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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트 호르히'''(August Horch)독일의 자동차 제조 업체인 '''[[아우디]]'''의 창시자이다.<ref>"[https://en.wikipedia.org/wiki/August_Horch August Horch]", "wikipedia"</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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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트 호르히'''<!--오거스트 호르히-->(August Horch)독일의 자동차 제조 업체인 '''[[아우디]]'''(Audi)의 창시자이다.<ref>"[https://en.wikipedia.org/wiki/August_Horch August Horch]", "wikipedia"</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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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요==
아우구스트 호르히는 1868년 10월 12일 독일 뷔닝겐(Winningen)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철과 기계를 좋아한 호르히는 10대부터 여행을 다니며 이런저런 공장의 견습생으로 일했다. 미트바이다 공대(Hochschule Mittweida)에서 엔지니어링을 전공한 1896년 '''[[카를 벤츠]]'''(Karl Benz)의 회사에 입사하고 4개월 만에 엔지니어로서 두각을 나타내어 벤츠는 호르히에게 자동차 제작 경영 일부를 위임하고 1894년부터 생산한 4륜 자동차인 벨로 제작을 담당하게 하였다. 호르히는 계속해서 더 뛰어난 모델을 만들길 원했으나 벤츠의 반대에 부딪혀 독립하여 1899년 살리 헤어츠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인 호르히 앤 시(A.Horch & Cie)를 쾰른 근처에 설립하였고 1901년에 자신의 첫 자동차 모델을 출시하였다. 호르히 앤 시에는 1902년에 작센(Sachsen) 지방의 라이헨바흐(Reichenbach)로 이전하고 1904년 주식회사로 개편하였다. 아우구스트 호르히는 카레이서로도 활동하였는데 자신이 만든 자동차를 타고 경주에 출전해 여러 번 우승하기도 하였지만 정작 회사의 상황은 어려워졌다. 1909년 아우구스트 호르히는 투자자들과의 갈등으로 이사회의 결의에 의해 자신의 회사에서 축출되었다. 엔지니어 출신이었던 아우구스트 호르히가 지나치게 자동차 경주에만 몰두하여 사업성에 문제가 있다는 이사회의 판단이었다. 기존 회사를 떠난 아우구스트 호르히는 1909년 같은 도시에 호르히 오토모빌-베르케(Horch Automobil-Werke GmbH)라는 이름으로 두 번째 회사를 설립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이미 이전 회사에 사용하였기 때문에 똑같은 이름을 두 번째 회사에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인 "Horch"(듣다)의 라틴어 어원인 "Audi"를 회사 이름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회사명을 아우디 베르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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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트 호르히는 1868년 10월 12일 [[독일]] 뷔닝겐(Winningen)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철]]과 [[기계]]를 좋아한 호르히는 10대부터 여행을 다니며 이런저런 공장의 견습생으로 일했다. 하지만 가업을 잇기보다는 학업에 뜻이 있기에, 1888년에 호흐슐레 미트웨이다(Hochschule Mittweida)라는 기술 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게 된다. 호르히는 공부를 시작한 지 단 3년 만에 엔지니어 졸업증을 따내게 되는데, 당시에는 굉장한 신분 도약과도 같은 이치였다. 그 조선업에서 직장을 얻어 근무하여 엔지니어링 기술을 배우고 1896년도에 '''[[카를 벤츠]]'''(Karl Benz)의 회사에 입사하고 4개월 만에 엔지니어로서 두각을 나타내어 [[벤츠]](Benz)는 호르히에게 자동차 제작 경영 일부를 위임하고 1894년부터 생산한 4륜 자동차인 [[벨로]] 제작을 담당하게 하였다. 호르히는 계속해서 더 뛰어난 모델을 만들길 원했으나 벤츠의 반대에 부딪혀 독립하여 1899년 살리 헤어츠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인 [[호르히 앤 시]](A.Horch & Cie)를 쾰른 근처에 설립하였고 1901년에 자신의 첫 자동차 모델을 출시하였다. 호르히 앤 시에는 1902년에 [[작센]](Sachsen) 지방의 [[라이헨바흐(Reichenbach)로 이전하고 1904년 [[주식회사]]로 개편하였다. 아우구스트 호르히는 카레이서로도 활동하였는데 자신이 만든 자동차를 타고 경주에 출전해 여러 번 우승하기도 하였지만 정작 회사의 상황은 어려워졌다. 1909년 아우구스트 호르히는 투자자들과의 갈등으로 이사회의 결의에 의해 자신의 회사에서 축출되었다. 엔지니어 출신이었던 아우구스트 호르히가 지나치게 자동차 경주에만 몰두하여 사업성에 문제가 있다는 이사회의 판단이었다. 기존 회사를 떠난 아우구스트 호르히는 1909년 같은 도시에 [[호르히 오토모빌-베르케]](Horch Automobil-Werke GmbH)라는 이름으로 두 번째 회사를 설립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이미 이전 회사에 사용하였기 때문에 똑같은 이름을 두 번째 회사에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인 "Horch"(듣다)의 라틴어 어원인 "Audi"를 회사 이름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회사명을 아우디 베르케라고 하였다.
  
