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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루트(영어: Meerut, 힌디어: मेरठ, 우르두어: میرٹھ)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 서부 미루트 지구의 도시이다. 인구는 157만 명이며 인더스 계곡 문명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정착촌이 이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고대 도시이다. 1857년 세포이 항쟁이 벌어진 도시이다.[1]
개요[편집]
메루트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 서부에 있는 공업, 군사 도시이며 갠지스강 평원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으며 해발높이는 219m이다.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서 북동쪽으로 70km, 수도 지역 내에 있으며 우타르프라데시주의 주도 러크나우에서 북서쪽으로 45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1806년에 영국이 병영을 설치한 이후로 군사도시로서 발전하였는데, 1857년 5월 10일에는 제3벵골 기병대의 인도인 병사들이 이른바 ‘세포이의 항쟁’을 일으켜, 북인도 전역에 확대되었다. 인도 북서부의 군사요충지이다. 갠지스강과 점나강 사이의 곡창지대에서 재배되는 밀, 목화, 사탕수수 등 농산물의 집산지이며 면방적, 화학, 식품, 제당, 도료 등의 큰 공장을 비롯하여 제조공장 및 많은 농산물 가공공장이 있다. 도시는 인도에서 가장 큰 스포츠 용품 생산자 중 하나이며, 악기 생산자 중 가장 크고, 아시아에서 가장 큰 금 시장 중 하나이다. "인도의 스포츠 도시"도 알려져 있다. 인도 최초의 지역 고속 교통 시스템인 델리-미루트 지역 고속철도 시스템(Delhi Meerut RRTS)이 현재 메루트에서 건설 중이다. 도시는 3개의 다른 고속도로가 있는 서부 우타르프라데시의 고속도로 수도로 알려져 있다. 메루트대학을 비롯하여 여러 단과대학이 있으며 자그마한 사원들이 많다.[2]
지리 및 기후[편집]
메루트는 인도 수도권(NCR)에서 델리 다음으로 큰 도시이며 스포츠 도시로도 알려져 있다. 메루트는 갠지스 평원과 야무나 평원 사이에 있다. 메루트 지역의 면적은 델리보다 큰 2,522km²이며 델리의 면적은 1,484km²이다. 하지만, 메루트의 인구는 델리보다 3배 적다.
메루트는 더운 여름과 시원한 겨울이 특징인 몬순의 영향을 받는 습한 아열대 기후를 가지고 있다. 여름은 4월 상순부터 6월 하순까지 지속되며 기온이 49°C에 이를 정도로 매우 덥다. 몬순은 6월 말에 도착해서 9월 중순까지 계속된다. 기온은 약간 떨어져 구름이 많이 끼지만 습도는 높아진다. 10월에 기온이 다시 상승하고 그 후 도시는 11월부터 3월 중순까지 온화하고 건조한 겨울철을 보낸다. 기록된 최저 기온은 2013년 1월 6일 일요일에 기록된 –0.4°C이다. 강우량은 연간 약 845mm로 농작물 재배에 적합하다. 대부분의 강우량은 장마철에 온다. 습도는 30~100%까지 다양하다. 도시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3]
역사[편집]
라마야나에서는 메이 다나브(May Danav)의 수도인 메이단트 카 케다(Maydant Ka Kheda)로 알려졌다. 이곳은 라바나(Ravana)의 아내 만도 다리(Mandodari)의 고향이었다.
1950-52년 메루트에서 북동쪽으로 37km 떨어진 비두라의 이름을 딴 고분군인 비두라카틸라(Vidura-ka-tila)에서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진 후 이 곳은 고대 도시의 유적인 것으로 결론났다.
