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무
이종무(李從茂)는 조선 시대의 장군.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돈문(敦文)이다.
개요
- 이종무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왜구를 격파했고 제2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웠으며 대마도를 정벌했다. 본관 장수(長水). 시호 양후(良厚). 1381년(우왕 7) 아버지와 함께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고 1397년(태조 6) 옹진만호(甕津萬戶) 때 왜구가 침입, 성을 포위하자 이를 격퇴하여 첨절제사(僉節制使)에 올랐다. 1400년(정종 2) 상장군으로 제2차 왕자의 난에 공을 세워 1401년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으로 통원군(通原君)에 봉해졌다. 1406년(태종 6) 좌군총제(左軍摠制), 1408년 남양수원등처조전절제사(南陽水原等處助戰節制使)·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 등을 거쳐 1408년 장천군(長川君)에 개봉(改封)되었다. 1409년 안주도병마사(安州都兵馬使), 1411년 안주절제사(安州節制使), 1412년 별시위좌이번절제사(別侍衛左二番節制使)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중국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413년 동북면도안무사 겸 병마절도사를 거쳐 영길도도안무사(永吉道都安撫使)가 되고, 1417년 좌참찬을 거쳐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의용위절제사(義勇衛節制使)를 지내고 1419년(세종 1)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승진했다. 1419년 전함 227척을 거느리고 대마도(對馬島)을 정벌한 후 돌아와 찬성사(贊成事)가 되었으나 불충한 김훈(金訓) 등을 정벌군에 편입시켰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상원(祥原)에 귀양갔다가 1420년 복직되어 풀려났고, 1421년 부원군(府院君)이 되었다. 1422년에는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동행한 정희원(鄭希遠)의 불경한 행동을 직계(直啓)하지 않아 1423년 과천(果川)에 귀양간 후 이듬해 풀려나와 복관되었다.[1]
- 이종무는 조선 초기의 조선전기 좌명공신 4등에 책록된 공신이자 무신이다. 이을진의 아들로 본관은 장수이며 어려서부터 말타기·활쏘기에 능하였다. 1381년 고려 우왕 때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고, 1397년 조선 태조 6년 왜구가 침입하자 끝까지 싸워 이를 격퇴하였으며 세종 때 쓰시마섬을 정벌하는 공을 세운다.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정안대군 이방원을 도운 공로로 좌명공신 4등에 녹훈되었고, 최종 관직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찬성사에 이르렀고, 통원군(通原君)에 봉해졌다가 장천군으로 개봉되었다. 시호는 양후(襄厚)이다. 고려 공민왕 9년 1360년에 장천 부원군 이을진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1381년 우왕 때 14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로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친 공으로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고, 1397년 옹진에서 만호(萬戶)의 벼슬에 재직 중 왜군이 다시 쳐들어와 성을 포위하자, 이에 끝까지 싸워 적을 물리친 공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가 되었다가 돌아와 상장군이 되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때는 정안대군 이방원의 편에 가담하여 회안대군 이방간(李芳幹)의 군사를 괴멸시켰고, 이로 인해 1406년 익대좌명공신의 호를 받고 통원군에 책봉되었고, 의주 등지의 병마절제사로 승진되었다. 1425년 음력 6월 9일 향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세종은 조회를 3일간 중단하고, 양후(襄厚)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종무 장군의 무덤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산 79번지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1975년 9월 5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다.[2]
- 이종무는 조선 전기의 무신이다. 이종무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 활동한 무신으로, 이 시기에 빈번하게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성질이 순박하고 진실하였으며, 죽은 뒤에 용인시 고기리에 묻혔다. 태종 대에는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여 통원군(通原君)에 봉해졌으며,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돈문(敦文), 호는 설죽(雪竹). 할아버지는 군기시윤(軍器寺尹) 이길상(李吉祥)이고, 아버지는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 도원수(都元帥) 이을진(李乙珍)이다. 아들로 이승평(李昇平)·이덕평(李德平)·이사평(李士平)·이후평(李厚平)을 두었다. 이종무는 젊어서부터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타는 등 무예에 능했다. 1381년(우왕 7)에 장군인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에 침범한 왜구를 토벌하는 데 많은 활약을 했다. 그 공으로 정용호군(精勇護軍)에 임명되었다. 1397년(태조 6)에 옹진만호(甕津萬戶)가 되었는데, 왜구가 갑자기 들어와서 성을 포위하자 끝까지 막아 싸웠으며, 첨절제사(僉節制使)로 승진되었다가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산 79번지 속칭 능말에 있으며, 1975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되었다. 시호는 양후(襄厚)이다. 갑주(甲胄)로 공로가 있음이 양(襄)이요, 생각함이 어둡지 아니함이 후(厚)란 의미이다. 임금이 제사를 하사하는 교서를 내렸다. [3]
