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기기관
증기기관(steam engine)이란 증기의 열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꾸는 열기관이다. 영국의 발명가 토머스 뉴커먼(Thomas Newcomen)이 발명했고, 제임스 와트(James Watt)가 개량하여 만들어진 장치이다. 기계 동력의 주요한 근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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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개요[편집]
증기기관은 증기의 열에너지를 동력원으로 이용하여 기계적인 일을 하는 기관이다. 기관에 사용되는 열에너지는 석유나 석탄을 연소시키거나 원자력을 이용해 얻는다. 이렇게 얻어진 열로 고온 고압의 수증기를 만들어 수증기의 압력으로 그 안의 피스톤을 움직이게 하고 그 왕복운동으로 동력을 얻는다. 한 번 사용되고 난 증기는 많은 에너지를 역학적 에너지로 빼앗겼으므로 저온 저압의 수증기로 바뀌어 다시 돌아간다. 1699년에 영국의 토마스 세이버리(Thomas Savery)가 증기 펌프 기관을 실용화한 이래로 토머스 뉴커먼(Thomas Newcomen), 제임스 와트(James Watt) 등이 효율이 높은 증기기관을 계속 발명하였다. 증기기관차, 증기선 등에 사용되며 유명해졌으며, 이는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증기기관의 장점은 다른 열기관에 비해 구조가 간단하고 취급이 쉬우며, 고장이 적어 수명도 길다. 또 고압 증기의 사용으로 인해 회전력이 강하며, 저속에서도 힘이 세다. 반면 역회전하면 열효율이 떨어지고, 회전 속도가 느려지며, 출력이 작고, 보일러 또는 복수기 등이 필요하여 소형 및 경량화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는 한계가 있다.
역사[편집]
증기의 활용[편집]
증기기관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으로는 1세기 고대 이집트에서 태어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한 그리스인 발명가이자 수학자인 헤론(Heron)의 이알러파일(aeolipile)이 있다.[1] 이알러파일은 작은 증기기구로, 속이 텅 빈 구가 서로 반대쪽에 위치한 베어링 위에 올려져있어, 수평의 축 위에서 자유롭게 회전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이알러파일은 증기기관의 최초격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생산 현장에서 사용되지는 않았고 장난감에 가까웠다. 이후에도 증기를 활용하려는 시도는 계속되었다. 12세기에는 끓인 물로 오르간을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고, 15세기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가 증기를 활용한 대포를 설계하기도 했다. 1551년에 오스만 이집트의 타키 알딘(Taqī al-Din)은 증기를 활용하여 모래톱을 회전시키는 장치를 고안했고, 1601년에 이탈리아의 지오바니 포르타(Giovanni Porta)는 증기를 사용하여 압력이나 진공을 만드는 실험을 했다. 1606년에는 스페인 출신의 제로미노(Jerónimo)가 광산에서 물을 퍼내는 증기기구를 고안하여 특허를 받았으며, 1630년에는 영국의 윌리엄 램지(William Ramsay)가 초기의 증기기관인 화력기관으로 특허를 받았다.[2]
증기기관의 실용성[편집]
실용성을 가진 증기기관은 17세기 후반에 등장했다. 당시는 목탄에서 석탄으로 연료가 대체되면서 탄광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탄광이 점점 깊어지며 통풍과 배수의 문제가 발생했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증기의 힘을 활용하는 방안이 주목을 받았다. 1663년에 영국의 귀족인 에드워드 서머셋(Edward Somerset)은 자신의 발명품을 실은 책자를 발간했는데, 거기에는 새로운 유형의 증기펌프가 포함되어 있었다. 실린더 속에 증기를 가득 채운 다음, 외부에 별도로 설치된 냉각기로 증기를 응축시키는 방법이었다. 이를 통해 실린더 내부에 부분적인 진공이 만들어지면 탄광 바닥으로부터 물이 실린더 속으로 빨려 올라올 수 있었다. 