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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포르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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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
포르쉐(Porsche)
폭스바겐(Volkswagen)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는 공학 박사이며 독일의 고급 스포츠카의 대명사로 알려진 포르쉐(Porsche)와 국민차로 알려진 폭스바겐의 창업자이며 독일의 국민차였던 비틀의 디자이너이다.[1] 페르디난트 포르셰라고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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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포르쉐 설립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1875년 9월 3일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이고 현재 체코의 일부인 보헤미아 지역에서 태어났다. 판금 기술자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기계에 대한 대단한 재능을 보였고 10대에 공업대학에 들어갔다. 18살 때 비엔나의 벨라 에거(Bela Egger) 전기회사에 취직한 그는 일이 끝난 후에는 지역 공과대학에서 몰래 강의를 들었다. 전기회사에서 5년간 근무하는 동안 전기모터를 개발하는 등 엔지니어로서의 열정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단했다. 23살이 되던 해, 그는 다른 국가의 황실이나 왕실의 VIP들에게 마차를 맞춤 제작하는 회사인 야콥 로너(Jakob-Lohner)의 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동차 시대의 도래를 예감한 이 회사는 마차 대신 자동차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첫선을 보인 차가 로너-포르쉐(ohner-Porsche)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개발 작업을 주도한 이는 바로 포르쉐였다. 이 차는 엄청난 무게의 전기모터 2개를 장착했다. 각자 앞쪽과 뒤쪽 바퀴동력을 전달하는 형태로 휘발유 엔진과 전기모터를 조합한 최초의 하이브리드차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돼 많은 관심을 받았다. 1902년 군대에서 운전 요원으로 복무한 그는 1906년 오스트로-다임러(Austro-Daimler)에 디자인 책임자로 부임했다. 포르쉐는 이곳에서 85마력의 프린츠 하인리히(Prinz Heinrich)를 제작했다. 오스트리안 제국 황제 빌헬름 2세의 동생 헨리 왕자가 이 차를 개발해달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다임러 입사 10여 년 만에 그는 임원으로 승진했고 1916년 강의를 훔쳐 들어야 했던 비엔나공과대학교에서 명예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24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공대에서 명예박사 학위 및 명예 교수직을 받으며 명성을 널리 알리게 된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1931년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슈투트가르트에 스포츠카경주용 자동차를 전문 제작하는 포르쉐 엔지니어링 오피스(Porsche Engineering Office)를 설립했다. 아들인 페리 포르쉐와 사위, 옛 동료들과 힘을 합쳐 회사를 설립한 포르쉐는 초기에는 중형차 위주로 제작을 하다 사세를 확장하면서 다른 자동차 메이커의 콘셉트카를 외주 받아 제작하기도 했다. 특히 경주차에도 관심이 많았던 포르쉐는 1934년 실버 애로우(Silver Arrow)로 불렸던 P-바겐(P-Wagen)를 제작하기도 했다.

