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예레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위키원
이동: 둘러보기, 검색
잔글
잔글 (같이 보기)
 
118번째 줄: 118번째 줄:
 
* [[아르메니아]]
 
* [[아르메니아]]
  
{{도시|검토 필요}}
+
{{:캅카스 같이 보기}}
 +
 
 +
{{서아시아 도시|검토 필요}}

2024년 1월 10일 (수) 09:40 기준 최신판

암만시 중심

예레반(아르메니아어: Երևան / Yerevan)은 아르메니아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이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 인간이 살아온 도시 중 한 곳이다. 예리반(Erivan), 예레브니(Erebuni)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었다. 흐라즈단강을 끼고 발달한 도시이며, 아라쿠스강의 지류가 시내를 흐른다. 예레반은 아르메니아의 행정, 문화, 산업의 중심지이다. 기계 제조나 금속업, 포도주, 브랜디 제조, 담배 제조업이 발달해 있다. 1918년 이래 아르메니아의 수도가 되었으며, 아르메니아의 역사상 열세 번째 수도이다.

개요[편집]

  • 행정단위: 아르메니아 수도
  • 면적: 223km²
  • 인구: 1,084,000명(2020년)
  • 지역어: 아르메니아
  • 시장: Hrachya Sargsyan

지명의 유래[편집]

예레반의 지명에 대한 기원은 많은 문헌과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전설에 따르면 예레반은 노아의 방주가 처음으로 도착한 곳으로, 지명은 당시의 고대 표기인 '예레벌(yereval)'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예레벌'은 '보이다' 혹은 '발견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한편, 기원전 782년, 우라르투 왕국의 아지쉬티 1세(King Argishti I)가 현재의 예레반 지역에 성채를 세우고, '아라반(Aravan)'으로 명명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역사[편집]

암만 성채의 헤라클레스 신전
서기 100년 경에 세워진 로마 극장

기원전 782년에 고대 아르메니아인의 조상인 우라르투 왕국의 6대 왕인 아르기슈티 1세의 명으로 쐐기문자로 기록된 비문에 근거해 이 무렵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때의 도시는 에레부니(Erebuni)라는 유적으로 남아있다. 이후 고대 아르메니아 왕국과 사산조 페르시아로마제국 시기를 거쳐 이슬람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도시는 아르메니아인들이 고대부터 성립해서 쭉 아르메니아인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이후 바그라투니 왕조 아르메니아 왕국과 셀주크제국,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이란의 다양한 왕조들과 오스만제국이 번갈아가며 차지하면서 현재의 시가지가 형성되었다. 이시기 오스만제국과 사파비제국의 전쟁의 결과 예레반이 황폐해지면서 아르메니아인의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고 주변의 무슬림 인구가 이주하기 시작했다. 1604년에 아바스 1세가 아르메니아인들을 추방했는데 이때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이 추방됐다. 17세기 예레반을 6번 방문한 프랑스인 여행자 장 밥티스트 타베르니에의 기록을 보면 예레반의 인구는 아르메니아인이 절대다수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도시의 인구는 17세기 감소하기 시작하여 오스만-호타키 왕조 전쟁까지 유지되다가 나디르 샤가 호타키 왕조를 쳐부수고 이란의 패권을 장악한 이후 주변의 무슬림 인구가 전란으로 예레반으로 이주하면서 아르메니아인 인구는 크게 감소했다.

18세기 말엽까지만 해도 늘어난 무슬림 인구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페르시아인이 인구의 절반 이상을 구성하던 도시였다. 하지만 1827년 10월 6일 러시아제국이반 파스케비치가 예레반을 점령하고, 이후 페르시아와의 튀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예레반은 러시아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1827년 점령당시 예레반은 소도시 규모로 2400여호에 대략 12000명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 중 일부가 점령 후 러시아의 박해로 인해 이란과 오스만제국으로 이주했으며, 1829년 4월에 실시된 인구조사에서 예레반에 거주하는 아제르바이잔인(당시에는 타타르라고 부름)의 숫자는 1807호 7,331명이었고, 아르메니아인은 567호 4,132명이었다.

