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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4일 (화) 11:40 판

러시아(Russia)
러시아(Russia)
러시아(Russia) 위치

러시아(Russia)는 유럽아시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가진 연방제 국가이다. 수도는 모스크바(Moscow)이다.

국토 면적이 17,098,246km²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나라이며, 지구상에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육지의 8분의 1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러시아의 국토는 무려 11개의 시간대에 걸쳐 있으며, 14개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인구는 약 1억 4,500만 명으로 세계에서 9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이자 유럽 최대의 인구 대국이다.

1945년 UN 창설 당시부터 원년 회원국 중 하나로,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연방이 들어서면서 소련의 권리와 의무를 모두 승계받아 현재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다. 이에 더해 막대한 천연자원 보유량 및 세계 2위 군사 강국이자 세계 최대 핵보유국이라는 위상을 이용하여 전 세계 각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강대국이기도 하다. G20 참가국이며, 한때 G8의 참가국이었다. 또한 중국,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상하이 협력 기구의 회원국이다. 독립국가연합과 유라시아 연합을 창설해 주도하고 있는 국가기도 하다. BRICS에서 R은 러시아에 해당한다.

개요

러시아는 극동에서 동부 유럽의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있는 나라이다. 9세기 루시에 국가 기원을 두며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대제국을 이루다 1922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으로 거듭났다. 1990년 고르바초프의 냉전종식 정책으로 각 공화국들에 민족주의 분규가 일어나면서 1991년 12월 31일 소련이 해체, 독립국가가 되었다.

정식명칭은 러시아 연방(Российская Федерация, Russian Federation)이다. 수도는 모스크바 (Москва, Moscow)이며, 공용어는 러시아어이다. 국가를 이루는 인종과 문화가 다양한 다민족 국가이며, 인구의 대부분인 75%가 러시아 정교회를 종교로 갖고 있다. 1946년 초대 상임 이사국이었던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구 소련)이 보유하고 있던 의석을 승계하여 1991년부터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동유럽 지역 상임 이사국으로 활동하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북쪽에 위치한 극동지방부터 동부유럽에 걸쳐 자리한 광대한 영토를 가진 국가로, 북쪽으로는 북극해(Северный Ледовитый океан, The Arctic Ocean), 동쪽으로는 태평양(Тихий океан, Pacific Ocean)과 면한다. 남쪽으로 북한(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중국(China), 몽골(Mongolia), 카자흐스탄(Kazakhstan),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조지아(Georgia), 서쪽으로는 우크라이나(Ukraine), 벨라루스(Belarus), 라트비아(Latvia), 폴란드(Poland), 리투아니아(Lithuania), 에스토니아(Estonia), 핀란드(Finland), 노르웨이(Norway) 등의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또한 러시아는 연방 공화국으로, 총 85개의 연방 주체들로 국가가 구성된다. 연방 구성 주체는 공화국, 자치주, 자치구, 지방, 주, 특별시 등 6개의 단위로 나뉜다.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Санкт-Петербург, Saint-Petersburg), 세바스토폴(Севастополь, Sevastopol)로 구성된 3개의 연방 특별시를 포함하여 22개의 공화국, 9개의 지방, 46개의 주, 1개의 유대인 자치주와 네네츠, 추코트, 한티-만시, 야말로-네네츠 4개의 자치구가 러시아 연방 공화국을 구성한다.

헌법에 의거한 민주주의 국가로 국민직선제를 기반으로 하는 6년 임기의 중임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다. 과거 구 소련에서는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공산당 일당 독재에 의해 국가가 통치되었으나, 1990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과정에서 대통령제를 도입하면서 러시아의 예하 공화국들도 대통령제를 도입하게 되었다.

러시아 연방 정부는 2014년 러시아 전역의 시간을 조정함과 동시에 서머타임(summer time) 제도를 폐지하였으며, 이에따라 러시아 연방은 UTC+2부터 UTC+12에 이르는 총 11개의 시간대에 속하게 되었다.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Москва, Moscow)는 대한민국의 서울과 -6시간의 시차가 난다.

주요 도시는 수도인 모스크바를 포함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보시비르스크(Новосибирск, Novosibirsk), 예카테린부르크(Екатеринбург, Ekaterinburg), 니즈니노브고로드(Нижний новгород, Nizhnii novgorod), 카잔(Казань, Kazan), 첼랴빈스크(Челябинск, Chelyabinsk), 옴스크(Омск,Omsk), 사마라(Самара, Samara), 로스토프나도누(Ростов-на-дону, Rostov-on-don), 우파(Уфа, Ufa),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 Vladivostok),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 Khabarovsk) 등 이다.

상징

국호

국호의 유래는 러시아인의 근간인 동슬라브인, 혹은 그들이 사는 땅을 가리키는 단어인 '루스(Русь / Rusʹ)'이다. 자국어 국호인 '로시야(Росси́я / Rossíja)'는 중세 그리스어로 '루스'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던 '로시아(Ῥωσσία / Rhōssía)'에서 유래한다. 현대 러시아어에서는 강세와 모음약화로 인해 'Росси́я'를 '[rɐˈsʲiɪ̯ə](라시여)'에 가깝게 발음한다. 현대 러시아어에서는 전치사 в-가 결합된 вв [vː], мм [mː], нн [nː], 어두 cc [sː]를 비롯해 새로운 음이 만들어지거나 병합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표기상의 이중자음은 자음 겹침이 일어나지 않는 단자음과 같이 발음한다. 따라서 Росси́я의 경우도 Роси́я로 쓰는 것과 발음이 같은 셈인데 이를 굳이 Росси́я로 표기하는 것은 그리스어 어원을 중시한 것이다.

한국 표준어에서 차용한 영어식 표현인 러시아는 16세기 무렵에 사용된 현대 라틴어식 표현인 '루시아(Russia)'가 어원이며 전통적인 중세 라틴어식 표현은 '루테니아(Ruthenia)'이다. 2005년 제정된 러시아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러시아어 국호를 따라 '로시야'로 쓰는 것이 맞겠지만 이미 굳게 정착한 표기를 뒤집기 힘들어서인지 지금도 표준 표기는 '러시아'이다. 북한 문화어로는 러시아어에서 직접 기원한 것으로 보이는 '로씨야'를 쓴다.

원래 러시아라는 명칭은 전통적으로 국명이라기보다는 지역명이었으며 루스와 구별되는 이름은 아니었다. 이는 벨라루스를 일컫는 다른 이름인 백러시아, 우크라이나 남부를 일컫는 소러시아, 벨라루스 서부 지역을 가리키는 흑러시아 등의 이름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동슬라브족 국가 중 하나였던 모스크바 대공국이 15세기 이후 동슬라브족이 중심이 된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고 지역을 거의 통일해 '루스' 혹은 '러시아' 지역의 대표 국가가 됨으로써 자신들의 지배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국호를 루스 차르국(Ру́сское ца́рство)으로 바꿨고, 이후 표트르 대제가 그리스어 어원의 '로시아'를 채용해 러시아 제국(Росси́йская импе́рия)을 선포했다. 이후 '러시아'가 지금까지 국명으로 이어졌다.

러시아를 한자로 옮긴 이름으로는 '노서아(露西亞)'와 '아라사(俄羅斯)'를 예로 들 수 있다. 전자는 일본어 한자 음차, 후자는 중국어 한자 음차에서 비롯한 것이다. 노서아란 음차는 러시아어 '로시야(Росси́я / Rossíja)'를 옮긴 것이고 아라사란 음차는 고전 몽골어 '오루스(ᠣᠷᠤᠰ᠋ / Оrus)'를 차용한 만주어 '오로스(ᠣᡵᠣᠰ / Oros)'에서 유래한다. 몽골어로 '루스'도 아니고 '오루스'가 된 이유는 몽골어에도 두음 법칙 비슷한 것이 있어서 어두의 유음(r, l)을 꺼리기 때문. 다만 한국어의 ㄹ→ㄴ 두음 법칙과는 달리 어두 모음을 첨가함으로써 유음이 어두에 놓이는 환경을 피한 것이다.

