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구
용산구(龍山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앙에 있는 자치구이다. 서울 한강 북쪽의 중간에 위치하며, 동쪽으로 성동구, 서쪽으로는 마포구, 북쪽으로는 남산을 경계로 중구, 남쪽으로는 한강을 경계로 강남구·서초구·동작구·영등포구와 접한다. 서울역에서 한강대교에 이르는 한강 대로가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한강 대로 주변은 상업 지구와 업무지구를 형성한다.[1]
개요[편집]
서울특별시의 중부, 경도상으로는 동경 126˚ 56´ 50˝~127˚ 58´ 40˝, 위도상으로는 북위 35˚ 34´ 23˝~38˚ 42´ 63˝에 위치한다. 동서 간 거리는 4.09㎞, 남북 간 거리는 4.37㎞이며, 면적은 21.87㎢로 서울시 전체 면적의 3.6%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12번째로 크다. 행정구역은 16개 행정동(36개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남동이 전체 면적의 13.8%로 가장 크고 용문동이 전체 면적의 1.3%로 가장 작다. 인구는 2020년을 기준하여 24만 4645명으로 서울시 전체 인구의 2.5%를 차지하여 중구·종로구 다음으로 적다. 구를 상징하는 꽃은 장미꽃, 나무는 소나무, 새는 비둘기이며, 구청 소재지는 이태원동이다.
용산구는 신분당선 연장선이 관통될 지역으로도 물망에 올라서 강남으로의 접근성도 기존보다 수월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용산의 어원은 정말로 '높은 언덕'을 의미하는 '산(山)'에서 따온 이름이다. 실제로 용산구는 서울 시내에서 높은 언덕이 많은 고지대에 속한다. 그래서, 2022년 수도권 폭우 사태에서도 강남구 지역에서는 침수 피해가 심했던 것과는 다르게 용산구는 고지대라서 별다른 큰 피해가 없었을 정도였다.
서울시 법정 도시 계획인 2030 서울 도시기본계획에 따라 용산구는 3도심을 매개하는 7광역중심 중 하나로 지정되었다. 용산역 인근이 중심지 역할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용산구는 한남동 위주로 일본인 인구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윤석열 정부 이후 대통령실과 대한민국 대통령 관저가 용산구에 위치하게 되면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거주하는 지역이 되었다. 이로 인해 언론 등에서는 대통령이나 대통령실 측을 용산이라고 돌려 표현하기도 한다.[2][3]
자연환경[편집]
북쪽에 남산(271m)이 마포구와 경계를 이루고, 동쪽에는 응봉 줄기가 성동구와 경계를 이루며, 남산 주변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고도 50m 이하의 낮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남산의 지맥이 한강으로 이어져 용산동과 이태원동 일대에 둔지 산(65m)이라는 큰 구릉지를 형성하였는데, 조선 시대에 둔지미(屯芝味)라 불리던 곳으로 지금의 주한미군 용산기지 일대에 해당한다. 서쪽에는 인왕산의 지맥이 남쪽으로 이어져 구불구불한 능선이 한강 가까이에서 봉우리를 이룬 산세가 용의 형상을 닮았다 하여 용산(龍山)이라 불렀는데, 만리재에서 효창공원을 거쳐 산천동과 청암동에 이르는 긴 구릉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지금은 대부분 주거지로 조성되어 있다. 남쪽으로는 한강이 동작구·서초구와 경계를 이루며 서해로 흘러가며, 서대문구 무악재에서 발원하여 용산구를 거쳐 한강에 합류하는 만초천은 복개되어 도로로 이용된다. 지질은 선캄브리아 시대의 경기 편마암 복합체가 기반암을 이루고, 북동부 산지에 중생대 쥐라기의 대보화강암이 분포한다. 한강 연안에는 신생대 제4기에 하천작용으로 형성된 충적층이 동서 방향으로 길게 분포한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바탕으로 한강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도시기후를 나타내고 있으며, 연평균 기온은 13.3℃, 1월 평균기온은 -1.5℃, 8월 평균기온은 26.1℃, 연 강수량은 1,449.1㎜이다.
