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이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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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이반도(영어: Sinai Peninsula)는 서아시아 지역의 아라비아반도 서쪽, 지중해와 홍해 사이에 있는 반도이다. 시나이반도는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를 연결하는 부분에 위치해 있으며, 지리적으로 서아시아의 레반트 지역에 속하고, 행정적으로는 이집트 영토에 속한다. 서쪽은 수에즈 운하와 수에즈만, 동쪽은 이집트와 이스라엘 국경과 아카바만이다. 면적은 60,000km², 인구는 약 60만 명이며 대부분 사막이다.[1]
개요[편집]
시나이반도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삼각형의 반도로 서아시아의 최서단이다. 동쪽으로 이스라엘 및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와 국경을 맞닿았다. 수에즈 운하 동편을 아시아로 보고 수에즈 운하 서편을 아프리카로 분류함이 보편적으로 시나이반도는 지리적으로는 아시아로 분류된다.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통로임과 동시에 역사와 종교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민족이 떠돌았던 곳이라 전해지며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시나이산 역시 반도 중앙의 모세산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동로마 제국 시대에 이미 성 카트린 수도원이 세워지는 등 성지로 여겨져 중시되었다. 주요 도시로는 지중해 해안의 엘아리슈와 홍해 휴양지로 유명한 샤름엘셰이크, 타바, 다합 등이 있다. 중세 시기 주요 도시였던 엘토르도 있다. 시나이반도는 무바라크가 물러난 이후, 이슬람 극단주의자들과 테러리스트에 의한 공격이 발생되고 있다. 휴양지 도시들은 비교적 안전하나 모세산과 같은 내륙은 테러 위협이 있다.[2]
시나이반도의 대부분은 두 개의 주, 즉 남부 시나이주와 북시나이주로 나뉜다. 다른 3개 주(州)는 수에즈운하를 가로질러 아프리카 이집트로 건너간다. 수에즈운하 남쪽 끝에 있는 수에즈주, 중앙에 있는 이스마일리아주, 북쪽에 있는 포트 사이드주이다. 고전 시대에 이 지역은 아라비아 페트라에아(Arabia Petraea)로 알려졌다. 반도는 성 캐서린 수도원 근처의 산이 성서에 나오는 시내산이라는 가정으로 인해 현대에 시내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시내산은 아브라함 신앙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중요한 장소 중 하나이다. 시나이반도는 고대 이집트 제1왕조(기원전 3100년경)부터 이집트의 일부였다. 이는 북쪽 지역인 레반트(현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의 영토)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레반트는 전략적 지정학적 위치와 문화적 융합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중심지였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및 소아시아의 여러 국가 사이의 갈등. 외국 점령 기간동안 시나이반도는 이집트의 나머지 지역과 마찬가지로 외국 제국, 즉 최근 역사에서는 오스만 제국(1517~1867)과 영국(1882~1956)에 의해 점령되고 통제되었다. 이스라엘은 1956년 수에즈 위기(이집트에서는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의 동시 공격으로 인해 삼국 침략으로 알려짐)와 1967년 6일 전쟁 중에 시나이 반도를 침공하고 점령해서 이스라엘 영토에 편입되었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는 시나이반도를 수복하기 위해 욤 키푸르 전쟁을 시작했으나 실패했다. 1982년,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조약의 결과로 이스라엘은 분쟁 지역인 타바를 제외한 시나이반도 전체에서 철수했으며, 타바는 1989년 중재 위원회의 판결 이후 반환되었다. 현재 시내산은 자연 환경, 풍부한 산호초, 성서적 역사로 인해 관광지가 되었다.[3]
지리 및 지형[편집]
시나이반도의 서쪽은 수에즈만, 동쪽은 아카바만이 경계다. 시나이반도는 삼각형 모양으로 북쪽 해안은 지중해 남부에 접해 있고 남서쪽과 남동쪽 해안은 수에즈만과 홍해의 아카바만에 접해 있다. 수에즈운하를 포함하고 있으며 폭이 125km에 달하는 수에즈 지협을 통해 아프리카 대륙과 연결되어 있다. 아시아 본토와 연결되는 동쪽 지협의 폭은 약 200km이다. 반도의 동쪽 해안은 아라비아판과 아프리카판을 분리한다. 최남단은 라스 무하마드 국립공원(Ras Muhammad National Park)이다. 시나이반도의 대부분은 이집트의 두 행정구역, 즉 남부 시나이(가눕 시나)와 북부 시나이(샤말 시나)로 나누어져 있다. 이들 지역의 면적은 약 60,000km²이고 인구는 약 60만 명이다. 수에즈 운하를 따라 아프리카 이집트로 건너가는 세 개의 행정 구역이 더 있다. 수에즈(el-Sewais)는 수에즈 운하의 남쪽 끝에 있고, 이스마일리아(el-Isma'ileyyah)는 중앙에, 포트 사이드는 북쪽에 있다. 시나이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는 북시나이 반도의 수도인 아리쉬(Arish)로 인구는 약 16만명이다. 다른 대규모 정착지로는 남부 해안의 샤름 엘 셰이크(Sharm el-Sheikh)와 엘 토르(El-Tor)가 있다. 내륙 시나이는 건조하고(사실상 사막) 산이 많고 인구가 희박하며 가장 큰 정착지는 세인트 캐서린과 네켈이다.