메루트는 또한 알람기르푸르로 알려진 하라판 정착촌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더스 계곡 문명의 가장 동쪽 정착지이기도 했다. 메루트는 마우리아 황제 아소카 시대(기원전 273년~기원전 232년)에 불교의 중심지였으며, 현재 도시의 자마 마스지드 근처에서 불교 건축물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델리 대학 근처의 '바라 힌두라오 병원' 옆에 있는 델리 능선에 있는 아소카 기둥은 피루즈 샤 투글룩(Firuz Shah Tughlaq, 재위 1351–1388)에 의해 메루트에서 델리로 옮겨졌다. 나중에 1713년 폭발로 손상되었다가 1867년에 복구되었다.
서기 11세기에 도시의 남서쪽 지역은 요새를 건설한 불란드샤르(Bulandshahr)의 도르 라자 하르 다트(Dor Raja Har Dat)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이 요새는 오랫동안 강하기로 유명했고 아인-이-악바리(Ain-i-Akbari)에서 언급되었다. 그는 나중에 1018년 가즈니(Ghazni)의 마흐무드(Mahmud)에게 패하여 그의 군대와 함께 마흐무드에게 항복하였다. 자마 마스지드(Jama Masjid)로 알려진 유명한 지역 랜드마크는 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마흐무드의 고관에 의해 건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함락된 직후 도시는 현지 힌두 라자(Hindu Raja)에 의해 탈환되었으며, 도시 방어를 위해 건설된 그의 요새 일부는 최근까지 살아남았다. 1206년 델리 술탄국을 세운 고르의 무함마드 장군 쿠트부딘 아이바크는 1193년 메루트를 공격해 점령했다.
1399년 티무르는 미루트를 공격하고 약탈했다. 일리아스 아프간(Ilyas Afghan)과 그의 아들 마우라 무하마드 타네스와리(Maula Muhammad Thaneswari)는 사피가 이끄는 비이슬람교도들의 도움을 받아 개최했다. 티무르는 항복을 협상하려 했고, 이에 대해 주민들은 타르마시린(Tarmashirin)이 과거에 이 요새를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대답했다. 그는 격분하여 기병 만 명을 이끌고 출발했다. 군대가 성벽을 넘었고 사피는 전투에서 죽었다. 주민들은 죽었고 그들의 아내와 아이들은 노예가 되었다. 요새와 집들은 산 채로 전소하라는 죄수들과 함께 파괴되었다.
그 후 그 도시는 무굴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왔고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보냈다. 무굴 황제 악바르 대제(Akbar, 재위: 1556–1605)의 통치 기간 동안 이곳에 구리 동전을 위한 조폐장이 있었다.
미루트의 주요 지역은 16세기부터 18세기 후반까지 압둘라푸르 미루트의 지배하에 있었다. 사다루딘 샤 카비르 나크비 알 칸나우지 부하리(Sadarudin Shah Kabir Naqvi Al Kannauji Bukhari)의 후손인 사다루딘(Sadarudin)은 시칸다르 로디(Sikandar Lodi)의 수석 고문이자 위대한 성자 샤 주나(Shah Jewna)의 아버지였다.
1803년 델리가 함락되면서 마라타 가문의 다울라트 라오 신디아는 영국 동인도 회사에 영토를 양도했다. 메루트는 델리와 가깝고 부유한 갠지스 야무나 도브 안에 있는 지역 등 특히 중요한 관심사를 가지고 1806년에 설립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메루트는 인도의 가장 크고 중요한 군사 기지 중 하나로 진격했다. 도시는 1818년에 같은 이름의 지구의 본부가 되었다.
미루트는 1857년 인도의 컴퍼니 통치에 반대한 반란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유명한 슬로건인 딜리 찰로(Dilli Chalo)가 이 도시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며, 반란이 시작된 곳은 메루트 주둔지였다.