역사[편집]
용산구 지역에서 선사 문화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한강변의 암사동 유적·응봉 유적 등을 통하여 볼 때 한강변의 용산구 일대에도 선사시대 인류가 살았을 개연성은 높다. 용산구를 포함한 한강 유역을 무대로 최초의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은 진국(辰國)과 삼한 사회의 마한(馬韓) 그리고 초기 백제였다. 기원전 1세기 말 백제국이 마한을 정복하고 초기 고대국가인 백제가 되었다. 이들은 한강 유역의 경제성을 이용하여 많은 생산 활동과 인구 증가를 이루었고 보다 큰 정치집단을 형성하여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475년 한강 유역은 고구려의 통치하에 들어갔으며, 남평 양이 설치되었다. 553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래 신라 삼국통일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신라는 전국에 9주를 설치했고 용산구를 포함한 서울지방은 한산 주(漢山州)에 편입되었다. 한산 주는 757년(경덕왕 16) 지금의 용산 지역을 포함한 서울지방에 한양군(漢陽郡)을 설치하면서 한주(漢州)로 개칭되었다. 후삼국시대에는 왕건의 활동으로 태봉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918년 왕건이 국왕에 추대되어 고려왕조를 개창함에 따라 한양군(漢陽郡)은 고려에 편입되었으며, 940년(태조 23) 전국의 행정구역을 재편성하고 주·군·현를 개칭함에 따라 한양군은 양주(楊州)로 편제되었으며, 용산 지역은 양주 관할구역이 되었다. 995년(성종 14) 도제(道制)가 실시되어 양주는 관내도(關內道)에 속하였고 절도사가 배치되어 좌신책군(左神策軍)이 되었다. 현종 9년에 양주는 양광도에 속하게 되었고, 1067년(문종 21) 양주는 남경으로 승격되어 고려 삼경제의 하나로 운영되었으며, 1069년에 신경기(新京畿)에 편입되었다. 그 후 다시 양주가 되었다가 1101년(숙종 6) 남경개창도감이 설치되어 남경후보지를 물색할 때 한강 연안의 용산방면을 비롯한 동대문 밖의 노원역, 도봉산 아래 해촌방면, 삼각산 면악 남쪽 지역 등이 거론되었다. 이중 경복궁 부근 면악 남쪽으로 결정이 되어 연흥전·천수전 등의 궁궐 건물이 마련되었다. 이때 남경의 관할구역은 동서로는 대봉에서 안산에 이르고, 남북으로는 사리에서 북악산에 이르는 지역으로, 바로 사리 일대가 용산 한강변이었다. 한편 1284년(충렬왕 10) 과주의 용산처를 부원현으로 승격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언제부터인가 용산 지역이 남경으로부터 과주로 이속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1298년(충렬왕 34) 남경을 한양부로 격하시키면서 나타나는 고려 한양부 소속의 고봉현과 연결시켜 볼 수 있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1394년(태조 3) 한양 천도로 한성부 관할구역이 될 때까지는 과주 부원현 용산처였다. 1390년(공양왕 2)에 경기좌도에 속하여 과전과 공신전의 반급 지역이 되었다.
용산 지역에는 고려 시대 지방을 잇는 22도의 하나인 청교도(靑郊道)의 한 역으로 청파역(靑波驛)이 있었는데, 이 역은 한성과 삼남 지방을 잇는 역이었다. 또 충숙왕은 제국대장공주와 함께 용산 강에 행차하여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었고, 행궁에서 용산 원자(龍山元子)를 낳기도 하였다. 한편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지방으로 피난갈 때 이곳 한강변 나루인 사평 도를 건너기도 하였다.
