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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6일 (화) 16:27 기준 최신판
성주군(星州郡)은 경상북도 서남부에 있는 군으로, 동쪽으로는 낙동강을 경계로 대구광역시 달성군과 경상북도 칠곡군, 서북쪽으로는 경상북도 김천시, 남쪽으로는 경상남도 거창군과 경상북도 고령군, 경상남도 합천군과 경계를 이룬다. 특산물로 참외가 유명하다.[1]
개요[편집]
성주군은 동경 128°02′∼128°24′, 북위 35°46′∼36°03′에 위치한다. 면적은 616.14㎢이고, 인구는 2023년 7월을 기준하여 42,366명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9개 면, 233개 행정리(111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에 있다.
성주 이씨와 성산 이씨, 성주 배씨와 성주 도씨는 이 지역을 본관으로 하며, 집성촌도 있다. 정도전에 나오는 이인임이 바로 성주 이씨. 실제로 이 지역 출신이기도 하다. 또 성주를 본관으로 하는 이씨가 있는데, 벽진면을 본관으로 하는 벽진 이씨가 있다. 그 외에 조선 개국 공신 배극렴도 성주 배씨며, 역시 성주군 출신이다. 근소한 차이지만 전국에서 유일하게 김씨보다 이씨가 더 많은 동네이다.
2016년, 주한미군의 미사일방공시스템인 사드가 성주읍에 위치한 성산포대에 배치된다고 발표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초전면 소성리 롯데 스카이힐 C.C 골프장으로 바뀌었다. 그 이후 롯데 스카이힐 C.C 골프장 및 진입로는 사드 운송차량이나 군인 등을 제외하고는 전면 출입이 금지되었다.[2][3]
자연환경[편집]
지세는 남서부 군계에 위치한 가야산(伽倻山, 1,430m)을 중심으로, 높고 낮은 산들이 군 전체를 둘러싼 작은 분지 형태를 이루고 있다.
서부와 북부에는 형제봉(兄弟峰, 1,022m)·염속산(厭俗山, 870m)·독용산(禿用山, 956m)·백마산(白馬山, 716m) 등의 높은 산이 솟아 있다.
동부와 남부에는 서진산(棲鎭山, 742m)·도고산(道高山, 349m)·영취산(靈鷲山, 332m)·작산(鵲山, 532m) 등 비교적 낮은 산들이 분포하고 있다. 서북부는 험한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동남부에는 평야가 전개되어 있다. 그 중 서진산(棲鎭山, 일명 禪石山)은 월하면 인촌리와 칠곡군 약목면의 경계에 위치하고, 대부분 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남쪽 산기슭에는 고려 때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창건한 선석사(禪石寺)가 있고, 그 앞의 태봉(胎峯)은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세종의 여러 왕자들과 단종의 태를 안장한 태실이 있다. 주변의 골짜기와 개울들이 절경을 이루어 봄·가을에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하천을 보면 서북부의 산악지대에서 발원한 대가천(大伽川)은 군의 서부를 동남류하여 고령군을 지나 낙동강에 유입한다. 강유역에는 비옥한 평야가 발달하여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이천(伊川)은 벽진면·성주읍 및 선남면 사이를 흐르는 하천으로, 벽진면의 고당산과 염표봉산에서 발원하여 남동류하고, 벽진면과 성주읍 남쪽을 지나 월항면 대산리에 이른다. 초전면백마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에서 남류한 지류 백천(白川)과 합류하고 다시 남동류하여 선원리 부근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연안에는 봉산들·섬안들의 비옥한 평야가 형성되어 있어서 중요한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 북서부는 평안계에 속하고, 중앙은 경상계에 속하며 화성암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천 연안의 평야는 신생대 제4기에 속하여 하성층(河成層)과 현무암층(玄武岩層)으로 되어 있고 충적토질(沖積土質)을 이루어 매우 비옥하다.