러시아는 예레반을 중동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군사중심지로 만들고자 했고 자국내에 들어와있던 아르메니아인들을 집중적으로 이주시키는 반면, 아제르바이잔 인구를 다른 지역으로 쫓아내었다. 러시아의 통치에서 예레반은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1887년에 와인과 브랜디 공장이 문을 열었다. 1890년대에 주류와 미네랄 워터를 생산하는 다른 공장이 문을 열었다. 기념비적인 성그레고리 교회는 1900년에 문을 열었다. 전기와 전화선은 각각 1907년과 1913년에 도시에 도입되었다. 영국 여행자 린치가 1893 ~1894년에 예레반을 방문 했을때 그는 이곳을 동방의 도시로 여겼지만 도시의 극적 성장으로 오래된 건물이 철거되고 유럽의 스타일로 변모해있었다.

20세기 초에 예레반시의 인구는 29,000 명이 넘었다. 1902년, 철도선이 예레반과 연결되고 같은 해에 예레반의 첫 공공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1905년 나폴레옹 1세의 종조카 루이 조셉 제롬 나폴레옹이 예레반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913년 시에 전화선 가입자가 80명을 넘었다.

예레반은 1917년 러시아제국의 붕괴와 함께 예레반 총독이 해산 될 때까지 아르메니아 총독부의 중심지였다.

그리고 1905년~1906년 사이에 아르메니아-타타르간에 충돌로 상호학살이 일어나 바쿠, 예레반, 나흐츠반, 슈샤, 간자, 트빌리시 등등 캅카스 전역에서 3천에서 1만명의 아르메니아인과 백인 타타르 무슬림들이 살해 당하였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조직이 더 효율적으로 조직화됐기 때문에 백인 타타르인들의 피해가 더 컸다고 한다. 이 사건의 원인은 예일대 역사교수인 피루즈 카젬자데에 따르면 "양쪽에서 학살 책임을 묻는 것은 불가능하며 어떤 경우에는 바쿠와 간자에서 타타르가 먼저 사격을 했고 다른 경우에는 슈샤와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인이 먼저 사격을 했다는 말도 있다"고 했다.

20세기 초에 예레반의 인구는 약 3만명의 작은 도시였다. 오스만제국과 러시아가 1차 세계대전의 혼란속에 빠저들자 오스만제국의 아르메니아도 러시아의 지원을 얻어 독립의 혼란속에 전화에 빠저들었다. 그러나 러시아제국이 10월 혁명으로 붕괴하고 터키군의 아르메니아 대학살로 오스만제국 국경과 인접한 예레반 일대에 아르메니아인 대략 7만5천명이 정착하면서 예레반은 독립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대도시이자 수도로 거듭나게 되었다.

1919년 예레반 대학교가 개교하고 트램이 개통되는등 짧은 독립 기간동안 발전했지만 이후 1921년 4월 소련 적군이 침공해서 함락되었다. 소비에트 통치기간 동안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수도로서 처음엔 15만명 도시의 계획도시로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100만명 규모로 빠르게 성장하는 대도시가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소련계의 외국인들 특히 러시아인들도 예레반에 많이 이주했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의 숫자는 1916년 12,000명 수준이었으나 1926년에 5,216명으로 줄었고[5] 1939년 소련의 이주정책의 결과로 6539명으로 다시 늘었으나 이후 차츰 감소하기 시작하여 1979년엔 2341명까지 줄었다. 이후 1989년에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으로 양 민족의 갈등이 격화되자 완전히 떠나 지금은 한명도 찾아볼 수 없다.

1924년 소련정부는 대규모 소비에트 스타일로 도시를 개조하기 시작했다. 이 대규모 도시 개조는 명암이 있는데 상수도와 하수도가 설치되고 도시 인프라가 많이 좋아젔지만 문제는 오래된 도시 유적도 구세대적인 반동이라는 이유로 대거 철거됐다. 이때 사르다르 궁전을 비롯해서 많은 교회 유물이나 모스크나 이슬람 유물들이 많이 철거됐다.[6] 주변 언덕의 조림사업은 옛 예레반의 재앙이었던 먼지폭풍을 종식시켰다고 한다. 도시 개발 사업을 주도한 건축가는 알레크산드르 타마냔(Ալեքսանդր Թամանյան)이었는데, 타마냔이 설계한 예레반 도심부는 상당히 편이 좋은 편이다.