한국어에서 한 글자로 줄여쓸 땐 '러'라고 한다. 아주 가끔 노서아에서 따온 '노(露)'를 쓰기도 한다.(노어노문학과 등) 1990년대 후반까지 신문에서 한자를 자주 병용했을 때만 해도 신문기사 표제에서는 이 나라의 약칭을 '露'라고 적었다. 2021년 기준으로도 여전히 '露'로 약칭하는 기사를 찾아볼 수는 있지만 거의 '러'라고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 먼 과거엔 아라사에서 따온 '아(俄)'도 있었지만 아관파천 한 단어를 제외하고는 사장된 표현이다.

이렇게 대다수 언어에서는 '루스'에서 따온 말을 쓰지만 일부 언어에서는 다른 데서 유래한 말을 쓰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핀란드어에서는 러시아를 '베내얘(Venäjä)'라고 하는데 이는 게르만인들이 슬라브인을 부르던 말인 '비니다즈(*winidaz)'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정작 루스에서 따온 말인 '루오치(Ruotsi)'는 스웨덴을 가리킨다.

공식 국호는 '러시아 연방공화국'이 아니라 '러시아 연방'이다. 러시아에서는 소련 이래로 '공화국'이라는 용어를 독립 국가의 한 형태로 사용하기보다 정치적 연합체(주로 연방 국가)를 구성하는 단위로서 사용하였다. 소련부터가 소비에트라는 사회주의 체제를 수용한 공화국들의 연합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련은 15개의 공화국으로 구성되었고, 이들 중 일부는 필요에 따라 다시 내부에 공화국을 설치하는 식이었다. 미국을 '미연방'이라 부르고 공화국이라 부르지 않는 이유와 비슷하다. 미국도 주마다 공화국이란 이름만 안 붙었지 엄연히 하나의 나라들이 연방을 이룬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소련이 해체되고 그것을 구성하던 공화국이었던 러시아가 독립국이 되자, 독립국이면서 스스로를 공화국으로 부르는 건 기존의 관행과 충돌하기에 '러시아 연방'이 공식 국호로 채택되었다. 어차피 지금 러시아 연방 내에도 공화국들이 연방을 구성하는 단위의 한 형태로 유지되고 있어서 국호에서 뭔가 명확한 구분이 필요하다.

소련 붕괴 이후 소련을 구성하던 공화국 산하에 설치된 자치공화국들도 독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기에 러시아로서는 여기에 빌미를 주지 않을 필요도 있었다. 만약 러시아가 러시아 연방공화국이나 러시아 공화국 같은 식의 국호를 채택했을 경우 러시아 산하의 자치 공화국의 주민들에게 "러시아나 우리나라(자치공화국)나 똑같은 공화국인데 왜 우리가 러시아의 일부로 묶여 있는 거지? 그냥 독립하면 안 되나?" 식의 생각을 부추길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러시아는 '공화국'이라는 이름을 안 쓰고 '공화국'보다 상위인 정치적 연합체라는걸 강조하기 위해 러시아 연방을 국호로 채택했다고 볼 수 있다.

국기

러시아 연방 국기

러시아 연방 국기(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флаг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는 위에서부터 흰색, 파란색, 빨간색의 가로선으로 이루어진 삼색기(Триколор)이다.

1705년 표트르 1세에 의해 백청적 삼색기가 지정되었다. 원래는 국기가 아닌 상선(商船)에서만 사용하였던 상선기였다. 1858년 로마노프 왕가의 상징인 검정-노랑-하양의 흑황백 삼색기가 러시아 제국 최초의 국기로 지정되었으나 백청적 삼색기도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다 1883년 알렉산드르 3세가 해상 뿐만 아니라 육상에서도 사용할 것을 공표하면서 공식 국기로 승격되었으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빨간 바탕에 흰 글씨의 국기로 대체되었고, 러시아 제국 시절의 국기는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후 소련 해체 직전인 1991년 8월 22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기를 삼색기로 재지정했으며, 그 후에 러시아 연방도 1993년 12월 11일까지 이 국기를 썼다. 이때의 국기는 지금 국기와는 다르게 중간 부분이 파란색이 하늘색에 가까웠다. 소련 시절의 국기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더이상 사용하지 않지만, 계엄령까지 선포될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였던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당시를 제외하고는 러시아 정부에서 금지하고 있지는 않아서 지금도 소련 시절의 상징물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이 국기를 썼던 러시아 제국이 슬라브 민족의 가장 영향력있는 국가였던 만큼, 러시아 국기에서 착안한 청(靑)-백(白)-적(赤) 조합이 범슬라브주의의 상징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슬로바키아, 체코,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의 국기가 러시아와 유사한 것은 이러한 이유. 이런 나라들은 국기에 자국의 국장을 반영해 러시아 국기와 구분한다.

국장

러시아 국장

러시아 제국에서 유래한 국장인 쌍두독수리를 사용한다. 러시아 제국은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동생의 딸과 결혼한 이반 3세가 이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자신의 국새에 쌍두독수리를 쓰기 시작하면서 쌍두독수리를 국장으로 사용한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혈통을 받아들이면서 러시아가 동로마 제국, 즉 로마 제국의 계승자이며 동시에 기독교의 계승자임을 주장했던 것이다.

방패 한가운데의 은빛 갑옷에 망토를 두른 채 용을 무찌르는 기사는 성인 게오르기우스이다. 이는 자유와 독립 수호를 위한 러시아 시민들의 결심과 용기를, 쌍두독수리 세 왕관은 러시아 연방과 그 주체들의 주권을 대표하며, 독수리의 발톱이 움켜쥐고 있는 금빛 보주와 지팡이는 통일된 러시아 연방과 러시아 연방의 권력을 상징한다.

국가

현대 러시아 연방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된 국가는 총 두 개가 있다. 처음 사용되었던 국가는 1991년 소련 붕괴 직후부터 2000년까지 사용되었던 〈애국가〉이며, 두 번째는 2001년부터 지금까지 쓰이고 있는 국가다. 2001년부터 사용되고 있는 국가는 〈소련 국가〉에서 가사만 바꾼 곡인 〈러시아 연방 국가〉이다.

〈러시아 애국가〉 (1991–2000)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며 소련의 15개 공화국이 모두 독립한 후, 대부분의 국가들이 새로운 국가를 제정했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후신인 러시아 연방도 새로운 국가로 '애국가'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이 '애국가'는 가사가 붙어있지 않아서 기악 연주만 가능한 국가였기 때문에 이래저래 불만이 많았었다. 이러한 불만은 러시아 국민 대부분이 인지하고 있었던지라 1993년과 1998년에 두 차례 가사 공모를 한 바 있으나, 합의 부족으로 공식 채택하는 데 실패했다. 현재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가사 있는 음원은 비공식 가사이다.

〈러시아 국가〉 (2001–)

2000년 러시아 대통령이 된 블라디미르 푸틴은 전임자인 보리스 옐친과 달리 구 소련에 대해서 상당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 1991년 소련의 붕괴를 재앙이라고 여기며 소련으로의 회귀를 추구했다. 푸틴이 집권했을 당시 러시아 경제가 무너져 있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러시아인들은 소련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간파하고 있던 푸틴은 구 소련의 국가 〈소련 국가〉를 부활하기로 하고, 그 때까지도 생존해있던 소련 국가의 작사가 세르게이 미할코프(Сергей Михалков)[2]에게 가사에서 공산주의 이념을 완전히 배제하는 재개작을 의뢰하였고 마침내 가사를 새로 쓴 것으로 교체한 러시아 연방 국가는 2000년 12월 30일[3]부터 공식적으로 러시아의 국가로 제정되었고, 2001년 신년사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사용되었다.