아우구스트 호르히는 또한 세계 최고의 자동차 경주로 손꼽히던 오스트리아 국제 알파인 레이스에 1911년 처음으로 참가하여 우승하였으며 1920년 이 회사를 떠나 독일 교통부 고위 공무원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우디의 임원으로 근무하였으며 1922년 2월 독일 기술 학회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32년 6월 29일 독일 작소니(Saxony)지방에서 아우디(Audi), 데카베(DKW), 호르히(Horch), 반더러(Wanderer) 4개 회사가 합병되어 설립된 아우토 유니언(Auto Union AG)이란 자동차 연합 회사의 이사가 되었다. 아우토 유니언은 4개의 회사를 뜻하는 4개의 겹친 원을 사용하였지만 이 배지(badge)는 경주용 자동차에만 사용하였고 각자의 이름과 엠블런(emblem)을 계속해서 사용했다. 아우토 유니언은 합병한 결과로 모터사이클부터 고급 살롱까지 많은 제품군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술적 발전은 계속되어 몇몇의 아우디 자동차 모델은 호르히나 완더러에서 만든 엔진을 탑재하기도 했다. 아우토 유니언은 아우디의 본격적인 시발점이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호르히는 나치당 독재 시절 나치에 대한 존중을 표현한 것이 화가 될 거라는 생각에 이리저리 도시를 옮겨 다니며 몸을 피하고 뮌히베르크에 정착하였다. 전쟁으로 파괴된 아우토 유니언을 재건하기 위해 잉골수타트에서 새로 시작하고 그나마 온전히 남아있던 곡물창고에서 소형 엔진과 오토바이를 생산하며 재건을 시작했고 명예이사로 남은 평생을 보내다 1951년 2월 3일 타계하였다.<ref>강경주, 〈[https://www.wowtv.co.kr/NewsCenter/News/Read?articleId=201911150765g 너의 이름은 아우디 창업주가 회사서 쫒겨난 이유]〉, 《한국경제TV》, 2019-11-16</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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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트 호르히는 또한 세계 최고의 자동차 경주로 손꼽히던 [[오스트리아]] 국제 알파인 레이스에 1911년 처음으로 참가하여 우승하였으며 1920년 이 회사를 떠나 독일 교통부 고위 공무원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우디의 임원으로 근무하였으며 1922년 2월 독일 기술 학회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32년 6월 29일 독일 작소니(Saxony)지방에서 아우디(Audi), 데카베(DKW), 호르히(Horch), 반더러(Wanderer) 4개 회사가 합병되어 설립된 [[아우토 유니언]](Auto Union AG)이란 자동차 연합 회사의 이사가 되었다. 아우토 유니언은 4개의 회사를 뜻하는 4개의 겹친 원을 사용하였지만 이 배지(badge)는 경주용 자동차에만 사용하였고 각자의 이름과 엠블런(emblem)을 계속해서 사용했다. 아우토 유니언은 합병한 결과로 모터사이클부터 고급 살롱까지 많은 제품군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술적 발전은 계속되어 몇몇의 아우디 자동차 모델은 호르히나 완더러에서 만든 엔진을 탑재하기도 했다. 아우토 유니언은 아우디의 본격적인 시발점이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호르히는 나치당 독재 시절 나치에 대한 존중을 표현한 것이 화가 될 거라는 생각에 이리저리 도시를 옮겨 다니며 몸을 피하고 [[뮌히베르크]]에 정착하였다. 전쟁으로 파괴된 아우토 유니언을 재건하기 위해 잉골수타트에서 새로 시작하고 그나마 온전히 남아있던 곡물창고에서 소형 엔진과 오토바이를 생산하며 재건을 시작했고 명예이사로 남은 평생을 보내다 1951년 2월 3일 타계하였다.<ref>강경주, 〈[https://www.wowtv.co.kr/NewsCenter/News/Read?articleId=201911150765g 너의 이름은 아우디 창업주가 회사서 쫒겨난 이유]〉, 《한국경제TV》, 2019-11-16</ref>
<ref>메이커 이슈, 〈[https://dinoman.tistory.com/28 아우디를 만들어낸 '호르히' 아우디의 역사]〉, 《티스토리》, 2017-04-15</ref>
 
<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118507&cid=43168&categoryId=43168&anchorTarget=TABLE_OF_CONTENT2#TABLE_OF_CONTENT2 아우디]〉, 《네이버 지식백과》</ref>
 
  
 
==주요 활동==
 
==주요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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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타입 K 운전석.jpg|썸네일|300픽셀|'''타입 K 운전석''']]
 