기후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하는 온대 계절풍 기후 지역이나 분지형 지형과 내륙에 위치하고 있어 한서의 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는 곳이다. 연평균기온이 14.1° 정도로 다른 지역보다 낮은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내륙 분지인 까닭이다. 1월 평균기온 -0.9℃ 내외, 8월 평균기온 29.1℃ 내외로 한서의 차가 큰 편에 속하며, 연 강수량은 850∼1,300㎜정도이나 6∼9월에 집중되는 편이다.[4]
역사[편집]
성주군 지방에서는 아직까지 구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 해당하는 고인돌·청동검 등이 발견되어 대략 이 무렵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삼한 시대에는 사회분화가 진행되어 소국(小國)으로 발전했는데, 반파국(伴跛國)이 이 곳에 있었던 것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그것이 성산가야(星山加耶)의 모체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가야연맹의 한 나라로 발전하였던 성산가야는 늦어도 6세기 중엽까지는 신라에 복속되어 군현체제하에서 본피현(本彼縣)이 되었다.
현재까지 성주읍 성산리, 월항면 수죽리 등지에 남아 있는 고분군은 성산가야시대와 신라에 편입된 직후의 유적으로 생각되고 있다. 757년(경덕왕 16) 본피현은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되어 성산군(星山郡)의 속현이 되었으며, 뒤에 벽진군(碧珍郡)으로 개칭되었다.
나말 여초의 전환기에 전국적으로 호족들이 할거하여 세력을 떨칠 때 성주지역에는 이총언(李悤言)이라는 대호족이 출현하여 인근의 중소 호족을 거느리고 군림했다. 태조 왕건의 회유정책으로 귀부하여 그의 아들 영(永)이 군사를 거느리고 태조를 도와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940년(태조 23) 성주는 경산부(京山府)로 승격되었고, 신안현·적산현(狄山縣)·수동현(壽同縣)·유산현이 통폐합되어 귀속되었다. 980년(경종 6)에 광평군(廣平郡)으로 강등되었다가 995년(성종 14) 대주(岱州)로 개칭되면서 도단련사(都團練使)가 파견되었다.
1012년(현종 3)에 다시 단련사가 폐지되었고, 1018년 지경산부사(知京山府事)가 파견되어 고령군(高靈郡)·약목현(若木縣)·지례현(知禮縣)·가리현(加利縣)·화원현(花園縣)·황간현(黃澗縣)·팔거현(八莒縣)·김산현(金山縣)·관성현(管城縣)·안읍현(安邑縣)·양산현(陽山縣)·이산현(利山縣)·대구현(大丘縣)·하빈현(河濱縣)·인동현(仁同縣) 등 1군 14현이 귀속되어 그 위세가 크게 떨쳐졌다.
1295년(충렬왕 21)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가 되었다가 1308년에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되었으며, 1310년(충선왕 2)에 다시 경산부로 강등되었다. 고려 말 왜구가 삼남지방을 휩쓸 때 성주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나, 우하(禹夏)의 활약에 의하여 왜구를 격파한 바 있다.
건국 이후에도 경산부로 지속되었으며, 태조 때 일시 계수관(界首官)이 되었고, 1413년(태종 13) 성주목으로 승격되면서 가리현·팔거현·화원현을 속현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이 때 성주는 경상도에서는 가장 넓은 간전결수(墾田結數)를 보유하였고, 많은 제언(堤堰)이 축조되어 있는 등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곳이었으며, 인재도 많이 배출한 영남의 거읍 중 하나였다.
임진왜란 중에는 일시 경상도 감영이 성주목팔거(현재 칠곡)에 두어지기도 하였다. 성리학이 널리 보급되면서 성주에서 정구(鄭逑)·김우옹(金宇顒) 등과 같은 대학자가 배출되었고, 1558년(명종 13) 천곡서원(川谷書院)이 세워지는 등 영남학파의 한 중요한 근거지 구실을 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성주를 점령하자, 의병장 김면·정인홍 등이 세 차례의 격전 끝에 성주성을 탈환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하였다. 1614년(광해군 7) 이 곳 주민 이창록(李昌祿)이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비방한 사건이 발생하여 목(牧)이 혁파되고 고령현에 합속되었다가 1616년 신안현으로 개명되었다. 인조반정 뒤 다시 목으로 승격되었다.