참고로 구 소련 국가 역시 중간에 한 번 변경된 것이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련은 인터내셔널가를 국가로 사용했다. 하지만 원래 프랑스 작품인 이곡은 지나치게 프랑스 풍이었고, 이 곡을 좋아하지 않았던 스탈린은 새로운 국가를 만들기로 결심했는데, 그 모델이 된 곡은 바로 스탈린을 미화하기 위해 만들었던 Жить стало лучше이라는 곡이었다. 이 곡의 가락을 바탕으로 좀더 웅장하게 개작하여 1944년부터 새로운 국가로 사용했다.

의용군 진행곡처럼 엄격한 제창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 러시아 국가가 연주되는 경우 기립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의용군 진행곡의 경우 반드시 엄숙하게 연주, 제창되지만, 러시아 국가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유연하게 연주되고, 상당히 많은 형태로 변주되기도 한다.

러시아가 스포츠 강국이기 때문에 올림픽에서 자주 연주되는 국가 중 하나였지만, 러시아 국가대표팀 도핑 스캔들로 인해 2018 평창 동계올림픽, 2020 도쿄 올림픽,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는 연주되는 일이 없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벨라루스와 함께 월드컵 등에서도 출전금지 당하여 스포츠 관련 행사에서는 당분간 들을 일이 없어졌다.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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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의 면적을 가진 러시아의 영토는 유라시아 대륙 북부와 발트해 연안으로부터 태평양까지 동서로 뻗어있다. 국토의 북쪽은 북극권에 속해 인구가 희박하나, 남쪽에 가까워질수록 많아진다. 유럽 지역과 아시아 지역(시베리아)의 거의 대부분은 광대한 평원으로 남부의 스텝과 북부의 툰드라 지대가 펼쳐져 있다. 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의 남쪽 국경에는 유럽 최고봉의 엘브루스 산을 포함한 카프카스 산맥이 있고,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는 우랄 산맥이 있다.

국토를 둘러싼 바다에는 북극해의 일부인 바렌츠해, 백해, 카라해, 랍테프해, 동시베리아해와 태평양의 일부인 베링해, 오호츠크해, 동해, 서쪽의 발트해와 서남쪽의 흑해가 있고, 해안선은 37,000km에 이른다. 이러한 바다에 위치한 러시아의 중요한 섬은 프란츠요제프 제도, 노바야젬랴섬, 세베르나야젬랴 제도, 노보시비르스크 제도, 브란겔섬, 사할린섬, 쿠릴 열도가 있다.

러시아 영내의 주요한 강에는 유럽 쪽의 돈강, 볼가강, 카마강, 오카강, 아시아 쪽의 오비강, 예니세이강, 레나강, 아무르강 등을 들 수 있다. 부라야트의 바이칼호는 세계 제일의 수심으로 유명하다.

지형

중간의 우랄산맥을 제외하면, 러시아의 지형은 남동쪽으로 험준한 산악지대가 발달하였고 북서쪽으로는 광활한 평지가 펼쳐져 있어 흡사 커다란 반구형의 극장과 같은 형상을 이루고 있다. 지형적 특성에 따라, 러시아는 콜라-카렐리야 지역·러시아 평원·캅카스 지역·우랄산맥·서(西)시베리아 저지·중앙 시베리아 고원·남부 산악지대·동부 산악지대로 구분된다. 콜라-카렐리야 지역은 핀란드 국경을 접한 유럽러시아의 북서부 지역이다. 카렐리야 지역은 고원지형을 이루나 해발고도는 낮다. 대부분 200m 이하의 구릉이 반복적으로 나타나며, 곳곳에 빙하호와 늪지가 발달하였다.

콜라반도에는 히비니산(1,191m)을 제외하고는 해발고도 300m 미만의 낮은 구릉이 발달하였다. 러시아 평원은 서쪽 국경선으로부터 동으로 우랄산맥까지, 북극해로부터 남으로 캅카스 지방과 카스피해까지 펼쳐진 대평원이다. 광활한 평원의 서쪽과 남쪽으로 발다이구릉, 스몰렌스크-모스크바고원, 중앙러시아고원, 프레몰가고원 등 400m 미만의 저산지가 분포해 있다. 이 고원들 사이로 드니프로강·돈강·드비나강 등이 흐르면서 그 주위에 범람원을 이루고 있다. 특히 발다이구릉은 해발고도 300m 내외의 빙하성 산지로서 볼호프강·드비나강·볼가강 등의 분수계 역할을 하고 있다. 러시아평원은 대부분 선캄브리아기에 형성된 안정된 기반암 위에 엷은 충적층이 덮인 지형구조를 보여주는데, 충적층이 두꺼운 곳에는 석탄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캅카스 지역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쿠반저지와 쿠마저지 및 카스피해 연안저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으며 북쪽으로 러시아평원과 연결된다. 특히 카스피해 연안은 해수면 이하(-27m)의 낮은 저지대이다. 쿠반저지와 쿠마저지 사이에는 평균 해발고도 400m의 스타브로폴고원이 있다. 한편 캅카스 지역 남단에는 험준한 캅카스산맥이 동서로 발달해 있어, 러시아와 그루지야·아제르바이잔 사이의 국경선 역할을 한다. 우랄산맥은 북극해 연안에서 카자흐스탄에 이르는 총 길이 약 2,080km의 습곡산맥으로서 러시아평원과 서시베리아저지를 구분해주고 있다.

북쪽의 나로드나야산(1,894m)을 비롯해 해발고도 1,500m이 넘는 산은 소수이고 그 사이로 낮은 산들이 이어져 있다. 그래서 우랄산맥은 큰 교통장애 요소가 되지 못하며, 일찍부터 주요 교통로가 발달해 왔다. 서시베리아저지는 우랄산맥에서 동쪽의 예니세이강까지, 북극해에서 남쪽 알타이산맥까지 펼쳐져 있는 광활한 지역이다. 이 저지는 오비강과 이르티시강이 형성한 거대한 범람원으로서 늪지가 많다. 대부분 해발고도 100m를 넘지 않는 저지이다.

취락은 주로 비교적 높은 남반부에 발달하였다. 중앙 시베리아 고원은 예니세이강과 동쪽의 레나강 사이에 발달한 고원지대로서 대부분 해발고도 400∼700m의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니세이강과 레나강의 지류가 고원 사이로 흐르면서 골짜기를 이룬다. 중앙시베리아 고원 북쪽으로는 비랑가산맥과 푸토란산맥이 있으며, 남쪽에는 바이칼리아산맥이 있다. 이들 산맥은 비교적 높은 산들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에는 야쿠티아분지가 형성되어 있다.

남부 산악지대는 카자흐스탄의 동쪽 국경선에서 바이칼호에 이르는 지역으로, 알타이산맥, 동·서 사얀산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산맥들은 해발고도 2,700∼4,200m의 험준한 산지로서, 정상부에서는 평탄한 고원을 이룬다. 또한 정상부의 만년설이 녹으면서 예니세이·오비·이르티시강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한편 바이칼호는 단층작용으로 형성된 거대한 호수로 최대 수심이 1,616m에 이른다.