아돌프 히틀러와 인연

1933년 독일의 수상이 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여러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우선 경제부흥을 위해 자동차 산업의 성장이 우선돼야 했고 같은 맥락에서 고속도로의 건설도 필요했다. 히틀러가 생각한 경제부흥책은 국민 누구나 자동차를 소유해 산업 경기를 띄우는 것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소형차에 관심이 많았던 포르쉐에 주목했고 이듬해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히틀러는 포르쉐와 마주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주문을 했다. 어른 2명과 아이 2~3명이 충분히 탈 수 있어야 하며 7L의 연료로 100㎞를 갈 수 있을 것, 또 값은 1,000마르크 이하일 것 등이다. 그러면서 이 차의 개발에 필요한 공학 연구소를 만들어주고 연구비 등도 전부 지원해 주기로 했다. 포르쉐가 우려했던 가격 문제는 국민들이 우표 900마르크 어치를 사면 차 한 대를 준다는 방식으로 국민차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1936년 공개된 프로토타입은 수평 대향 4기통 1.1L 엔진에 최고 속도 98㎞/h, 최대출력 26.5마력의 성능을 지녔다. 간단한 구조와 우수한 내구성이 장점이었다. 특히 후면에 위치한 엔진과 후륜구동의 RR 방식은 나중에 포르쉐가 설계한 차들의 시초가 됐다. 디자인에 불만을 가졌던 히틀러는 70일간의 성능 테스트 결과를 보고 크게 만족했다. 그리고 이 차의 이름을 KdF(Kraft durch Freude)라고 불렀는데 기쁨의 힘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포르쉐는 히틀러와 달리 이 차의 이름을 독일어로 국민차라는 뜻인 폭스바겐(Volkswagen)으로 불렀다. 독일의 소형차 생산을 예의주시하던 미국에서는 이때부터 이 차의 외관에서 모티브를 얻어 비틀(Beetle, 딱정벌레)로 부르기 시작했다. 비틀은 지금까지 2,100만 대 이상 판매하여 역대 3번째로 가장 많이 팔리는 역사적인 모델이 됐다. 천재적인 디자이너에 의해 탄생한 소형차 비틀은 뛰어난 성능과 내구성, 앙증맞은 디자인, 저렴한 가격으로 세계인들을 매료시켰다. 그러나 국민차 비틀의 판매로 거둬들인 돈은 고스란히 전쟁 준비에 쓰였다. 전쟁 중에 폭스바겐 공장은 군수공장으로 바뀌었고 비틀은 생산이 중단됐으며 그동안 만들어 두었던 차는 전쟁에 이용됐다. 히틀러는 비틀의 주문과 함께 포르쉐에 군용 탱크의 개발도 주문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동시에 포르쉐의 공장은 군용차 생산공장으로 변했다. 포르쉐 박사는 1934년 히틀러와 괴벨스의 주도로 독일 시민권을 취득했고 1937년에는 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 통칭 나치당과 히틀러 친위대인 SS에 가입하였다. 1942년에는 SS 상급 지도자 직위를 수여받아 독일군의 군사 차량 개발 및 생산을 책임지게 된다. 그는 설계 노하우를 활용해 차량 외에도 전차 개발에 참여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독일군을 상징하는 티거 전차와 티거II 전차의 개발에 참여했다. 하지만 세계를 정복하려던 나치 독일의 야망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함께 무너졌고 독일은 소련과 연합군에 의해 동서로 분단되는 최후를 맞이했다. 포르쉐 박사는 전후 복구를 위해 프랑스영국에서 밀려드는 자동차 주문과 설계 외주 의뢰를 받으며 지냈으나 1945년 12월 자국 독일이 패전국이 되자 차와 탱크를 군수물자로 지원했다는 이유로 프랑스에 머물던 포르쉐는 전범으로 체포됐다. 아들 페리 포르쉐는 잡혔다 바로 풀려났으나 포르쉐는 20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포르쉐 기업은 아들 페리가 이끌었다. 자유의 몸으로 1949년 독일로 돌아온 포르쉐는 아들과 함께 포르쉐 재건에 나섰다. 포르쉐 이름을 최초로 사용한 포르쉐 356이 공개된 것도 이때다. 수작업으로 49대만 제작된 포르쉐 356은 이후 17년간 7만 8,000대가 생산됐으며 포르쉐 재기의 밑거름이 됐다. 1950년 심장마비로 쓰러진 후 1951년 1월 30일 75세를 일기로 슈투트가르트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하였다. 사후인 1996년 그는 국제 모터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고 1999년에는 금세기 자동차 엔지니어 상을 받았다.[2][3]

