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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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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시 위치
오정구 위치

오정구(梧亭區)는 대한민국 경기도 부천시 북부에 위치한 구이다. 2016년 7월 4일 책임 읍면동제의 시행으로 인해 부천시의 다른 일반구와 함께 폐지되었다가 2024년 1월 1일에 다시 설치되었다.[1] [2]

개요[편집]

오정구의 면적은 20.05㎢이며 인구는 153,531명(2024년 6월 기준)이다. 동쪽으로는 서울 양천구, 북쪽으로는 인천 계양구, 부평구와 접하고 있다. 1995년 吾丁區에서 梧亭區로 구의 한자 표기가 바뀌었다.

2024년 기준 관할구역은 행정동 7개(성곡동, 원종1동, 원종2동, 고강본동, 고강1동, 오정동, 신흥동), 법정동 8개(여월동, 작동, 원종동, 오정동, 고강동, 대장동, 삼정동, 내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역 여건은 청동기 유적지인 고강동 선사유적을 기리는 고리울 선사문화제 등 지역축제가 활발하게 개최되고 있는 부천의 역사와 문화의 근원지이며, 뉴타운 개발과 오정산업단지 조성 및 도로개설공사를 통하여 역사, 문화, 주거, 교육 등 다방면에서 고도의 개발 가능성과 최적의 주거지역으로 변모 하고 있는 지역이다.[3]

역사[편집]

선사시대[편집]

부천의 대표적인 선사유적으로는 고강동의 청동기시대 유적이 있다. 이 유적은 1995년 여름 홍수 때 반달돌칼과 석창 등 매우 정교하게 가공된 석기 유물이 드러나면서 발견되었다. 이후 2005년까지 한양대 박물관과 한양대 문화인류학과에 의해 7차에 걸친 발굴로 총 21기의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제사유적인 적석환구유구가 확인되었고 함께 출토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민무늬 토기와 간석기류 등은 청동기시대 뿐만 아니라 초기 철기시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판단되어 한강 유역의 초기 국가단계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편집]

삼한시대 마한 54소국의 하나인 우휴모탁국(優休牟琢國)을 부천 일대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사료가 부족하다.

삼국시대 부천의 인근 지역인 인천이 백제 미추홀이었던 것에서 유추하여 부천도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75년(장수왕 63)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여 수도인 한성을 함락시키고 한강 일대를 차지하면서 고구려의 주부토(主夫吐)로 기록되어 문헌에 최초로 등장한다. 주부토는 고구려의 지명으로 당시 한강의 지류인 굴포천의 범람원에 위치하여 황무지였던 땅에 긴 둑을 쌓아 '줄보둑'-'주부토'로 부른 데서 비롯된 말로 추정한다. 6세기에 고구려가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는 등 정치적 불안이 거듭되자, 551년 부천 일대의 한강 하류 지역을 백제가 수복하였으나, 553년 신라가 급습하여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전국을 9주5소경으로 정비하면서 지명을 한자식으로 변경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고구려식 이름인 주부토군도 긴 둑이라는 뜻의 장제군(長堤郡)으로 변화되었다.

고려 시대[편집]

918년 왕건은 고려를 건설한 후 940년(태조 23년)에는 전국 주·부·군·현의 지명을 고쳤다. 이때 부평의 지명도 장제군에서 수주(樹州)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부평의 읍격이 상승된 것을 의미한다. 수주라는 명칭은 시인 변영로의 호가 되었고, 지금 고강동 일부 지역의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1150년(의종 4년)에는 전주에 있던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수주로 가져오면서 지명도 안남으로 변화되고 읍격도 상승하였다. 고려 전기의 도호부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에 설치되었다.[20] 당시 부평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한 것은 12세기에 백성의 유망이 많아지고,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등 정치적 변란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수도 개경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1215년(고려 고종 2년)에 안남도호부에서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로 개칭되었고, 1308년(충렬왕 34년)에 길주목으로 승격되었으나 1310년(충선왕 2년)에 다시 부평부로 강등되었다.

조선 시대[편집]

1392년 건국한 조선은 전국을 8도로 나누었고, 이때 부평은 전국 44개 도호부 중 하나로 종3품인 도호부사가 파견되었다. 당시 부평은 강화와 김포를 거쳐 한성 및 해주와 연결되는 한강 수로에 위치였기 때문에 행정구역상 수원진관에 소속되어 인천을 속읍으로 둔 군사적 요충지였다.

조선시대 삼남 지방에서 올라오는 조운선들은 인천과 부평 연안을 지나 강화도 염하 수로를 거쳐 한강의 마포나루에서 하역하였다. 강화도 염하는 물살이 거세어 조운선들이 좌초되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인천 연안에서 한강으로 직접 연결되는 물길을 내서 조운선을 운행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 시도는 중종 때 김안로에 의해서 추진되었는데, 당시 공사는 한강에서 시작하여 원통이고개까지 수로를 굴착하고 중단되었으나 2011년에 굴포천을 따라 완공된 경인아라뱃길의 원형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종래의 8도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시행하면서 부평은 인천관찰부에 속한 부평군이 되었다. 당시 부평군은 15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가운데 현재의 부천에 해당하는 곳은 상오정면·하오정면·석천면·주화곶면·옥산면의 일부 지역이었다.