[[파일:타입 K 운전석.jpg|썸네일|300픽셀|'''타입 K 운전석''']]
1899년 11월 아우구스트 호르히는 벤츠에서의 직장 생활 3년 만에 퇴사하고 사업 파트너인 살리 헤르츠와 함께 자신의 회사를 차리고 전 회사 사장님 칼 벤츠처럼 자신의 이름을 딴 호르히 앤 시(Horch & Cie)를 설립하였다. 쾰른에 차려진 회사는 자동차 수리를 주업으로 하는 회사이다. 1901년 호르히는 엔진과 차체를 개발한 첫 프로토 타입을 만들었으며 1902년 회사를 보그틀란드로 이사하고 1904년 주식회사로 변경과 함께 사명을 호르히 앤 시 모로바겐 베르크(Horch & Cie, Morotwagenwerke AG)로 변경하고 작센주의 츠비카우에 자리 잡았다. 호르히는 1904년 5마력 2기통 자동차를 출시하고 1908년 40마력 4기통 엔진 자동차를 선보이고 한 해에 100대 이상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회사가 되었다. 1909년 6월 호르히는 경영진과의 분쟁으로 회사를 떠났다.<ref>삼성화재교통박물관, 〈[https://blog.naver.com/stm_blog/222261940361 아우디의 창업자, 아우구스트 호르히(August Horch)1편]〉, 《네이버 블로그》, 2021-03-0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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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호르히_901.jpg|썸네일|300픽셀|'''호르히 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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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11월 아우구스트 호르히는 벤츠에서의 직장 생활 3년 만에 퇴사하고 사업 파트너인 살리 헤르츠와 함께 자신의 회사를 차리고 전 회사 사장님 칼 벤츠처럼 자신의 이름을 딴 호르히 앤 시(Horch & Cie)를 설립하였다. 쾰른에 차려진 회사는 자동차 수리를 주업으로 하는 회사이며 회사 설립 1년 후인 1900년에 첫 번째로 개발한 차량인 호르히-베르크를 출시하게 되지만, 너무 높은 가격 때문에 판매가 잘 되지 않았다. 곧 두 번째 자동차인 패톤을 출시하게 되는데 가격대를 판매 가능한 수준까지 낮추는 데에 성공하게 되고, 12월 23일에 자신이 만든 [[패톤]]에 아내를 태우고 쾰른 기내를 주행한다. 하지만 패톤 역시 판매량은 6개월에 6대만 팔리는 정도로 실적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판매가 부진하자 회사의 경영은 어려워졌고 도산 위기에 쳐하게 된다. 그때 독일에서 도움의 손길이 뻗쳐오는데, 호르히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여러 회사들이 지원하게 된다. 덕분에 1902년에 투자자들의 요구에 따라 작센(Sachsen) 지방의 라이헨바흐(Reichenbach)로 이전하게 되어, 1904년 주식회사로 변경과 함께 사명을 호르히 앤 시 모로바겐 베르크(Horch & Cie, Morotwagenwerke AG)로 변경하고 작센주의 츠비카우에 자리 잡았다. 호르히는 1904년 5마력 2기통 자동차를 출시하고 1908년 40마력 4기통 엔진 자동차를 선보이고 한 해에 100대 이상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회사가 되었다. 호르히가 자동차 경주에 몰두하며 사업을 진행하게 되면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이사회의 판단으로 호르히의 퇴출이 결정되어 1909년 6월 호르히는 회사를 떠났다.<ref>삼성화재교통박물관, 〈[https://blog.naver.com/stm_blog/222261940361 아우디의 창업자, 아우구스트 호르히(August Horch)1편]〉, 《네이버 블로그》, 2021-03-0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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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디 베르케===
 