주요 활동

로너 포르쉐 믹스테-바겐

로너-포르쉐 믹스테-바겐

벨라 에거에서 5년을 근무한 포르쉐는 1898년 다른 국가의 황실이나 왕실의 VIP들에게 마차를 맞춤 제작하는 회사인 야콥-로너(Jakob-Lohner)의 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동차 시대의 도래를 예감한 이 회사는 마차 대신 자동차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첫선을 보인 차가 로너-포르쉐 믹스테-바겐(Lohner-Porsche Mixte-Wagen)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문턱에 있었던 이 시절 등장한 최초의 하이브리드 자동차 로너-포르쉐 믹스테-바겐은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아직 오스트리아인이었던 시절, 그가 일했던 로너 자동차 공장에서 만들었다. 포르쉐는 이미 1898년, 'P1'이라는 이명으로 알려진 C.2 페이톤을 설계하면서 상당한 수준의 전기차 설계 능력을 증명한 바 있었다. 그리고 P1 전기자동차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포르쉐는 여기에 가솔린 엔진을 결합하여 모터에서 사용할 전기를 충전한다는 구상을 실행해 옮겼다. 이렇게 만들어진 차가 로너-포르쉐이다. 로너-포르쉐는 엄청난 무게의 전기모터 2개를 장착했다. 각자 앞쪽과 뒤쪽 바퀴에 동력을 전달하는 형태로 휘발유 엔진과 전기모터를 조합한 최초의 하이브리드 자동차라는 명성을 얻었고,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어 많은 관심을 받았다. 물론 오늘날의 기준에서는 일반적인 병렬 스트롱 타입의 하이브리드 자동차라기보다는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에 가깝다. 내연기관은 축전지에 저장할 전력만 생산하고, 구동은 전기모터로만 하는 직렬식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다르게 이르는 말이다. 로너-포르쉐는 100년이 지난 오늘날의 시점에서 놀라운 점들이 많다. 직렬식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적용은 둘째치고, 각각의 바퀴에 모두 전기모터가 내장된 인-휠 타입의 전기모터를 사용하여 사륜구동을 구현하고 있었다. 각각의 모터는 약 7~14마력의 최고출력을 낼 수 있었다. 따라서 네 바퀴로 구동하고 제동 시에도 모터 저항을 이용해 네 바퀴가 모두 제동할 수 있는 사륜 제동 시스템까지 구현한, 당시로써는 혁신적인 설계가 돋보였다.

폭스바겐 비틀

폭스바겐 비틀(1세대)

당시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중산층이 붕괴한 상태였고 미국인의 30% 이상이 자가용 승용차를 보유한 것과 대조적인 2%에 불과했다. 이에 히틀러는 독일 중산층 회복을 위한 KdF(Kraft durch Freude, 행복을 통해 얻는 힘) 프로그램을 추진하였다. KdF 프로그램은 2~3명의 자녀를 둔 독일인 가정을 위한 복지의 일환으로 국민차를 타고 주말에 휴양지의 리조트를 방문하고 유람선을 타고 여가를 즐기며 모든 가정에는 국민 라디오를 보급해 방송을 청취할 수 있는 이상적인 중산층의 삶을 만드는 것이 골자였다. 히틀러는 국민차의 조건을 몇 가지 제시했는데 5인 가족이 타고 100km/h 이상으로 달릴 수 있을 만큼 넓은 실내공간과 강력한 엔진을 탑재해야 하고, 연비는 14.3km/L 이상이어야 하며, 모든 부품은 쉽고 저렴하게 교체할 수 있도록 설계돼야 하며 차고가 거의 없는 독일의 주거 환경상 냉각수 동파를 막기 위해 공랭식 엔진을 탑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 차량 가격은 1,000마르크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무엇 하나 달성하기 쉬운 것이 없는 조건들이었다. 하지만 포르쉐 박사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작고 실용적인 대중차를 연구 중이었다. 그는 췬다프 사를 위해 개발한 타입 12, NSU 타입 32등의 프로토타입을 거치며 국민차 프로젝트를 구체화했다. 가격을 맞히기 위해 작은 차체를 유지하면서도 넓은 실내공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타트라의 설계를 참고해 차체 뒤편에 엔진을 탑재했다. 공랭식 엔진은 특이하게도 수평대향 4기통 레이아웃을 채택했는데 덕분에 엔진 높이가 낮아져 스윙 액슬 방식의 서스펜션을 채택할 수 있었다. 1938년 마침내 타입 1의 시제품이 완성됐고 히틀러는 이 차에 KdF-바겐이라는 이름을 붙여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생애 처음으로 자가용 차를 살 기대에 부푼 독일인들은 앞다퉈 자동차 적금에 가입했고 타입 1은 독일 최초의 국민차로 등극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국민들이 모은 자동차 적금은 고스란히 군용차 제작에 쓰였다. 사실 히틀러가 지시했던 국민차 개발은 전쟁 시 신뢰성 높고 우수한 성능을 갖춘 군용차를 대량생산하기 위한 것이다. 타입 1의 설계를 바탕으로 군용으로 전용된 퀴벨 바겐과 쉬빔바겐이 생산됐고 이들은 나치 독일군의 주력 전술 차량으로 사용되었다. 타입 1이 승용차로 생산되기 시작한 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의 일이다. 1945년 영국군이 2만 대의 타입 1을 주문한 것을 계기로 볼프스부르크 공장의 생산이 재개됐고 이후 독일 내수와 유럽에서 주문이 늘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타입 1은 이미 10년 가까이 된 설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시트로엥 2CV, 영국의 모리스 마이너같은 대중차보다 뛰어난 가성비를 자랑했고 귀여운 디자인과 높은 신뢰성, 경제성에 힘입어 미국 시장에도 진출해 큰 인기를 끌었다. 공식적으로 타입 1이 단종된 것은 출시로부터 무려 65년이 지난 2003년이며 긴 세월 동안 무려 2,100만 대 넘게 생산되면서 타입 1은 아직도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이 생산된 단일 모델로 기록된다. 이후 비틀은 그 독특한 디자인을 계승한 뉴비틀, 그리고 더 비틀 등의 후속 모델로 이어졌다.[4]