용산은 고려 말 과주(果州)에 속했던 곳으로, 조선 시대에는 한성부 성저십리 지역으로 서부의 용산방(龍山坊) 이었다. 한편 오늘날 용산구 지역은 용산방과 더불어 남부 한강 방과 둔지방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반면 용산방에는 마포구 지역도 포함된다. 1789년 용산 지역에 해당하는 용산방·한강방·둔지방의 호구를 살펴보면, 용산방은 4647호에 1만 4915명, 한강방은 406호에 1145명, 둔지방은 1,241호에 3,589명으로 한성부 인구의 약 20만 명의 1할에 해당하는 인구가 분포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476년(성종 7) 용산강 북쪽 언덕 귀후서 뒤편의 폐사지를 중수하여 용호 독서당을 개설하고 사가독서를 실시하여 홍문관 학사들을 공부하게 하였다. 한편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퇴각을 차단하는 전장이었으며, 원효로 심원정을 회담 장소로 하여 조선 측을 외면한 채 명나라 군사와 왜군이 화전 교섭을 벌이기도 하였고, 용산강에서 강화회담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용산 강은 조선 초기 수로 전 운소가 설치되는 등 한강 수운의 중심지였으며, 후기에는 마포에 그 기능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효창공원 일대는 정조의 원자인 문효세자의 효창원이 마련되어 왕실 묘역으로 이용되었으며, 한강변 서부이촌동 모래사장은 새남 터라 하여 군사 연무장과 사형장으로 이용되었다. 와서·귀후서·전생서·서빙고 등의 관아가 있었고, 청파역과 이태원, 노량진·서빙고나루터·한강진이 있어 주요 교통로였음을 알 수 있다.
용산구는 1896년 4월 한성부 용산방·한강 방·둔지방으로 시작하여 1910년 10월 경기도 경성부에 편입되었다. 1911년 4월 5부 8면제 실시에 따라 용산면·한지면이 되었다. 1914년 4월에는 용강면·한지면이 경기도 고양군에 속하였다. 그러나 업무처리 곤란과 주민의 불편에 따라 1914년 9월 다시 경성부 용산 출장소를 설치하고 용산 일대를 관할하게 하였다. 1931년 경성부 직할이 되었으며, 그 후 경성부의 인구가 100만 명에 이르고 주거지역이 급속히 팽창하면서 경성부 본청 행정만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1943년 6월 ‘구제’를 실시, 행정기관으로 용산구역소를 설치하고 ‘구장’이 관할하게 되었다.
원효로 방면을 구용산, 한강로변을 신용산이라 부르는데, 구용산은 조선 말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다툼 무대였고, 각국 인들의 거류지로 조성되어 지금도 효창·청파동과 원효로 등지에는 일본식 목조의 낡은 가옥이 남아 있다. 즉 1884년(고종 21) 10월 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허용하는 개시장(開市場)으로 지정된 후, 1887년 선교의 자유가 인정되자 원효로를 중심으로 프랑스·중국·일본인 등이 들어와 종교 및 상업활동을 전개하였다. 서울역에서 한강철교에 이르는 신용산 지역은 조선시대까지 홍수 피해가 잦아 낮은 지대에는 인가가 거의 없는 벌판이었다. 그러나 도심과 가깝고 한강 수운을 이용해 인천과의 연결이 용이하며 평탄하고 넓은 이 지역은 일제의 식민통치 군사기지로 이용되었다.
1888년 8월 한강에 증기선이 운항되었고, 1891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이자 양옥 건물인 용산 신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900년 1월 서계동~청파동~원효로 4가에 이르는 전차가 개통되었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제에 의해 군사기지와 철도기지가 세워져 식민통치와 대륙 침략의 거점이 되었다.
광복 후 서울특별시 용산구가 되었으며, 현재 36개 법정동과 16개 행정동으로 구획되어 있다. 그간 경제발전과 인구변동 등으로 여러 차례 관할 구역의 조정이 있었으며, 1995년 7월 1일 민선 제1기 출범을 계기로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로 접어들었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일본군이 주둔했던 신용산 지역에는 자연스레 한국군과 미국군의 사령탑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2006년 들어 미군 기지의 이전과 더불어 민족공원 조성이 추진되고 있다. 육군본부 이전 자리에는 전쟁기념관이 조성되었고, 용산가족공원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이 건립되어 있다. 또 미국 대사관의 이전 결정과 초고층 아파트의 건립으로 이 일대의 경관이 크게 변모되고 있다. 최근 들어 용산 지역에 대한 개발 잠재력에 주위의 시선이 집중되면서 의욕적인 지역 개발 사업이 활기를 띠고 있다.
