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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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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영

지석영(池錫永)은 조선대한제국한의사(韓醫師), 토포사(討捕使) 문관, 정치인, 교육자, 저술가이다.

개요

  • 지석영은 조선 후기의 의사·문신·국문학자이며 최초로 종두법을 도입했다. 의학교육사업과 한글 보급 및 연구에도 힘썼다.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이며, 조선 말기인 1855년(철종 6) 서울에서 태어났다. 1876년(고종13) 수신사(修信使) 김기수(金綺秀)의 통역관으로 일본에 갔던 스승 박영선(朴永善)으로부터 구가 가쓰아키[久我克明]의 《종두귀감(種痘龜鑑)》을 전해 받고 종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879년 부산에 있던 일본 해군병원 제생의원(濟生醫院)에서 종두법을 배우고 1879년 겨울 처가가 있는 충주 덕산면(德山面)에서 40여 명에게 종두를 시술했는데, 이것이 한국에서 공개적으로 실시된 최초의 종두로 알려져 있다. 1880년 서울에서도 부산제생의원에서 보내온 두묘(痘苗)로 종두를 실시했다. 1883년(고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고 1885년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저술했다. 1887년 장령(掌令)으로 시폐(時弊)를 논하다가 우두의 기술을 미끼로 일본과 결탁한 개화당과 도당을 이룬다는 이유로 전라도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었다. 6년간의 유배 생활 동안 농학서인 《중맥설》과 의학서인 《신학신설》을 저술했다. 1892년 유배에서 풀려나 승지(承旨)를 거쳐 1896년(고종33) 동래부사를 지냈다. 1899년 경성의학교(京城醫學校) 교장에 취임하여 이후 10년간 의학교육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한글 보급에 힘써 <신정국문(新訂國文)>(1905) 6개조를 상소하였다. 이 제안은 그대로 받아들여져 공포되었으며, 지속적인 연구를 위해 1908년 국문연구소 위원이 되었다. 또한 1909년 옥편의 효시인 《자전석요(字典釋要)》를 간행하는 등 국문연구에도 공적을 남겼다.[1]
  • 지석영은(1855년 5월 15일~1935년 2월 1일)은 민본주의 군주제 조선 시대 구한말기의 문신이자 대한제국 시대의 한의사 겸 국어·한글학자 및 교육인이다. 본은 충주(忠州)로, 한성부 종로관훈방 생이다. 자(字)는 공윤(公胤), 아호(雅號)는 송촌(松村), 본관은 충주(忠州)로, 한성부 종로관훈방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후일 종두법 공헌 등의 공적으로써 면천 조처되었다. 일찍이 한학에 학구적이던 그는 1876년(고종 13) 오랜 학행(學行)을 치하하는 취지의 음서로 천거되고, 1883년(고종 20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掌令),[2] 형조 참의(刑曹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1880년부터 종두법 보급을 위해 큰 공헌을 하였다. 조선의 종두법 시행의 선구자로, 종두에 대한 알기 쉬운 서적을 저술하여 의학 발전에 기여하였고, 천연두가 유행할 때마다 우두 종법을 실시하여 병에 걸린 이들을 구제하였다. 또한, 한글 보급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팔괘장과 태극장을 받았다.[2]
  • 지석영은 개항기 『우두신설(牛痘新說)』, 『자전석요(字典釋要)』 등을 저술한 의료인. 한의사, 국어학자이다.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 서울 관훈동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의학교육을 받은 일은 없었으나 일찍부터 서학(西學)을 동경하여 중국에서 번역된 서양의학책을 탐독하였는데, 특히 관심을 둔 것은 영국인 제너(Jenner,E.)의 종두법(種痘法: 천연두 예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1876년(고종 13) 병자수호조약이 일본과 체결되면서 그 해 수신사로 지석영의 스승인 박영선(朴永善)이 가게 되었는데, 그는 오다키(大瀧富川)에게 우두법을 배우고 구가(久我克明)의 『종두귀감(種痘龜鑑)』을 얻어다 전해주었다. 그 뒤 1879년 일본해군이 세운 부산의 제생의원(濟生醫院)에 가서 원장 마쓰마에[松前讓]와 군의(軍醫) 도즈카(戶塚積齊)로부터 2개월간 종두법을 배우고 두묘(痘苗:우두의 원료)와 종두침 두 개를 얻어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처가가 있는 충주에 들러 40여 명에게 우두를 놓아주었다. 이것이 한국에서 사람에 의한 공개적인 종두법 실시의 시초이다. 개화가 늦어지는 이유가 어려운 한문을 쓰기 때문이라 보고 1905년 널리 교육을 펴기 위하여 알기 쉬운 한글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더욱이 주시경(周時經)과 더불어 한글의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구자였다. 1908년 국문연구소 위원에 임명되었고, 1909년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자전석요(字典釋要)』를 지어냈다. 그의 주장은 인정을 받아 많이 받아들여졌고, 고종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태극장(太極章) · 팔괘장(八卦章) 등을 내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일합병을 당하자 모든 공직을 버렸다. 이후 1915년 전선의회 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17년에는 동서의학을 절충한 조선병원의 원장으로 추대되었다.[3]
  • 지석영경기도 구리시 망우 공원 묘지에 안장된 일제 강점기의 의학자이자 국어 학자이다. 국어 학자로서 한글 전용을 제창하였다.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이다. 아버지는 지익룡(池翼龍)이다. 지석영은 상소를 올려 '국문을 새로 개정해 나라의 자주와 부강을 도모'할 것을 건의하여 1905년 7월19일 '신정 국문(新訂國文)'을 공표했다. 1908년 국문 연구소 위원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자전석요』를 펴냈다. 지석영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모든 공직을 버렸다. 1914년에 유유당(幼幼堂)이라는 소아과 의원을 열어 봉사를 시작했고 1915년에 전선 의생회(全鮮醫生會) 회장을 지냈다. 지석영은 『중맥설(重麥說)』·『신학 신설(新學新說)』·『우두 신설(牛痘新說)』·『자전석요(字典釋要)』 등을 저술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망우 공원 묘지에 있다. 고종은 지석영의 공을 인정하여 태극장(太極章)·팔괘장(八卦章) 등을 하사하였다.[4]