전차 개발

1936년에 등장한 4호 전차는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만 해도 최강의 전차로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소련 T-34, 미국 M4 셔먼 등 연합군의 진보한 전차가 등장하면서 독일 전차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포르쉐에 4호 전차의 뒤를 이을 강력한 신형 전차 개발에 착수하도록 지시했다. VK 45.01(P)은 포르쉐가 개발한 티거 전차의 프로젝트명으로 시제품을 제조했다. 특이하다고 할 만한 점은 이 시제품이 포르쉐의 젊은 시절 명성을 안겨다 주었던 하이브리드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두 대의 포르쉐 V10 엔진을 작동시키면 엔진발전기를 돌리고, 그 전기로 모터를 돌려 구동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마치 전기모터로 달리는 RC 전차처럼 전차의 변속, 전후좌우진 전환을 손쉽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헨셸(Henschel)사의 VK 45.01(H)에 밀려 육군에 채택되지 못해 양산되지는 못했다. 점점 독일에 불리하게 돌아가던 전쟁 상황에서 완성된 차대를 놀려둘 수 없었다. 결국 이 차대에 고정식 전투실을 설치하고, 티거 전차의 포를 능가하는 화력의 71구경장 88m 대전차포를 탑재함으로써 구축전차 페르디난트가 완성되었다. 페르디난트는 90대가 생산되어, 1943년 7월에 벌어진 동부전선 최대의 결전, 쿠르스크 전투에 첫 실전 투입되었다. 독일군이 공세를 지속하던 전투 초기에 페르디난트는 무려 200mm 두께에 달하는 전면 장갑과 71구경장 88mm 대전차포의 강력한 화력을 십분 발휘하여, 원거리 전투에서는 거의 무적의 힘을 발휘했다. 그러나 전투 후기에는 소련군의 조밀한 방어시설에 걸린 독일군의 진격이 지체되면서, 전투가 근접전 위주로 벌어지자 약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차 페르디난트에는 자체 방어용 기관총이나 전주위 잠망경 등 적 보병과의 근접전을 상정한 어떤 장비도 실려 있지 않았다. 결국, 구축전차가 소련군 보병이 던진 화염병에 격파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전차 페르디난트는 중량이 너무 무거워, 기동성도 좋지 않았다. 최고속도가 포장도로 시속 30km, 야지에서 시속 10km였다. 1943년 11월까지 동부전선에서 살아남은 48대의 페르디난트는 전훈을 받아들여 약간의 개량을 거친 후, 엘리펀트(Elefant)로 개칭된 후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동부전선보다 산지가 많은 이탈리아는 엘리펀트가 싸우기 적합한 전쟁터는 아니었다. 결국 계속 소모되어 가다가 끝까지 살아남은 4대는 베를린 전투에서 종전을 맞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여기서 끝내지 않고 엘리펀트보다 더 크고 강한 전차를 만들어 냈다.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차 마우스(Maus)이다. 어떠한 적의 공격에도 격파당하지 않는 무적의 전차 개념이던 마우스는 1942년 7월 포르쉐의 제안을 히틀러가 받아들임으로써 개발이 시작되었다. 1943년 12월에는 모의 포탑을 얹은 V1호차가, 이듬해 3월에는 실포탑을 얹은 V2호차가 완성되었다. 당시 기준으로 마우스의 공격력과 방어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장갑 두께는 제일 두꺼운 곳이 460mm였고, 어지간한 부위도 190~200mm를 웃돌았다. 전비중량은 무려 188t, 주무장은 55구경장 128mm 대전차포 1문, 36.5구경장 75mm 대전차포 1문이었다. 그러나 주행성능은 최고속도가 포장도로에서조차 시속 13km, 연비가 리터당 38m에 불과한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히틀러는 마우스를 150대 발주하였지만, V1호차가 완성되기도 전인 1943년 10월에 최소화했다. 결국, 마우스는 두 시제차만 완성된 채로 종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독일군은 마우스 V2호차의 차체에 폭약을 설치해 자폭시켰지만, 포탑은 비교적 멀쩡한 상태로 남았다. 소련군은 이 포탑을 회수해 마우스 V1 차체에 결합해 본국으로 가져가 각종 실험에 사용했다. 현재 마우스는 러시아 쿠빙카 전차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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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K 45.01(P) 마우스 엘리펀트