이때 만들어진 레닌 광장은 현재 공화국 광장으로 아르메니아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여기서 아르메니아 총리 취임식도 하고 중요한 정치 이벤트를 많이 한다. 1982년에 도시는 레닌훈장을 받았다.

1991년 구소련이 해체되고 난후 독립 아르메니아의 수도가 된 예레반은 독립 직후 구소련 국가들이 그랬듯이 경제난으로 전력난에 시달렸다. 전력난은 1996년까지 지속적으로 예레반을 괴롭혔다. 2006년에 도시개발이 대거 시작되고 난후 예레반 아파트의 가격이 90년대 초반과 비교해서 10배 가까이 올랐다고 한다.

이러한 건설붐의 결과로 중앙 아람로 주변의 역사적 건물들이 많이 훼철되고 현대적 건물로 많이 변모했다. 예레반은 정치의 중심지기 때문에 2008년 아르메니아 선거부정 시위나 2016년 세르지 사르키샨에 반대하는 시위 등 잦은 시위의 중심지가 되었다. 2018년 결국 세르지 사르키샨이 물러나고 니콜 파시냔이 총리가 돼서 민주화를 이룩했으나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 아르메니아가 패전하자 또 다시 니콜 파시냔에 대항하는 대규모 시위의 중심지가 되었다. 2021년 초기 총선의 결과 니콜 파시냔이 다시 승리함으로써 정국은 일단 안정화됐으나 야권은 반발하고 있어 다시 대규모 시위가 열릴 지도 모른다.

지리[편집]

암만은 요르단강 동쪽의 약 75km, 아라비아 고원의 서쪽 끝인 요르단 서북부에 위치하였으며 해발고도 약 1,000~1,100m이다. 암만의 지형은 아즐룬산맥(Ajlūn Mountains)과 연결되는 북서쪽의 살트, 북동쪽의 자르카, 서쪽의 마다바, 남서쪽의 카라크마안 등 7개의 주요 언덕이 있으며, 오늘날 도시의 주요 지역들은 각 언덕의 이름을 붙여 명명되었다. 도시의 북부에는 자르카강(Zarka river)이 흐르는데, 자르카강은 요르단강 하류에서 야르무크강(Yarmouk river)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지류로, 도시 북동쪽의 아인 가잘(Ain Ghazal)이라 불리는 샘에서 발원하여 깊고 넓은 계곡을 지나 서쪽에 있는 요르단 강으로 흘러간다.

기후는 지중해성기후대 근처의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반건조기후로 분류된다. 5월부터 11월까지 지속되는 여름은 길고 약간 더운 편이며 간혹 폭염이 나타나기도 한다. 4월에서 5월 사이에 시작하는 봄은 약 한 달 동안 지속되고 최고 기온은 28℃에 달한다. 겨울은 11월 말에서 시작해서 3월 초중순까지 지속된다. 보통 17℃ 이하를 유지하며 1년에 한 두 번 눈이 내리기도 한다.

연 평균 강수량은 300mm이며 주로 겨울철인 11월부터 4월에 내린다. 가장 더운 6월부터 8월까지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암만 도시 내에서도 각 자치구마다 경험하는 기후는 서로 다르다. 북부 교외의 아부 엔세르(Abu Nser) 자치구는 도시에서 서리가 내릴 만큼 가장 추운 반면, 중심부의 마르카(Marka) 자치구 등은 훨씬 더 기온이 따뜻하다.

요르단은 세계에서 기후가 가장 건조한 나라 중 하나에 속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디지(Disi) 대수층에서부터 암만으로 물을 수송하는 프로젝트를 2013년 7월부터 개시하여 가용 자원을 약 12% 정도 증가시켰다. 또한, 홍해사해 운하를 통해 공급되는 간척수와 해수를 담수화하여 부족한 물 자원 문제를 해소하고 있다.

지리[편집]

예레반은 아르메니아의 남서쪽에 자리한 아라라트평원의 북동부와 흐라즈단강(Hrazdan River) 유역에 위치한다. 도시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남쪽의 흐라즈단강에 인접한 지역은 완만한 평지를 이루고 전반적인 지형은 고산평원의 모습을 보인다. 평균고도는 990m이며 북동부는 상대적으로 지대가 높아 최대 고도는 1,390m에 달한다.