지형은 사막이 많은 편이며 대체로 남부가 높고 북부가 낮다. 2,642m에 달하는 카타리나산을 비롯해 2,000m대 산이 4개 있고 산지 지역은 화성암 지대로 이뤄져있으며 황량한 절벽과 깊은 계곡이 가득하다. 인구 대부분은 남쪽보다는 북쪽 지중해 연안과 수에즈 운하 근처에 모여살고 있으며 내륙에는 유목민 생활을 하는 베두인과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산다. 중동답게 석유, 망간, 구리, 철 등 자원도 풍부하다.[4]
역사[편집]
시나이반도는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아왔다. 이곳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서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구리 광석을 찾기 위해 시나이를 탐험한 것을 기록한 기원전 3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시나이라는 이름은 훨씬 오래 전에 알려진 듯하며, 중동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적 숭배대상인 '신'(Sin:달의 신)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보통 유대인에 연관된 성지로도 유명하지만 자세한 건 없다. 하느님이 모세에게 10계명을 준 장소로 유명하다. 시나이산이 그 장소라고 널리 알려져서인지 이슬람이나 기독교에서 성지로 유명한 곳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왕래하는 입구, 출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보니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나던 곳이지만 결국 인접한 당대의 강대국 상 이집트가 지배하게 되었다. 그 뒤로 상하 이집트가 통합되어 탄생한 고대 이집트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고대 이집트 왕국이 몰락해 아시리아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헬레니즘 제국으로 이어지는 지배자들의 속국이 되며 시나이반도도 그곳에 속하게 되었다. 그 뒤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가 지배했지만 아라비아반도에서 번성한 나바테아 왕국의 세력이 커지며 나바테아인들이 차지하게 됐다. 나바테아 왕국이 106년 로마 제국의 트라야누스 황제의 영토 확장으로 로마 제국에 편입되며 시나이 지역은 아랍 속주에 들어갔다.
