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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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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뉴스

빌뉴스(리투아니아어: Vilnius, 벨라루스어: Вільня 빌냐, 폴란드어: Wilno, 러시아어: Вильнюс, 문화어: 윌뉴스)는 리투아니아수도이며 가장 큰 도시로서 2009년 유럽연합의 유럽문화수도(European Capital of Culture)로 지정된 유서 깊은 도시이다. 영어로는 빌니우스(Vilnius), 폴란드어로는 빌노(Wilno)라고 한다. 옛 이름은 빌나(Vilna, 러시아어: Вильна, 독일어: Wilna, 라트비아어: Viļņa,)이다. 빌뉴스란 지명은 빌리야강의 이름에서 유래했다.[1]

개요[편집]

빌뉴스는 서쪽의 발트해로부터는 312km 떨어져 있지만 동부의 벨라루스 국경과는 불과 32km에 불과할 정도로 리투아니아의 남동부 쪽에 위치한다. 빌뉴스는 리투아니아 서남부 네리스강(Neris river)과 빌니아강(Vilnia river) 강을 사이에 두고 건설된 도시로 면적은 402㎢이다. 바르샤바 북동쪽 380km, 민스크 북서쪽 180km 지점에 있다. 빌뉴스는 시 면적의 68.8%가 공원과 숲으로 구성된 녹지이며 강 면적은 2.1%이고 나머지 29.1%가 시가지로 녹지가 많은 도시이다. 수세기 동안 지난한 역사의 변화를 겪었으며, 국경의 변화와도 깊이 관계하고 있다. 빌뉴스는 리투아니아 내 60개의 자치시 중 하나로 2000년에 빌뉴스시로 편입된 그리지스케스(Grigiškės)를 비롯한 몇몇 소도시과 농촌지역까지 포함한다. 시 운영은 임기 4년의 51명의 이사로 구성된 시이사회(City Council)에서 운영한다. 51명의 임원은 모두 정당 소속으로 선거를 통해 임명된다. 시장은 시이사회에서 임명하였으나 2015년 이후 주민 직선제로 바뀌었다. 빌뉴스 구시가지에 여러 교파의 교회와 다양한 박물관, 미술관이 있다. 구시가지의 옛 건축물들은 1994년에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네리스강 북쪽의 신시가지에는 현대식 첨단 도시가 형성되어 있고 남서쪽에는 공업지대가 있다.[2][3]

지리[편집]

빌뉴스는 남동쪽의 (북위 54° 41′ 동경 25° 17′ ) 리투아니아에 있는 빌니아강과 네리스강의 합류상에 위치한다. 많은 다른 도시들처럼 빌뉴스는 교차하는 강인 빌니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고 여겨진다. 빌뉴스에 가깝게 위치한 곳은 유럽의 지리학적 중심이라 주장하는 장소이다. 빌뉴스의 비중심 지역은 수세기를 통하여 변화하는 나라의 국경 형태로 생각할 수 있다. 빌뉴스는 문화적, 지리적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중심에 있었다.

빌뉴스는 발트해와 리투아니아 최대의 항구 도시인 클라이페다에서 312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빌뉴스는 카우나스 (102km), 샤울레이(Šiauliai, 214km), 파네베지스(Panevėžys, 135km)와 같은 리투아니아의 주요 도시들과는 고속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현재 빌뉴스 지역은 402km²이다. 빌딩이 도시의 29.1%, 녹색 공간이 68.8%, 물이 2.1%를 점유한다.

역사[편집]

원래는 발트인 정착촌이었으며 슬라브인들도 거주하였다. 적어도 11세기부터는 유대인들도 거주하기 시작했다.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1323년 리투아니아 대공 게디미나스(Gediminas)가 성채를 세우면서이다. 리투아니아의 대공이었다가 폴란드의 왕을 겸하게 된 브와디스와프 2세(폴란드어: Władysław II Jagiełło, 리투아니아어: Jogaila)는 1387년 빌뉴스에 도시 자치법에 따른 권리를 부여하였다. 당시 빌뉴스의 주민들은 리투아니아인들 외에도 루신인(근대의 벨라루스인), 폴란드인, 독일인, 유대인을 포함하였다.