동부 산악지대는 동쪽의 바이칼호로부터 야블로노비산맥, 스타노보이산맥, 주그주르산맥, 콜리마산맥, 추코트산맥으로 이어져 베링해까지 연결된다. 한편 베르호얀스크산맥과 체르스키산맥은 남북으로 뻗어 각각 주그주르산맥·콜리마산맥과 만난다. 이 산맥들은 해발고도 2,000∼3,000m 사이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고대 유럽 지괴와 북아메리카 지괴가 충돌하면서 형성된 습곡산지이다. 한편 동부산악지대의 동쪽지역은 화산이 집중 분포해 있다. 특히 캄차카반도와 쿠릴열도는 활발한 화산활동이 일어나고 있는 환태평양화산대의 일부이다.

하천

러시아의 큰 하천은 주로 중앙아시아 지역의 남단에 발달한 산악지역에서 발원하고 있으며, 그중 카스피해로 유입되는 볼가강을 제외하고는 대개는 북류한다. 대체로 상류지역에 해당하는 급경사 부분은 짧은 반면, 유로의 대부분이 평원 위로 흐르고 있다. 예를 들어 오비강은 하류 쪽 약 3,000km의 낙차가 불과 90m이며, 볼가강 하류 3,000km의 고도차도 350m에 지나지 않는다.

유량의 계절적 변화는 매우 커 풍수기(豊水期)인 5∼6월에는 연간 유량의 약 1/2이 흐르고, 나머지 기간은 거의 항행이 어려울 정도로 유량이 적다. 따라서 주요 하천 곳곳에 건설된 댐의 전력생산이 큰 지장을 받고 있다. 이들 강들은 1년 중 많게는 8∼9개월, 적게는 3∼4개월 정도 결빙하여 수로교통 수단으로 이용하는 데 제약을 주고 있다. 더구나 교통수요는 주로 동서방향으로 발생하는 데 비해 하천은 대부분 남북으로 흐르고 있어 교통수단으로서의 기여도는 낮을 수 밖에 없다.

이 때문에 오래 전부터 운하를 건설하거나 동서방향의 철도망을 건설하여 주요 하천들을 서로 연결하는 교통체계를 마련하고자 노력해 왔다. 한편 대규모 하천이 남북으로 길게 흐르기 때문에 해빙기가 되더라도 하구 쪽은 얼어 있는 경우가 많아 자주 범람한다. 이는 농업에 막대한 지장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주요하천은 발전용수, 농업용수, 교통로, 공업용수로서 그 경제적 가치는 매우 크다. 따라서 대규모 토목사업을 통해 그 가치를 극대화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볼가강 개발과 예니세이강 유역변경공사이다. 볼가강 개발은 수력발전 및 홍수조절 목적 외에, 남쪽의 볼고그라트에서 북쪽의 트베리를 거쳐 직접 범(汎)유럽 운하 하천망과 연결되는 수로교통망을 구축하려는 목적도 있다. 예니세이강 유역변경공사는 안가라강으로 유로를 바꿔 낙차를 이용, 대량의 전력을 생산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생산된 전력은 인근의 이르쿠츠크 공업지역뿐만 아니라 서부지역에 공급된다. 또한 이 공사는 시베리아 남부지역에 관개용수를 공급하고, 나아가 오비강을 거쳐 유럽 러시아의 하천망과 연결하려는 거대한 토목사업이다.

기후

러시아는 시베리아로 대표되는 추운 나라로 알려져 있다. 그 유명한 동장군이란 말이 본디 러시아의 겨울을 이르던 말임은 물론이다. 대부분 지역이 추운 것은 사실이되, 세계에서 영토가 가장 큰 나라답게 남부는 외려 따뜻한 곳도 있다.

가령, 2014 소치 동계올림픽을 개최한 흑해 연안 소치의 2월 평균기온은 6℃이며 아열대기후로 제주시의 6.4℃와 비슷하다. 게다가 여긴 일년 내내 강수량이 고르고 연간 강수량도 1,700mm를 넘어 한국 기준으로도 다우지에 속하는 곳이다. 이 지역은 기후가 온화하여 차나무가 자라기 좋아 러시아 국산 차를 생산하는 지방이기도 하다.

내륙의 모스크바 역시 서울특별시보다는 춥지만 강원도 대관령, 북한 평안북도 신의주시, 라선시와 비슷한 정도(1~2월 평균기온 -7.5℃)의 기온으로, 극한의 환경까지는 아니다. 북아시아(시베리아)도 인구 대개가 몰려 사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연선 지역은 그리 춥지는 않다. 모허 국경지역은 -30℃ 내외로 엄청나게 춥다.

반대로 한반도에 한파가 닥칠 때 서울이 모스크바보다 잠시 기온이 낮을 때가 있어 러시아 겨울날이 별것 없다 여기는 경우도 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상대적으로 온도가 높다 해도 습도 역시 높아 빠르게 체온이 떨어져 얼어죽기 딱 좋고, 목숨이 지장이 갈 정도가 아니더라도 뼛속까지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든다.

다만 러시아가 전체적으로 겨울이 조금 길기는 하지만, 1년 내내 추운 것도 아니고 여름은 충분히 덥다. 30℃를 넘는 지역도 많고, 2010년 7월 칼미키아의 우타에서는 45.4℃라는 러시아 역사상 최고기온이 기록되었다. 오이먀콘에서 기록된 최저기온이 -71.2℃이니 무려 116.6℃의 차이가 난다!

소련 이전 러시아 제국 시절, 그리고 현재 러시아는 세계적인 곡물 수출국이다. 즉, 황무지만 있는 게 아니라 농사 짓기 좋은 땅도 많다.

물론 북극권에 가까운 시베리아 북쪽으로 올라가거나 동쪽으로 갈수록 극한의 추운 기후를 자랑한다. 야쿠츠크의 1월 평균 기온은 -40℃, 베르호얀스크는 -45.9℃, 오이먀콘은 -51.3℃다. 각 도시의 위엄에 대해서는 문서를 참조. 한국의 추운 겨울의 원인이 바로 시베리아에서 내려오는 시베리아 기단 때문이다.

러시아는 9월 중하순부터 5월까지 겨울일 정도로 추운 나라인데도 워터파크가 있다. 물론 100% 실내이다.

지구 온난화의 수혜를 보는 나라이다. 일단 시베리아 남쪽부터 농사 가능한 온대지역이 북상 중인 추세인데 캐나다나 알래스카보다 영향을 받는 곳이 훨씬 넓어 이득을 제일 많이 보고 있다. 더구나 점점 열리고 있는 북극항로의 통행세를 기대하는 눈치이다. 동아시아의 한중일이 싱가포르행 남쪽 항로보다 훨씬 가까운 지름길이 될 북극항로의 주 수혜자가 될 예정이다.

식생과 토양

러시아는 위도에 따른 식생대가 매우 뚜렷하다. 툰드라, 타이가, 혼합림·낙엽수림 지대, 스텝 등이 넓은 지역에 걸쳐 발달해 있다.

⑴ 툰드라 지대:북극해 연안을 따라 핀란드 국경에서 베링해까지 동서로 펼쳐져 있으며, 전체 면적의 약 5%에 해당한다. 이 지역에는 월평균기온이 0℃ 이상인 달이 3∼4개월에 불과하고 그것도 10℃를 넘지 않는다. 지표는 극히 한랭하여 하부의 토양층은 영구 동토를 이루고 여름에는 곳곳에 습지가 형성된다. 혹독한 기후, 짧은 성장기간, 토양의 영구 동결로 농업은 불가능하며, 다만 선태류·지의류·양치류 외에 일부 관목이 자라고 있을 뿐이다.

