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선덕여왕(善德女王)은 신라 최초의 여왕이자 제27대 왕(재위 632∼647)이다.
개요
- 선덕여왕은 성은 김(金)이고, 이름(諱)은 덕만(德曼)이다. 시호(諡號)는 선덕(善德)이며 '인평(仁平, 634〜647)'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의 맏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복승 갈문왕(福勝葛文王)의 딸인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이다. 언니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은 제25대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의 아들인 이찬(伊湌) 김용춘(金龍春)과 결혼해 제29대 무열왕(武烈王, 재위 654~661)을 낳았다.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에는 음 갈문왕(飮葛文王)이 선덕여왕(善德女王)의 배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632년(진평왕 54) 정월에 아버지 진평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나라 사람들이 그녀를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 '왕력' 편에는 '성골(聖骨) 남자가 다하여 여왕을 세웠다(聖骨男盡故女王立)'고 기록되어 있다. 진평왕의 동생들인 백반(伯飯)과 국반(國飯)도 이미 죽었고, 진평왕의 가계(家系)에 남자 혈족이 존재하지 않아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이다.[1]
- 선덕여왕은 신라의 제27대 국왕이자 기록상 확인되는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다. 연호는 '인평'(仁平).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의 딸이며, 최초의 진골 출신 국왕인 태종 무열왕의 이모이기도 하다. 진덕여왕, 진성여왕과 함께 신라 3대 여왕들 중 한 명. 현대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박근혜까지 포함해 한국사에 단 4명 있었던 여성 국가 원수들 중 첫 번째였다. 참고로 삼국사기에서는 여왕이 아니라, 여(女) 자가 빠진 '선덕왕'(善德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훗날 제37대 군주이자 남성 국왕인 선덕왕(宣德王) 김양상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한국 역사상 여왕은 단 3명밖에 없는 예외적인 사례로 평가되기 때문에 제27대 선덕왕을 '선덕여왕'으로 바꿔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선덕여왕은 숭불정책을 통해 황룡사 9층 목탑으로 상징되는 불교 문화를 융성시켰다. [2]
- 선덕여왕은 신라의 제27대 여왕이며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다. 성은 김(金), 휘는 덕만(德曼)이다. 진평왕과 마야부인 김씨(摩耶夫人 金氏)의 딸이며, 진평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재위 중인 632년부터 633년까지 건복(建福)의 연호를 사용하였고, 634년 인평(仁平)으로 개원하였다. 출생연도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즉위 당시 50세 전후의 나이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삼국사기》에는 진평왕의 맏이로, 《삼국유사》에는 형제자매 서열에 관한 기록이 없이 진평왕의 딸로만 기록되었다. 진평왕이 아들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진평왕의 왕녀인 덕만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성스러운 조상의 혈통을 이어받은 여황제"라는 뜻을 가진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존호를 올렸다.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은 '김씨 성골의 남자가 다하였으므로 여왕이 왕으로 선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3]
- 선덕여왕은 신라의 제27대(재위: 632년~647년) 왕이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진평왕(眞平王)의 장녀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그를 왕위에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다고 한다. 즉,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성골(聖骨)'이라는 특수한 왕족 의식이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즉위하던 해인 632년(선덕여왕 1)에 대신 을제(乙祭)에게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전국에 관원을 파견해 백성들을 진휼(賑恤)했으며, 633년에는 주(州) · 군(郡)의 조세를 1년간 면제해 주는 등 일련의 시책으로 민심을 수습하였다. 그리고 634년에 분황사(芬皇寺), 635년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세웠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634년에 인평(仁平)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중고(中古) 왕실의 자주성을 견지하고자 하였다. 다만 즉위 이후 거의 매년 당나라에 조공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당나라와의 관계가 밀접해졌다. 당 태종이 지적한 여왕 통치의 문제점은 신라 정계에 파문을 일으켜 647년 1월에는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眞骨) 귀족들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이 이를 진압했으며, 여왕은 이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위 16년 만에 죽었다. 시호(諡號)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 지냈다.[4]
선덕여왕의 생애
-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선덕여왕은 성품이 관대하고 어질며 총명했다. 당나라에서 가져온 모란꽃 그림만 보고도 그 꽃이 향기가 없음을 알았으며, 636년(선덕여왕 5)에는 왕궁 서쪽의 옥문지(玉門池)에 개구리가 많이 모여들었다는 이야기만 듣고서 서남쪽 변경의 옥문곡(玉門谷)에 백제군이 잠입해 있다는 사실을 예견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삼국유사》에는 그녀가 자신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세워지리라는 것을 미리 예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신라 최초로 여자로서 왕위에 오른 선덕여왕은 대신(大臣) 을제(乙祭)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했고, 634년(선덕여왕 3)에는 연호를 '인평'으로 고치고, 635년(선덕여왕 4)에는 이찬 수품(水品)과 김용춘(金龍春)을 시켜 각 주(州)와 현(縣)을 돌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게 했다. 636년(선덕여왕 5)에는 수품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으며, 637년(선덕여왕 6)에는 사진(思眞)을 서불한(舒弗邯)으로, 알천(閼川)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았다. 645년(선덕여왕 14)에는 이찬 비담(毗曇)을 상대등으로 임명했다. 선덕여왕의 재위 기간에도 백제와 고구려는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 때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신라를 잇달아 공격해왔다. 633년(선덕여왕 2)에는 백제가 서쪽 변경을 쳐들어왔다. 636년(선덕여왕 5)에도 백제 장군 우소(于召)가 독산성(獨山城)을 기습하기 위해 몰래 침투해 왔으나, 선덕여왕은 이를 미리 알고 알천(閼川)을 보내 패퇴시켰다.