예레반의 중심부에서 약 8km 떨어진 에레보니구(Erebuni District)에는 1981년 정부에서 지정한 에레보니 국립보호구역(Erebuni State Reserve)이 위치한다. 에레보니 국립보호구역은 해발 1,300~1,450m에 걸쳐 펼쳐진 반건조 지형의 산악지대로, 두꺼비 등 희귀 양서류와 야생 벼가 자생하는 곳이다.

기후는 대륙성기후로, 추운 반건조 기후를 보인다. 여름은 덥고 건조하며, 겨울은 춥고 눈이 많이 내린다. 내륙 지역으로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사계절 내내 습도가 높지 않다. 예레반의 연평균 기온은 12°C 정도이지만, 큰 기온차로 가장 더운 7~9월 평균기온이 26°C에서 40°C를 웃돈다. 여름철은 건조하면서 온도가 높고 일조량도 풍부해 각종 과일이 자라는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가장 추은 1~2월은 평균 -4~-8°C 이지만 -15°C 이하로 기온이 내려가는 날이 많고, 눈도 많이 내린다. 봄·가을은 기온이 온화하지만 상대적으로 습도가 높고 비도 자주 내린다. 연평균 강수량은 318mm 이며 봄과 가을에 강수가 집중된다.

도시 형성[편집]

공산주의 시절 예레반은 아르메니아 출신 러시아 건축가 알렉산더 타마니안(Alexander Tamanian)의 계획 하에 대대적인 도시 재건축으로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예레반을 파리와 비엔나와 같이 넓은 대로에 신고전주의풍의 건물이 늘어선 도시로 개조하고자 하였고, 이에 따라 도시 전역에는 소련의 통치기에 건축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양식의 석조건물이 많이 들어섰다. 아르메니아에서 채취한 돌의 색깔이 분홍색을 띄어 ‘핑크색의 도시(Pink City)’로 불리기도 한다.

역사가 오래된 도시이지만, 중세마을 등과 같이 유럽 도시에 흔히 볼 수 있는 구시가지(Old Town)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는 오랜 외세의 지배와 더불어 소련의 통치시기에 낡은 주거와 상업지역을 허물고 대대적인 도시재개발을 진행하였기 때문이다.

시내관광의 중심 지역은 공화국광장(Republic Square)에서부터 예레반 오페라극장이 위치한 자유광장(Freedom Square)까지 길게 뻗은 켄트론 구역(Kentron District)이다.

켄트론 구역은 예레반의 중심부로, 타마니안이 두 개의 광장인 공화국광장과 자유광장을 축으로 본 지역을 설계하였다. 여기에는 프랑스 신고전주의 양식의 일종인 보자르 건축양식(Beaux-Arts architecture)의 건물이 늘어서 있다. 공화국광장과 자유광장은 2000년대 이후 조성한 현대적인 북쪽거리(Northern Avenue)로 연결되어 있으며, 북쪽거리를 따라 호텔·식당과 쇼핑센터가 몰려있다. 켄트론은 관광지이면서 대학가로, 예레반 국립대학교(Yerevan State University)와 예레반 농업대학교(Yerevan Agricultural University) 등 캠퍼스가 위치한다.

경제[편집]

교통[편집]

예레반은 아르메니아 항공운송과 철도망의 중심지이다. 시내의 대중교통은 트롤리버스와 소형버스, 지하철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예레반 시내에서 서쪽으로 약 12km에 위치한 즈바르트노츠 국제공항은 아르메니아의 관문으로, 약 20여 개의 외국항공사가 취항한다. 사선치 데이비트역(Sasuntsi Davit station)은 예레반의 유일한 기차역으로 튀르키예와 아제르바이잔의 국경 봉쇄로 국제선은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 노선만 운행되며, 여름 휴가철에는 조지아의 흑해 휴양지인 바투미까지 연장 운행된다. 예레반에서 이란까지 연결되는 철로는 아제르바이잔의 서쪽 영토인 나히체반 자치공화국을 경유하여 폐쇄되었다.