그 뒤 몇 차례의 승강(陞降)이 있었으나, 1745년(영조 21) 다시 목으로 환원되었다. 그 동안 팔거현은 칠곡도호부에, 화원현은 대구부(大丘府)에 각각 이속됨으로써 가리현만 거느리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도 성주에서는 많은 서원과 사우가 설립되고 이진상(李震相) 등 영남학파를 계승한 성리학자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1895년 근대적인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성주군으로 되어 대구부에 속하였다. 1905년에는 인곡(仁谷)·덕곡(德谷)·노다(老多)·다산(茶山) 등 4개 면이 고령군으로, 노곡면(蘆谷面)이 현풍군(玄風郡)으로, 증산면(甑山面)이 지례군에 각각 편입되었기 때문에 관할구역이 자연히 축소되었다.
개화의 물결이 이 곳에도 미쳐 1906년 사립학교가 세워졌고, 일제의 국권 강탈 이후에는 이의 회복을 위한 민족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선남면·가천면·성주면·성주읍내장 등지에서 맹렬한 만세시위 운동이 일어났고, 다수의 인물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경상도 유림이 중심이 되고 전국 유림대표 137명이 연서한 파리장서(Paris 長書)는 파리평화회의에 보내진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였는데, 이 고장 출신 김창숙(金昌淑)이 중국 망명시 휴대하여 평화회의에 우송했다. 세계 각국 및 전국 향교에 이 문서를 보내는 데에도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 안정되지 못한 사회 정세하에서 좌익의 주동으로 대구에서 시작된 10·1폭동사건은, 이 지방에도 파급되어 경찰서가 습격되는 등의 혼란이 있었지만 곧 질서가 회복되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었을 때 주전선(主戰線)의 배후지였기 때문에 공산군에 의해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1973년 대가면 중산동이 가천면에 편입되었으며, 1979년 5월 1일 성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3년 고령군 덕곡면 성동이 수륜면에, 용암면 유서동이 선남면에 편입되었고, 선남면 노석동이 칠곡군 약목면으로 편입되는 행정구역 조정을 거쳤다.
1988년 5월 9일 동이 리(里)로 개칭되었으며, 1989년에는 용암면 명포리·장학리가 선남면에, 월항면 어산리가 초전면에 편입되었고, 1990년벽진면 해평리가 수촌리로 개칭되었다.
2004년 현재 성주읍·선남면(船南面)·용암면(龍岩面)·수륜면(修倫面)·가천면(伽泉面)·금수면(金水面)·대가면(大家面)·벽진면(碧珍面)·초전면(草田面)·월항면(月恒面) 등 1읍 9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업[편집]
경지 면적은 총면적의 22%에 달하며 전체 주민의 69%가 1차산업에 종사한다. 농업지대는 가천면과 수륜면을 흐르는 대가천(大伽川)과 벽진면과 성주읍을 흐르는 이천 유역 및 초전면과 월항면을 흐르는 백천(白川)과 합류하여 낙동강에 유입되는 일대의 유역이다. 성주군의 동남부 지역인 선남·용암·수륜면 등에는 주로 벼농사가 성하고, 서북부 지역인 초전·벽진·금수면 등의 산간지대는 밭농사로서 고추·마늘·포도·사과 등이 생산된다.
특히 참외와 수박은 맛과 질이 좋아 성주의 특산물로서 대구·부산·서울 등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다. 참외 산지는 선남면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성주·초전·월항·용암·대가·벽진면의 순이며, 수박은 벽진·초전·성주·월항·선남면의 순이다. 한우 사육은 용암·수륜면, 성주읍에서, 돼지는 선남·성주·초전면에서 각각 사육되고 있는데 계속 증가하고 있다.
광업은 수륜면에서 고령토와 규석이 생산되고 있으며, 농공단지는 성주읍·선남면·월항면에 56개 업체가 입주해 있으며, 1,153명의 종업원이 일하고 있다. 농공단지에 있는 공장들은 대부분 섬유제조업이고, 그 밖에 자동차 부품·건축자재·석재가공 공장이 입주해 있다.
교통[편집]
고속 도로는 중부내륙고속도로(남성주 IC, 성주 IC)가 지나가며, 대구광역시와는 교통이 매우 편리하며, 30번 국도, 33번 국도, 59번 국도가 있어 구미시·고령군·칠곡군 및 경상남도 거창군·합천군과의 교통이 편리하다.