===아우디 베르케===
아우구스트 호르히는 호르히 앤 시를 떠나 한 달 뒤인 1909년 7월 츠비카우에 자신의 두 번째 회사 호르히 오토모빌-베르케(Horch Automobil-Werke GmbH)를 설립하였다. 같은 도시에 같은 이름을 가진 두 개의 자동차 회사가 불편한 공존을 시작하는 순간이었으며 호르히 앤 시의 경영진들은 호르히의 이런 행보에 빠르게 대응하여 법원에 등록된 상표이므로 호르히가 회사의 이름을 호르히로 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소송하였고 법원은 호르히 앤 시의 손을 들어주었다. 호르히는 비록 자신의 이름을 가져오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새 회사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은 것인데 그것이 바로 아우디 베르케(Audiwerke GmbH)이다. 새 회사의 이름을 고민하던 호르히는 사업 파트너 중 한 명인 프란츠의 집에 방문하였으며 어른들이 이야기를 하던 중 불쑥 라틴어를 공부하던 프란츠의 10살 아들의 입에서 독일어 호르히는 듣다라는 뜻의 독일어 동사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말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 아우디였다. 1910년 4월 25일 호르히는 새 회사의 사명 아우디 베르케를 법원에 등록 신청하였다. 1911년 첫 자동차인 Type A10을 생산하고 모터스포츠를 통한 적극적인 마케팅에 나선 아우디는 1912년부터 1914년까지 드라이버로 직접 출전하여 오스트리아 알파인 랠리 대회에 참가해 3연승을 거뒀다. 1920년 52세인 호르히는 아무 분쟁 없이 사직하고 또다시 자신이 세운 회사를 떠난다. 그는 베를린으로 향해 독일 교통 관련 부서에서 자동차 공학과 생산업의 전문가로서 정부와 신생기업들에 자문을 제공하는 일을 하였다. 기술 개발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그는 여전히 아우디의 주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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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트 호르히는 호르히 앤 시를 떠나 한 달 뒤인 1909년 7월 츠비카우에 자신의 두 번째 회사 호르히 오토모빌-베르케(Horch Automobil-Werke GmbH)를 설립하였다. 같은 도시에 같은 이름을 가진 두 개의 자동차 회사가 불편한 공존을 시작하는 순간이었으며 호르히 앤 시의 경영진들은 호르히의 이런 행보에 빠르게 대응하여 법원에 등록된 상표이므로 호르히가 회사의 이름을 호르히로 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소송하였고 법원은 호르히 앤 시의 손을 들어주었다. 호르히는 비록 자신의 이름을 가져오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새 회사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은 것인데 그것이 바로 [[아우디 베르케]](Audiwerke GmbH)이다. 새 회사의 이름을 고민하던 호르히는 사업 파트너 중 한 명인 프란츠의 집에 방문하였으며 어른들이 이야기를 하던 중 불쑥 라틴어를 공부하던 프란츠의 10살 아들의 입에서 독일어 호르히는 듣다라는 뜻의 독일어 동사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말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 아우디였다. 1910년 4월 25일 호르히는 새 회사의 사명 아우디 베르케를 법원에 등록 신청하였다. 1911년 첫 자동차인 Type A10을 생산하고 모터스포츠를 통한 적극적인 마케팅에 나선 아우디는 1912년부터 1914년까지 드라이버로 직접 출전하여 오스트리아 알파인 랠리 대회에 참가해 3연승을 거뒀다. 1920년 52세인 호르히는 아무 분쟁 없이 사직하고 또다시 자신이 세운 회사를 떠난다. 그는 베를린으로 향해 독일 교통 관련 부서에서 자동차 공학과 생산업의 전문가로서 정부와 신생기업들에 자문을 제공하는 일을 하였다. 호르히는 주식회사 아우디의 경영에 관심이 없고 오직 기술 개발에만 힘을 써왔기 때문에, 정부의 제안을 흔쾌히 받게 된다. 그리고 여전히 아우디 베르케에서 임원으로 근무하게 되다가 1922년 2월에 독일기술학회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게 된다. 기술 개발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그는 여전히 아우디의 주주였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118507&cid=43168&categoryId=43168&anchorTarget=TABLE_OF_CONTENT2#TABLE_OF_CONTENT2 아우디]〉, 《네이버 지식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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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토 유니언===
 
===아우토 유니언===
1929년 미국 금융시장이 붕괴되며 시작된 대공황은 이미 어려웠던 독일 경제에 치명타가 되었다. 1932년 6월 29일 독일 작소니(Saxony)지방에서 아우디(Audi), 데카베(DKW), 호르히(Horch), 반더러(Wanderer) 4개 회사가 합병되어 설립된 아우토 유니언(Auto Union AG)이란 자동차 연합 회사이다. 작센 지방 자동차 회사들의 연합체 아우토 유니언은 출범과 동시에 독일 제2의 자동차 제작회사로 되었다. 하지만 회사의 연합은 각 회사들은 고유의 로고를 사용하며 각자의 모델을 생산하고 종종 새로 개발한 엔진을 공유하는 수준이었다. 호르히 앤 시와 아우디의 창업자이며 아우디의 주주였던 호르히는 아우토 유니언의 주요 임원으로 자리하였다. 대공황 이후 독일은 선전선동에 비상한 재주를 지닌 히틀러와 나치당에 의해 장악되었고 아우토 유니언 출범 이듬해인 1933년 총리가 히틀러인 나치 독일이 되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1940년 4월 타치 독일은 자국 내 모든 자동차 업체들의 민수용 자동차 생산을 금지시키고 총동원 태세에 돌입했고 아우토 유니언도 군용트럭 생산공장이 되었다. 전쟁에서 회사는 폭격을 맞아 파괴되었고 동독 영역에 포함되면서 나머지 시설들도 해체되거나 국유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공장이 파괴되었고 전후에도 대부분의 공장들이 동독 영토가 되면서 위기에 봉착하여 1949년에 바이에른 주 잉골슈타트로 본사와 생산 시설을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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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미국]] 금융시장이 붕괴되며 시작된 대공황은 이미 어려웠던 독일 경제에 치명타가 되었다. 1932년 6월 29일 독일 작소니(Saxony)지방에서 아우디(Audi), 데카베(DKW), 호르히(Horch), 반더러(Wanderer) 4개 회사가 합병되어 설립된 아우토 유니언(Auto Union AG)이란 자동차 연합 회사이다. 작센 지방 자동차 회사들의 연합체 아우토 유니언은 출범과 동시에 독일 제2의 자동차 제작회사로 되었다. 아우토 유니언이 4개의 회사와 합병되며 [[모터사이클]]로부터 고급 살롱까지 많은 제품군을 확보해가며 커지게 된다. 아우토 유니언은 4개의 회사를 뜻하는 동그란 원을 4개 겹친 모양의 로고를 사용했었지만, 회사의 연합은 각 회사들은 고유의 로고를 사용하며 각자의 모델을 생산하고 종종 새로 개발한 엔진을 공유하는 수준이었다. 호르히 앤 시와 아우디의 창업자이며 아우디의 주주였던 호르히는 아우토 유니언의 주요 임원으로 자리하였다. 대공황 이후 독일은 선전선동에 비상한 재주를 지닌 히틀러와 나치당에 의해 장악되었고 아우토 유니언 출범 이듬해인 1933년 총리가 히틀러인 나치 독일이 되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1940년 4월 타치 독일은 자국 내 모든 자동차 업체들의 민수용 자동차 생산을 금지시키고 총동원 태세에 돌입했고 아우토 유니언도 [[군용트럭]] 생산공장이 되었다. 전쟁에서 회사는 폭격을 맞아 파괴되었고 동독 영역에 포함되면서 나머지 시설들도 해체되거나 국유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공장이 파괴되었고 전후에도 대부분의 공장들이 동독 영토가 되면서 위기에 봉착하여 1949년에 바이에른 주 잉골슈타트로 본사와 생산 시설을 이전하였다.<ref>devmin, 〈[https://tiqui-taca.tistory.com/35 아우디의 역사]〉, 《티스토리》, 2017-02-16</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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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입 K===
 
