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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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야(Konya) 또는 코니아는 튀르키예의 내륙 중부 아나톨리아 지방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이다. 도시 자체의 인구는 약 140만 명으로 튀르키예에서 7번째로 큰 도시이다. 콘야 도시권 인구는 230만 명이며 튀르키예에서 6번째로 인구가 많은 대도시이다. 콘야주의 주도이며 콘야주에서 경제, 산업, 문화 등이 가장 발전된 도시이다.[1]
개요[편집]
콘야는 튀르키예 중부, 소아시아의 아나톨리아고원 남쪽 해발고도 1,027m에 위치한다. 앙카라에서 남쪽으로 240km 떨어져 있다. 유서깊은 도시로 로마시대에는 이코니움(Iconium)이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로의 제1회 전도지이다. 고대부터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서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중시되었고, 중세 들어서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기독교, 이슬람 세력 간에 수차례 전장이 되었다. 12∼13세기에는 셀주크 투르크의 수도로서 번영하였으며,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14-15세기에는 카라만 왕조의 수도였고, 오스만 제국기에는 카라만 에얄레트에 이어 콘야 빌라예트의 중심지였다. 그 후 한때 쇠퇴하였으나, 아나톨리아 종관(縱貫) 철도의 개통(1895)으로 부흥하였다. 제당, 시멘트, 식육, 융단 등의 공업이 활발하며 구시가 주변에 신시가가 발달하였다. 시가지는 서고동저의 형태로, 동북쪽에 광대한 산업 단지가 있고 그 외곽에 콘야 공항이 자리한다. 북쪽 외곽에는 튀르키예 최대의 공립대학인 셀축 대학교가 있고, 동쪽에는 사립대인 KTO 카라타이 대학교가 있다. 시내에는 루미 영묘와 알라에딘 모스크 등 당시 건축물이 다수 남아 있다.[2]
지리 및 기후[편집]
콘야는 튀르키예에서 가장 큰 면적(41,001km²)을 가지고 있는 콘야주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균 해발고도는 1,016m이다.
콘야는 쾌변의 기후분류에 따르면 한랭 반건조 기후(BSk)이고 트레웨타 분류에 따르면 온대 대륙성 기후(Dc)이다. 여름의 주간 평균 기온은 30°C이지만 여름의 밤은 시원하다. 콘야에서 기록된 최고 기온은 2023년 8월 14일의 40.9°C로, 2000년 7월 30일의 40.6°C의 이전 기록을 근소하게 앞지른다. 겨울 평균 기온은 -4.2°C이고, 기록된 최저 기온은 1972년 2월 6일의 -26.5°C이다. 강수량은 적고 주로 겨울과 봄에 내린다.[3]
역사[편집]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도시로 여겨지는 차탈회위크(Çatalhöyük)가 이 도의 춤라(Çumra)군 퀴췩쾨이(Küçükköy)읍에 위치해 있다. 기원전 7000여년 경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이곳은 한때 인구 5,000여 명의 거대한 취락지였던 것으로 추측되며, 특이하게도 다닥다닥 붙은 거주지의 천장에 문을 뚫어 사다리를 타고 이동하는 구조로 도시 전체가 거대한 성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당시의 벽화와 신전의 흔적, 발굴된 대지모신상을 통해 당시의 종교와 사회구조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귀중한 곳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지정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대의 콘야는 히타이트, 고대 그리스, 로마 제국을 거쳤고 라틴어로 이코니움이라 불렸다. (현지 그리스어는 이코니온) 서기 1세기에는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이곳을 지나갔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있어 성지로 여겨지는 곳 가운데 하나다. 특히 콘야 시 근교의 실레(Sille) 마을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인 성녀 헬레나가 예루살렘으로 가던 도중 327년에 세웠다는 성당이 있는데, 이름도 헬레나의 이름을 따 아야 엘레니(Aya Eleni kilisesi)라고 불린다. 이 성당은 아나톨리아 내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당 건물로 간주되고 있고, 내부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징발되어 야전병원으로 쓰이다 버려진 것을 콘야시 당국에서 꾸준히 보수, 복원하여 옛 모습을 찾았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콘야 중심가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기념성당이 있는데 이곳에도 가톨릭 순례자들이 들른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지키고 있는 곳이며, 사제가 상주하지 않는 본당이라 사제가 올 때만 미사를 드린다. 