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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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크주(스페인어: País Vasco 파이스 바스코, 바스크어: Euskadi 에우스카디)는 스페인의 광역자치주으로, 역사적인 바스크 지역의 일부이다. [1]
개요
바스크주의 면적은 7,234㎢ 인구는 2,189,534명 (2016년)이다. 주도는 비토리아 가스테이스이며 최대도시는 빌바오이다. 비스케이 만에 면해 있는 알라바·기푸스코아·비스카야 도를 포함하는 주이다.
주민의 대부분은 바스크인이며 에우스카라(éuscaro)라는 고유언어를 사용하는데 스페인어와는 완전히 다른 언어 체계를 가지고 있다. 바스크 지역의 언어적 특성 때문에 바스크 인들이 다른 지역에서 유럽으로 유입된 인종이라는 설도 있었지만, 이 지역에서 오래된 고대의 언어 형태가 남은 것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바스크인은 인종적, 관습적으로 주변의 프랑스인·에스파냐인과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눈썹이 짙고 강한 턱을 가지고 있다. 기질은 용감하고 모험을 좋아한다고 알려져 있다.[2][3]
자연환경
바스크 지방은 북동쪽에서 피레네 산맥에 의해 스페인령 바스크 지역과 바스크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프랑스령 바스크 지역으로 나뉘며, 서쪽에서 칸타브리아산맥에 의해 바스크 지방과 산탄데르주가 나뉜다. 남쪽으로는 피레네 산맥이 에브로강 유역, 카스티야주의 부르고스, 로그로뇨로 이어지며, 동쪽으로는 나바레주와 접한다. 비스카야와 기푸스코아에 있는 산들은 매우 들쭉날쭉하며 강들은 길이가 짧고 물살이 빨라 산을 지나면서 가파른 골짜기를 형성한다. 연평균 강우량은 1,200mm에 달하는데, 산세바스티안시 주변에서는 1,500mm가 넘지만 에브로강 유역에서는 750mm를 넘지 않는다. 동부는 강우량이 비교적 풍부하고 고른 북대서양 기후의 영향을 받으며, 남부의 알라바 산간 분지는 아(亞)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다.
역사
바스크 지역에 거주하는 바스크인들은 최소 기원전 3천 년 이전부터 거주하고 있는 단일 정체성과 문화가 분명한 단일민족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선주민들이다.
이들의 기원을 정확히 알 수가 없어서 다양한 설들이 내려오고 있다. 확실한 것은 유전자 분석에 의하면 신석기 시대에 피레네 산맥 부근에 수천 년간 정주민으로 살던 원시 바스크인(Proto-Basque people)과 인도유럽어족을 쓰는 이주민(스페인인, 프랑스인)들 간의 혼혈화된 후손이라는 것이다.
원시 바스크인은 여타 토착 서유럽인들과 거의 동일한 하플로그룹에 속하는 엄연한 코카소이드계 인종이라는 것이다. 해당 지역에 정착한 후 수천 년간 유럽의 여타 민족들과 거의 섞이지 않아 문화적·언어적 정체성이 유달리 강하게 남았을 뿐이다. 혈액형 비율에 약간 차이가 있는데 이 또한 오랜 고립으로 인한 것일 뿐 특이한 것은 아니다. 고대 크로마뇽인의 마지막 후손이라느니 심지어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의 후예라는 판타지스러운 가설도 있었지만, 유전적으로는 그저 평범한 서유럽 인종이다.
바스크인처럼 고립된 언어와 정체성을 가진 민족은 고대 로마 시대 초기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드물지 않았다. 이탈리아 반도 안에 있던 에트루리아어도 인도 유럽어족에 속한 언어가 아니었고, 알프스 산맥 동부에서 쓰이던 라이티아어도 인도 유럽어와 달랐다. 그리스 로마 문명에 가까웠던 덕에 기록에 남은 것만 이 정도며, 이런 기층언어들은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언어들이 확산되면서 다 사라져가고, 다소 고립된 지역에 살던 바스크족의 언어만 살아남은 것이다.