서머셋은 자신의 증기펌프를 실제로 설치하기도 했지만, 사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1698년에 영국의 군사기술자 토마스 사베리(Thomas Savery)는 '광부의 친구(miner’s friend)'로 불린 증기펌프로 특허를 받았다. 그것은 서머셋의 증기펌프와 비슷한 방식이었지만, 차가운 물을 실린더 외부가 아닌 내부에 직접 뿌린다는 차이가 있었다. 사베리의 증기펌프는 몇몇 탄광에서 사용되었으나, 그 장치로는 10미터보다 더 깊은 곳의 물은 끌어올릴 수는 없었다. 피스톤으로 구동되는 증기기관을 최초로 고안한 사람은 프랑스 출신의 위그너 교도인 드니 파팽(Denis Papin)이었다. 그는 1671~1674년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Christiaan Huygens)가 화약엔진을 만드는 일을 도왔으며, 1676~1679년에는 로버트 보일(Robert Boyle)의 조수로 일하며 최초의 압력솥을 발명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파팽은 1690년에 수증기를 이용하여 실린더 내의 피스톤을 위아래로 움직이는 피스톤기관을 만들었고,[3] 1705년에는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Gottfried Leibniz)의 도움을 얻어 고압에서 피스톤을 움직이는 두 번째 증기기관을 고안했다. 그러나 파팽의 증기기관은 물을 끓인 후 피스톤을 움직이기까지 긴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사용되기는 어렵다는 한계가 있었다.[2]
증기기관의 상업화[편집]
상업화에 성공한 최초의 증기기관은 뉴커먼 기관이었다. 토머스 뉴커먼(Thomas Newcomen)은 영국에서 대장장이로 일하면서 탄광을 자주 방문했기 때문에 효과적인 증기기관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파팽이 증기기관에 피스톤을 사용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바탕으로 사베리의 증기펌프를 개량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뉴커먼은 배관공인 존 캘리(John Cally)와 힘을 합쳐 1712년에 대기압기관을 개발하여 탄광에 설치했다. 당시에 뉴커먼은 실린더와 피스톤이 정확하게 들어맞을 수 있도록 피스톤 상부에 고무 원반을 씌웠다. 이와 함께 그는 사베리에게 동업을 제의하여 이익을 함께 나누기로 함으로써 특허의 문제도 해결했다. 뉴커먼기관의 작동 원리는 먼저 균형 추가 밑으로 떨어지면 피스톤이 실린더의 꼭대기로 올라가고, 증기기관의 작동을 위해 피스톤 밑의 실린더에 증기를 채운다. 그런 다음 실린더 내부에 차가운 물을 뿌리면 증기가 응축되면서 부분적으로 진공이 만들어진다. 이 진공의 힘으로 피스톤은 균형추의 무게를 누르고 압력이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피스톤이 실린더의 아랫부분에 도착하면, 피스톤 밑으로 모여든 증기로 인해 대기압과 증기압이 균형을 이루게 되고, 균형추는 다시 피스톤을 끌어올려 실린더 꼭대기로 되돌려놓는다. 이 과정은 계속해서 반복된다.[2] 뉴커먼기관은 큰 성공을 거두어 1775년까지 영국에서는 600대가 넘는 뉴커먼기관이 사용되었으며, 1776~1800년에는 1,000대에 달하는 뉴커먼기관이 제작되었다. 1740년경에 뉴커먼기관은 이전에 사람 25명과 말 10마리가 일주일 동안 하던 일을 단 하루 만에 해낼 수 있었다.[4]
와트의 발명[편집]
뉴커먼기관의 등장 이후 증기기관을 개량하기 위한 시도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713년에 험프리 포터(Humphrey Potter)는 밸브를 자동으로 열고 닫는 시스템을 개발했고, 1718년에 존 데자굴리어(John Desaguliers)는 안전밸브와 이중밸브를 고안했으며, 1720년에 제이콥 로이폴트(Jacob Leupold)는 두 개의 실린더를 사용하는 증기기관을 제안했다. 이어 1769년에는 존 스미튼(John Smeaton)은 피스톤 운동을 이전보다 더 길게 할 수 있도록 뉴커먼 증기기관을 개량했고, 1779년에는 제임스 피카드(James Pickard)에 의해 뉴커먼기관에 크랭크가 설치되었다. 증기기관의 개량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은 제임스 와트(James Watt)였다. 그는 1763년에 대학에서 일하던 중 뉴커먼기관의 모형을 보게 되었다. 