지석영의 생애

  • 지석영은 1855년 한성부 종로관훈방(지금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지익룡은 근교에 한약과 침으로 이름난 유의였다. 어려서부터 의학에 대해 관심을 가졌었고, 특히 일찍부터 청나라(중국)에서 들여온 서양 의학서의 번역본을 많이 읽었고,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의 우두법(우두 접종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 1876년 음서 천거 및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을 다녀온 역시 명의로 칭송이 자자하던 스승 박영선(朴永善)에게서 《종두귀감》을 얻어 보고 나서 감명을 받았고, 1879년 10월 부산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제생의원에서 일본인 의사에게서 두 달간 우두법을 배웠다. 1879년 겨울 충청도 중원 충주군 덕산면에서 최초로 40여 명에게 우두를 시술하였다. 특히 한성부(서울)에는 종두장(종두의료소)을 설치하였다. 1880년 2차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우두종계소(牛痘種繼所)에서 두묘의 제조법을 배우고 두묘 50병을 얻어서 돌아와 종두법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이러한 사회 공헌 등으로 중인 출신임에도 면천되어, 1883년(고종 20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사헌부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고, 1887년 공가(貢價)와 화폐 문제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 지석영은 1885년 《우두신설》을 저술하였다. 1890년대 후반에는 독립협회에서 활동하기도 하였고, 1894년에는 김홍집에 의해 토포사(討捕使)로 동학군 토벌에 참여하였다. 1894년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제수되었고, 1895년 동래부 관찰사(東萊府觀察使)가 되었다. 1896년 우두법의 보급에 공헌하였으며, 1899년 경성 의학교가 세워진 이후로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1907년 통감부에서 의학교를 폐지하고 1908년 대한의원의육부(大韓醫院醫育部)로 개편할 때 학감이 되었으나, 경술국치늑약 후(1910년)에 사직하였다. 이후에는 (한방)소아과를 특히 주요 진료를 하였고, 1915년에는 전국조선의생대회(全國朝鮮醫生大會. 현 한의사협회의 전신)가 열리고 회장을 맡는다. 일제는 보안법 1조로 조선 의생회의 해산을 명하고 관계자인 지석영 선생을 필두로 김성기, 최동섭, 경도학, 장기학, 윤용배, 조병근, 박인서 등 의생들을 종로경찰서로 초취하여 금후 다시는 이와 같은 회를 설립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게 한다. 그리고 1916년 조선의생회는 일제의 압박에 의해 해체되고 만다. 지석영은 나라의 정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05년에는 〈신정국문〉 6개조를 고종에게 상소하여 공포하게 하였다. 또한 그는 여러 외래 도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한글의 우수성과 중요성을 자각하여 한국어의 발전과 보급에도 노력하였다. 지석영은 학부 안에 국문 연구소를 설치하게 하였으며, 1908년에는 국문 연구소 위원이 되었다. 또한 1909년에는 한자를 국어로 풀이한 《자전석요》를 간행하여 한자 해석의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우두신설