선사시대 유적을 통해 보면 전통적인 바스크인의 거주 지역은 피레네 산맥을 중앙에 두고 프랑스의 가스코뉴와 아키텐, 스페인 북부 산악 지대와 해안에 걸쳐 있었다. 이들이 엄청나게 오랜 시간 동안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지 않고 (기원전 3,000년~5,000년부터 현재까지) 정착민으로 살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바스크인의 조상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선사 시대 유적들은 청동기 시대에 점점 산지로 이동하며 요새화되는데, 다른 유럽계 민족들과의 마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5세기 포르투갈이 대항해시대를 열게 된 것 역시 당시 포르투갈의 국가 기간 산업이던 어업을 후원하던 엔히크 왕자가 참치 어장을 찾아서 어선을 이용해 대서양을 뒤지다가 아조레스 제도와 마데이라 제도를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고고학 연구를 통해 관련 유물과 유적이 출토되면서 사실임이 입증된 빈란드와는 달리 바스크인들의 아메리카 도달설은 관련된 유물과 유적이 발견된 바가 없어서 아직 가설에 머무르고 있다. 심지어, 이들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에 도달했을 가능성을 부정하는 매우 강력한 증거도 있는데, 바로 캐나다에 있는 바스크족의 포경기지 유적인 레드베이 기지가 그 증거다. 이 유적을 캐나다의 고고학자들이 발굴해서 분석해본 결과, 아무리 건설 시기를 이르게 잡아도 1530년 이전으로는 거슬러 올라가지 않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1492년에 아메리카에 도달했던 콜럼버스보다는 진출이 늦었던 셈이다. 이 정도면, 유럽 국가들 중에서는 상당히 이른 시기에 아메리카 진출을 시도한 건 맞지만 말이다. 일단은 바스크족들이 스스로 주장한대로, 바스크족 포경업자들이 타국의 지원도 없이 독자적으로 이곳에 도달했다는 것만은 분명히 인정받고 있다. 바스크족은 참치뿐만 아니라 대구잡이로도 유명했다. 당장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유명한 생선 요리가 바로 말린 대구인 바칼랴우(Bacalhau)였다.
고대 로마의 군단이 바스크족을 동맹 부족으로 적극적으로 기용했고, 이베리아 반도 곳곳의 다른 켈트족과 이베리아인 성읍들을 복속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로마 군단병으로 입대해 오늘날의 영국의 잉글랜드에 해당하는 브리타니아를 정복할 때도 활약했다. 샤를마뉴가 이끄는 프랑크 왕국 군대 또한 이들에게 호되게 당했고, 이슬람 제국이 서고트 왕국을 침공해 전선이 피레네 산맥의 북부 지역까지 밀렸을 때도 방어에 한 획을 담당했다. 프랑스 남부 카타리파 준동에 프랑스의 용병으로 참전에 활약한 바 있으며, 위그노 전쟁에 프랑스 왕실의 외가로 참전해 왕가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나폴레옹 군대의 스페인 점령 당시 프랑스군도 이들의 게릴라 전술로 힘겨워 했다. 게릴라 어원의 유래가 된 민족이기도 하다. 최근까지도 ETA 등 테러 단체로 활동한 바 있다. 이들은 이슬람을 상대로만 800여 년 동안 방어 전선을 형성하였고, 통합 스페인 왕국 창립이후 16~17세기 유럽 최강 스페인 육해군의 일익을 담당했다.
로마의 시민으로 동화되면서도 여전히 많은 바스크인들은 산지에 있는 성읍의 자치권을 얻어 고유문화를 지키며 살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는 로마인으로써 완전히 동화되었다. 로마가 망하고 난 한참 이후까지도 가톨릭으로 개종이 상당히 느렸다가 중세 초기에 유럽의 대세를 따라 결국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도 했다.
중세 시대 때는 소수 민족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결혼 동맹 등으로 외교적으로 자주성을 지켜내면서도 스페인 왕국 성립에 참여해 스페인 시민이 되어 동화되는 등 유연한 면모도 가지고 있는 민족이었다. 통합 스페인 왕국의 전신인 아라곤 왕국, 카스티야 왕국, 나바라 왕국의 왕가들은 모두 바스크 민족의 왕이었던 산초 3세의 후손들이다. 이렇게 스페인 제국 출발의 핵심에는 바스크 민족이 있고 스페인계와 독일계 합스부르크 가문에도 이들의 혈통이 들어간다, 게다가 프랑스에 여왕을 시집 보냄으로써 결혼 동맹으로 동군연합이 되었고 위그노 전쟁에서 부르봉 왕가의 외가로써 참전해 부르봉왕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바스크인들이 유럽 강대국들과 결혼 동맹과 군사적 지원에 성공한 결과 많은 유럽 강대국들의 왕가에 바스크인의 핏줄이 흘러서 현재까지도 바스크족을 소수 민족이라 낮춰 보는 국가는 없고 스페인 내에서도 꽤나 위상이 높다.
중세 시대 바스크족은 다른 유럽인들과 다르게 바이킹들과 평화적으로 교류했는데 이들로부터 조선술, 항해술을 전수받았고 바이킹 몰락 이후에는 대서양의 주인으로 불렸던 만큼 조선술과 항해술에 매우 뛰어났다.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 이사벨 1세의 후원으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때도 이미 신대륙을 다녀왔던 바스크족이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당시 어획, 고래잡이, 선박, 철광석 수출 등의 사업을 했고 영국, 북유럽, 아메리카 대륙을 오가며 무역 흑자로 막대한 수입을 올려서 당시부터 부유한 지역이었다.
바스크 지방은 원래 나바라 왕국의 영토였지만 1512년 스페인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다만 통일 스페인이라는 국가는 기본적으로 연합체였기 때문에 지방 분권성이 강했고 다른 지방들이 그러하듯 바스크 지방 또한 폭넓은 자치를 누렸다. 특히 스페인의 군주들은 카탈루냐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에 바스크 지방의 지원을 받았고 그 대가로 바스크 지방에는 더 많은 자유가 허락되었다.