⑵ 타이가(삼림대) 지대:툰드라 지대 남쪽에 분포해 있으며 국토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다. 툰드라와는 달리 여름에는 온난한 기후를 보인다. 이곳에는 주로 전나무·낙엽송·가문비나무 등 침엽수림이 발달해 있지만, 남쪽에는 자작나무·떡갈나무 등 활엽수림도 있다. 봄과 가을의 빈번한 서리, 습지, 척박한 토양 때문에 농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타이가의 대표적인 토양인 포졸은 표층의 부식질이 쉽게 용탈되기 때문에 매우 척박하다.

⑶ 혼합림·낙엽수림 지대:타이가 지대 남쪽에 분포하며 서쪽 국경에서 동쪽의 노보시비르스크까지 전개된다. 이 지대는 서쪽의 경우 남북으로 길게 발달한 반면 동쪽으로 갈수록 그 폭이 좁아지는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타이가 지대에 비해 하계가 길고 온난하며, 동계 역시 상대적으로 짧고 기온도 높은 편이다. 연강수량은 400∼600mm에 불과하지만, 증발량이 적고 하계에 집중되어 곡물농업에 적합한 기후조건을 가진다. 그 결과 많은 지역이 개간되어 농지로 이용되고, 삼림은 극히 일부 지역에만 남아 있다.

주요 수종은 참나무·가문비나무와 같은 침엽수림과 서양물푸레나무, 단풍나무, 느릅나무 등의 활엽수림이 분포해 있다. 이 지대의 토양은 스텝의 토양보다는 비옥도가 떨어지지만 타이가의 포졸보다는 비옥하다. 즉 영구 동토가 없고 배수도 양호하며, 상대적으로 토양의 여과성이 떨어지고 토양층이 두껍다. 뿐만 아니라 많은 영양분을 가진 빙하성 퇴적물질이 이곳에 집중 퇴적되어 토양의 비옥도를 높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곳에는 다양한 농작물이 재배되고 목축업이 성행하는 등 스텝 지역과 더불어 러시아의 중요한 농업지역이 되고 있다. 토지생산성이 높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이곳에 인구가 집중 분포해 왔다. 이 지대 남쪽에는 삼림과 스텝이 혼재되어 있는 삼림 스텝 지대(forest-steppe)가 동서로 길게 서(西)시베리아 지역까지 분포해 있다. 문자 그대로 삼림과 스텝의 점이지대이다.

⑷ 스텝 지대:서쪽 국경에서부터 동쪽의 시베리아 알타이산맥까지 뻗어 있다. 이 지역은 하계가 온난하고 무상기일이 길지만, 연강수량이 200∼500mm에 불과하다. 따라서 건조한 기후에 잘 견딜 수 있는 곡물을 재배하는 한편 가축사육을 많이 한다. 토양은 흑색의 체르노좀(chernozyom)으로서, 부식질이 매년 쌓이는 반면 거의 용탈되지 않아 토양 속에 영양분이 많다. 특히 토양 속에 함유된 석회분이 토양을 중성으로 만든다. 이 지대는 러시아의 곡창지대로 밀·사탕무·해바라기 등의 농작물 재배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야생동물

영토가 넓어서 불곰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고 인도 다음으로 야생 호랑이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대형 초식동물 말코손바닥사슴도 널리 서식하며, 비교적 온화한 극동부에는 자라와 가물치도 서식한다. 또한 북극권하고도 가까워서 북극곰이나 바다코끼리도 서식한다.

여담으로 공룡화석이 많이 발굴되는 이웃나라 몽골과 중국, 바다 건너 아메리카 대륙과는 달리 이 나라에선 특이하게 페름기에 살던 단궁류의 화석이 많이 발견된다.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수궁류인 이노스트란케비아나 에오티타노수쿠스, 울레모사우루스 등의 수많은 단궁류들이 러시아에서 발굴되었다. 그 외 스쿠토사우루스같은 파충류도 발견되었다. 이처럼 러시아에는 많은 수의 페름기 생물들이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역사

고대

러시아라는 지명이 역사상 나타나기 훨씬 전에 중앙아시아, 트랜스코카서스, 흑해 연안 등지에는 발달된 문명이 존재하였다. 러시아의 초원지대에서는 사르마티아인, 고트족, 흉노족, 불가족, 아바르족, 카자르족 등이 차례로 지배하였으나 러시아역사의 주인이 되지는 못하였다.

반면 러시아의 삼림지대, 즉 동북부지대에 살고있던 슬라브족이 서쪽 유럽으로 이동한 서슬라브족과 동쪽으로 이동한 동슬라브족이 동서방향으로 확장하면서 오늘날 러시아의 주류민족을 형성하게 되었다.

8세기 경 동슬라브족은 드니프로강과 볼호프강 및 볼가강 상류지역으로 유입하여 정착하고 있었으며, 작은 도시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9세기 경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바이킹의 후손인 바랑고이(Varangian)족이 이 지역으로 확장해 오게 되었고, 이들은 슬라브족을 자주 침탈해오는 유목민인 카자르족으로부터 막아주기도 하면서 북쪽의 노보고르드(Novgorod)와 남쪽의 키이우(Kyiv)를 중심으로 분리하여 슬라브족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바랑고이족은 서서히 슬라브 원주민과 동화되어 나갔다.

부족 형태 및 대륙 이동 시기를 거쳐온 슬라브인들은 882년 바랑고이족의 올레그(Oleg)에 의해 최초의 국가 형태인 키이우 공국으로 통합되어 역사에 등장한다.

키이우 공국

키이우 공국은 뛰어난 전략적 위치를 바탕으로 세력을 크게 확장시켜 도시국가 형태의 주변 공국들을 지배하였다. 988년 키이우의 왕 블라디미르가 동방정교회로 개종한 후,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국가통합수단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054년 키이우 왕가의 분열로 블라디미르·모스크바·노브고로트 등 여러 도시국가가 독립하면서 키이우 공국은 크게 쇠퇴하였다. 그후 키이우는 여러 이민족으로부터 침입을 받다가, 13세기 타타르인(몽골인)의 침입으로 결정적으로 멸망하였다.

몽고지배와 모스크바공국

중국중앙아시아를 정복한 몽고족징기스칸을 계승한 오코타이칸은 바투에 명하여 유럽 원정을 시작하였다. 바투는 1223년 아조프 근처의 칼카강의 전투에서 키이우군을 상대로 승리하고 유럽으로 계속 진군하였으나 칸의 계승문제로 회군하였다. 그러나 1238년에서 1240년에 걸친 재침입으로 키이우 전역은 240년간에 걸친 몽고족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몽고의 지배는 각 지역의 통치자들이 공물과 세금을 바치고 몽고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방식이었다. 몽고족의 지배는 그동안 러시아와 유럽과의 연결을 단절시켜 유럽의 시대적 흐름에 뒤떨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몽고의 지배하에서 가장 크게 성장한 한 것은 모스크바 공국이었는데, 모스크바 공국의 알렉산더 네프스키는 몽고의 침입 때 저항하지 않고 몽고의 지배를 인정함으로써 몽고로부터 대공의 칭호와 다른 공국들보다 월등한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그는 공국 간에 대공위를 번갈하가면서 물려주던 키이우 공국의 전통적인 윤번제(로타제) 방식에 따르지 않고 부자세습을 함으로써 키이우 공국과 분리되고 특별한 지위를 유지하였다.