용산 일대는 철도시설과 군사시설이 집중되어 있던 곳으로 한국전쟁 때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반면 용산동 2가는 흔히 해방촌이라 부르는데 한국전쟁 전후 월남한 사람들이 집단으로 판잣집을 짓고 살던 마을이 형성된 곳이다.
2001년 확정된 서울특별시 지구 단위 개발계획에 따라 서울역에서 한강대교에 이르는 100만 평의 개발이 추진되고 있다. 용산역이 경부고속철도 중앙역사와 신공항 철도 출발역으로 선정되어 이 지역에 대한 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용산역 일대 철도정비창을 포함한 21만여 평이 쾌적한 환경과 업무의 편리성을 도모하고 민간 설계 공모와 외자 유치를 통해 첨단 국제 업무 단지로 조성될 계획이다. 또 한강로 일대에 최첨단 업무시설과 컨벤션 센터, 외국인 전용 주거시설, 공원 녹지시설 등이 2011년까지 체계적으로 개발될 것이다. 즉 주한미군이 반환하는 여러 시설 부지에 관광·문화 관련 시설과 종합행정타운이 건립되면 용산구는 명실상부한 서울의 부도심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용산구 지역에는 가봉을 비롯한 41개국의 대사관이 위치하여 한국 현대 외교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2020년을 기준하여 행정구역은 16개 행정동(남영동·보광동·서빙고동·용문동·용산 2가 동·원효로 1~2동·이촌 1~2동·이태원 1~2동·청파동·한강로동·한남동·효창동·후암동) 36개법정동(갈월동·남영동·도원동·동빙고동·동자동·문배동·보광동·산천동·서계동·서빙고동·신계동·신창동·용문동·용산동 1~6가·원효로 1~4가·이촌동·이태원동·주성동·청암동·청파동 1~3가·한강로 1~3가·한남동·효창동·후암동)으로 이루어져 있다.[4]
경제[편집]
서울 자치구들 중에서 최상위권이다. 거의 강남3구에 비교될 정도이며 더불어 강북에서 최고로 잘 사는 곳이다. 정부 장·차관들의 관저들과 대기업 회장들의 사저들, 용산구 소재 해외 공관 근무자 주택이 죄다 여기에 있다. 흔히 정치인들과 기업인들과 고위 공무원들 등 높으신 분들이 무조건 강남에서 살고 있을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재벌 3세 이하, 고위 공무원들 자녀들과 대기업 임원 자녀들이 강남에서 사는 경우가 많고, 재벌 2세 이상, 고위공무원들과 대기업 임원들은 용산구에서 사는 경우가 많다. 기타 공공기관 공무원들과 대기업 직원들을 위한 관사들도 용산구에 많이 있다. 서울의 산하 자치구들 중에서 미래가 상당히 밝은 자치구이다. 서울특별시청 용산구 이전(現 용산 구청부지)과 용산국제업무지구의 건립은 실패했지만, 여전히 용산구는 경제가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동네이며, 3차 산업을 통해 일취 월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신분당선이 강남역에서 용산역까지 연장되면 더욱더 밝아지는데, 기존 버스 외에도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 덕분에 경제 활성화가 제대로 되어 용산구는 돈을 더 많이 벌게 된다.
교통[편집]
원효대교·한강철교·한강대교·동작대교·반포대교·한남대교 등이 한강을 가로질러 용산구와 강남 지역을 연결한다. 도로 교통은 도시고속화도로인 강변북로가 마포구 가양대교 북단을 기점으로 한강변의 이촌동·서빙고동·주성동·보광동·한남동 등을 거쳐 경기도 남양주시까지 이어진다. 이 밖에 이촌동을 기점으로 중구 남대문로 5가까지 이어지는 한강 대로와 한남동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한남대로를 비롯하여 강남 대로(서초구 염곡동~한남동)·녹사평 대로(서빙고동~중구 회현동 1가)·동작 대로(용산동 6가~관악구 남현동)·반포 대로(서초구 서초동~서빙고동)·삼일 대로(한남동~종로구 재동)·만리재로(마포구 공덕동~용산구~중구 만리동 1가)·백범로(마포구 노고산동~한강로 1가)와 청파로·원효로·다산로·서빙고로·소월로·신흥로·여의대방로·이촌로·장충단로·효창원로·후암로 등이 용산구의 내·외곽을 연결한다.