또한 시리아 정교회와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같은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들도 이 건물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동로마 제국기 이코니온은 이슬람 제국에 대항하는 아나톨리아 테마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838년 기존 아나톨리아 내륙의 중심지이던 아모리움이 압바스 왕조에게 파괴된 후 이코니온이 대신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963년 함단 왕조을 마지막으로 한 세기 가량 안정을 누리던 이코니온은 1069년 셀주크 제국군에게 습격당했고,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의 혼란기에 프랑크 용병 대장 루셀 드 바이욀이 장악했다가 1084년 룸 셀주크에게 정복되었다. 이후 지명은 튀르크식인 콘야로 바뀌었다. 이어진 십자군 전쟁기에 콘야는 1차 십자군에게 점령된 니케아(이즈니크)를 대신하여 룸 셀주크의 수도가 되었고, 수차례 전장이 되었다. 1097년 7월 도릴라이온 전투에서 룸 셀주크 군을 격파한 1차 십자군은 이듬달 튀르크 수비대가 도주한 콘야를 습격하였다. 다만 도시를 점령하지는 않고 그대로 킬리키아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1101년의 롬바르드 십자군은 그해 8월, 이번에는 수비대가 배치된 콘야를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후 동진하던 십자군은 동쪽 100km 지점 헤라클레아(현 에레을리)에서 막 메르지푼 전투를 승리하고 달려온 클르츠 아르슬란 1세의 매복에 당해 전멸하였다. 다만 승리에 도취된 클르츠 아르슬란은 1107년 모술 원정에 나섰다가 전사하였고, 섭정 하산이 콘야를 장악했으나 1110년에 석방된 클르츠 아르슬란의 아들 멜리크샤 1세가 콘야를 장악하고 술탄에 올랐다. 그 후 1116년 동생 메수트가 다니슈멘드 조의 도움으로 콘야를 장악하며 술탄에 올랐고, 1126년에는 앙카라-카스타모누-찬크르 총독 아랍이 콘야를 포위하자 메수트는 동로마 조정에 망명했다가 요안니스 2세의 도움으로 복위하였다. 1172년 말엽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성지 순례 후 귀국하던 벨프 가문의 바이에른-작센 공 하인리히를 초청해 극진히 대접하였고, 도적떼의 습격이 있던 동로마와 비교되었다.
1176년 9월 마누일 1세의 동로마 제국군이 콘야로 진격했으나 으스파르타와 콘야 사이의 베이셰히르 호숫가에서 클르츠 아르슬란 2세의 매복에 대패하고 철수하였다. 1190년 3차 십자군이 다가올 무렵 30년 이상 즉위하여 연로했던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장남 쿠트브 앗 딘에게 섭정을 맡겼고, 후자는 콘야에 파견된 독일측 사신 고드프루아 폰 비세바흐를 맞이한 후 사절 토킬리를 트라키아로 보내어 십자군의 안전 통과를 약속하였다. 본래 양측의 관계는 호의적이었으나 살라흐 앗 딘의 사위였던 쿠트브 앗 딘의 심경은 복잡하였고, 술탄이 통제하지 못하는 튀르크 유목민들이 십자군을 습격하여 프리드리히 1세가 분노하자 십자군과 동행하던 사절 토킬리는 고드프루아를 잡아 도주하였다.
이로써 양측은 전쟁에 돌입하였고, 1190년 5월 십자군은 필로멜리온 전투에서 룸 셀주크 군을 격파하고 콘야를 포위하였다. 쿠트브 앗 딘과 클르츠 아르슬란은 성 밖으로 출정했으나 역시 패하였다. 승전 후 독일군은 '쾰른 규모의 도시'라 묘사된 콘야에 입성하여 닥치는 대로 학살을 자행하고 10만 마르크 상당의 전리품을 약탈하였다. 시타델에서 농성하던 술탄은 안전 통행과 물품 교역을 보장하는 조건의 강화를 제안하였고, 이를 수용한 프리드리히는 5일 후 시체 썩는 냄새로 가득찬 시내를 떠나 외곽으로 진영을 옮겼고 다시 3일 후 튀르크인 인질과 함께 남하하였다. 그 후 룸 셀주크와 십자군 간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6월에 프리드리히가 살라프강에서 익사하며 3차 십자군 중 독일 병력은 그대로 와해된다.
두 차례에 걸친 십자군의 점령을 겪은 콘야는 10여년 간의 내전을 끝낸 카이쿠스라우 1세 때부터 안정을 되찾았고, 카이쿠바드 1세 때까지 반세기 가량 번영하였다. 1205년에는 알렉시오스 3세가 복위를 위해 콘야 궁정으로 망명해왔고, 1211년 카이쿠스라우 1세는 그와 함께 니케아 제국을 침공했으나 테오도로스 1세에게 패하고 전사하였다. 이후 콘야의 아미르들은 장남 카이카우스 1세를 추대했는데, 형제인 토카트의 카이쿠바드와 안탈리아의 이브라힘이 반란을 일으켜 한때 후자의 군대가 콘야에 입성했으나 결국 진압되었고 둘다 사로잡혔다. 명군의 면모를 보이던 카이카우스 1세는 1220년 급사하였고, 이에 카이쿠바드가 유폐에서 풀려나 술탄에 올라 전성기를 이어갔다. 이 시기 콘야에는 수준 높은 건물들이 세워졌다.