러시아가 몽고족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은 모스크바 공국의 이반 3세부터이다. 그는 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조카딸과 혼인을 함으로써 비잔틴의 계승자이고 그리스정교의 수장임을 주장하였으며, 북쪽의 전통적인 공국인 노보고로드 공국을 지배하는 등 러시아 지역을 합병해나갔다. 마침내 1480년에는 몽고와의 주종관계를 공식적으로 종결하는 선언을 하였으며, 러시아 전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함으로써 전제군주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는 법률과 행정조직을 만들고 새로운 토지소유제를 도입하였으며 크레믈린 궁을 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다음 세대의 발전의 초석을 닦았다. 이 시기에 도입된 토지소유제는 제정러시아시대까지 사회적 불만의 근간이 되었던 농노제의 탄생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반 4세는 쯔아(짜르:Tsar)라는 전제군주의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며, 귀족세력과의 권력투쟁을 위해 귀족회의체인 두마(Duma)에 대항할 성직자, 도시자본가 등으로 구성된 회의체를 만들면서 왕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의 사후에 벌어진 왕위계승전, 농민반란으로 모스크바 공국은 위태로워진 상태에서 1610년 폴란드의 침입으로 망하게 된다. 폴란드는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등 위세를 떨쳤으나, 러시아인들은 국민군을 조직해 저항하면서 폴란드군을 물리치게 되며 로마노프 왕조를 열게 된다.

로마노프왕조와 표트르대제

러시아를 서구화시킨 표트르 대제

폴란드의 침입으로 모스크바 대공국이 무너지고 국민군과 젬스키 소보르(zemskii sobor)라는 국민회의체에 의해 새로운 왕으로 옹립된 인물은 이반 4세의 조카인 17세의 미카엘 로마노프였으며, 이때부터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된다. 국민군과 의회의 지지속에서 1613년에 출발한 로마노프왕조는 모스크바 대공국 시절에 형성된 짜리즘 혹은 쯔아리즘(tsarism)으로 불리우는 전제군주 체제로 서서히 복귀하였으며, 1905년의 입헌군주제로 왕조를 유지하다가 1917년 소비에트정권에 의해 멸망하였다. 미카엘의 즉위 10년 뒤에는 왕조가 안정되면서 회의체의 대의기구의 역할이 약화되고 이후의 왕들은 전제권이 강화하면서 폴란드에 의해 점령당했던 영토를 회복하거나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로마노프 왕조의 4대 왕(짜르)인 표트르(피터) 대제(재위 1689~1725)는 대대적인 영토확장 정책을 실시하였다. 처음에는 대대적인 조선사업을 일으키고 크리미아 반도쪽으로 남진정책을 폈으나 성공적이지 못하였고, 이후에 북진정책을 실시하여 스웨덴을 굴복시키고 발틱연안으로 나아가 서구로 나가는 수로를 확보하였다. 그는 다시 서쪽으로 영토를 계속 확장해 나갔다. 그 결과 표트르 대제는 현재의 러시아 영토 대부분을 지배하는 최초의 러시아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1703년 네바강 하구 부근에 상트페테르부르크(후에 레닌그라드로 바꾼 후 최근에 다시 원래의 지명으로 복귀)를 건설한 뒤, 1713년 제국의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한편, 표트르 대제는 정치적·경제적·문화적 개혁을 단행하면서 유럽과 본격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가 외부세계로 진출하는 창구역할을 하였으며, 이곳을 통해 무역이 성행하였다. 또한 이 무렵부터 우랄산맥 일대에 철강과 군수공업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이외에도 해군의 창설과 군의 근대화 및 행정조직개혁 등이 표트르 대제 때 이루어졌다. 그의 대외적인 개혁정책의 핵심은 서구화정책이었다. 대내적으로 1721년 러시아 정교의 교구를 폐지하면서 신성종교의회로 대체함으로서 교회에 대한 국가의 지배를 공고히하였다.

로마노프왕조와 전제군주제

표트르 대제의 사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극도의 혼란상이 나타났고, 이 틈을 타서 귀족층은 그들의 힘을 확대하였고 농노제가 확대되는 등 농촌과 농민의 피폐가 더 심각하여 농민들의 반란은 끊이지 않았다.

남편인 표트르 3세의 왕위를 계승한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1796)는 독일 출신으로, 당시 유럽의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았지만 재위 기간 중 푸가초프의 반란과 같은 대규모 반란을 겪었고 프랑스혁명과 같은 대변혁에 대한 두려움으로 보수적인 전제정치를 강화하였다.

심지어 그는 국유지를 경작하는 농민들을 사유화하고 농노로 전락시키기도 하여 농민들의 반감을 샀다. 대외적으로 표트르 1세의 팽창정책을 계승하여 상당한 성과를 올렸는데, 1783년 크림반도를 장악하고 1791년 오스만튀르크를 굴복시켜 흑해 캅카스 지방과 지중해로 진출하였고, 세 차례에 걸친 폴란드의 분할(1772년, 1793년, 1795년)에 참가하면서 서쪽으로 영토를 더욱 확장시켰으며, 동쪽으로도 우크라이나·시베리아·극동을 거쳐 아메리카 대륙의 알래스카까지 진출하였다.

19세기 로마노프 왕조는 알렉산드르 2세 전까지 강력해진 전제군주체제를 유지하였다. 알렉산드르 1세는 경찰을 만들고, 자문기구인 국가회의와 각료회의를 설치하였다. 그 시기 대외적으로는 나폴레옹 1세가 유럽 정복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나폴레옹이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하였던 영국을 경제적으로 봉쇄시키기 위해 베를린칙령(대륙봉쇄령)을 발표하여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에 대해 영국과의 통상을 금지하였다. 영국에 농산물을 수출하여 외화를 획득하였던 러시아는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마침내 대륙봉쇄령을 깨뜨려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을 촉발시켰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알렉산드르 1세는 여세를 몰아 비엔나 회의를 주도하면서 핀란드, 베사라비아 등을 획득하면서 유럽에서의 지위를 격상시켰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으로 러시아에 자유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입헌군주제나 공화제, 농노해방 등 사회개혁을 부르짖는 유럽의 시민혁명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 12월 장교단의 반란과 같은 소규모 반란들이 일어났다. 특히 니콜라스 1세 때는 러시아의 전제군주제와 농노제에 회의를 품는 지식인들이 늘어나고 서구의 합리주의에 근거하여 러시아의 낙후성에 대한 비판이 강해졌다.

로마노프왕조의 몰락

19세기 중반에 왕위에 오른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러시아의 개혁은 크림전쟁의 패배로 인한 국제적인 위상의 추락에서 나왔다. 크림전쟁(1853-1856)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차지하여 흑해로의 진출을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었으나, 러시아의 남진을 견제하는 프랑스·영국·이탈리아가 오스만 제국에 가세하면서 러시아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전쟁은 러시아의 패전으로 파리평화조약을 맺으면서 종결되었지만 러시아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이때 러시아는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하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국내적으로 개혁과 근대화를 약속하였다. 그는 1861년 농노를 해방하고 1864년 지방자치기구를 설치하는 등 일련의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적인 개혁은 오히려 농민이 더욱 지주에게 예속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이러한 불만은 브나로드운동과 같은 농촌개혁운동이나 나로드니크(인민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혁명사상을 싹트게 하였다.

전제군주제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음에도 이후의 러시아의 전제군주(짜르)들은 비밀경찰에 의한 감시와 통제, 암살과 같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지하 반체제 세력은 사회혁명당을 만들어 토지의 공동소유, 소수민족의 자치권 인정 등을 주장하였다. 러일전쟁패배(1905) 이후 전제군주제의 몰락이 시작되었는데 특히 1905년 1월의 피의 일요일 사건은 시위·폭동·총파업 등 총체적인 혼란을 가져와 로마노프 왕조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였다. 니콜라스 2세는 1905년 10월선언을 통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인정하고 입헌군주제를 채택할 수 밖에 없었다. 형식상 입헌군주제이지만 여전히 황제는 절대권을 행사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프랑스와 삼국협상을 맺고 있던 러시아가 전쟁에 개입하였으나, 독일침입에 대비한 초토화작전의 실패로 경제가 파탄이 나고 반전의식은 더욱 강해졌다. 그 결과 국민적 불만이 폭발하여 일어난 1917년의 3월 혁명(구력 2월)으로 니콜라스 2세가 퇴위하면서 로마노프왕조는 막을 내린다.