대한제국[편집]

개항 이후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많은 외국인들과 교역품들이 서울로 향하면서 그 길목에 해당하는 부천에도 변화의 기운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특히, 1899년 노량진과 제물포를 잇는 경인선이 개통되어 부천에 소사역(지금의 부천역)과 오류동역(훗날 서울특별시로 편입)이 설치되면서 현재의 부천이 형성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소사역은 광활한 김포평야에서 산출되는 농산물을 모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되었다.

소사역이 설치됨에 따라 인근 마을의 주민들이 이주해서 여객을 상대로 한 접객업소와 음식점 등이 생겨났으며, 성주산 서쪽 기슭으로는 가로촌(街路村) 형태의 취락이 발달하였다. 1904년경 일본인들에 의해서 서울을 중심시장으로 하는 근교농업 형태의 복숭아 과수원이 성주산 자락의 사질토양을 배경으로 세워졌고, 경작을 위한 노동력으로 주민들이 늘어나면서 취락의 발달이 촉진되었다.

일제강점기[편집]

한국을 병합한 일제는 1914년 인천의 일본 조계 지역과 주변지역을 인천부로 삼고, 나머지 지역과 부평군을 합하여 부천군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부천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신설된 부천군은 인천부의 일부와 부평군을 중심으로 강화군의 일부 섬, 남양군의 대부면과 영흥면의 섬들을 포함하여 15면 160리에 달했다. 당시 부천군청은 인천도호부가 위치한 문학면 관교리에 있었다. 당시 소사역 일대는 계남면에 해당하였는데, 계남면은 1931년 소사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41년 소사읍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 당시 부천군 15개 면 가운데 계남면·오정면의 대부분 및 소래면의 일부 지역이 현재의 부천시 영역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1919년 일제의 식민지 지배체제에 항거한 3·1운동이 발발함에 따라 부천에서도 격렬한 항일시위가 전개되었다. 1919년 3월 24일 계남면사무소가 군중들의 습격을 받아 조자칭과 판벽 등이 파괴되었다. 이후에도 부천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대한민국[편집]

1960년대 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시되면서 공업화와 도시화가 급속히 이루어졌으며,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의 인구가 급격히 팽창하였다. 이에 따라 1973년 행정구역 개편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수도권의 합리적인 개발과 인구집중 억제, 무질서한 시가지 팽창 방지를 위해 수도권의 행정구역 조정이 있었다. 이때 부천군이 폐지되면서 소사읍이 부천시로 승격되었다.

옛 부천군 시절 오정면이었던 곳이었으며, 부천군이 폐지된 1973년 잠시 김포군에 편입되었다가, 2년 만인 1975년 부천시로 다시 편입된 역사가 있다. 현재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북부에 해당하는 김포군 계양면이 1989년 인천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부천시와 김포군이 직접 경계선을 접하고 있었다. 1914년 이전까지는 부평도호부 상오정면(오정동, 삼정동, 내동, 원미구 도당동, 약대동), 하오정면(원종동, 고강동, 여월동, 작동), 주화곶면(대장동, 서울특별시 강서구 오곡동, 오쇠동)의 3개 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강동, 원종동, 작동은 1986년까지 서울특별시 도시계획구역에 속하여, 장기적으로는 서울 편입 예정지구였던 시절이 있었다. 실제로 고강동, 원종동, 작동은 바로 인접한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월동, 신정동 및 강서구 화곡동과 거의 비슷한 동네 분위기를 풍긴다. 다음 또는 네이버 지도 등으로 항공 사진을 보면, 고층 아파트보다는 다세대주택, 빌라로 동네가 이루어진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2016년 7월 4일 부천시가 일반구를 폐지하고 책임읍면동제를 실시하면서, 오정구가 폐지되고 2개 책임동(행정복지센터)으로 재편되었고, 오정구청은 오정어울마당으로 바뀌었다.

2024년 1월 1일, 부천시가 7년 반 만에 책임읍면동제를 폐지하고 다시 일반구 체제로 복귀하면서 부활했다.[4]

교통[편집]

서울 지하철 7호선 까치울역과 부천종합운동장역이 원미구 춘의동과 오정구 경계에 걸쳐있다. 두 역 다 주소지상으로는 원미구 춘의동 관할이다. 하지만 까치울역은 역 부지가 오정구 작동에 걸쳐 있고 부천종합운동장역은 6번 출구가 오정구 성곡동(여월동) 영역이다. 또한 수도권 전철 서해선 원종역이 2023년 7월 개통했다.

