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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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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허난설헌(許蘭雪軒)은 조선 중기의 시인, 작가, 화가이다.

개요[편집]

  • 허난설헌은 조선 중기 선조 때의 시인.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다.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고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되었다. 본관 양천(陽川). 호 난설헌(蘭雪軒). 별호 경번(景樊). 본명 초희(楚姬). 명종 18년(1563년) 강원도 강릉(江陵)에서 출생하였다.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許筠)의 누나이다.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워 8세 때 이미 시를 지었으며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하였다. 1577년(선조 10) 15세 때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하였으나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연이어 딸과 아들을 모두 잃고 오빠 허봉이 귀양을 가는 등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詩作)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한 시세계를 이룩하였다. 허난설헌이 죽은 후 동생 허균이 작품 일부를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되었다. 선조 22년(1589년) 27세로 요절하였으며 유고집에 《난설헌집》이 있다. 작품으로는 시에 《유선시(遊仙詩)》, 《빈녀음(貧女吟)》, 《곡자(哭子)》, 《망선요(望仙謠)》, 《동선요(洞仙謠)》, 《견흥(遣興)》 등 총 142수가 있고, 가사(歌辭)에 《원부사(怨婦辭)》, 《봉선화가》 등이 있다.[1]
  • 허난설헌(1563년 ~ 1589년)은 본명은 초희(楚姬)로, 다른 이름은 옥혜(玉惠)이다. 호는 난설헌(蘭雪軒), 난설재(蘭雪齋)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이달(李達)에게 시와 학문을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하였다. 1577년(선조 10년)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문인의 한사람이며, 300여 수의 시와 기타 산문, 수필 등을 남겼으며 213수 정도가 현재 전한다. 서예와 그림에도 능했다. 남편 김성립과 시댁과의 불화와 자녀의 죽음과 유산 등 연이은 불행을 겪으면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1608년(선조 41년) 남동생 허균(許筠)이 그녀의 문집을 명나라에서 출간함으로써 그녀의 명성이 점차 널리 알려졌다. 사후 남편 김성립이 증 이조참판에 추증되면서 그 역시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된다. 작품으로는 시에 '유선시', '빈녀음', '곡자', '망선요', '동선요', '견흥' 등 142수가 있고, 가사에 '원부사', '봉선화가' 등이 현재 전한다. 사후 시신은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산29의 5번지에 안장되었다가 후일 현 하남시로 이장되었다. 그의 작품은 1608년 동생 허균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 작가들에게 보인 뒤, 그 재주에 탄복한 명나라 관리들의 주선으로 비용을 지원받아 출간하여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2]
  • 허난설헌은 조선전기 『난설헌집』을 저술한 시인이다.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강원도 강릉(江陵) 출생. 아버지는 엽(曄), 오빠는 봉(篈), 남동생은 균(筠)이다. 현상(賢相) 공(珙)의 혈통을 이은 명문가문으로 유명한 문장가와 학자를 배출했다. 엽이 첫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에게서 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에 강릉 김씨(江陵金氏)광철(光轍)의 딸과 혼인해 봉 · 초희 · 균 3남매를 두었다. 조선사회의 모순과 계속 닥쳐온 가정의 문제들 때문에, 허난설헌의 시 213수 가운데에 세상을 떠나 신선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내용을 담은 시가 128수나 된다. 현실에서의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 탈현실의 천상 세계와 신선의 삶을 동경하면서 그런 세계를 허구화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널리 알려진 시로는 둘째 오라버니 허봉을 갑산으로 유배 보내는 안타까움을 읊은 「송하곡적갑산(送荷谷謫甲山)」이 있고, 강가 집에서 독서하는 서방님께 부치는 시로 「기부독서강사(寄夫讀書江舍)」, 죽은 자식을 향해 통곡하는 시로 「곡자(哭子)」, 감정을 삭이고 싶어서 지은 시로 「견흥(遣興)」, 가난한 집 처녀를 위한 노래 「빈녀음(貧女吟)」 3수 등이 있다. 국한문가사로는 「규원가(閨怨歌)」와 「봉선화가(鳳仙花歌)」가 있다. 그러나 「규원가」는 허균의 첩 무옥(巫玉)이 지었다고도 하고 「봉선화가」는 정일당김씨(貞一堂金氏)가 지었다고도 한다. 허난설헌의 작품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임종 때 그의 유언에 따라 모두 소각됐다고 전한다. 한편, 동생 허균이 허난설헌의 작품 일부를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었고 주지번의 찬사를 받아 중국으로 전파되어 1606년(선조 39) 그녀가 별세한 후 18년 뒤에 최초로 중국에서 간행되기도 하면서 조선조 대표적 여류시인이 되었다. 1606년(선조 39) 그녀가 별세한 후 18년 뒤에 최초로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한편, 『난설헌집』은 1711년에는 일본인 분다이(文台屋次郎)가 간행해 일본 열도에서도 애송됐다.[3]
  • 허난설헌은 조선 중기의 강릉에서 태어난 여성 시인이다. 허난설헌(1563~1589)은 조선 중기의 강릉에서 태어난 시인으로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蘭雪軒)이다. 초당 허엽(許曄)의 딸, 허성(許筬)과 허봉(許篈)의 동생이고 허균(許筠)의 누이이다. 강릉 교산 애일당에서 태어나 초당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5세 무렵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하였으나 시집살이와 남편의 외방 출입으로 원만한 부부관계가 되지 못하였다. 허난설헌은 사랑하던 남매를 잃고 복중의 아이마저 유산하자 큰 슬픔에 빠졌다. 친정의 몰락, 오빠와 동생의 귀양 등 가문의 비극이 겹치고 허약한 육신과 정신적 피폐함 등으로 인하여 27세로 요절하였다. 허난설헌은 강릉 초당의 명문집안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 재상이었던 문경공 허공(許珙)의 혈통을 이어받아 선조 때 명망이 높았던 초당공 허엽을 아버지로, 예조참판을 역임한 애일당 김광철(金光轍)의 따님인 김씨를 어머니로 이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허엽은 청주한씨 부인에게서 딸 둘과 아들 한 명을 두었는데, 장녀는 박순원에게 차녀는 우성전에게 시집을 갔고, 장남은 이조판서를 역임한 악록 허성(許筬)이다. 한씨부인과 사별 후 강릉김씨 부인과 재혼하여 하곡 허봉(許篈)과 허난설헌, 허균(許筠)이 태어났다. 허난설헌은 글재주가 뛰어난 집안에서 태어나 천부적인 재주와 출중한 용모로 여신동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천부적 재능을 인정하지 않았고, 중국 악부시와 유사함, 집안의 몰락 등으로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시는 규원의 한을 품고 살면서도 현실초월의 신선세계를 그려나감으로써 '하늘 선녀의 글재주', '시와 문장은 하늘이 내어서 이룬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따라서 유작 한시의 양적·질적인 면에서 동양 삼국의 최고 여류시인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4]