철도 교통은 1900년 지금의 동작구와 용산구를 연결하는 한강철교가 개통하여 경인선이 용산역을 거쳐 서울역까지 운행하였으며, 1905년에는 서울~신의주를 잇는 경의선과 서울~부산을 잇는 경부선이 개통하여 서울역~용산역을 운행하였다. 이후 광역 전철 시대가 열리면서 경인선·경부선은 수도권 전철 1호선 운행계통에, 경의선은 수도권 전철 경의 중앙선 운행계통에 포함되었다. 소요산을 기점으로 하는 1호선은 용산구와 중구에 걸쳐 있는 서울역과 용산구의 남영역~노량진역을 거쳐 인천시(인천역)·충남 아산시(신창역)·경기도 오산시(서 동탄역)·광명시(광명역)까지 운행하고, 경의 중앙선은 경기도 파주시의 문산역을 기점으로 용산구의 효창공원앞역~용산역~이촌역~서빙고역~한남역을 거쳐 경기도 양평군의 용문역·지평역까지 운행하는 노선과 가좌역에서 분기하여 서울역까지 운행하는 노선으로 나뉜다. 당고개역~남태령역을 운행하는 4호선이 용산구의 서울역~숙대입구역~삼각지역~신용산역~이촌역을 경유하고, 응암역~신내역을 운행하는 6호선이 용산구의 효창공원앞역~삼각지역~녹사평역~이태원역~한강진역을 거쳐 간다. 이밖에 인천국제공항 철도가 서울역을 기점으로 김포국제공항과 인천국제공항을 연결한다. 서울역에서 1호선·4호선·경의 중앙선·인천국제공항철도가, 용산역에서 1호선과 경의 중앙선이, 이촌역에서 4호선과 경의 중앙선이, 삼각지역에서 4호선과 6호선이, 효창공원앞역에서 6호선과 경의 중앙선이 각각 접속한다.
관광[편집]
1997년 이태원동·한남동 일원의 0.38㎢에 이르는 지역이 관광진흥법에 따라 서울시 최초의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 이태원 관광특구는 서울 속 작은 지구촌이라 불릴 만큼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으로서 쇼핑과 유흥의 명소로 이름난 경리단길과 100여 개의 상점의 몰려 있는 엔티크가구거리, 40여 개국의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세계음식거리, 이태원 시장, 베트남 퀴논길과 이슬람 서울중앙성원이 있는 우사단로 등 볼거리·먹거리·즐길 거리가 풍성하여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태원동의 남산 자락에 남산 야외식물원이 조성되어 있다.
남산공원이 용산구와 중구에 걸쳐 조성되어 있으며, 용산동 2가에 위치한 남산 서울타워는 서울의 랜드마크로 꼽힌다. 남산 서울타워는 해발고도 479.7m의 전망 타워(N서울타워)와 한복문화체험관을 비롯한 문화·상업 복합시설(서울타워 플라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구 방면에서 또 하나의 명물인 남산케이블카와 연결된다. N서울타워는 360도 회전식 레스토랑과 사랑의 자물쇠로 유명하고, 서울 전경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시원한 전망과 특히 서울 전역이 불빛으로 물든 야경이 빼어난 명소이다.
역사 명소로는 김구·윤봉길·이봉창 등 애국지사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효창동의 효창공원(사적), 민간신앙의 대상인 신을 모셔 놓은 서빙고동 부군당(서울 민속문화재), 조선 후기의 천주교 박해 때 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당고개·왜고개·새남터 순교성지와 새남터 성당, 남산에 축조된 한양도성 성곽길 등이 있다. 이 밖에 이태원동 남산 남측순환로의 가을 단풍길, 용산동 2가의 해방촌, 시민들의 문화 휴식 공간으로 조성된 이촌동의 노들섬, 신계동의 과학 동아 천문대 등의 명소가 있으며, 용산동 1~6가와 서빙고동 일원의 반환된 미군 기지에 용산공원이 조성되고 있다. 먹거리 명소로는 남영동 먹자골목과 한강로 1가의 삼각지 대구탕 골목이 유명하다.