와트는 뉴커먼기관을 분석하며 증기가 크게 낭비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뉴커먼기관은 증기의 동력을 사용한 후 냉각시킬 때 실린더 속에 냉수를 넣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때 냉수는 증기를 냉각시키는 동시에 실린더도 냉각시키게 되며 이에 따라 다시 실린더를 가열하려면 그만큼 많은 석탄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와트의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분리응축기를 고안했다. 이전과 같이 수증기를 실린더 안에서 직접 냉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린더로부터 분리된 응축기를 별도로 만들어 실린더 안의 수증기를 관을 통해 뽑아낸 후 실린더 바깥에서 냉각시키는 원리였다. 와트는 분리응축기를 사용하면 증기기관의 열효율이 이전보다 2~4배 향상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1765년부터 분리응축기가 설치된 증기기관의 모형을 설계하고 개선하기 위해 꾸준히 작업했다. 결국 1769년 1월 5일, 와트는 화력기관에서 증기와 연료의 소모를 줄이기 위해 고안한 새로운 방법으로 특허를 받게 되었다.[2]
만능동력원[편집]
와트는 1774년에 매튜 볼턴(Matthew Boulton)과 투합하여 증기기관의 상업화에 매진했다. 그 결과 1776년 3월 8일, 탄광에서 분리응축기를 장착한 새로운 증기기관을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그 후 와트와 볼턴은 탄광뿐만 아니라 제분소, 방직 공장, 제철소 등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증기기관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서는 왕복운동을 회전운동으로 바꿀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는데, 와트는 윌리엄 머독(William Murdock)의 도움으로 1781년에 유성식 기어를 고안하여 문제를 해결했다. 이는 맞물린 한 쌍의 톱니바퀴 중에서 한 쪽을 고정시키고 다른 쪽이 고정된 톱니바퀴를 도는 장치였다. 이 장치 덕분에 와트의 증기기관은 방직기와 같이 상하, 좌우, 회전운동을 모두 필요로 하는 기계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와트의 혁신은 끊이지 않았다. 1782년 그는 실린더의 양 끝을 응축기와 보일러에 밸브 장치로 연결함으로써 피스톤의 상하운동을 모두 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는 복동식 증기기관을 개발했다. 피스톤의 하강운동뿐만 아니라 상승운동에서도 증기압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5] 와트는 1783년에 유성식 기어를 장착하고 실린더 두 개를 사용하는 증기기관의 개발을 완료했는데, 이 장치에는 회전식 증기기관이란 명칭이 붙여졌다. 다음 해인 1784년에 와트는 자신의 사무실에 회전식 증기기관을 설치하여 운전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에도 와트는 더욱 완벽한 증기기관을 만들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1787년에는 1788년에는 증기기관의 속도를 자동적으로 제어하는 원심조속기가 활용되었고, 1790년에는 실린더 내부의 압력을 표시하는 우수한 성능의 압력계가 개발되었다. 178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생산된 와트의 새로운 증기기관은 만능동력원으로 각광을 받았다. 볼턴의 말에 따르면, '나라 전체가 와트의 증기기관에 미친 상태'였다. 특히 1789년에는 와트의 증기기관이 면공장에 채택됨으로써 증기기관의 사용처는 탄광을 넘어 공장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또한 19세기에 들어서는 고압 증기기관이 개발되어 운송수단에 적용되었다. 리처드 트레비식(Richard Trevithick)이 1800년에 최초의 고압 증기기관을 발명한 후 1804년에 철도 궤간을 달릴 수 있는 증기기관차를 제작했던 것이다.[2]
트레비식의 증기기관차[편집]