강릉 초당동 고택[편집]

  • 강릉 초당동 고택(江陵 草堂洞 古宅)은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초당동에 있는 고가이다. 1985년 1월 17일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신 허엽(許曄)이 살았고, 그의 딸 허난설헌(許蘭雪軒)이 태어난 집이다. 집의 구조는 ㅁ자형의 본채와 一자형의 행랑채로 구분된다. 본채는 화강암을 잘 다듬은 장대석을 사용하여 기단을 쌓았다. 대문을 사이에 두고 안채와 사랑채로 나뉘며, 그 사이에 광이 있다.
  • 안채는 기와로 된 팔작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집으로서, 부엌·방·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안방의 문은 두짝세살문과 용(用)자 창호로 된 이중문이고, 마루에는 네짝분합문으로 되어 있다. 마루방은 장마루로 되어 있다. 사랑채는 기와로 된 팔작지붕으로 이어져 있고, 전면에 툇마루, 오른쪽에 대청 2칸이 있다. 사랑채의 왼쪽 끝 상노인방은 안채 출입문간으로도 드나들 수 있다. 창호로 둘러싸인 사랑 대청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고 윗부분의 판대공(板臺工)과 대들보는 퇴간만큼 앞쪽으로 돌출되어 구조적인 미를 풍기고 있다. 잘 다듬어진 정원이 앞에 있고, 그 앞으로 공간을 구분하는 담과 협문이 있다.