===타입 K===
고집 있는 사업가이며 모터스포츠광인 호르히는 자동차 개발사에 족적을 남긴 뛰어난 엔지니어이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타입 K이다. 타입 K는 스티어링 핸들을 좌석 좌측에 변속 레버를 좌석 중앙에 배치해 당시 자동차들의 운전석과 조수석 구분의 모호함을 단번에 없애버렸다. 이 배치는 맞은편에 다가오는 차량에 대해 더 나은 시야를 제공하고 앞서 있는 차량을 오른쪽으로 돌아 추월하는데 보다 안전했으며 1920년대 업계 표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기념비적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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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 있는 사업가이며 모터스포츠광인 호르히는 자동차 개발사에 족적을 남긴 뛰어난 엔지니어이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타입 K이다. 타입 K는 [[스티어링 핸들]]을 좌석 좌측에 변속 [[레버]]를 좌석 중앙에 배치해 당시 자동차들의 [[운전석]]과 [[조수석]] 구분의 모호함을 단번에 없애버렸다. 이 배치는 맞은편에 다가오는 차량에 대해 더 나은 시야를 제공하고 앞서 있는 차량을 오른쪽으로 돌아 추월하는데 보다 안전했으며 1920년대 업계 표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기념비적 모델이다.<ref>메이커 이슈, 〈[https://dinoman.tistory.com/28 아우디를 만들어낸 '호르히' 아우디의 역사]〉, 《티스토리》, 2017-04-15</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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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히 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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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히 901은 1935년부터 1936년에 독립 서스펜션과 오토 유니온의 츠비카우(Zwickau) 호르히 공장에서 [[사륜구동]]을 갖춘, 육군 무기 사무소의 사양에 따라 개발된 독일 국방군(Wehrmacht)의 중간 전지형 표준 [[승용차]]이다. 1937년과 1943년 사이에 호르히는 두 개의 다른 8기통 V 엔진을 장착한 14,911대의 차량을 제공했었다. 처음에는 민간인 전용 승용차 유형인 호르히 830/930에서 3.5리터의 변위가 있는 80마력(59kW) 버전을 내놓았고, 이후 자동차는 90마력(66kW)의 3.8ℓ 엔진을 장착했다. 같은 기간 오토 유니온 그룹에 속한 지그마르 공장은 호르히 V8 엔진과 75마력(55kW)의 출력을 갖춘 오펠 블리츠 6기통인라인 엔진을 장착한 원더러스 901차량으로 약 16,000대의 차량을 생산했다. 1938년과 1943년 사이에 오펠 베르크 브란덴부르크는 오펠 6기통 엔진을 장착한 중형 표준 승용차 3,860대를 생산했다. 바깥쪽에는 양면 중앙에 여분의 [[바퀴]]가 장착되어 있었고, 작은 언덕과 흙벽에서 운전할 때 바퀴가 지지대 역할을 했다. 1940년에 바퀴가 분배되면서, 내부에 더 많은 공간을 제공하는 "타입 40"의 [[트렁크]]에 단 하나의 여분의 바퀴만 보관되었다. 이 차량의 생산은 1943년에 직접 후속 모델 없이 중단되었다.<ref>〈[https://de.wikipedia.org/wiki/Horch_901 Horch 901]〉, 《위키피디아》</ref>
  
 
{{각주}}
 
{{각주}}
29번째 줄: 35번째 줄:
 
* 아우디 글로벌 홈페이지 - https://www.audi.com/
 
* 아우디 글로벌 홈페이지 - https://www.audi.com/
 
* "[https://en.wikipedia.org/wiki/August_Horch August Horch]", "wikipedia"
 