영국인 리처드 트레비식(Richard Trevithick)은 트레비식 고압 증기기관을 활용해 증기기관차를 시험 운전하는 데 성공했다. 트레비식 고압 증기기관은 와트의 증기기관에 있던 응축기를 없앤 대신 보일러에서 발생하는 증기로 움직이는 피스톤이 장착된 실린더를 장착했다. 트레비식 증기기관은 실린더 모양의 보일러에 수평으로 장착된 한 개의 실린더, 보일러 연소에 쓰이는 석탄가스가 배출되는 연통, 실린더 피스톤 봉에 연결된 바퀴로 구성됐다. 트레비식은 자신의 증기기관을 이용해 최초의 기관차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1804년 영국에서 첫 선을 보인 이 기관차는 무게가 5톤이나 나갔지만 70명의 사람과 석탄차를 포함해 모두 25톤이 나가는 차량을 시속 8km로 이동시켰다. 말이 아닌 기계가 사람을 나르는 첫 시도였다.[6]
스티븐슨의 증기기관차[편집]
트레비식의 기관차를 발전시켜 본격적인 철도의 시대를 연 사람은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이었다. 스티븐슨은 트레비식과 달리 실린더를 수직으로 장착하고 보일러 등을 개량했다. 이를 통해 시속 39km를 낼 수 있는 증기기관차인 로코모션(Locomotion)을 개발해 최초의 석탄 수송 철도 노선에 투입했다. 스티븐슨은 당시 발달했던 제철 공법을 활용해 기차가 다니는 선로도 개량했다. 무거운 기관차가 제대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선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829년에는 훗날 증기기관차의 표준 모델이 된 로켓호를 개발됐다. 로켓호는 당시 기관차 경진대회에서 시속 48km의 속도로 우승을 했다. 로켓호가 최고 속도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개의 관이 들어있는 보일러를 이용해 연소가스의 열이 증기를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이전 기관차 보일러에는 한 개의 파이프만 있었으나, 로켓호 보일러에는 25개의 구리 튜브가 들어 있었다. 로켓호에는 두 개의 실린더가 장착됐으며 연소실이 보일러와 분리됐고 연소실 두께도 배로 늘어났다. 이전 증기기관차보다 훨씬 효율이 높아진 로켓호는 최초의 여객용 정기 노선에 활용됐다.[6]
증기기차의 발달[편집]
증기기관차의 발전은 여러 변화를 가져왔다. 사람과 물자의 이동 시간은 매우 빨라졌고 이전보다 훨씬 편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로켓호가 장착된 기차는 마차보다 두 배나 빨랐고, 요금도 마차의 3분의 2밖에 되지 않았다. 가장 빠른 말로도 시속 18km 밖에 낼 수 없었지만 기차는 시속 50km까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말에게 먹이를 주거나 지친 말을 교체하기 위해 1시간 마다 여행을 멈출 이유도 없었다. 이에 여행객은 점차 증가했다. 맨체스터와 리버풀 노선은 증기기차 개통 후 1년도 채 안 돼 50만 명이 이용했다. 기차의 빠른 속도는 국가 경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공장에서 생산된 물건들이 인근 지역을 벗어나 멀리까지 팔려나가게 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점점 더 많은 공장에서 기계를 이용해 더 많은 양의 상품을 생산했다. 유럽 대륙에서는 철도가 발달하면서 이웃 지역으로 수출하는 상품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경제의 규모가 전체적으로 커졌다. 또한 증기기차의 발달은 사람들이 시간을 엄격하게 지키는 태도를 갖게 했다. 마차가 다니던 시대에도 마차의 도착 예정 시간이 있었으나 제 시간에 도착하는 경우보다 늦는 경우가 더 많았다. 반면 기차는 거의 정해진 시각에 도착하기 때문에 옛날 마차를 대하던 것처럼 느긋하게 기차역에 도착하면 기차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기차 시간을 정확히 지켜야 했고 이것이 습관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시계를 보기 시작하며 약속 시간도 구체적인 시간으로 구체화됐다.[6]
증기기관의 쇠퇴[편집]
증기기관차는 19세기 말부터 새로운 기술에 밀리기 시작했다. 디젤기관차 등 증기기관차보다 편리한 기술이 나타나며 증기기관차의 입지는 점점 약해졌다. 각종 기계 기술의 발달로 초기의 트레비식 증기기관차에 비해서 비약적인 발전을 했지만, 기관차 가동 전에 충분한 예열 시간이 필요하며 증기 발생을 위해 충분한 물을 필요로 하는 점 등이 불편했다.[7] 이런 단점을 보완하며 등장한 것이 디젤기관이다. 증기기관을 작동하는 데는 여러 사람이 필요했지만 디젤기관은 한 사람만으로 작동이 가능했다. 또한 증기기관에 비해 훨씬 조용하고 날씨 변화에 의한 지장도 거의 없었으며 시동과 중지도 훨씬 쉬웠다. 증기기관처럼 늘 정비와 청소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이런 장점들로 인해 디젤기관차는 증기기관차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6]