허균·허난설헌 시비공원[편집]

  • 허균·허난설헌 시비공원(許筠·許蘭雪軒詩碑公園)은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초당동에 있는 시비(詩碑)공원이다. 1998년에 개관하였다. 공원은 강릉 출생의 대표적인 문인인 허균(許筠)과 허난설헌(許蘭雪軒)을 비롯한 허씨 5문장가의 예술혼을 기리고 시민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공원 부지는 강릉시 초당동의 허균 생가 일대이며, 허엽시비, 허성시비, 허봉시비, 허균시비, 허난설헌시비 등을 세우고 시민 모두가 자연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문화산책로로 조성하였다.

난설헌시집목판초간본[편집]

  • 난설헌시집목판초간본(蘭雪軒詩集木板初刊本)은 허난설헌의 작품 210여 수가 수록된 목판본의 시문집이다. 1998년 9월 5일 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강릉시오죽헌시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허난설헌의 목판본이다. 허난설헌(許蘭雪軒)은 1563년(명종 18) 강릉 초당에서 태어나 1589년(선조 22) 27세에 요절한 조선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난설헌은 호이며,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이다. 허난설헌이 죽은 해인 1589년 그의 동생 허균이 그의 유고(遺稿)를 정리하여 《난설헌고(蘭雪軒稿)》를 편집하였다. 그 후 1606년(선조 39) 허균은 명(明)의 사신으로 조선에 온 주지번(朱之蕃)과 양유년(梁有年) 두 사람을 만나 그 유고를 보이고 머리글을 부탁하였다. 주지번은 짧은 서문을 썼고, 양유년이 제사(題辭)를 달았다. 내용은 오언고시 15수, 칠언고시 8수, 오언율시 8수, 칠언율시 13수, 오언절구 24수, 칠언절구 142수로 이루어져 있으며, 부록으로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 〈한정일첩(恨情日疊)〉 〈몽유광상산시서(夢遊廣桑山詩序)〉와 오언고시 1수가 실려 있다.

강릉 허난설헌 시비[편집]

  • 강릉 허난설헌 시비(江陵許蘭雪軒詩碑)는 조선 중기의 시인 난설헌 허초희(許楚姬)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시비(詩碑)이다.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초당동의 허초희(許楚姬) 생가 입구에 있다. 시비는 1998년에 한국예술문화단체에서 세웠다. 비석은 대리석으로 비좌(碑座)와 비신(碑身)을 만들었으며, 비두(碑頭)에는 구름 모양을 형상화하였다. 전체 높이는 240cm이고, 비신은 너비 110cm, 두께 50cm의 크기이다. 비석에는 허난설헌의 《죽지사(竹枝詞)》 세 번째 시가 새겨져 있다. 죽지사는 난설헌의 고향 강릉에서의 추억이 담겨 있는 한시로 장정룡(張正龍)이 번역하여 비문을 지었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은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으로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時作)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여인의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다.

허난설헌 묘[편집]

  • 허난설헌 묘(許蘭雪軒 墓)는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묘. 1986년 9월 7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조선 선조(宣祖) 때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무덤이다. 원래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중부고속도로 건설로 현재 위치인 안동김씨 선산(先山)에 이장되었다. 묘역은 잘 정돈되어 있으며, 남편인 김성립(金誠立)의 묘소가 바로 위에 있고 어린 나이에 죽은 두 아이의 무덤이 우측에 나란히 있다. 봉분을 중심으로 상석(床石), 망주석(望柱石), 문인석(文人石), 장명등(長明燈), 시비(詩碑) 등 석물이 있는데, 화강암으로 만든 문인석을 빼고는 모두 최근에 오석(烏石)으로 만들어 세운 것이다. 시비는 이장할 때 세웠으며, 묘역의 넓이는 100평, 크기는 높이 275cm, 너비 108cm이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 《두산백과》
  2. 허난설헌〉, 《위키백과》
  3. 허난설헌 (許蘭雪軒)〉,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허난설헌〉,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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