로마 제국이 분열된 후에는 그대로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530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시나이산 아래에 3년에 걸쳐 성 카타리나 수도원을 지었고 이 곳은 지금까지도 기독교 성지가 되었다. 이곳은 나중에 이슬람교가 생기면서 이 수도원을 부수지 않고 수도원 안에 작은 모스크를 만들어 이슬람에서도 성지가 되었다. 현재도 수도원에서는 기독교 사제들과 무슬림 직원들이 함께 일하며 운영하고, 따로 예배를 드린다. 나중에 동로마가 약해지고 이슬람 세력이 커지면서 이슬람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다가 맘루크 왕조의 땅이 되었고 여기가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한 1517년 뒤로 오스만 영토가 되어 이스탄불에서 보낸 관리의 지배를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오스만 제국군과 영국군의 격전지였으며, 전쟁이 끝나자 시나이반도는 이집트 영토가 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 건국 이후로 허구헌날 전쟁터가 되기 일쑤였고 1956년 수에즈 전쟁에서 피해가 꽤 컸다. 제3차 중동전쟁 이후로 이스라엘이 시리아령이었던 골란고원과 함께 자국령으로 합병하였지만, 그 적은 인구로 이스라엘 본토의 3배에 달하는 넓은 시나이 지역을 다스리는 것도 어려웠고 여기에 거주하는 베두인과 충돌을 우려하여 그들을 꽤 잘 대해주었다. 정확히는 사실상 베두인들에게 자치를 맡기고 경제적 후원을 하며 뒤로 물러났기에 베두인과 충돌없이 잘 지냈다. 이스라엘 점유 당시에는 유대인 정착촌도 있었으나 이집트에게 돌려주면서 이곳의 정착촌들이 철거되기도 했다. 유대인 정착촌 및 정착촌들을 이어주는 도로들은 주로 시나이반도 남부 해안가에 집중되었다. 제4차 중동전쟁에선 소련의 도움을 얻은 이집트가 온갖 창의적인 방법으로 이스라엘군을 수에즈운하 동편 30km까지 밀어냈다. 그러나 악전고투 끝에 골란 고원에서 시리아군을 격퇴하고 전열을 정비한 이스라엘이 샤론 장군의 지휘아래 수에즈 남부에서 반격작전을 벌여 수에즈 운하 서편으로 3개 사단이 넘어가 이집트 본토를 공격했고 결국 이집트도 본토가 위험한 상황에서 전쟁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판단 양국은 종전에 합의했다. 이스라엘이 수에즈 운하 동편 30 km 지점까지의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게 반환하고 30km 이후 동쪽의 시나이반도 땅은 이스라엘 영토로 하는 조건으로 종전을 했고 이후 여러차례 협상을 통해 이스라엘은 결국 시나이반도 전역을 1979년과 1982년에 이집트에게 완전히 돌려주었다. 그 이유는 이 당시의 이집트의 인구는 약 4500만 명이었던데 반해 이스라엘 인구는 고작 390만 명에 불과했기에 그 정도의 인구로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통치도 힘든 판에 이스라엘 본국 영토의 3배에 달하는 시나이반도를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점령 시절에도 이 지역에 대한 상주인구를 늘리고자 이스라엘 정부는 자국내의 유대인들의 이주를 붓는 것만 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 캐나다 등 서방국가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민오면 시나이반도로 이주해달라고 호소했지만 이들 유대인들은 당연히 위험한데 오기 싫어하며 이주를 거부했다. 한편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종전 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평화협상이 진행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이집트 반환이 논의되자 당시 이스라엘내 극우 정치인들과 시나이반도에 정착한 이스라엘 유대인 국민, 강경파 이스라엘군 장성들은 반환을 결사 반대하며 제2의 이스라엘을 세우거나 또는 시나이반도를 이집트령과 이스라엘령으로 분할하여 영토 일부 지역이라도 이스라엘 영토로 점유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몽골이나 칠레, 아르헨티나같이 국토가 방대하면서 인구가 적은 해외 국가들의 사례를 대며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를 계속 통치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 측이 이집트와 국교를 맺고 캠프 데이비드 협정 당시 전면 물러나면서 이들도 한발 물러나게 되었고 극히 일부 지역에 여전히 거주하면서 이집트 국적을 받고 이집트 정부에게 세금을 내며 산다. 이스라엘 관광객들에게 인기있었던 관광명소이기도 했다. 그러나 2004년 터진 누웨이바 동시다발 폭탄 테러로 유태인 관광객만 12명이 죽고 66명에 이르는 부상자가 생긴 뒤로 매해 100만 명 이상 가던 유태인들은 관광을 멈췄고 지금은 친 다에시 및 다에시 지파들 성향의 테러리스트들이 나타나면서 사실상 가기 어렵거나 가는 사람들이 있되 관광객 수가 줄어들었다.[5]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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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시나이반도〉, 《위키백과》
- ↑ 〈시나이 반도〉, 《요다위키》
- ↑ 〈시나이반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 〈시나이 반도〉, 《나무위키》
- ↑ "Sinai Peninsula", Wikipedia
참고자료[편집]
- 〈시나이반도〉, 《위키백과》
- 〈시나이 반도〉, 《나무위키》
- 〈시나이 반도〉, 《요다위키》
- "Sinai Peninsula", Wikipedia
- 〈시나이반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편집]
레반트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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