* "[https://en.wikipedia.org/wiki/August_Horch August Horch]",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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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경주, 〈[https://www.wowtv.co.kr/NewsCenter/News/Read?articleId=201911150765g 너의 이름은 아우디 창업주가 회사서 쫒겨난 이유]〉, 《한국경제TV》, 2019-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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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화재교통박물관, 〈[https://blog.naver.com/stm_blog/222261940361 아우디의 창업자, 아우구스트 호르히(August Horch)1편]〉, 《네이버 블로그》, 2021-03-02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118507&cid=43168&categoryId=43168&anchorTarget=TABLE_OF_CONTENT2#TABLE_OF_CONTENT2 아우디]〉, 《네이버 지식백과》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118507&cid=43168&categoryId=43168&anchorTarget=TABLE_OF_CONTENT2#TABLE_OF_CONTENT2 아우디]〉, 《네이버 지식백과》
* 강경주, 〈[https://www.wowtv.co.kr/NewsCenter/News/Read?articleId=201911150765g 너의 이름은 아우디 창업주가 회사서 쫒겨난 이유]〉, 《한국경제TV》, 2019-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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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vmin, 〈[https://tiqui-taca.tistory.com/35 아우디의 역사]〉, 《티스토리》, 2017-02-16
 
* 메이커 이슈, 〈[https://dinoman.tistory.com/28 아우디를 만들어낸 '호르히' 아우디의 역사]〉, 《티스토리》, 2017-04-15
 
* 메이커 이슈, 〈[https://dinoman.tistory.com/28 아우디를 만들어낸 '호르히' 아우디의 역사]〉, 《티스토리》, 2017-04-15
* devmin, 〈[https://tiqui-taca.tistory.com/35 아우디의 역사]〉, 《티스토리》, 2017-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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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de.wikipedia.org/wiki/Horch_901 Horch 901]〉, 《위키피디아》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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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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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를 벤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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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월 3일 (월) 11:33 기준 최신판

아우구스트 호르히(August Horch)
아우디(Audi)

아우구스트 호르히(August Horch)는 독일의 자동차 제조 업체인 아우디(Audi)의 창시자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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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편집]

아우구스트 호르히는 1868년 10월 12일 독일 뷔닝겐(Winningen)에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계를 좋아한 호르히는 10대부터 여행을 다니며 이런저런 공장의 견습생으로 일했다. 하지만 가업을 잇기보다는 학업에 뜻이 있기에, 1888년에 호흐슐레 미트웨이다(Hochschule Mittweida)라는 기술 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게 된다. 호르히는 공부를 시작한 지 단 3년 만에 엔지니어 졸업증을 따내게 되는데, 당시에는 굉장한 신분 도약과도 같은 이치였다. 그 후 조선업에서 직장을 얻어 근무하여 엔지니어링 기술을 배우고 1896년도에 카를 벤츠(Karl Benz)의 회사에 입사하고 4개월 만에 엔지니어로서 두각을 나타내어 벤츠(Benz)는 호르히에게 자동차 제작 경영 일부를 위임하고 1894년부터 생산한 4륜 자동차인 벨로 제작을 담당하게 하였다. 호르히는 계속해서 더 뛰어난 모델을 만들길 원했으나 벤츠의 반대에 부딪혀 독립하여 1899년 살리 헤어츠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인 호르히 앤 시(A.Horch & Cie)를 쾰른 근처에 설립하였고 1901년에 자신의 첫 자동차 모델을 출시하였다. 호르히 앤 시에는 1902년에 작센(Sachsen) 지방의 [[라이헨바흐(Reichenbach)로 이전하고 1904년 주식회사로 개편하였다. 아우구스트 호르히는 카레이서로도 활동하였는데 자신이 만든 자동차를 타고 경주에 출전해 여러 번 우승하기도 하였지만 정작 회사의 상황은 어려워졌다. 1909년 아우구스트 호르히는 투자자들과의 갈등으로 이사회의 결의에 의해 자신의 회사에서 축출되었다. 엔지니어 출신이었던 아우구스트 호르히가 지나치게 자동차 경주에만 몰두하여 사업성에 문제가 있다는 이사회의 판단이었다. 기존 회사를 떠난 아우구스트 호르히는 1909년 같은 도시에 호르히 오토모빌-베르케(Horch Automobil-Werke GmbH)라는 이름으로 두 번째 회사를 설립하지만 자신의 이름을 이미 이전 회사에 사용하였기 때문에 똑같은 이름을 두 번째 회사에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인 "Horch"(듣다)의 라틴어 어원인 "Audi"를 회사 이름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회사명을 아우디 베르케라고 하였다.

아우구스트 호르히는 또한 세계 최고의 자동차 경주로 손꼽히던 오스트리아 국제 알파인 레이스에 1911년 처음으로 참가하여 우승하였으며 1920년 이 회사를 떠나 독일 교통부 고위 공무원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우디의 임원으로 근무하였으며 1922년 2월 독일 기술 학회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32년 6월 29일 독일 작소니(Saxony)지방에서 아우디(Audi), 데카베(DKW), 호르히(Horch), 반더러(Wanderer) 4개 회사가 합병되어 설립된 아우토 유니언(Auto Union AG)이란 자동차 연합 회사의 이사가 되었다. 아우토 유니언은 4개의 회사를 뜻하는 4개의 겹친 원을 사용하였지만 이 배지(badge)는 경주용 자동차에만 사용하였고 각자의 이름과 엠블런(emblem)을 계속해서 사용했다. 아우토 유니언은 합병한 결과로 모터사이클부터 고급 살롱까지 많은 제품군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술적 발전은 계속되어 몇몇의 아우디 자동차 모델은 호르히나 완더러에서 만든 엔진을 탑재하기도 했다. 아우토 유니언은 아우디의 본격적인 시발점이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호르히는 나치당 독재 시절 나치에 대한 존중을 표현한 것이 화가 될 거라는 생각에 이리저리 도시를 옮겨 다니며 몸을 피하고 뮌히베르크에 정착하였다. 전쟁으로 파괴된 아우토 유니언을 재건하기 위해 잉골수타트에서 새로 시작하고 그나마 온전히 남아있던 곡물창고에서 소형 엔진과 오토바이를 생산하며 재건을 시작했고 명예이사로 남은 평생을 보내다 1951년 2월 3일 타계하였다.[2]