철도는 없고 대구, 칠곡, 김천에서 타야 한다. 남부 내륙선 철도 건설이 확정되고 2021년 1월에는 성주역 건설이 확정되었으며, 2022년에는 완전히 건설이 확정되었고, 대구 도시철도 2호선 연장이 계획 중이므로 철도가 지나지 않는 시와 군에서는 2027년 ~ 2028년 쯤에 벗어날 예정이다. 성주터미널에서 초전면을 거쳐 김천으로 가는 농어촌 버스 노선이 있는데, KTX 김천(구미)역에 들어갔다가 나온다. 문양역에서 성주읍, 성주역까지의 성주 경전철 공사가 확정되었다.
관광[편집]
가야산을 비롯하여, 높고 수려한 산이 많으며, 동쪽 경계를 따라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 자연경관이 아름답다. 이 군에는 성산가야의 옛터이고 뒤에는 신라에 병합된 관계로 가야와 신라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문화관광자원이 풍부한 지역으로 손꼽힌다.
유명한 관광지로는 수륜면의 가야산국립공원과 신정동의 회연서원, 대가면 칠봉리의 사도실과 청천서원, 금수면의 성주댐과 대가천계곡, 가천면 일대의 포천계곡, 월항면 대산리의 한개마을이 있다. 가야산은 1972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뒤 개발이 시작되었다.
가야산에는 계곡·폭포를 낀 절경이 수없이 많다. 거기에는 법수사와 심원사 등의 폐사지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들은 통일신라 후기에 창건되어 천년 동안 번성했고 100여 개의 암자가 딸린 거찰이었다. 이외에도 법수사지 3층석탑과 심원사지 3층석탑이 있다.
수륜면 신정리에는 한강정구 선생을 배향하는 회연서원이 있다. 경내에는 지경재·명의재 등의 건물이 있으며, 한석봉이 썼다는 현판이 유명하다. 대가면 칠봉리에는 최근에 복원된 청천서원이 있다. 성주댐은 1992년 완공된 다목적댐으로 총 3천8백만 톤의 물을 가두어 놓았으며 드라이브코스로 아주 적격이다.
대가천계곡은 탄성을 지르게 하는 비경들이 거듭되고, 운봉현광호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세운 백운정과 바위의 생김새가 배모양을 닮았다고 붙여진 배바위, 선바위(소학봉)가 있다.
포천 계곡은 가야산 뒷자락의 대표적인 명소로 물이 맑고 풍부하여 구비구비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 계곡에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당대 최고의 선비였던 응와이 원조가 지은 만귀정과 김천택이 머물며 공부했던 사봉정이 있다.
그 외에 아름다운 골짜기와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여름철 피서지로 알려지게 되어 대구를 비롯한 인근 도시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사철 모여드는 신계 용사 계곡, 성주읍의 성산가야의 산성과 고분, 월항면 서진산의 선석사와 조선왕조의 태실(胎室), 영축산의 감응사 등이 있다.
전시공간으로서 금수문화예술마을은 2000년 4월 문화관광부와 성주군, 그리고 성주교육청이 지역문화의 창달을 위해 예술인들에게 제공된 창작스튜디오이자 주민들의 문화체험공간이다. 2003년 개관한 성주문화예술회관은 공연, 전시를 위한 공간과 여성복지센터 1개동을 갖추고 있다.
문화행사 및 축제[편집]
민속놀이로는 줄다리기·답교 놀이·달불 놀이 등이 전해온다. 대표적인 문화행사는 매년 가을에 열리는 성주문화제로, 농악대회·씨름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린다.
성주 참외 축제는 성주 참외의 우수성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하여 매년 4월 말에서 5월 초까지 성밖숲에서 개최되는 축제이며 많은 관광객 유치와 다양한 프로그램 진행으로 2008년에 경상북도 지정 우수 축제로 지정됐다. 현재는 성주 생명 문화축제로 바뀌었다.
성주 가야산 야생화 축제는 469종의 식물이 분포하는 자연의 보고인 가야산은 야생화와 야생초의 은은한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곳이다. '산과 꽃, 천연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실시된 "성주 가야산 야생화 축제"는 매년 5월에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에서 열리는 행사다. 고적대 퍼레이드, 농악 한 마당, 야생화 사진전, 약초 전시회 등이 열린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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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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