1243년 6월 카이쿠스라우 2세는 몽골 제국에 맞서 무슬림 연합군을 이끌고 출정했으나 쾨세다으 전투에서 대패한 후 앙카라로 도주하였고, 무방비로 남겨진 콘야는 재상 무하답 앗 딘이 몽골 진영에 찾아가 항복하며 겨우 파괴를 면하였다. 이후 룸 셀주크는 몽골에 복속하였고, 1256년부터는 일종의 다루가치인 페르반 무인 앗 딘 술레이만이 콘야에 상주하였다. 이듬해 5월 콘야 총독 술레이만이 토카트의 반란 진압을 위해 자리를 비우자 술탄 카이카우스 2세는 니케아 제국군과 함께 콘야를 장악하고 마르딘의 아르투크 왕조 및 마야파리킨의 아이유브 왕조와 연대하여 몽골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하지만 돌아온 몽골군에게 패배한 카이카우스 2세는 동생 클르츠 아르슬란 4세에게 카이세리 일대를 내어주었다. 한편 13세기 중반 콘야에는 몽골 지배를 피해 페르시아 문화권에서 몰려든 이들이 다수 이주해왔는데, 그중에는 수피 메블라나 종단의 창시자 잘랄루딘 루미도 있었다.
1261년 8월 몽골 측의 승인과 함께 클르츠 아르슬란 4세는 콘야에 입성하여 단독 술탄에 올랐고, 카이카우스 2세는 막 수복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주하였다. 이후 무인 앗 딘 술레이만이 재차 몽골측 총독으로서 상주하였고, 더 많은 조공을 위해 높은 세금을 거두었다. 1266년 무인 앗 딘은 클르츠 아르슬란 4세를 처형하고 후자의 아들 카이쿠스라우 3세를 옹립하였다. 1271년 맘루크 왕조의 바이바르스가 엘비스탄 전투에서 일 칸국-룸 셀주크 군을 격파하자 그해 5월 카라만 왕조-멘테셰 후국의 연합군이 콘야를 점령하고 카이카우스 2세의 아들 치미르를 술탄으로 옹립했으나 이듬달 아바카 칸이 친정에 나서자 철수하였다. 다만 카이세리와 달리 콘야에서는 몽골군의 학살이 없었다. 복위한 카이쿠스라우 3세는 1284년 일 칸국의 내분에 가담했지만 지는 편이었기에 역모 혐의로 처형되었다. 그는 룸 셀주크 왕실 영묘인 알라에딘 자미에 매장된 마지막 술탄이었다.
카이카우스 2세의 다른 아들 메수트 2세가 옹립되었는데, 일 칸국은 카이쿠스라우 3세의 아들들을 콘야에 봉하며 룸 셀주크를 양분시켰다. 이에 1286년 메수트 2세가 콘야를 점령하고 그들을 처형하며 재통합하였고, 이후 일 칸국에 복속하여 관계를 회복하였다. 다만 1308년 메수트 2세가 사망한 후 카라만 왕조의 바헤레딘 마흐무트 베이가 콘야를 점령하며 룸 셀주크는 멸망하였고, 그는 차남 야흐쉬를 콘야 총독에 봉하였다. 1312년 후일 추판 왕조를 세우는 몽골 장수 초반이 콘야를 점령하였다. 그러다 1360년경 세이페딘 쉴레이만 베이가 재차 콘야를 점령하여 카라만을 대신 수도로 삼았고, 이후 카라만 군주들은 메블라나 영묘에 매장되었다. 14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이 성장하자 카라만 조의 알레에딘 알리 베이는 주변의 제후들과 연합하에 그에 맞섰고, 1389년 코소보 전투 시에 오스만 조의 후방을 공격하였다. 따라서 신임 술탄 바예지트 1세는 1390년 콘야를 포위하였다.
1481년 메흐메트 2세가 사망하자 장남 바예지트 2세와 젬 간의 내전이 발발하였고, 카슴은 후자의 편에서 1482년 5월 콘야를 포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해 7월 젬이 로도스로 망명하자 카슴은 오스만 측에 투항하여 실리프케 총독에 봉해졌고, 이로써 카라만 조는 멸망하였다. 15-16세기 콘야는 페르시아와 시리아 방면의 요충지이자 악사라이와 카이세리까지 아우르는 카라만 에얄레트의 치소였고, 젬에 이어 쉴레이만 1세의 자녀들이 차례대로 산작 베이를 지냈다. 먼저 삼남 셀림 (미래의 셀림 2세)이 1542-44년간 부임하였고, 뒤이어 1549년 장남 무스타파가 콘야 산작 베이로 봉해졌으나 뤼스템 파샤의 음모로 1553년 10월 동쪽의 에레을리에서 처형되었다. 사후 콘야 일대에서는 처형에 반발하는 반란이 있었고, 이로써 뤼스템 파샤 역시 해임되었다. 오스만 시기 콘야는 직물업과 광산업으로 번영하였고, 동시에 메블라나 영묘를 찾는 순례객들 (가끔은 술탄들도)로 붐볐다.
카라만 에얄레트는 186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콘야 빌라예트로 개편되었다. 튀르키예 독립 전쟁 당시 콘야에는 튀르키예군의 주요 공군 기지가 있었다. 본래 일대, 특히 서북쪽의 실레에는 그리스계 인구가 다수 거주했으나 전후 1923년의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으로 이주되었다. 이후 공화국 시기에 들어 수도 앙카라와 인접해 있는 덕분에 개발되어 현재의 대도시로 성장하였다.[4][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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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서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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