주요 활동[편집]

호르히 앤 시[편집]

호르히 앤 시 엠블럼
아우디 베르케 엠블럼
타입 K 운전석
호르히 901

1899년 11월 아우구스트 호르히는 벤츠에서의 직장 생활 3년 만에 퇴사하고 사업 파트너인 살리 헤르츠와 함께 자신의 회사를 차리고 전 회사 사장님 칼 벤츠처럼 자신의 이름을 딴 호르히 앤 시(Horch & Cie)를 설립하였다. 쾰른에 차려진 회사는 자동차 수리를 주업으로 하는 회사이며 회사 설립 1년 후인 1900년에 첫 번째로 개발한 차량인 호르히-베르크를 출시하게 되지만, 너무 높은 가격 때문에 판매가 잘 되지 않았다. 곧 두 번째 자동차인 패톤을 출시하게 되는데 가격대를 판매 가능한 수준까지 낮추는 데에 성공하게 되고, 12월 23일에 자신이 만든 패톤에 아내를 태우고 쾰른 기내를 주행한다. 하지만 패톤 역시 판매량은 6개월에 6대만 팔리는 정도로 실적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판매가 부진하자 회사의 경영은 어려워졌고 도산 위기에 쳐하게 된다. 그때 독일에서 도움의 손길이 뻗쳐오는데, 호르히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여러 회사들이 지원하게 된다. 덕분에 1902년에 투자자들의 요구에 따라 작센(Sachsen) 지방의 라이헨바흐(Reichenbach)로 이전하게 되어, 1904년 주식회사로 변경과 함께 사명을 호르히 앤 시 모로바겐 베르크(Horch & Cie, Morotwagenwerke AG)로 변경하고 작센주의 츠비카우에 자리 잡았다. 호르히는 1904년 5마력 2기통 자동차를 출시하고 1908년 40마력 4기통 엔진 자동차를 선보이고 한 해에 100대 이상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회사가 되었다. 호르히가 자동차 경주에 몰두하며 사업을 진행하게 되면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이사회의 판단으로 호르히의 퇴출이 결정되어 1909년 6월 호르히는 회사를 떠났다.[3]

아우디 베르케[편집]

아우구스트 호르히는 호르히 앤 시를 떠나 한 달 뒤인 1909년 7월 츠비카우에 자신의 두 번째 회사 호르히 오토모빌-베르케(Horch Automobil-Werke GmbH)를 설립하였다. 같은 도시에 같은 이름을 가진 두 개의 자동차 회사가 불편한 공존을 시작하는 순간이었으며 호르히 앤 시의 경영진들은 호르히의 이런 행보에 빠르게 대응하여 법원에 등록된 상표이므로 호르히가 회사의 이름을 호르히로 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소송하였고 법원은 호르히 앤 시의 손을 들어주었다. 호르히는 비록 자신의 이름을 가져오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새 회사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은 것인데 그것이 바로 아우디 베르케(Audiwerke GmbH)이다. 새 회사의 이름을 고민하던 호르히는 사업 파트너 중 한 명인 프란츠의 집에 방문하였으며 어른들이 이야기를 하던 중 불쑥 라틴어를 공부하던 프란츠의 10살 아들의 입에서 독일어 호르히는 듣다라는 뜻의 독일어 동사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 말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 아우디였다. 1910년 4월 25일 호르히는 새 회사의 사명 아우디 베르케를 법원에 등록 신청하였다. 1911년 첫 자동차인 Type A10을 생산하고 모터스포츠를 통한 적극적인 마케팅에 나선 아우디는 1912년부터 1914년까지 드라이버로 직접 출전하여 오스트리아 알파인 랠리 대회에 참가해 3연승을 거뒀다. 1920년 52세인 호르히는 아무 분쟁 없이 사직하고 또다시 자신이 세운 회사를 떠난다. 그는 베를린으로 향해 독일 교통 관련 부서에서 자동차 공학과 생산업의 전문가로서 정부와 신생기업들에 자문을 제공하는 일을 하였다. 호르히는 주식회사 아우디의 경영에 관심이 없고 오직 기술 개발에만 힘을 써왔기 때문에, 정부의 제안을 흔쾌히 받게 된다. 그리고 여전히 아우디 베르케에서 임원으로 근무하게 되다가 1922년 2월에 독일기술학회로부터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게 된다. 기술 개발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그는 여전히 아우디의 주주였다.[4]