종류[편집]
왕복기관[편집]
왕복기관이란 연료의 폭발로 발생한 압력으로 실린더 안의 피스톤을 왕복운동시켜 동력을 얻는 기관을 뜻한다. 이때 피스톤의 왕복운동을 그대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피스톤, 피스톤핀, 연결봉, 크랭크핀을 통해서 크랭크축의 회전운동으로 전환시켜 이용한다. 왕복기관의 종류는 연료의 연소가 일어나는 장소에 따라 크게 외연기관용 왕복기관과 내연기관용 왕복기관으로 구분할 수 있다. 외연기관용 왕복기관은 연료의 연소가 밀폐된 내부가 아닌 실린더 외부에서 일어나는 기관으로, 산업혁명을 불러온 증기기관이 이에 해당한다. 보일러에서 연료를 연소시켜 발생한 고온∙고압의 증기를 실린더 내부로 전달해 피스톤을 움직이는 기관으로 주로 증기기관차에 사용되었다. 내연기관용 왕복기관은 실린더 안에서 연료의 연소가 일어나는 기관으로, 20세기 이후 주요 운송 수단인 자동차, 선박 등에 이용되고 있다. 내연기관용 왕복기관은 사용하는 연료에 따라 디젤기관, 가솔린기관 등의 종류가 있다. 가솔린기관은 점화 플러그로 불꽃을 일으켜 연료를 연소시켜 동력을 얻으며, 디젤기관은 실린더 내부의 공기를 압축시켜 가열된 공기에 연료를 분사하여 연소시켜 동력을 얻는다. 내연기관용 왕복기관은 연료의 연소에서 발생하는 폭발력을 이용하기 때문에 진동과 소음을 수반하기 쉬운 단점이 있으나, 외연기관용 왕복기관보다 부피가 작고, 다양한 요구에 따른 출력을 맞출 수 있어 소형 제초기와 RC카 엔진부터 대형 선박의 디젤엔진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다.[8]
증기터빈[편집]
증기터빈은 보일러에서 발생시킨 고온·고압의 증기를 노즐 또는 고정된 날개로부터 분출 및 팽창시켜 나온 고속의 증기류를 회전하는 터빈 날개에 부딪쳐서 그 충동 작용 또는 반동 작용에 의하여 축을 회전시키는 것이다.[9] 따라서 증기터빈은 증기가 가지는 열에너지를 속도에너지로 바꾸기 위한 노즐과 속도 에너지를 기계적 일로 바꾸기 위한 터빈 날개로 하여 구성되어 있다. 노즐과 터빈 날개의 한 조를 터빈의 단이라고 한다. 증기터빈은 이러한 단을 여러 개 나란히 배열하여 구성되어 있다. 보일러로부터 보내 오는 고압 증기는 조절 밸브를 지나 증기실로 들어가고 여기서부터 팽창하면서 각 단을 통과하여 배기실로 나간다. 회전부는 터빈축·임펠러 및 터빈 날개로 되어 있다. 임펠러는 터빈 축에 장치되어 차실에 수용되고 축은 차실 밖의 베어링에 지지된다. 터빈 축이 차실을 관통하는 곳에는 증기의 누설을 방지하기 위하여 래버린스 패킹과 같은 밀봉 패킹이 있다. 차실을 나온 증기는 복수기로 들어가 여기서 냉각되어 물이 된다. 이 물은 다시 급수 펌프로 보일러에 되돌려진다.[10] 노즐은 각 단마다 설치되는 칸막이판 속에 고정되어 있다. 터빈의 단에는 터빈 날개를 충동력만으로 구동하는 것과 충동력과 반동력의 양쪽에 의하여 구동하는 것이 있다.[11] 전자를 충동단, 후자를 반동단이라고 한다. 그리고 충동단만으로 이루어진 터빈을 충동터빈, 반동단만으로 이루어진 터빈을 반동터빈이라고 한다.[12] 증기터빈은 회전운동만으로 회전속도를 빠르게 하여 출력당 중량을 작게 할 수 있고 장시간의 연속운전이 가능하다. 따라서 왕복형의 증기기관 또는 내연기관 등에 대신하여 화력발전소, 선박, 공장 등의 대출력 원동기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13]
영향[편집]
1차 산업혁명[편집]
산업혁명을 받치고 있는 기반은 기술혁명이다. 세 번의 산업혁명이 이어지는 동안 다섯 번의 기술혁명이 있다. 한 번의 산업혁명마다 두 번의 기술혁명이 있었다. 산업혁명이 시작되는 시기는 기술혁명보다 약 20년 정도 앞선다. 도전적인 기업가들이 사업성이 있을 만큼 성숙하기도 전에 신기술을 산업화하여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에서 도전 정신이 충만한 기업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는 1차 산업혁명을 주도했던 기술들의 발전 궤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차 산업혁명을 주도했던 기술들은 오래 전부터 발전되어 오던 것들이었다. 열효율은 2% 내외로 매우 낮았지만 값이 싸고 다루기 쉬웠던 토머스 뉴커먼(Thomas Newcomen)의 증기기관이 장악하고 있던 광산 배수 시장에, 값이 비싸고 다루기 까다로운 제임스 와트(James Watt)의 증기기관 기술을 도입한 사업가 매튜 볼턴(Matthew Boulton)이 있었기에 1차 산업혁명이 촉발될 수 있었다. 