- 선덕여왕은 북동 지역의 영토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637년 우수주(牛首州, 지금의 춘천)를 설치해 군주(軍主)를 두었고, 639년(선덕여왕 8)에는 하슬라주(何瑟羅州, 지금의 강릉)를 북소경(北小京)으로 만들어 사찬(沙湌) 진주(眞珠)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 643년(선덕여왕 12)에는 김유신(金庾信)을 압량주(押梁州)의 군주(軍主)로 삼았으며, 이듬해에는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해 백제를 공격하게 했다. 김유신은 백제로부터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등 7개의 성을 빼앗았다. 645년(선덕여왕 14)에도 백제가 매리포성(買利浦城, 지금의 경남 거창)을 공격해왔으나 김유신이 이를 물리쳤다.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을 받던 신라는 고립을 피하기 위해 중국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더욱 강화했다. 신라는 632년(선덕여왕 원년), 633년(선덕여왕 2), 640년(선덕여왕 9), 642년(선덕여왕 11), 643년(선덕여왕 12), 644년(선덕여왕 13), 645년(선덕여왕 14) 등 거의 해마다 당나라로 사신을 보냈으며, 640년에는 유학생들을 당나라에 보내 국학(國學)에 입학시켜 주기를 요청하기도 했다.
- 선덕여왕은 아버지인 진평왕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진흥하였다. 분황사(芬皇寺, 634년)와 영묘사(靈廟寺, 635년) 등을 완성했고, 636년(선덕여왕 5) 병이 들었을 때에는 황룡사(皇龍寺)에서 백고좌(百高座)를 열어 승려들을 모아 《인왕경(仁王經)》을 강설케 하고 1백 명의 승려에게 도첩을 주었다. 645년(선덕여왕 14)에는 자장법사(慈藏法師)의 요청을 받아들여 황룡사 9층탑을 세웠다. 《삼국유사》에는 첨성대가 세워진 것도 선덕여왕 때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 선덕여왕은 647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낭산(狼山)에 매장되었다. 오늘날 경주시 배반동에 위치한 선덕여왕릉은 사적 제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평왕의 동생인 진안 갈문왕(眞安葛文王) 국반(國飯)의 딸, 곧 선덕여왕의 사촌인 승만(勝曼)이 왕위를 계승해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 ~654)이 되었다.
경주 선덕여왕릉
- 경주 선덕여왕릉(慶州 善德女王陵)은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산79-2번지에 있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의 능. 1969년 8월 2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의 능으로 646년경에 조성되었다. 1969년 8월 2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낭산(狼山) 보호구역에 포함된다. 사천왕사(四天王寺) 위 낭산의 정상에 있는데, 현재의 상태는 봉토(封土) 밑에 둘레돌을 쌓은 원형의 토분(土墳)이다. 둘레돌은 잡석을 비스듬히 2단으로 쌓았고 그 밖으로 드문드문 둘레돌의 높이와 비슷한 대석을 기대어 놓았다. 이로 미루어 무열왕릉의 봉토 밑에 노출된 자연석의 한 부분은 결국 이러한 형식의 둘레돌이 봉토에 의하여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는 다른 표식의물(表飾儀物)이 없고 다만 전면에 상석(床石)이 있으나 이것은 후세에 설치된 것이다.
- 《삼국유사》에 보면 선덕여왕은 죽는 날을 미리 예언하고 도리천(忉利天)에 장사지내 달라고 하였는데, 모두가 알아듣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하니 낭산이 바로 그곳이라고 하여 그 뒤에 거기에 장사지냈다. 과연, 여왕을 장사지낸 지 10여 년 후인 문무왕 때 능 밑에 사천왕사를 지으니 불경에서 말한 바 사천왕 위가 도리천이라는 가르침을 실증한 것이 되어 비로소 모두가 깨달았다고 한다. 신라 능묘제도의 중요한 형식을 보여 준다.