소비에트정권 수립

러시아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패배로 인해 빈곤에 찌든 인민들의 시위와 파업이 계속되었다. 1917년 3월혁명(구력 2월)이 일어나 니콜라이 2세를 축출하고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국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자, 이에 대항하는 노동자와 병사들의 대표들로 구성된 볼셰비키혁명 세력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마침내 1917년 11월 7일(러시아 구력으로 10월 25일)에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파가 임시정부를 전복시키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성공하여,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레닌은 혁명 직후, 주요 산업 및 은행의 국유화, 신분제 폐지, 인민재판소 설치, 의회의 해산 등과 같은 혁명적 입법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신생 소비에트 정권은 부르주아와 지주 등 우익 백군(白軍), 즉 반(反)혁명세력의 봉기와 연합국(영국·프랑스·미국·일본 등)의 개입으로 위기를 맞았다. 이에 레닌은 모든 기업의 국유화·노동의무제·곡물징발제·식량배급제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전시(戰時) 공산주의' 정책을 실시하는 동시에, 소비에트 적군(赤軍)을 동원하여 내란을 종식시켰다.

전시 공산주의 정책은 농민의 반발과 경제복구의 실패 등으로 오히려 신생 소비에트 정권을 위기상황으로 몰았다. 이에 1921년 레닌은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lan:NEP)'을 채택하면서, 자유농 인정·농산물 판매 허용·사기업 인정 등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였다. 이러한 신경제정책으로 경제가 신속히 복구되었고 인민의 생활수준도 다소 향상되었다. 한편 레닌은 고전적인 마르크스의 명제에서 벗어나 러시아 한 나라만이라도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는 '일국 사회주의론'을 전개하였다. 이는 러시아혁명 후 주변국가에서 기대했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소비에트 정권의 안정 자체가 시급한 현실에 대한 전략적 대응으로서 나온 이념 수정이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과 일국 사회주의론은 격렬한 이념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당내 갈등의 와중에 22년 스탈린은 당 총서기로 임명되었고,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캅카스(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아르메니아)로 이루어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소련)이 탄생되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과 혁명을 거치는 동안 신생 소비에트 정권은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 서부지역의 상당한 영토를 상실하였다. 이때 상실한 영토는 1939~1945년에 소련이 회복하는 영토보다 많았다.

스탈린시대

레닌과 스탈린 (1922년)

러시아에서는 1924년 레닌의 사망으로 권력을 잡은 스탈린이 트로츠키파(派)를 숙청하고 권력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그는 일국 사회주의 건설과 소련의 온전한 경제적 독립을 이룩하기 위해, 도시와 농촌에서의 자본주의적 요소를 제거하는 한편, 공업화와 농업근대화를 추구하였다. 이를 위해 사기업을 폐지하고 국가 주도의 제1차 5개년계획(1928∼1932)과 농업의 집단화가 실시되었다. 이는 신경제정책의 실질적인 폐지를 의미한다. 스탈린은 계속된 2·3차 5개년 계획기간에 중공업 중심의 공업화를 강력히 추진하였다. 또한 1937년에는 농업집단화를 완료하여 토지의 99%를 콜호스 소유로 만들었다.

한편 스탈린은 정치부문에서는 강권정치를 통해 사회주의 체제를 확고히 하였다. 즉 1936년 스탈린헌법이라 부르는 소비에트 헌법을 제정하고, 공산당 지도자·인텔리겐치아·농민 등 수많은 사람들을 숙청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전까지, 1924년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 1929년 타지키스탄, 1936년 키르키스스탄·카자흐스탄, 1940년 몰디비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가 각각 소련연방에 가입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후로 스탈린은 매우 현실적인 외교노선을 취했다.

즉 1939년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중립을 취해, 서부 지역에서 상당한 영토를 얻었다. 그러나 1941년 독일이 침공하자 순식간에 모스크바까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스탈린은 서부의 공장시설을 소개(疏開)하여 우랄·시베리아에 군수산업을 일으키는 한편, 새로운 군부대를 창설하여 반격하였다. 1945년 5월 독일의 패전 이후 소련은 일본과 전쟁을 벌여 북한과 사할린 및 쿠릴열도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였지만, 2000만 명 이상이 희생당하고 국가재산의 약 30%가 손실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소련은 전쟁 복구에 나서 1950년대 초에는 경제가 전전(戰前)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한편 종전 후 동유럽과 중국의 공산화가 진행되면서 세계는 미·소를 양극으로 하는 '냉전체제'로 전환되었다.

흐루쇼프 시대

스탈린이 죽고 말렌코프가 잠시 집권할 때즈음 드넓은 시베리아에서 석유가 터져나오며 소련은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 되었다. 석유를 수출하기 위해 소련은 1950년말부터 서방과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석유, 천연가스를 필두로 한 자연 수출, 그리고 공산권 위성 국가들의 소비를 위한 자동차 등 중공업 등을 기반으로 소련은 양대 강국이 되었다. 1957년에는 인류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연이어 개를 우주에 보냈으며, 1961년에는 최초의 유인 우주 탐사를 실행해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전통을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겉모습과는 달리 원자재에 국가수입의 상당 부분을 의존하고, 자동차나 VHS 기기같은것을 구할려면 몇달에서 몇년씩 기다려야하고 지방 소도시에서 물자공급이 제대로 안되다보니 주요 대도시로 물건을 사려고 일부러 여행가는 등 소비재 부문은 구입에 오랜시간 기다려야되는 경우가 많은 등 경제체제가 워낙에 빈약한 면도 있었다. 이 시기의 소련 경제사정을 비꼬는 공산주의 유머 시리즈도 많다. 또 소련인들은 자국의 빈약한 공산품에 불만을 품어 많은 서방제 생활용품이 암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되었다. 1980년대 기준으로 치면 월급이 200루블인데 청바지 하나에 100루블씩 하는 식이었다.

개혁적, 진보적 흐루쇼프 시대에 소련은 전성기에 이르렀지만 사실 이 시절에도 과거 대숙청의 부작용으로 트로핌 리센코처럼 공산당에 아부하는 사이비 과학자들이 국가 정책을 좌지우지하면서 비과학적인 농업정책으로 흉작이 발생하는 등 흉작이 발생해서 외국으로부터 대량의 곡물을 수입하는 굴욕을 겪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말 이후 소련의 산유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를 만회할 수 있었다.

브레즈네프 시대

이후 18년 동안 이어진 반동적, 보수적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코시킨 개혁이 실패로 돌아기고 이 시기부터 경제성장률이 3% 안팍에 그치며 경제가 정체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 중반 오일 쇼크가 터졌고, 오일 쇼크 최대의 수혜자는 당사자 중동이 아닌 소련이었다. 오일 쇼크로 석유 가격이 4배 폭등하자 세계 최대 산유국 소련의 경제 역시 다시 침체기를 벗어나게 되었다.