- 이종무는 조선전기 좌명공신 4등에 책록된 공신. 무신이다. 본관은 장수(長水).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고, 1381년(우왕 7)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한 공으로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었다. 1397년(태조 6) 옹진만호로 재직 중 왜구가 침입해 성을 포위하자 끝까지 싸워 격퇴하였다. 그 공으로 첨절제사에 올랐다. 1400년(정종 2) 상장군으로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간(芳幹)의 군사를 무찔러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녹훈되고 통원군(通原君)에 봉해졌다. 의주의 병마절제사를 거쳐, 1406년(태종 6) 좌군총제(左軍摠制)에 제수되었고 이어 우군총제를 겸했으며, 이 해장천군(長川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1408년 남양 · 수원 등의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 · 중군도총제 등을 역임하고, 이듬해 안주도병마사, 1411년 안주절제사를 거쳐, 1412년 별시위좌이번절제사(別侍衛左二番節制使)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3년 동북면도안무사 겸 병마절도사를 거쳐, 영길도도안무사(永吉道都安撫使)가 되었다. 1417년 좌참찬 ·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 · 의용위절제사(義勇衛節制使)를 지내고, 1419년(세종 1) 삼군도체찰사에 올랐다. 1419년 왜선 50여 척이 비인현의 도두음곶(都豆音串)에 침입해 병선을 불태우고 약탈하며, 절제사 이사검(李思儉)을 해주 · 연평곶(延平串)에서 포위하는 등 침입이 잦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적의 허점을 틈타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對馬島)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그에게 전함 227척, 군량 65일분, 군졸 1만7285명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이에 정벌군을 지휘해 대마도를 공략, 대소 선박 129척과 가호(家戶) 1,940여 호를 소각했으며, 적 114급(級)을 참수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귀국한 뒤 찬성사에 승진했으나, 불충한 김훈(金訓) · 노이(盧異) 등을 정벌군에 편입시켰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어 상원(祥原)에 유배되었다.[4]
이종무의 생애
- 이종무는 1360년(공민왕 9)에 이을진(李乙珍)의 아들로 태어났고, 기록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다고 한다. 우왕 때 벼슬을 하여 창왕, 공양왕까지 고려 마지막 4명의 왕을 경험하였다. 1392년 조선 건국 후에도 태조, 정종, 태종, 세종에 걸쳐 조선 초기 4대왕을 모셨다. 1400년 2차 왕자의 난 때에는 이방원의 편에 가담하여 이방간의 군사를 전멸시켰다. 대마도를 정벌하였고 이 공적으로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도 들어가 있다.
- 1419년 세종 대에 상왕인 태종의 명을 받아 김종서 등과 대마도 정벌에 나서게 되는데 패전이나 무승부에 가깝다는 견해도 있으나 조선군은 어느 정도 세력을 보존하면서 왜구 세력 약화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승리라고 볼 수도 있다. 1만 7천을 끌고 가서 180명 죽은 걸 일시적으로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볼 수는 있어도 패배한 원정이라고 하는 데는 비약이 심하다. 100여 명을 죽이고 민가 2천여 채를 불사르고 포로로 잡혀있던 중국인과 조선인들을 구출하는데 남은 왜구들은 모두 섬 깊숙한 곳으로 도주한다. 사실 이때 동원한 병력이 많기는 했는데 공식적으로 200척이 넘는 배에 1만 7천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간 것이다.
- 대마도(쓰시마섬)에 상륙한 병력을 제비뽑기로 선출했다는 것인데 이때 공격에 나가게 된 것이 박실이었다. 이 때문에 운 나빠서 상륙대가 된 병사들의 사기가 좋을 리가 없어서 180명이나 되는 군사들을 잃었다. 그동안 나머지 병력들은 박실이 2번이나 구원 요청을 했음에도 모두 무시하고 그대로 배 안에서 대기하다가 패전이 확인된 뒤에 그대로 귀국했던 것이다. 이 한심한 제비뽑기 사건 등이 알려지면서 상황이 완전히 반전되지만 이종무를 대마도 정벌 패전 책임으로 처벌할 수는 없었다. 대마도 정벌은 세종 대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병권을 쥐고 있었던 태종의 명령으로 일어난 일이었으며 태종은 대마도 정벌의 성공을 대대적으로 홍보한 뒤였다. 김훈이라는 인물이 죄를 지었다 풀려났는데 이 사람을 허락도 받지 않고 대마도 정벌에 종군시킨 것이 잘못이라는 궁색한 논리였다. 결국 이종무는 작전 착오가 아니라 인사 책임으로 귀양을 가는데 이후 이종무를 죽이라는 상소가 빗발쳤으나 넘어갔고 뒤에 관직에 복귀하게 된다. 복귀한 이후에 명나라 사신을 따라갔으며 그 때 사신에 포함되어 있던 도총제 권희달이 사고를 치는데 이 때문에 다시 삭탈관직되었다가 다시 복귀해 1425년 죽었다.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로에 자연휴양림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바라산 방면 고기동 산79번지 주소로 향하면 '이종무로'가 있는데 경기도 기념물 제25호인 이종무 장군 묘소가 남아있다.