1979년 자치법령으로 설립되었다. 이 지방의 행정부는 임기 5년의 총리와 3개주에서 각각 같은 수로 선출된 대표의원들로 이루어진 의회로 구성된다. 1930년대에 바스크 분리주의 운동이 이 지역에서 격렬하게 일어났는데, 이 소요는 1936년 10월 5일의 자치법령 발표로 끝났다. 이듬해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바스크 분리주의 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자 이 운동의 과격파들은 스페인 중앙정부에 대항해 테러 활동을 전개했다.
에브로강 유역의 탁 트인 들판과 포도원으로 둘러싸여 구심점이 되는 작은 공동체들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 한편 피레네산맥에서는 개인농장인 카세리오를 중심으로 인구가 넓게 분산되어 있는데, 이 농장들은 산악지역의 작은 농지에서 집약적인 재배를 한다. 19세기 중반 이래 이 지역의 급격한 공업화로 피레네산맥의 전통적 거주지역이 해체되었으며, 그결과 오지의 거주지보다는 산세바스티안이나 빌바오 같은 해안도시들이 성장했다. 인구밀도는 해안지역에서 가장 높아 바스크 지방 인구의 4/5 정도가 빌바오 및 교외지역에 몰려 있다. 알라바 주는 북쪽 구릉지대를 덮고 있는 오크나무와 너도밤나무 삼림을 제외하면 곡물 및 포도 재배에 적합한 광활한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근대 초기 이후 미국에서 들여온 옥수수와 감자 같은 작물의 보급으로 재배작물이 많아지고 종류도 다양해졌지만, 전통적으로 바스크 지방의 주민들은 목동이다. 1950년대초 이래로 알라바주의 비토리아시는 상당히 공업화되었지만, 알라바주는 이 지방에서 농업 활동이 가장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다.
중세 후기부터 비스카야 도와 기푸스코아 도는 방대한 철광석과 삼림자원을 개발하여 크게 공업화되었다. 이 지방의 야금업은 대부분 빌바오 시와 네르비온 강의 연안지역에서 이루어진다. 한편 빌바오시 외곽에서는 야금업·식품 가공업·화학산업 등이 이루어지며, 제지업은 톨로사와 오리아 강 연안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또한 서비스업이 매우 발달했으며, 특히 빌바오 시는 스페인 제1의 금융 중심지이다. 한편 이 지방의 도시화와 산업 발전으로 인해 바스크인의 전통문화는 쇠퇴했으며 프랑스와 미국으로의 이민 때문에 개인농장의 주민 수도 크게 감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진적인 바스크 분리주의 단체로서 바스크어로 '바스크의 조국과 자유'라는 뜻의 ETA(Euzkadi Ta Azkatasuna/에테아)가 결성되어 그들의 테러 활동으로 바스크 지방분권주의가 스페인 중앙 정권을 약화시키는 가장 큰 세력이 되었다. 프랑코 사후 자치정부를 갖춘 바스크 지방이 수립되고 ETA의 테러 행위도 잦아들었으나 바스크 분리주의가 완전히 종식되지는 않았다.
경제
스페인에서 경제 수준이 월등히 높은 지역이고 부자 동네임을 자처하며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카탈루냐보다도 1인당 GDP가 훨씬 높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스페인 내에서 실업률이 가장 낮은 주(州)에 속했다. 2007-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에도 스페인에서 가장 경제 사정이 나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 예로 2010년 기준 안달루시아의 1인당 GDP가 22,000$인 데 비해 바스크는 41,000$다. 바스크의 경제력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다. 실업률의 경우 2012년 바스크의 실업률이 14%였다면 안달루시아의 실업률은 35%였다. 그렇지만 급여 수준은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스페인 국립 통계청(INE)에서 발간한 Encuesta anual de estructura salarial(연간 임금 구조 조사)을 보면 País Vasco의 평균 임금은 26,535유로, 스페인 전체 평균은 22,726유로다. 먼저 언급된 안달루시아는 20,891유로. 제일 못 버는 것은 19,278유로의 카나리아 제도다. 어쨌든 스페인에서 소득이 제일 높고 전체 평균보다 20% 가까이 높으니 경제력이 제일 우월한 것은 맞다.
고래잡이 산업으로도 유명했다. 9세기부터 시작된 바스크 지방의 포경 산업은 주 본거지인 비스케이 만의 고래가 줄어들자 아이슬란드나 심지어 [[북아메리카]의 뉴펀들랜드 섬까지 진출했다. 나중에는 영국과 네덜란드에 뒤쳐지기는 했지만 이들도 바스크 출신 포경 선원들을 상당히 많이 고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슬란드로 진출한 선원들 사이에서 아이슬란드어와 바스크어의 피진어가 생겨나기도 했고 북아메리카에 남은 유일한 프랑스 영토인 생피에르 미클롱의 국기에 바스크 지방기가 삽입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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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서유럽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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