효율이 높은 증기기관은 높은 생산성으로 연결되므로 에너지 수요가 컸던 섬유산업이나 철도, 증기선 등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급격히 늘어나는 증기기관의 수요가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때마침 제련기술이 고급 철강 소재를 대량 공급할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하였고, 증기기관의 실린더 블록을 가공할 수 있는 선반기술이 개발되어 증기기관 기술에 융합되었기 때문이다. 즉, 이전부터 발전해오던 기술들이 성숙되어 서로 융합함으로써 성장하고 있던 섬유산업의 발전을 가속시켰으며 작은 나라 영국이 세계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라로 만들었다.[14] 하지만 이는 곧 공장과 기계가 들어서게 되어 기계들이 사람이 할 일을 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부익부 빈익빈을 가속화 시켜 공산주의가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15]
각주[편집]
- ↑ 〈헤론〉, 《위키백과》
- ↑ 2.0 2.1 2.2 2.3 2.4 송성수 작가, 〈세상을 바꾼 발명과 혁신 - 증기기관 (헤론의 증기기구에서 와트의 증기기관까지)〉, 《생각의힘》, 2018-01-02
- ↑ 핸드메이커, 〈(핸드메이드 역사 이야기 3) 기계혁명과 포드 시스템, 대량생산의 시작〉, 《네이버 포스트》, 2019-09-16
- ↑ 〈미래기술관 - 산업혁명 - 과학기술의 혁명 - 증기기관〉, 《국립중앙과학관》
- ↑ 이연선 프로, 〈증기기관으로 1차 산업혁명을 가져온 '제임스 와트' (인포그래픽_세계인물편)〉, 《시선뉴스》, 2017-02-04
- ↑ 6.0 6.1 6.2 6.3 동국대학교 교양교육원 박진희 교수, 〈물리산책 - 증기기관차의 발명 ('철도의 시대'를 열다)〉, 《과학창의재단》, 2011-08-17
- ↑ 누리, 〈증기기관차의 발명 -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블로그》, 2011-08-17
- ↑ 〈왕복기관 (reciprocating engine, 往復機關)〉, 《두산백과》
- ↑ 꽃두루, 〈증기터빈이란...〉, 《네이버 블로그》, 2006-08-23
- ↑ 스끼다시, 〈Steam Turbine〉, 《네이버 블로그》, 2009-10-28
- ↑ 〈증기터빈(steam turbine)〉, 《사이버기술교실》, 2001-02-09
- ↑ ra07p5xw, 〈충동터빈과 반동터빈〉, 《네이버 블로그》, 2015-08-10
- ↑ 〈증기터빈의 특징과 용도〉, 《두산백과》
- ↑ 박종구, 〈진공 이야기 - 4차 산업혁명과 과학기술〉, 《배큠매거진》, 2019-03
- ↑ 〈증기기관〉,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 〈증기기관〉, 《나무위키》
- 〈증기기관〉, 《위키백과》
- 〈왕복기관 (reciprocating engine, 往復機關)〉, 《두산백과》
- 〈증기터빈의 특징과 용도〉, 《두산백과》
- 〈미래기술관 - 산업혁명 - 과학기술의 혁명 - 증기기관〉, 《국립중앙과학관》
- 〈증기터빈(steam turbine)〉, 《사이버기술교실》, 2001-02-09
- 꽃두루, 〈증기터빈이란...〉, 《네이버 블로그》, 2006-08-23
- 스끼다시, 〈Steam Turbine〉, 《네이버 블로그》, 2009-10-28
- 동국대학교 교양교육원 박진희 교수, 〈물리산책 - 증기기관차의 발명 ('철도의 시대'를 열다)〉, 《과학창의재단》, 2011-08-17
- 누리, 〈증기기관차의 발명 -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블로그》, 2011-08-17
- ra07p5xw, 〈충동터빈과 반동터빈〉, 《네이버 블로그》, 2015-08-10
- 이연선 프로, 〈증기기관으로 1차 산업혁명을 가져온 '제임스 와트' (인포그래픽_세계인물편)〉, 《시선뉴스》, 2017-02-04
- 송성수 작가, 〈세상을 바꾼 발명과 혁신 - 증기기관 (헤론의 증기기구에서 와트의 증기기관까지)〉, 《생각의힘》, 2018-01-02
- 박종구, 〈진공 이야기 - 4차 산업혁명과 과학기술〉, 《배큠매거진》, 2019-03
- 핸드메이커, 〈(핸드메이드 역사 이야기 3) 기계혁명과 포드 시스템, 대량생산의 시작〉, 《네이버 포스트》, 2019-09-16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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