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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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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

허목(許穆)은 조선 숙종 때의 문신ㆍ학자(1595~1682). 자는 문보(文甫)ㆍ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이다.

개요

  • 허목은 조선 중기 학자 겸 문신이다. 사상적으로 이황·정구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에게 연결시킴으로써 기호 남인의 선구이며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다. 전서(篆書)에 독보적 경지를 이루었다. 문집 《기언(記言)》, 역사서 《동사(東事)》등을 편집하였다. 본관 양천. 자 문보(文甫)·화보(和甫). 호 미수(眉叟). 시호 문정(文正). 현감 허 교(許喬)의 아들이며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사위이다. 경기도 연천의 향리이고 서울에서 성장하였지만 영남 남인의 거두 정구(鄭逑)에게 학문을 배웠다. 사상적으로 이황(李滉)·정구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李瀷)에게 연결시킴으로써 기호 남인의 선구이며 남인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다. 사서(四書)나 주희(朱熹)의 저술보다는 시·서·역·춘추·예의 오경(五經) 속에 담겨 있는 원시 유학의 세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중국 진한(秦漢) 이전의 문물에 대한 탐구는 문자에도 적용되어 특히 전서(篆書)에 독보적 경지를 이루었다. 그러한 사상은 단순한 복고주의가 아니고 당시의 모순들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활로의 개척을 의미하였다. 그의 예설은 정치적으로 왕권강화와 벌열 세력 억제를 통하여 왕조 질서를 확립하고 일반 사대부의 기회 균등을 찾으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서인들이 왕실에 대해서 유교적 예를 보편적으로 적용하여 상대적으로 집권 사대부의 권위를 높이려는 움직임에 대립되었다. 또한 막강한 권위를 지닌 북벌론에 대해서도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허구임을 비판하였다. 한편 당시의 국정에 많은 의견을 개진하였으나 호포제(戶布制)를 반대하고 중세 신분제의 수호에 나타나듯 보수적인 입장에 선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저서에 편집한 문집 《기언(記言)》, 역사서인 《동사(東事)》를 비롯하여 예서(禮書)인 《경례유찬(經禮類纂)》 《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정체전중설(正體傳重說)》, 삼척 읍지인 《척주지(陟州誌)》 등이 있다.[1]
  • 허목은 조선 시대 후기의 문신 및 유학자, 역사가이자 교육자 겸 정치인이며, 화가, 작가, 서예가, 사상가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으로, 자(字)는 문보(文甫)·문부(文父)·화보(和甫), 호(號)는 미수(眉叟), 태령노인(台領老人),대령노인(臺領老人), 석호장인(石戶丈人)이다. 별호는 미로(眉老), 희화(熙和), 공암지세(孔巖之世), 승명(承明)이고 별호로는 동교노인(東膠老人), 구주노인(九疇老人), 동서노인(東序老人), 이서포옹(二書圃翁),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청수한 모습에 홀쪽한 몸, 우묵한 이마에 긴 눈썹 등 염담하면서도 광대하다, 여윈 얼굴 긴 눈썹에다 늘씬하고 출중하여 보기에 신선 같았고, 대하면 강직하고 시원스러운 운치가 있었다 하며 옛날 사람의 풍모와 흰 털이 섞인 눈썹으로 학과 같은 자태가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쓴 초상화 자찬(自讚)에 '몸이 마르고 키가 크며 이마가 움푹하고 수염과 눈썹이 길다. 손바닥에 글 문(文)자 무늬가, 발바닥에는 우물 정(井)자 무늬가 있고, 성격은 담담 화평하다'고 스스로의 외모를 평하였다.[2]
  • 허목은 조선 후기에, 성균관제조,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 · 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 찬성 허자(許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별제 허강(許橿)이고, 아버지는 현감 허교(許喬)이며, 어머니는 정랑 임제(林悌)의 딸이다. 부인은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이다. 1615년(광해군 7) 정언눌(鄭彦訥)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 거창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서 문위(文緯)를 사사하였다. 또한 그의 소개로 정구(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24년(인조 2) 광주(廣州)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전념해 그의 독특한 전서(篆書)를 완성하였다. 1626년 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啓運宮具氏)의 복상(服喪)문제와 관련해 유신(儒臣) 박지계(朴知誡)가 원종의 추숭론(追崇論)을 제창하자, 동학의 재임(齋任)으로서 임금의 뜻에 영합해 예를 혼란시킨다고 유벌(儒罰)을 가하였다. 이에 인조는 그에게 정거(停擧)를 명하였다. 뒤에 벌이 풀렸는데도 과거를 보지 않고 자봉산에 은거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사후 1688년 관작이 회복되고, 숙종은 예장(禮葬)의 명령을 내려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했으며, 자손을 등용하도록 하고 문집을 간행하게 하였다. 그림 · 글씨 · 문장에 모두 능했으며, 글씨는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작품으로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시흥의 영상이원익비(領相李元翼碑), 파주의 이성중표문(李誠中表文)이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가 전한다. 저서로는 『동사(東事)』 · 『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 『경설(經說)』 · 『경례유찬(經禮類纂)』 · 『미수기언(眉叟記言)』이 있다. 1691년 그의 신위(神位)를 봉안하는 사액서원으로 미강서원(嵋江書院)이 마전군(麻田郡)에 세워졌고, 나주의 미천서원(眉川書院), 창원의 회원서원(檜原書院)에도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3]