메루트를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반란은 1857년 3월 벵골의 바라크포어에서 시작되었다. 인디인 세포이 망갈 판데이는 지휘관 두 명을 향해 총을 쏘았지만 빗나갔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 하고 처형되었다. 4월에 판디의 반란의 불은 북인도를 불태웠고 동인도의 두 번째로 큰 수비대인 메루트에 도달했다. 이곳에서는 유럽인과 토종 해원이 각각 2,000명이 조금 넘는 균등하게 균형을 이뤘다. 유럽인 주둔지는 인도인 주둔지와 분리되었다. 근처에 사다르 바자르와 랄 쿠르티 바자르가 있었는데, 후자는 대통령 군대가 입었던 빨간 제복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1857년 4월 24일, 미루트의 사령관인 카마이클 스미스는 우타르 프라데시와 비하르에서 온 90명의 벵골 기병대를 행진시켰다. 그는 그들에게 새로운 엔필드 탄약을 발사하라고 명령했지만 85명은 거절했다. 탄피에는 뜯어야 할 종이가 씌워져 있었다. 이슬람 군인들은 그 종이가 돼지 지방과 힌두교, 소 지방으로 기름칠 되어 있다고 믿었다.
도시와 지역은 또한 1984년 힌두시크 폭동과 1982년 힌두시크 폭동으로 고통받았으며 1987년 5월 하시무라 학살 당시 지방무장경찰대(PAC) 요원들이 무슬림 42명을 사살한 사건도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이다. 2006년 빅토리아 파크 스타디움에서 열린 가전제품 "브랜드 인디아" 박람회에서 발생한 화재로 최소 100명이 사망했으며 당국은 이미 45명의 사망자를 확인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망자 수는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됐다.[4]
세포이 항쟁[편집]
세포이 항쟁(1857년 ~ 1858년)은 인도인 용병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영(反英) 항쟁이다.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인도를 간접적으로 통치하고 있었고 동인도 회사는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세포이는 페르시아어로 용병을 뜻하며 영국 동인도 회사에서 고용한 인도인 용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항쟁이후 인도는 영국 국왕이 직접 다스리게 되었고, 이 항쟁은 인도 독립운동의 시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인도는 90년 후인 1947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세포이 항쟁은 세포이 반란, 1857년 인도 항쟁, 제1차 인도 독립전쟁 등으로도 불린다. 이 명칭들 가운데 '반란'이란 것은 다분히 영국측 시각을 반영한 것이고, 인도인의 입장에서 이 항쟁은 영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으로 평가되었다. 세포이 항쟁은 빠른 속도로 인도 각지에 확산되어 각계 각층이 영국에 대항하는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주요 교전은 주로 갠지스강 상류 삼림 지역과 인도 중부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오늘날 인도의 행정 구역으로 보면 우타르프라데시주, 비하르주, 마디아프라데시주 북부, 그리고 델리 등지에서 교전이 있었다. 세포이 항쟁은 영국 동인도 회사의 종교에 대한 몰이해에서 촉발되었고 1858년 6월 20일에 과리오르가 함락되면서 절정을 맞았다. 세포이 항쟁은 인도 전역을 포괄하지는 못하였다. 항쟁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벵골, 뭄바이, 마드라스와 같은 지역은 상대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펀자브의 시크교 제후는 오히려 영국 동인도 회사를 지지하여 병력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하이데라바드, 마이소르, 트라반코르, 카시미르, 라즈푸탄 등과 같은 다른 많은 지역의 토후국들은 항쟁에 가담하지 않았다. 한편, 아와드와 같은 일부 지역에서는 항쟁이 유럽 국가 전체에 대한 배격운동 양상을 띄었다. 락슈미 바이와 같은 항쟁의 지도자들은 항쟁 이후에도 인도 독립 운동의 상징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세포이 항쟁의 지도자들은 새로운 질서에 대한 일관적인 이념을 공유하지는 않았다. 세포이 항쟁으로 인해 영국 동인도 회사는 해체되었고 영국은 인도에 대한 직접 지배를 위해 군사, 재정, 행정 등 각 분야를 개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영국은 영국령 인도 제국을 출범시켜 정부 직할로 편재하였다. 이로써 빅토리아는 인도 제국의 군주라는 새로운 지위를 더하게 되었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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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남아시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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