1503년에서 1522년 사이 빌뉴스는 아홉 개의 성문과 세 개의 성탑을 갖춘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빌뉴스는 지그문트 2세(리투아니아어: Žygimantas Augustas, 폴란드어: Zygmunt II August)가 1544년 그곳으로 왕궁을 이전하면서 최고 전성기를 맞았다. 스테판 바토리(리투아니아어: Steponas Batoras, 폴란드어: Stefan Batory)는 1579년 빌뉴스 대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대학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학문, 특히 과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빌뉴스 시는 급속도로 성장하며 많은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폴란드인, 벨라루스인, 유대인, 러시아인, 독일인, 카라이파 유대인, 루신인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각각 시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655년 러시아군이 빌뉴스를 함락시켜 약탈하고 불태웠다. 주민들은 학살되었다. 그 후 빌뉴스의 성장은 주춤했으나 인구 수는 다시 회복되어 19세기 초에는 북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 이후 빌뉴스는 러시아제국에 합병되어 빌나 현의 현도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1915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군이 점령하였다. 독일군이 물러난 후에는 빌뉴스는 폴란드 자위대, 볼셰비키군, 폴란드군, 다시 소비에트 연방군의 손으로 넘어가며 그 지배자가 여러번 바뀌었다. 1920년 바르샤바 전투에서 폴란드군에 패한 소련군은 그해 7월 12일 평화 협정을 통해 새로이 독립국으로 재탄생한 리투아니아에 빌뉴스를 넘겨주었다. 10월 9일에는 루찬 젤리고프스키 장군이 이끄는 폴란드군의 리투아니아·벨라루스 사단이 연출된 쿠데타를 통해 빌뉴스를 장악하였다. 빌뉴스 시와 주변 지역은 폴란드의 괴뢰 국가인 중앙리투아니아 공화국(폴란드어: Litwa Środkowa)이라는 독립된 국가로 선포되었다. 1922년 2월 20일에는 이 지역이 모두 폴란드 영토가 되었다. 카우나스의 리투아니아 정부는 폴란드가 불법적으로 빌뉴스를 점령하고 합병했다고 보아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와의 관계는 1938년까지 단절된 상태로 계속되었다. 그동안 빌뉴스는 다시 빠르게 성장하였다. 당시 빌뉴스의 주민 대다수는 폴란드인과 유대인이었고 리투아니아인들은 소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의 비밀 조항에 따라 소련은 1939년 9월 19일 빌뉴스를 장악하고 합병하였다. 1939년 10월 10일 소련의 최후통첩을 받은 리투아니아는 빌뉴스를 얻는 대신 소련이 리투아니아 각지에 군사기지를 세우는 것을 허락하였다. 곧 수도를 카우나스에서 빌뉴스로 이전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지만 미처 끝내기도 전인 1940년 6월 소련은 리투아니아 전국을 점령하였다. 새로 설립된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가 된 빌뉴스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세워졌다. 4만 명에 달하는 수가 소련의 비밀 경찰 내무인민위원회에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1941년 6월에는 빌뉴스가 독일군에 함락되어 구시가에는 유대인 주민들을 위한 게토가 두 군데 세워졌다. 이 가운데 작은 게토는 같은 해 10월에 이미 ‘제거’된 상태였고 두 번째 게토의 주민들은 이른바 악티오넨(독일어: aktionen)의 일환으로 수시로 학살되었다. 1943년 9월 1일 게토 반란이 실패로 끝난 후 두 번째 게토도 파괴되었다. 265,000명에 달했던 빌뉴스의 유대인 인구의 95% 정도가 독일군과 리투아니아인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많은 수는 구시가에서 서쪽으로 10km 떨어진 파네리아이(리투아니아어: Paneriai)에서 죽음을 맞았다.

1944년에는 폴란드 향토군과 소련군이 차례로 빌뉴스를 장악하였다. 빌뉴스는 다시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로 소련에 합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은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의 폴란드인들을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농촌의 리투아니아인들과 소련의 타 공화국에서 러시아인들이 도시에 이주하면서 전후 빌뉴스는 주민 구성, 문화, 전통이 완전히 바뀌었다.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가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 리투아니아 공화국을 회복시켰다. 소련은 1991년 1월 9일 군 병력을 투입하여 이에 대응했고 1월 13일에는 국립 라디오, 텔레비전 건물과 빌뉴스 텔레비전 철탑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14명이 죽고 700명 이상 심한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소련은 결국 1991년 8월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그 후 빌뉴스는 소련 시절의 흔적을 지우고 현대 유럽 도시로 탈바꿈하려 노력하며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옛 건물들은 수리되고 네리스강 북쪽에는 새로운 시 중심가가 될 새 상업 지역이 발달되고 있다.[4]

기후[편집]

빌뉴스의 기후는 쾨펜의 기후 구분에 의해 대륙성 기후로 간주된다. 온도 기록은 1777년 이래로 유지되어오고 있는 상태이다. 매년 평균 기온은 +6.1°C이며 1월에 평균 기온은 −4.9°C, 7월에 평균 기온은 +17.0°C이다. 평균 강수량은 년 당 대략 661mm이다.