선덕여왕의 업적
- 선덕여왕은 재위 초반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여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도록 하는 구휼정책을 활발히 추진하였으며, 동아시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를 건립하여 농사에 도움이 되게 하였다. 또한 재위 기간에 분황사(芬皇寺)와 영묘사(靈妙寺) 등의 사찰을 건립하였다. 특히 선덕여왕은 웅대한 호국의 의지가 담긴 거대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황룡사 9층 목탑은 높이 80m의 거대한 탑으로 이를 모두 9층으로 한 이유는 이웃의 9적을 물리쳐서 복속시키기 위해 나라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
- 불교의 융성이다. 선덕여왕은 불교를 신라 사회의 중요한 문화적 기틀로 삼았다. 그녀는 불교를 장려하고 사찰을 다수 건립함으로써 종교적 안정을 이루었다.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황룡사 9층 목탑의 건축이 있다. 황룡사는 신라의 대표적인 불교 사찰로, 그 안에 건립된 9층 목탑은 신라의 왕권을 상징하는 중요한 기념물로 여겨졌다. 이외에도 분황사, 영묘사 등의 사찰을 건립하여 불교의 융성과 종교적 권위 확립에 기여했다. 사찰의 건축은 종교적 의미뿐만 아니라 신라의 중앙 집권화를 더욱 굳건하게 하였다.
- 국정 운영이다. 중앙집권 체제 강화 선덕여왕은 종교적 업적 외에도 국정 운영에서 중요한 변화를 이끌어 냈다. 선덕여왕은 관리들을 통해 국정을 철저히 운영하며 신라의 국력을 강화했다. 특히 백제와 고구려,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군사적 대비책을 강화하고, 국방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군사 훈련을 정비했다. 선덕여왕의 치세 동안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며, 내부적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행정 체제를 정비했다. 이러한 중앙집권 체제의 강화는 이후 문무왕 시대에 삼국 통일로 이어지는 초석이 되었다.
- 천문과 문화적 발전이다. 선덕여왕은 문화와 과학의 발전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녀는 첨성대를 세워 천문학을 연구하도록 하였으며, 이는 농업과 국가 행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첨성대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 중 하나로, 신라의 과학 기술 발전을 상징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선덕여왕은 음악과 예술을 장려하여 신라 문화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중에서도 향가인 '도솔가'는 그녀가 직접 만든 노래로 전해지며, 신라의 예술적 성과를 대표한다.
선덕여왕에 대한 평가
- 선덕여왕은 신라의 27대 왕이자 한국 역사상 최초의 여왕으로 기록된다. 그녀는 진평왕과 마야부인의 딸로 태어나 진평왕의 뒤를 이어 신라를 통치하게 되었다. 당시 신라는 삼국 통일을 위해 고구려와 백제, 외세와 끊임없이 대립하던 시기였으며, 여왕으로서의 통치는 기존의 왕권 체제와는 다른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선덕여왕은 즉위 초기에 정치적 안정과 국방 강화를 위해 노력하며, 신라의 중앙 권력을 견고하게 다졌다. 여왕으로서의 역할은 당대 신라 사회에서 매우 파격적인 변화였으며, 이후 여성 통치자들의 역할에 대한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비담의 난
- 비담의 난(毗曇-亂)은 645년 상대등에 오른 비담이 권력을 장악하여 647년 1월, "女主不能善理여주불능선리(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라는 명분을 내걸고 염종의 군사와 함께 출정하여 일으킨 선덕여왕 대의 반란이다. 이로 비담은 도망치다가 김유신에 의해 처참한 최후를 맞고 그의 9족과 30명이 모두 숙청당했다. 647년 1월, 비담은 주위의 꾐에 넘어가 염종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때 선덕여왕의 심장병은 최고조에 달하여, 선덕여왕의 기력이 쇠할 때를 노려 난을 일으켰다는 일설이 있다. 혼란스러운 난 도중인, 647년 1월 8일에 선덕여왕이 승하하고 말았다. 결국 진덕여왕이 왕위를 이었다.
동영상
각주
- ↑ 〈선덕여왕(善德女王,?~647)〉, 《두산백과》
- ↑ 〈선덕여왕〉, 《나무위키》
- ↑ 〈선덕여왕〉, 《위키백과》
- ↑ 〈선덕여왕(善德女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
- 〈선덕여왕〉, 《나무위키》
- 〈선덕여왕〉, 《위키백과》
- 〈비담의 난〉, 《나무위키》
- 〈선덕여왕(善德女王,?~647)〉, 《두산백과》
- 〈선덕여왕(善德女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교육정복기, 〈선덕여왕 업적 최초의 여왕 각종 사찰을 많이 짓다〉, 《네이버블로그》, 2024-05-19
- 현동민 기자, 〈(오늘의 역사) 신라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즉위하다〉, 《인천투데이》, 2024-02-20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