허목의 생애

  • 1626년(인조 4) 유생으로서 동학(東學)의 재임(齋任)을 맡고 있을 때, 생부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왕으로 추숭해 나가려는 인조의 뜻을 지지한 박지계(朴知誡)에게 그 이름을 유생 명부에서 지우는 벌을 가했다가 과거 응시를 금지당하는 처벌을 받았다. 그 일을 계기로 과거와 벼슬에 뜻을 끊고 광주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여러 곳을 이주한 끝에 1646년 연천에 돌아왔다. 1650년(효종 1) 이후 정릉참봉·내시교관·조지서별좌·공조좌랑·용궁현감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거나 곧 사직하였다. 1657년 공조정랑·사복시주부를 거쳐 1659년에 장령에 임명되자 상소를 올려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의 정책에 반대하는 등 중앙 정부에서의 정치활동을 시작하였다. 1659년에 현종이 즉위한 후 경연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다시 장령이 되었다. 이때 효종에 대한 인조 계비 조대비(趙大妃)의 복상 기간을 서인 송시열 등이 주도하여 1년으로 한 것은 잘못이므로 3년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송(禮訟)논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삼척부사로 축출되었다.
  • 1674년 효종비가 죽었을 때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趙大妃)의 복제를 송시열 등이 주장한 9개월복 대신 기년복으로 늘려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승리하고 남인이 집권함에 따라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75년(숙종 1)에 산림직인 성균관제주(成均館祭酒)를 비롯하여 이조참판·우참찬·이조판서 등을 거치고 우의정에 임명됨으로써 과거를 거치지 않고 진출한 산림(山林)중에서 정승까지 승진한 흔하지 않은 인물이 되었다. 이때 왕통을 문란하게 했다는 송시열의 죄를 엄하게 다스릴 것을 주장하여, 온건론자인 허적(許積)이 이끄는 탁남(濁南)에 대비되는 청남(淸南)의 영수가 되었다. 1676년에 사직하고, 특명으로 기로소에 들어간 후로는 허적의 전횡을 비판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을 뿐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할 때 관직을 삭탈당하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죽은 후 1688년에 관직이 회복되고 경기도 마전에 있는 미강서원(湄江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허목 전서 함취당

  • 허목 전서 함취당(許穆 篆書 含翠堂)은 조선 시대 유학자 허목이 쓴 전서체 붓글씨이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당대 명필이었던, 허목(許穆)이 전서체로 쓴 편액이다. 종이 한 장에 한 글자씩 써서 3매를 이어 붙인 것이다. 편액의 아래에는 18세기 문신 홍수보가 1791년(정조 15)에 지은 발문이 딸려 있어 편액 글씨의 내력을 알 수 있다.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당대 최고의 전서명필이었던 허목의 글씨라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아 2010년 10월 25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허목 초상

  • 허목 초상(許穆 肖像)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인 허목의 초상화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겸 학자로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바 있는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의 이모본(移模本; 원본을 모사한 것) 초상화이다. 1794년(정조 18)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였던 어진화사(御眞畵師; 임금의 초상을 그리는 화가) 이명기(李命基)가 그렸다. 정조가 허목의 됨됨이에 감동하여 영의정 채제공에게 초상화 제작을 논의하라 명하였고, 그 명에 따라 은거당(恩居堂; 경기도 연천에 있었던 허목의 집)에 있던 82세 허목의 초상화를 구하여 이명기로 하여금 이모본을 제작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제작과정은 화폭 상단에 있는 발문에 기록되어 있다. 비단 바탕에 그린 채색화로, 그림의 크기는 가로 56.8cm, 세로 72.1cm, 발문 부분의 크기는 가로 65.8cm, 세로 28.6cm이다. 그림 오른쪽에는 채제공이 직접 쓴 표제가 붙어 있다.
  • 허목 초상은 배 부분까지 내려오는 상반신 초상화이며, 좌안7분면(左顔七分面; 왼쪽 얼굴이 약 70% 정도 드러남)으로 그려졌다. 그림 속 허목은 오사모(烏紗帽; 검은 사모)를 쓰고 엷은 분홍색 시복(時服; 대궐에 들어가거나 공무를 볼 때 관원들이 입는 옷)에 서대(犀帶; 일품의 벼슬아치가 허리에 두르던 띠)를 착용하고 있다. 체형과 얼굴은 말랐으며, 수북하고 하얀 눈썹과 가슴팍까지 내려오는 하얀 수염을 지녔다. 눈가와 뺨에는 깊은 주름이 묘사되었다. 허목이 사망한지 100년이 지난 시점에 그린 이모본으로 비록 생전의 모습을 직접 보고 그린 것은 아니지만 17세기 사대부 초상화의 형식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또, 여든이 넘은 노학자 허목의 풍모를 잘 담아낸 어진화사 이명기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미수허목공묘역