여름은 섭씨 30°C 이상의 온도로 더울 수 있다. 빌뉴스에서 밤 생활은 1년 중 이시간 때에 최고조이며 야외 술집, 식당과 카페들은 낮 동안 매우 대중적이된다. 겨울은 어는점 위로 거의 접근하지 않는 온도로 매우 춥다. 섭씨 영하 25°C 아래의 온도는 1월과 2월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상태이다. 빌뉴스의 강들은 특히 추운 겨울에 얼며,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호수들은 거의 항상 영구적으로 1년 중 이때 동안 얼어있다. 인기 있는 놀이는 어부가 얼음에 구멍을 뚫고 미끼를 낀 갈고리로 낚시를 하는 얼음 낚시이다.

교통[편집]

빌뉴스공항은 리투아니아의 관문으로 유럽의 25개국 약 50개 도시로 국제선 항공편을 운항한다. 시내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5km 떨어져 있으며 빌뉴스철도역과 직접 기차편이 연결되어 있다.

빌뉴스는 리투아니아의 세 주요 도시인 빌뉴스, 커우너스, 클레이페다를 연결하는 A1 자동차도로의 출발점이다. A1 도로는 유럽 루트 E85번 도로의 일부이다. 빌뉴스와 파네베지스를 연결하는 A2 자동차도로는 E272번 도로의 일부이다. 그밖에 빌뉴스에서 출발하는 도로로 A3, A4, A14, A15, A16이 있다. 빌뉴스의 남부우회도로로 A19가 있다.

빌뉴스에 있는 시티비사는 빌뉴스에서 가장 큰 카셰어링 업체로 승용차, 자전거, 전기 스쿠터를 단기 또는 장기로 임대해준다. 렌탈은 모바일 앱을 이용해서 한다. 이 회사의 가장 큰 경쟁자는 SPARK로서 전기차만 서비스하고 있고 빌뉴스 여러 곳에 자체 충전소를 가지고 있다.

빌뉴스는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전기차가 많은 도시이다. 빌뉴스에는 수십 개의 고성능 충전소가 있다. 빌니우스시와 리투아니아정부는 전기차 사용을 장려하고 있고 전기차 이용자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고 있다. 빌뉴스에서는 전기차 충전이 완전히 무료이고 전기차는 공공 주차장에서 무료로 주차할 수 있다. 전기차는 또 교통 체증 속에서도 별도의 A 레인에서 달릴 수 있다.

관광[편집]

도미니코누거리에 있는 신의은총성소교회도 성지순례의 중요한 장소이다. 이곳에는 신의 은총 그림이 있다. 빌뉴스는 폴란드의 수녀였던 성파우스티나가 전도를 시작했을 때 신의 은총 기도의 출발지였다. 1934년에 첫 신의 은총 그림이 에게니우스 카지미로브스키에 의해 그려졌고 그 그림은 지금 빌뉴스의 신의은총성소교회에 걸려 있다. 성파우스티나가 전에 살았던 집이 시내 북동쪽 안타칼니스의 그리보거리에 있고 순례자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루키시케스광장 가까이에 있는 성필리포와요쿠보교회는 루키시케스의 성모마리아 그림을 가지고 있다. 이 성화는 15~16세기에 그려졌다. 리투아니아의 오래된 기념물 중 하나이다. 세 십자가는 빌뉴스의 유명한 기념물이다. 전설에 따르면 십자가는 14세기에 순교한 14명의 프란체스코회 수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나무로 만들어졌던 십자가는 소련 점령기에 제거되었다가 리투아니아 독립 후 거대하게 재건되었다. 게디미나스탑은 빌뉴스 상부 성의 한 부분으로 14세기 후반에 처음 세워졌다. 이 탑에 올라서면 빌뉴스 시내 전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2003년에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게디미나스언덕 아래에서 꼭대기까지 사람들을 실어나른다.[5]

빌뉴스요새는 17세기 전반에 구축된 르네상스식 요새로 탑과 지하의 포문, 그리고 연결 통로로 이루어져 있다. 연결 통로는 48m의 긴 터널이다. 17세기 중엽 모스크바와의 전쟁 중에 크게 부서졌고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 무기고로 사용되었다. 빌뉴스텔레비전탑은 326.5m로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다. 빌뉴스 서쪽 카롤린시케스에 있는 이 탑은 1991년 1월에 발생한, 리투아니아 독립을 외친 시위의 장소였다. 이때 소련 군대가 탑에 들어와 14명의 민간인이 죽었고 700명이 부상당했다. 이를 기념하는 작은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꼭대기에는 회전 전망대가 있고 맑은 날에는 시내는 물론 25마일 떨어진 엘렉트레나이까지 보인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빌뉴스〉, 《위키백과》
  2. 빌뉴스(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빌뉴스〉, 《나무위키》
  4. 빌뉴스〉, 《요다위키》
  5. 빌뉴스(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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