아우토 유니언[편집]

1929년 미국 금융시장이 붕괴되며 시작된 대공황은 이미 어려웠던 독일 경제에 치명타가 되었다. 1932년 6월 29일 독일 작소니(Saxony)지방에서 아우디(Audi), 데카베(DKW), 호르히(Horch), 반더러(Wanderer) 4개 회사가 합병되어 설립된 아우토 유니언(Auto Union AG)이란 자동차 연합 회사이다. 작센 지방 자동차 회사들의 연합체 아우토 유니언은 출범과 동시에 독일 제2의 자동차 제작회사로 되었다. 아우토 유니언이 4개의 회사와 합병되며 모터사이클로부터 고급 살롱까지 많은 제품군을 확보해가며 커지게 된다. 아우토 유니언은 4개의 회사를 뜻하는 동그란 원을 4개 겹친 모양의 로고를 사용했었지만, 회사의 연합은 각 회사들은 고유의 로고를 사용하며 각자의 모델을 생산하고 종종 새로 개발한 엔진을 공유하는 수준이었다. 호르히 앤 시와 아우디의 창업자이며 아우디의 주주였던 호르히는 아우토 유니언의 주요 임원으로 자리하였다. 대공황 이후 독일은 선전선동에 비상한 재주를 지닌 히틀러와 나치당에 의해 장악되었고 아우토 유니언 출범 이듬해인 1933년 총리가 히틀러인 나치 독일이 되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1940년 4월 타치 독일은 자국 내 모든 자동차 업체들의 민수용 자동차 생산을 금지시키고 총동원 태세에 돌입했고 아우토 유니언도 군용트럭 생산공장이 되었다. 전쟁에서 회사는 폭격을 맞아 파괴되었고 동독 영역에 포함되면서 나머지 시설들도 해체되거나 국유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공장이 파괴되었고 전후에도 대부분의 공장들이 동독 영토가 되면서 위기에 봉착하여 1949년에 바이에른 주 잉골슈타트로 본사와 생산 시설을 이전하였다.[5]

타입 K[편집]

고집 있는 사업가이며 모터스포츠광인 호르히는 자동차 개발사에 족적을 남긴 뛰어난 엔지니어이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타입 K이다. 타입 K는 스티어링 핸들을 좌석 좌측에 변속 레버를 좌석 중앙에 배치해 당시 자동차들의 운전석조수석 구분의 모호함을 단번에 없애버렸다. 이 배치는 맞은편에 다가오는 차량에 대해 더 나은 시야를 제공하고 앞서 있는 차량을 오른쪽으로 돌아 추월하는데 보다 안전했으며 1920년대 업계 표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기념비적 모델이다.[6]

호르히 901[편집]

호르히 901은 1935년부터 1936년에 독립 서스펜션과 오토 유니온의 츠비카우(Zwickau) 호르히 공장에서 사륜구동을 갖춘, 육군 무기 사무소의 사양에 따라 개발된 독일 국방군(Wehrmacht)의 중간 전지형 표준 승용차이다. 1937년과 1943년 사이에 호르히는 두 개의 다른 8기통 V 엔진을 장착한 14,911대의 차량을 제공했었다. 처음에는 민간인 전용 승용차 유형인 호르히 830/930에서 3.5리터의 변위가 있는 80마력(59kW) 버전을 내놓았고, 이후 자동차는 90마력(66kW)의 3.8ℓ 엔진을 장착했다. 같은 기간 오토 유니온 그룹에 속한 지그마르 공장은 호르히 V8 엔진과 75마력(55kW)의 출력을 갖춘 오펠 블리츠 6기통인라인 엔진을 장착한 원더러스 901차량으로 약 16,000대의 차량을 생산했다. 1938년과 1943년 사이에 오펠 베르크 브란덴부르크는 오펠 6기통 엔진을 장착한 중형 표준 승용차 3,860대를 생산했다. 바깥쪽에는 양면 중앙에 여분의 바퀴가 장착되어 있었고, 작은 언덕과 흙벽에서 운전할 때 바퀴가 지지대 역할을 했다. 1940년에 바퀴가 분배되면서, 내부에 더 많은 공간을 제공하는 "타입 40"의 트렁크에 단 하나의 여분의 바퀴만 보관되었다. 이 차량의 생산은 1943년에 직접 후속 모델 없이 중단되었다.[7]

각주[편집]

  1. "August Horch", "wikipedia"
  2. 강경주, 〈너의 이름은 아우디 창업주가 회사서 쫒겨난 이유〉, 《한국경제TV》, 2019-11-16
  3. 삼성화재교통박물관, 〈아우디의 창업자, 아우구스트 호르히(August Horch)1편〉, 《네이버 블로그》, 2021-03-02
  4. 아우디〉, 《네이버 지식백과》
  5. devmin, 〈아우디의 역사〉, 《티스토리》, 2017-02-16
  6. 메이커 이슈, 〈아우디를 만들어낸 '호르히' 아우디의 역사〉, 《티스토리》, 2017-04-15
  7. Horch 901〉, 《위키피디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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