교육[편집]
전통 교육기관은 조선 시대에 한성부에 속하여 성균관과 4부 학당이 공공 교육기관 역할을 하였으며, 성종 때 젊은 문신들이 사가 독서(賜暇讀書) 하던 독서당(讀書堂)이 지금의 청암동에 설치되어 남호당(南湖堂)이라 불렀다. 근대 교육기관은 1892년 한성부 용산방 형제정계(지금의 원효로 4가)에서 용산 신학교가 용산 지역의 첫 근대 학교로 설립되었다가 1942년 일제에 의하여 폐쇄되었으며, 신학교 건물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초등 교육기관은 1903년 용산방 동문외계(지금의 원효로 2가)에서 원정 공립 심상소학교가 개교한 뒤 경성 원정 공립 국민학교 등의 변천을 거쳐 지금의 서울 남정 초등학교로 이어지고, 1915년 경성부 금정(지금의 효창동)에서 용산 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한 뒤 경성 금정 공립국민학교·서울 금양 국민학교 등의 변천을 거쳐 지금의 서울 금양 초등학교로 이어진다. 이 밖에 1919년 경성 삼판 공립 심상소학교(지금의 서울 삼광 초등학교), 1921년 한남 공립 보통학교(지금의 서울 한남초등학교), 1926년 조양학원(지금의 서울 이태원 초등학교), 1943년 경성 서공덕 공립국민학교(지금의 서울 청파초등학교) 등이 개교하였다.
중등 교육기관은 1899년에 설립된 관립 상공 학교가 관립 농상 공학교·선린상업중학교 등의 변천을 거쳐 지금의 선린중학교와 선린인터넷 고등학교로 이어지고, 1905년에 발족한 철도이원양성소가 교통고등학교·용산공업고등학교를 거쳐 2021년에 용산철도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여 지금에 이른다. 1907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설립된 보성여학교를 모태로 하는 보성여자중학교·보성여자고등학교가 1955년 용산동2가로 이전하여 지금에 이르고, 같은 해 평안북도 정주에서 설립된 오산학교를 모태로 하는 오산중학교·오산고등학교가 1956년 보광동으로 이전하여 지금에 이른다. 이밖에 1945년 용산중학교, 1946년 신광여자중학교·신광여자고등학교와 용산고등학교 등이 개교하였다.
고등교육기관은 1906년 고종의 계비 순헌황귀비의 지원으로 설립된 명신여학교를 모태로 하여 1938년 청파동2가의 현 위치에 숙명여자전문학교가 설립된 뒤 숙명여자대학을 거쳐 지금의 숙명여자대학교로 이어진다. 2019년을 기준하여 교육기관은 대학교 1개교(숙명여자대학교)를 비롯하여 고등학교 10개교, 중학교 9개교, 초등학교 15개교 등이 있다. 학생 수는 3만 3193명으로 서울시 전체 학생의 1.7%를 차지한다.
문화재[편집]
국립중앙박물관과 삼성미술관 리움 등에 소장된 문화재가 풍부하다. 국가 지정 문화재로는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금동 미륵보살반가사유상·조선왕조실록 적상산사고 본·김정희 필 세한도·정선 필 금강전도를 비롯한 국보 96점, 옛 보신각 동종·금동 약사여래 입상·금령총 금관·김홍도 필 풍속도 화첩·승자총통·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대동여지도 목판·정조 어찰첩을 비롯한 보물 287점, 사적 3개소(서울 효창공원·서울 용산 신학교·서울 원효로 예수성심성당), 방상시 탈·십장생수 이층롱을 비롯한 국가 민속문화재 6점 등이 있다. 이 밖에 1900년에 건설된 한강 철도교와 백범 김구 유묵을 비롯한 20점이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시 지정 문화재로는 국기복색소선 및 사절복색자장요람·혼천의·해동제국기를 비롯한 서울유형문화재 9점, 서울기념물 1점(구 용산 수위관측소), 서울 민속문화재 1점(서빙고동 부군당) 등이 있다. 이밖에 1906~1910년에 발행된 《경향신문》과 남산도서관에 소장된 일제강점기 잡지 3종 등 2점이 서울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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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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