이종무 장군 묘
- 이종무 장군 묘(李從茂 將軍 墓)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에 있는 고려말∼조선초의 무신 이종무(1360∼1425)의 무덤이다. 1975년 9월 5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광교산록(光敎山麓)에 있으며 묘제(墓制)는 특징 없이 평범하다. 봉분 앞에 묘비와 상석·향로석이 있고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 1쌍씩이 있다. 주위에는 네모 반듯하게 장대석을 쌓아 호석을 삼았고 묘의 전면 왼쪽에는 근래 새로 세운 오석(烏石)으로 된 묘비가 있다. 이종무는 어려서부터 용맹하여 1381년(고려 우왕 7) 14세의 나이로 왜구를 물리치는 공을 세웠고 1397년(조선 태조 6) 서해안에서 왜구를 물리쳐 상장군이 되었으며 1419년(세종 원년) 쓰시마섬[對馬島]을 정벌하는 등 일생이 왜구와의 싸움으로 점철되었다. 1425년(세종 7) 별세하여 이곳에 안장되었다.
대마도 정벌
- 고려 말 조선 초에, 왜구(倭寇)를 근절하기 위해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한 사건이다. 왜구는 13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한반도와 중국 연안에서 활동한 일본인의 해적 집단을 총칭한다. 그중에서도 1350년(충정왕 2) 이후 고려 말까지 약 40년 동안 왜구에 의한 피해가 가장 극심하였다. 특히 우왕 재위 기간(1374~1388)에는 총 378회, 연평균 27회에 달할 정도로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으며, 남해 연안뿐만 아니라 수도 개성을 위협하거나 내륙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는 등 전국이 왜구에 시달렸다. 왜구는 단순한 약탈뿐만 아니라 살인과 납치, 방화 등을 마구 저질렀다. 고려 정부는 한편으로는 육지 곳곳에 성을 쌓고 수군을 증강하며 화기를 개발하는 등 왜구 방어에 임하며, 한편으로는 일본 조정에 사신을 파견해서 왜구를 통제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일본은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때 구주(九州) 일대는 중앙에 밀린 남조(南朝) 세력의 본거지였으며, 그중에서도 막부(幕府)의 통제력이 거의 미치지 못했던 삼도(三島), 즉 대마도 · 일기(壹岐, 잇끼) · 송포(松浦, 마쓰우라: 현재의 나가사키) 세 곳이 왜구의 본거지로 지목된다.
- 본래 대마도는 땅이 매우 척박해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고려와의 교역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몽골과 고려 연합군의 일본 원정 이후 고려와의 교역이 줄어든 데다가 국내 정세마저 불안정해지자 대마도는 식량 확보를 위해 해적 활동에 나섰던 것이다. 또한 남조 세력이 부족한 군량미와 노동력 확보를 위해 조직적으로 남조 휘하의 세력을 한반도에 침범시킨 것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고려와 조선 정부는 고려 1389년(창왕 1), 1396년(태조 5)과 1419년(세종 1) 등 총 세 차례에 걸쳐 대마도 정벌에 나섰다. 근본적으로 왜구는 일본 측의 정세 불안과 경제적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고려 · 조선 측의 외교적 교섭만으로는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 결과 세 차례에 걸친 직접적인 무력 동원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1419년의 대마도 정벌을 계기로 더 이상 대규모의 왜구는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 이로써 대마도는 일본 측에서 조선과 통교하고자 하는 세력들을 통제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조선 초기의 조선과 일본 사이 통교 체제의 근본적인 구조를 이루며, 이후 양측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해 가는 바탕이 되었다.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이종무〉, 《나무위키》
- 〈이종무〉, 《위키백과》
- 〈이종무〉, 《향토문화전자대전》
- 〈이종무(李從茂,1360~1425)〉, 《두산백과》
- 〈대마도 정벌 (對馬島 征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종무 (李從茂)〉,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홍쌤,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과 제비뽑기〉, 《네이버블로그》, 2024-07-21
- 캡틴, 〈태조 이방원 이종무 장군을 시켜 대마도를 정벌하다.〉, 《네이버블로그》, 2022-01-27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