고르바초프 시대

1982년 브레즈네프가 사망하자 집권한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 정권은 기본적으로 브레즈네프 노선을 답습하였을 뿐만 아니라 단명에 그쳤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등장은 소련사회에 대변혁을 초래하였다. 그는 경제침체와 외교적 고립이라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내적으로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대외적으로는 글라스노스트(개방)라는 실용적인 정책을 펼쳤다. 국내 경제발전을 위해 국가통제체제를 완화하고 기업과 지방의 자율권을 확대하는 동시에, 시장경제제도 도입과 무역확대를 추진하였다. 또 관료주의의 축소, 권력의 지방분산, 인민대표회의 창설, 대통령제의 도입 등 정치개혁을 실시하였다. 1989년 최초로 다당제 선거가 실시되었고 1990년 고르바초프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가 집권했던 80년대 초반에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국방비가 폭증하여 재정부담이 급속히 늘어났으며 석유가격이 81년 고점을 찍은 이후 80년대 중반 폭락하면서 소련의 국가재정수입이 줄어들면서 경제가 더 침체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위기 속에 다음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개혁과 개방만이 소련이 살 길이라 생각했고,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펼쳤다. 개방 정책이 효과를 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소련의 재정은 1985~86년경 이미 붕괴 상황에 이른 상황이었다. 설상가상으로 1986년 체르노빌이 폭발하여 소련 경제에 치명타를 먹였고, 1989년 동유럽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었다. 먼저 발트 3국에서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며 소련에서 사실상 독립을 선언했는데, 과거 이러한 움직임을 군대를 이용해 강경 진압했던 소련 지도자들과 달리 고르바초프는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하였고, 오히려 이러한 소련의 모습에 동유럽 모든 나라에서 민주화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며 1990년 소련의 각 공화국들이 소련에서 독립을 선포했고, 동유럽의 공산정권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고르바초프는 소련내 각 공화국의 자치권을 보장하면서 소련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혼란 속에서 고르바초프의 인기는 폭락했고 소련은 급격히 와해되고 있었다. 1991년 소련 군부의 8월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보리스 옐친이 주도권을 잡았고, 1991년 말 고르바초프는 소련 해체를 선언하였다.

러시아 연방 출범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 아래 소련 내 각 공화국의 독립 움직임이 크게 일어났다. 1990년 2월 구소련 공산당 중앙위총회에서 '인도적·민주적인 사회주의를 꾀하며'라는 정치강령을 채택함으로써 공산당 일당독재가 부정되고 복수정당제가 열렸으며 당과 국가를 분리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1990년 3월에는 임시 인민 대의원대회에서 헌법개정이 이루어지면서 대통령직이 신설되었고 고르바쵸프는 구소련 공산당서기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구소련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부터 싹터온 개별 공화국의 민족주의와 자립요구는 러시아중심의 구소련공산당을 등식을 깨고, 1990년 6월 러시아가 독자적인 러시아 공산당을 출범시키고 주권선언을 하는 데 기여하였다. 당시 러시아 최고회의의장이었던 옐친은 제28차 공산당대회 토론회에서 확실한 복수정당제로의 이행, 당명의 변경 등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대회폐막 하루전인 1990년 7월 12일에 공산당 탈당을 선언하였다. 이 사태 이후 구소련연방의 해체가 촉진되었다.

1991년 6월 러시아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옐친은 공산당의 이념적 독재를 폐기하고 공산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없애는 조치들을 취함으로써 보수파 및 구소련 연방의 대통령인 고르바초프와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1년 8월 19일 보수파의 쿠데타시도가 옐친에 의해 진압되면서 옐친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옐친은 연방정부를 무력화하고 러시아공화국의 독립을 성취하기 위하여 1991년 10월 러시아공화국의 독자적인 경제개혁을 추구할 수 있는 3개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들은 대통령 포고령이 헌법 및 기타 법률과 동등한 권한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것을 무효화할 수 있도록 하여 옐친의 정치적 권한을 크게 확대시켰다. 또한 공화국 간 거래에 국제가격을 적용하고 연방에 대한 재정지원을 대폭 삭감함으로써 연방정부를 기능불능상태에 빠지도록 하였다. 마침내 1991년 12월 11개 공화국이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티에서 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독립국가연합) 결성에 합의함으로써 구소련은 완전히 해체되고 1992년 1월 1일자로 러시아를 비롯한 각 공화국은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었다.

러시아공화국과 옐친

옐친은 1992년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위해 상품이나 서비스 가격을 자유화하고 중앙집중식 자원분배제도의 폐기하였다. 그러나 생산의 독점화 등의 이유로 물가상승과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이러한 경제사정의 악화를 이유로 1993년 보수세력들은 옐친 탄핵안을 제출하였다. 옐친은 가까스로 탄핵안이 부결되자, 국민투표를 통하여 국민들의 신임을 재확인하고 사유화와 경제자유화를 더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렇지만 보수파가 입법부인 두마(Duma)를 장악하여 개혁을 거부하자, 옐친은 의회를 해산하는 등 강경한 조치를 취하면서 민영화 또는 사유화를 위한 지속적인 개혁을 진행하였다.

1995년 러시아의 경제는 안정을 찾고 약간의 성장을 보이면서 긍정적인 추세를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1997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1997년 불어닥친 아시아의 금융위기는 국가부채시스템을 손상시키면서 러시아 경제를 붕괴위기까지 몰고 갔는데, 러시아의 엄청난 해외부채는 과거 구소련의 부채였다. 실업과 국민생활수준의 저하 문제가 심각해진 가운데, 1999년 체첸의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체첸반군의 활동이 거세졌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러시아 안보회의 서기가 된 푸틴은 체첸분리주의자들에 대한 반격을 시도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둠으로써 옐친의 천거로 총리가 되었다. 옐친은 1999년 12월 31일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푸틴을 대통령 권한대행에 임명함으로써 푸틴시대를 열어주었다.

중앙집권화 푸틴시대

블라디미르 푸틴

새로운 세기를 맞으며 옐친은 당시 총리였던 푸틴에게 권력을 이양하였고, 2000년에 푸틴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대통령이 되었다.

푸틴은 옐친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러시아는 가즈프롬 등 민영화된 에너지 기업들을 다시 국유화시키면서 에너지 수익을 세수로 확보하여 경기 회복에 나섰다. 푸틴 정부는 2000년대 유가 상승으로 크게 호황을 맞았으며, 이렇게 확보한 세수로 외국에 있던 채무를 처리하고 대침체 당시 자국이 다시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슬란드가 부도 위기에 처하자 돈을 꿔 주는 채권자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푸틴은 러시아 연방의 민주주의를 말살했고, 정적들을 죽이고 언론을 탄압해 가며 독재자로 군림하였다. 푸틴은 2008년 자신의 임기가 끝나자 바지대통령을 내세워 집권한 이후 헌법을 개정하여 6년으로 증가시켰으며, 2020년에는 부정선거를 무릅쓰고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임기를 초기화하면서 사실상 종신 집권 독재자로써 자리잡게 되었다.

푸틴은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소련 해체로 인해 축소된 영향력 회복에 힘쓰는 한편, 총리 시절부터 해 오던 네오 나치를 필두로 한 극우 민족주의 운동을 나시같은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흡수하였다.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패권적인 행보에 나섰으며,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과시하려 하였다.

여기에 2014년에는 크림 위기와 돈바스 전쟁에 사실상 개입해 친서방 노선을 타는 우크라이나를 무력 압박하고, 2022년에는 1월 카자흐스탄 반정부 시위 진압, 2월 돈바스 지역에 공식적으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하는 등 중앙아시아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구 소련권에 물리적으로 영향을 주며 옛 초강대국으로의 회귀를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비슷하게 명분없는 전쟁 선포 및 군사적 무능 노출, 총동원령 선포 등으로 사실상 독재와 부패로 약화된 자국의 실상을 전세계에 노출시키며 국내/국제적 위신이 크게 실추되고 우크라이나의 생각보다 훨씬 강한 저항을 맞이하게 되면서 정치적으로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동영상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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