예레반의 대중교통은 트롤리버스와 지하철을 제외하고 모두 민간 기업이 운영하는데, 약 60여 개의 운송회사가 버스와 택시를 운행한다. 2017년 기준 예레반에는 37개의 버스노선이 운영되며, 마슈루카(marshrutka)라고 불리는 소형밴이 승객 운송의 50%를 담당한다. 트롤리버스는 1949년부터 운행되었는데 예레반시는 점진적으로 트롤리버스를 줄이고 일반버스로 대치하고 있다. 공산주의 시절인 1981년에 건설한 예레반 메트로(Yerevan Metro)는 1개 노선에 10개의 역이 있으며 총연장은 12.1km에 불과하다.

관광[편집]

예레반은 다수의 도서관·박물관·음악과 미술학교가 있는 문화예술의 도시로, 아르메니아를 대표하는 많은 랜드마크가 시내 전역에 산재한다.

대표적인 명소로는 우라르투 왕국 시기에 축조된 예레반의 기원이 되는 역사적인 유적지 에레부니 요새(Erebuni Fortress)와 6세기에 건축된 예레반에서 가장 오래된 하나님의 성모 카토기케교회(Katoghike Tsiranavor Church), 1997년부터 건축이 시작되어 2001년에 완공된 성그레고리 성당(Saint Gregory Cathedral) 등이 있다. 이외에 20세기 초 튀르키예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추모하는 치체르나카베르드(Tsitsernakaberd), 1971년부터 건축이 시작된 이후 현재도 공사가 진행 중인 거대한 석회 언덕인 케스케이드(Cascade)와 높이 22m의 아르메니아 어머니상(Mother Armenia monument)도 예레반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국립아르메니아 박물관(National Gallery of Armenia)과 아르메니아 역사박물관(History Museum of Armenia)은 예레반의 대표적인 박물관이다. 405년 아르메니아 문자를 창안한 언어학자인 메스로프 마슈토츠(Mesrop Mashtots)의 이름을 딴 고문서협회(Mesrop Mashtots Institute of Ancient Manuscripts)는 약 30만 개의 고문서가 보관된 곳으로, 아르메니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박물관이다. 이외에 아라라트 박물관(Ararat Museum)은 아르메니아 코냑의 역사를 알아보고, 직접 시음과 구매도 가능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시내에는 예레반 오페라극장(Yerevan Opera Theatre) 등 많은 극장과 공연장이 위치한다.

교육[편집]

예레반은 아르메니아 교육의 중심지로, 아르메니아의 약 60여 개의 국립 및 사립 대학교 중 50여 개의 대학교가 소재하며, 이중 23개는 국립대학교이다. 오랜 외세의 지배 후, 20세기 초에 독립국가가 만들어지면서 1919년, 최초 고등교육기관인 예레반 국립대학교(Yerevan State University)가 설립되었다. 이외에 1921년에 설립된 아르메니아 국립건축대학교(National University of Architecture and Construction of Armenia), 1922년에 설립된 예레반 국립의과대학교(Yerevan State Medical University)와 아르메니아 국립교육대학교(Armenian State Pedagogica) 등 대표적인 대학들이 예레반에 밀집해 있다. 또한 아르메니아 아메리칸대학교(American University of Armenia)와 러시아-아르메니아대학교(Russian-Armenian University) 등 외국계 법인이 설립한 사립대학교도 다수 위치한다.

소련의 통치 기부터 아르메니아의 과학기술의 중심지로, 대표적인 연구기관인 1943년 소련과학기술아카데미(Soviet Academy of Sciences)의 분원으로 출발한 아르메니아 국립과학아카데미(Armenian National Academy of Sciences)가 소재한다. 소련의 붕괴 이후에는 켄들 응용자연과학연구소(CANDLE Synchrotron Research Institute)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교육과 연구기관인 튜모 창의기술센터(TUMO Center for Creative Technologies) 등 여러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또한 아르메니아는 전통적인 체스의 강국으로, 초등학교에서부터 체스를 배우는데, 예레반에는 1970년에 문을 연 티그란 페트로시안 체스학교(Tigran Petrosian Chess House)가 위치한다. 1984년 아르메니아의 전설적인 체스챔피언 '티그란 페트로시안(Tigran Petrosian)'의 이름을 따 교명이 변경된 이곳은 여러 국제 체스 대회가 개최되기도 한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캅카스 같이 보기[편집]

남캅카스 국가
북캅카스 지역
캅카스 도시
캅카스 지리
캅카스 문화
캅카스 주변 지역


  검수요청.png검수요청.png 이 예레반 문서는 아시아 도시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