  • 우두신설(牛痘新說)은 1885년(고종 22)에 지석영(池錫永:1855~1935)이 쓴 한국 최초의 우두종서(牛痘種書). 활자본. 2권 1책. 지석영이 일본인 기쿠치 고안[菊池康庵] 등으로부터 종두법을 익혀 오랫동안 경험해 온 지식을 종합하여 간행하였다. 상권(上卷)에는 김홍집(金弘集) ·이도재(李道宰)의 서문과 저자의 자서(自序)가 있고, 영국 의사 덕정(德貞:Edward Jenner)의 《우두고(牛痘考)》 《우두속고(牛痘續稿)》, 영국 의사 합신(合信:Habson)의 《부영신설(婦嬰新說)》 중에 들어 있는 <종두론(種痘論)>과 <논우두(論牛痘)>의 내력 등을 적었다.
  • 청(淸)나라 남해(南海) 구희(邱熺)의 《인두약서(引痘略序)》 《인두략》을 중간한 증망안(曾望顔)의 서문, 조난정(趙蘭亭)의 <증보우두삼요서(增補牛痘三要序)> 등이 실려 있다. 하권에는 소아접종법(小兒接種法), 진두(眞痘) ·가두(假痘) ·종두(種痘) 시의변(時宜辨), 종두중금기(種痘中禁忌) ·수두후수지(水痘後須知) ·소아두장채취법(小兒痘漿採取法) ·두묘제조(痘苗製造) 및 축장법(蓄藏法) ·채두가수장법(採痘痂收藏法), 독우종두(犢牛種痘) 및 경과(經過), 독우채장법(犢牛採漿法) ·독우사양법(犢牛飼養法) 및 방약(方藥) 등을 적었다. 또, 계우상도(繫牛床圖) ·종두기구류도(種痘器具類圖)와 설봉(雪峰)의 우두행(牛痘行)이 첨부되어 있다. 제너의 우두종법(牛痘種法)의 발견으로부터 이에 대한 한역서(漢譯書)의 소개, 우두의 시종(施種) 및 치료, 또는 두묘(痘苗)의 제조와 종우(種牛)의 사육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법방을 간명하게 서술하였다.

자전석요

  • 자전석요(字典釋要)는 지석영(池錫永:1855∼1935)이 지은 한자옥편. 활자본. 1책. 1909년(융희 3) 간행. 종래의 옥편류가 자음과 자의를 한글로 달지 않은 데 반해 이 책은 자음과 자의를 한글로 달아 한자의 소리와 뜻을 알아보기 쉽게 하고, 또한 속음과 속자를 붙여 근대적 색채를 띠게 한 최초의 옥편이다. 책 끝에 그림을 많이 넣어 한자로 풀이한 것이 특징이며 범례 중에는 한글 표기에 관한 것도 있어 저자의 맞춤법에 대한 견해를 엿볼 수 있다.

동영상

각주

  1. 지석영(池錫永,1855~1935)〉, 《두산백과》
  2. 지석영〉, 《위키백과》
  3. 지석영 (池錫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지석영〉,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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