포르쉐 가문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포르쉐를 창업했을 뿐 아니라 폭스바겐의 창업주이기도 하다. 그는 두 자녀를 두고 있었는데, 딸인 루이스 포르쉐는 유명 법률가인 안톤 피에히와 결혼해 피에히 가문을 일으키고 아들인 페리 포르쉐포르쉐 가문을 이뤘다. 1951년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세상을 떠난 후 아들인 페리 포르쉐가 포르쉐 회사의 실질적인 경영주로 활동하였다. 그는 63세가 되던 1972년에 주식을 공개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친손자이자 페리 포르쉐의 장남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포르쉐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포르쉐 디자인을 세워 독립하였다. 그는 포르쉐에 디자인 문화를 가져온 사람으로, 오늘날 스포츠카들의 형태를 만들어낸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동생인 볼프강 포르쉐는 처음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으나 2007년 전문경영인이었던 벤델린 비데킹의 후임으로 포르쉐의 회장을 맡게 되었다. 딸인 루이제 피에히와 아들인 페리 포르쉐의 자녀들은 포르쉐 경영권을 지키기 위한 협력을 하면서도 주도권을 위한 갈등과 경쟁을 끊임없이 이어왔다. 2005년에는 벤델린 비데킹 회장이 이끌던 포르쉐가 폭스바겐 그룹을 인수하겠다고 지분 인수에 나서며 포르쉐 가문과 피에히 가문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당시 폭스바겐그룹은 피에히 가문의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회장으로 있었고, 비데킹 포르쉐 회장의 뒤에는 포르쉐 집안의 막내 볼프강 포르쉐 대주주가 있었다. 양가의 다툼은 결국 포르쉐의 승리로 귀결되는 듯했지만, 2008년 금융위기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자 2009년 폭스바겐이 포르쉐를 인수하며, 7년간의 오랜 다툼은 끝을 맺게 되었다. 두 집안은 폭스바겐 그룹 경영권을 함께 지키기로 하고 지주회사인 포르쉐SE를 통해 의결권을 갖게 되었다. 양가가 함께 보유한 주식은 50% 이상으로서 폭스바겐그룹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6]

각주

  1. Ferdinand Porsche〉, 《wikipedia》
  2. 페르디난트 포르셰〉, 《나무위키》
  3. 안광호, 〈(세기의 車 디자이너)8. 포르쉐 왕가의 전설, 페르디난트 포르쉐〉, 《경향비즈》, 2013-04-16
  4. 자동차, 역사의 순간 2. 포르쉐 박사, 딱정벌레 차를 만들다〉, 《엠파크》, 2020-02-03
  5. 안광호 기자, 〈8. 포르쉐 왕가의 전설, 페르디난트 포르쉐〉, 《경향신문》, 2013-04-16
  6. 김한용 기자, 〈(자동차백과) 폭스바겐이 포르쉐를 인수했다고? 천만에…〉, 《탑라이더》, 2012-07-11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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