같은 부천시임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전철 1호선(경인선)보다 오히려 서울특별시 강서구의 화곡역을 통한 수도권 전철 5호선으로의 교통 수요가 더 많은 곳이기도 하다. 경인선이 부천시의 남부 지역을 관통하기 때문에, 부천시의 북부 지역인 오정구에서는 서울 도심으로 갈 경우 경인선보다 5호선 화곡역이 더 접근하기 쉽다. 그래서 오정구에는 화곡역으로 가는 버스 노선이 상당히 많다. 사실 이는 결과론적인 이야기인데, 오정구를 거쳐 현재의 화곡역 사거리 방면으로 향하는 버스 노선은 5호선 개통 이전부터 존재한 2호선 환승을 위해 당산역을 경유하여 최종적으로 서울의 부도심 중 하나인 영등포역 방면까지 운행하던 노선들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1호선과 7호선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인천광역시나, 시청, 경기남부 지역이나 강남 등으로 갈 때 주로 이용한다. 한 가지 재밌는 점은 세 동(고강, 오정, 원종) 모두 주로 사용하는 1호선, 7호선 역이 다르다는 건데 고강동 주민은 5번, 20번, 58-1번, 77번등의 버스가 다니므로 까치울역, 역곡역 등을 가장 많이 이용하고 원종동 주민은 대부분 종합운동장으로 가는 버스가 많기 때문에 부천종합운동장역, 부천역을 가장 많이 이용한다. 오정동 주민은 내촌고가나 원종사거리를 경유하는 경우가 많아 춘의역, 부천시청역, 부천역 등을 주로 이용한다.

경인고속도로가 오정구의 가운데를 동서로 관통하며, 부천 IC가 내동에 설치되어 있다.

교통 하나는 편한 동네이다. 특히 서울 도심으로 가려면 여월동-원종동-고강동에서 606번 버스 하나면 직통으로 갈 수 있다. 물론 도로 정체가 심한 출퇴근 시간대라면, 이 버스만 타고 가는 것보다는 화곡역을 통해 수도권 전철 5호선과 환승하거나, 수도권 전철 서해선 원종역에서 김포공항역을 통해 인천국제공항철도를 타는 것이 더 빠르다. 강남으로 가려면 서울 지하철 7호선을 타거나, 김포공항역에서 서울 지하철 9호선을 타고 가면 된다. 버스로 15분 이내로 접근 가능한 지하철 노선이 상당히 많은 것이 특징이다.

지역 특징[편집]

중동신도시와 상동지구, 부천역 상권이 있는 원미구 및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지나가며 재개발로 인해 고층아파트가 속속 들어서고 있는 소사구와 비교해 보면 차이를 실감할 수 있다. 그래도 2013년 현재 오정구에 여월택지지구와 오정산업단지가 조성되었지만, 구의 절반 정도가 그린벨트로 묶여있는데다가 김포국제공항에 인접한 지리적 특성상 고도제한구역으로까지 지정되어 있어 개발 속도가 상당히 더딘 편. 이 때문에 오정구 내에서는 여월택지지구 정도를 제외하면 10층 이상의 아파트나 건물을 찾기 힘들다. 다만, 2015년 고도제한을 완화하는 항공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며 오정구 지역이 어떻게 개발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2010년 이전까지는 일반구 중 인구가 가장 적은 곳이었다. 하지만 2010년 7월 1일 통합 창원시가 출범하면서 창원시 진해구가 잠시 그 타이틀을 가져갔다가 2014년 7월 1일 통합 청주시가 출범하면서 청주시 상당구에게 인구 17만 7,436명으로 가장 인구가 적은 일반구 타이틀을 내줬으나 상당구 역시 인구 증가로 20만 명대를 돌파하고, 2024년 1월 1일부로 오정구가 부활하며 다시 일반구 중 인구가 가장 적은 곳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경인선을 기준으로 경계가 확실히 갈리는 원미구와 소사구와는 달리, 오정구와 원미구 사이의 경계는 상당히 모호한 편이다. 특히 오정구 성곡동(여월동)과 원미구 도당동 사이, 오정구 신흥동(삼정동)과 원미구 약대동 사이는 골목길 하나를 두고 구 관할이 나뉠 만큼 경계선이 모호하다.

과거 부천군 시절엔 도당동 역시 오정면 지역이었다는 점이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고등학교 역시 오정구 관내엔 원종고등학교, 덕산고등학교, 수주고등학교 정도 밖에 없으며, 1993년 오정구 분구~2002년 평준화 이전까지만 해도 오정구엔 원종고등학교 이외엔 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도당동의 부천북고등학교나 도당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오정구 출신이 많았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오정구〉, 《위키백과》
  2. 오정구〉, 《나무위키》
  3. 두산백과 : 오정구〉, 《네이버 지식백과》
  4. 부천시〉,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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