  • 미수허목공묘역(眉叟許穆公墓域)은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학자 겸 문신 허목(許穆)의 묘이다. 2002년 9월 16일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허목(許穆, 1595 ~ 1682)은 조선 중기 학자 겸 문신이다. 사상적으로 이황(李滉)·정구(鄭逑)의 학통을 이어받아 이익(李瀷)에게 연결시킴으로써 기호 남인의 선구이고 실학파의 기반이 되었다. 전서(篆書)에 독보적 경지를 이루었다. 허목의 묘는 민통선 내에 위치하며 허자(許磁)의 묘와 100m 거리에 있다. 석물로는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문인석(文人石) 2기, 망주석(望柱石) 2기, 장명등(長明燈), 제관들이 손을 씻는 제수석 등이 있는데 모든 석물에 탄흔이 있다. 망주석은 왼편과 오른편이 모두 높이 200cm로 같고 장명등은 높이 160cm의 기둥에 직사각형의 화창석(火窓石) 및 큰 사모지붕을 갖추고 있다. 묘갈(墓碣)은 월두형(月頭形)의 비신인데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모양이다. 앞부분에 탄흔 40여 개가 있고 오른쪽 측면의 가운데에도 큰 탄흔이 있다. 묘갈의 비문은 뒷부분의 "許眉叟自名(허미수자명)"으로 보아 생전에 친필로 자명자찬(自名自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기언

  • 기언(記言)은 조선 중기의 학자 허목(許穆:1595∼1682)의 문집이다. 목판본. 93권 25책. 저자가 직접 편집하였으며, 간행은 1689년(숙종 15) 왕명으로 이루어졌다. 일반적으로 저자의 호를 따서 ‘미수기언(眉叟記言)’이라고 부른다. 원집 ·속집 ·습유(拾遺) ·자서(自序) ·자서속편 ·별집으로 구성되었는데, 크게 나누어 1674년(현종 15) 이전에 쓰여진 〈원집〉과 그 이후에 지은 〈속집〉이 합계 67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따로 〈기언별집〉 26권이 있다. '기언'이라는 특이한 제목의 뜻은, 말의 중요함과 위험함을 두렵게 여겨, 말하면 반드시 써서 지키기에 힘쓴 한편, 날마다 반성한 데서 나왔다. 체제도 일반 시문집과 달리 매우 특이하여 첫 머리의 큰 표제가 학(學) ·예(禮) ·유림(儒林) 등으로 되어 있는 바와 같이 형식보다 내용을 기준으로 모으고 그것을 바로 드러내는 표제를 붙였다. 다만, 편지 ·묘비문 등이 형식에 따라 함께 묶여져 있는 부분이 있고, 특히 후대에 편집된 별집은 시 ·소차 ·수의(收議) 등을 글의 형식별로 담고 있다. 저자가 직접 쓴 장문의 〈자서〉 두 편도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동사

  • 동사(東事)는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허목(許穆)이 쓴 기전체(紀傳體) 형식의 역사서이다. 1667년(현종 8)에 편찬된 것으로, 허목의 문집인 《기언(記言)》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조선의 풍토적 조건과 거기에 맞춰 형성된 농업조건, 인심 ·풍속을 헤아려 그에 순응하는 정치를 행하는 데 목적을 두고 쓰여졌으며, 서(序)와 세가(世家) ·열전(列傳) ·지승(地乘) ·외기(外記)로 구성된 기전체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열전 항목에 각국의 역사를 쓰고 있다는 점과 지(志)에 해당하는 것이 지승뿐이라는 점은 형식에서 탈피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사를 하나의 독립된 천하질서로 상정한 것으로, 당시의 주류적인 흐름인 존화적 문화의식을 탈피한 점에 큰 의의가 있다. 지승에는 한국의 강역과, 물산 ·풍속을 중시한 풍토사관(風土史觀)이 나타나 있다. 이 책에 나타난 허목의 역사의식은 삼한 70여 국을 단군의 후예로 설정한 고려 말 이승휴(李承休)와 광해군대에 반주자학적인 역사의식을 가졌던 대북(大北) 사류들의 의식과도 연결되며, 실학자 이익(李瀷)을 비롯하여 한말 ·일제강점기 때의 대종교(大倧敎) 계통의 민족주의 역사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동영상

각주

  1. 허목(許穆,1595~1682)〉, 《두산백과》
  2. 허목〉, 《위키백과》
  3. 허목 (許穆)〉,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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