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구
성북구(城北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북동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동쪽으로 노원구, 중랑구와 접하고, 서쪽으로 한양도성을 경계로 종로구와 접한다. 북한산을 경계로 서쪽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와도 접하며, 남쪽으로 동대문구와 접하고, 북쪽으로 강북구, 도봉구와 접한다. 명칭은 한양도성(城)의 북(北)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성동구(城東區)도 마찬가지. 성북구 내의 성북동(城北洞)도 서울 성곽 바로 북쪽에 위치해있다.[1]
개요[편집]
서울특별시의 북동부, 경도상으로는 동경 126˚ 58´ 37˝~127˚ 04´ 32˝, 위도상으로는 북위 37˚ 32´ 14˝~38˚ 28´ 42˝에 위치한다. 구의 동쪽 끝은 석관동, 서쪽과 북쪽 끝은 정릉동, 남쪽 끝은 보문동 6가이며, 동서 간 거리는 8.58㎞, 남북 간 거리는 6.03㎞이다. 면적은 24.57㎢로 서울시 전체 면적의 4.1%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9번째로 크다. 행정구역은 20개 행정동(39개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릉 3동이 전체 면적의 15.1%를 차지하여 가장 크고 정릉 1동이 전체 면적의 1.8%로 가장 작다. 인구는 2020년을 기준하여 44만 7056명으로 서울시 전체 인구의 4.5%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9번째로 많다. 구를 상징하는 꽃은 진달래, 나무는 감나무, 새는 참새이다. 구청 소재지는 삼선동 5가이다.
서울 성저십리 지역 중에 주택 조성이 광복 이전에 진행된 지역 중 하나로,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성북구에 산다"라고 하면 서울 토박이 내지는 서울에서 장기 거주한 주민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단, 이 이미지에 부합되는 성북구는 미아리고개 남쪽, 즉 성북, 동소문, 삼선, 동선, 보문, 안암동 인근을 말한다. 미아리고개 북쪽 지역은 난개발이 진행되면서, 재개발이 시작되기 전인 1970~1980년대만 해도 미아리고개를 경계로 빈부차를 비롯 문화적으로도 큰 차이가 있었다. 예를 들면 남쪽의 부유한 중고등학생들을 노리고 떼로 몰려와 갈취와 폭행을 일삼는 불량배들과 이에 맞서려는 학생들 간의 패싸움이 자주 일어났었는데, 영화배우 최민식이 대일 고등학교 재학 시절 휘말렸던 패싸움이 바로 이 시기였다.[2][3]
자연환경[편집]
서북부에 북한산의 남장 대(712m)와 북악산(342m)·낙산(125m)으로 이어지는 산릉이 종로구와 경계를 이룬다. 북한산 자락이 중앙부의 개운산(134m)으로 이어지면서 형성한 구릉에 아리랑고개와 미아리고개가 위치하고, 동부의 천장산(140m)이 동대문구와 경계를 이룬다. 서북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고도 100m 이하의 구릉성 산지를 형성하며, 대체로 남북으로 좁고 동서로 긴 지형을 이룬다. 서울~원산을 잇는 추가령구조곡이 구의 동쪽으로 지나가고, 그 단층을 따라 흐르는 중랑천이 중랑구와 경계를 이룬다. 지질은 중생대 쥐라기의 대보조산운동으로 형성된 대보 화강암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성북천·정릉천·중랑천 등의 하천 연안에 충적층이 분포한다. 북악산 남부에서 발원하는 성북천(안암천)은 구의 남부를 동남 방향으로 흘러 동대문구에서 청계천에 합류하고, 북한산 정릉계곡에서 발원하는 정릉천은 남쪽으로 내부순환로를 따라 흐르다가 동대문구에서 청계천에 합류한다.
연평균기온(2001~2010년)은 12.9℃로 서울시 평균(13.0℃)과 비슷하다. 연평균 일 최고기온은 17.6℃, 연평균 일 최저기온은 8.8℃로 연평균 일교차가 8.8℃로 나타난다. 식물의 성장 가능 기간은 265.6일로 서울시 평균(268.5일)보다 2.9일 짧다. 연평균 강수량은 1424.5㎜로 서울시 평균(1387.3㎜)보다 38㎜가량 많으며, 연평균 강수량의 60% 이상이 여름철에 집중하는 하계 다우형이다.
역사[편집]
성북구 지역에서 발견된 구석기·신석기시대 유적은 아직 없다. 그러나 이 지역이 한강 유역에 위치하고 있고, 한강 유역의 하남시 미사리 유적이나 강동구 암사동 유적에서 선사시대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대국가로서 마한이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서기전 18년 온조(溫祚)가 한강 유역에 백제국(伯濟國)을 건국하고 점차 마한제국을 병합하여 백제(百濟)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475년 고구려의 남하로 수도를 공주로 옮길 때까지 500여 년간 한강 유역을 지배하였다.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이 일대에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설치하여 80여 년간 다스렸다.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동맹을 파기하고 이 일대를 독차지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 혹은 신주(新州)를 두어 관리하였다. 통일을 달성한 후 신라는 전국을 9주로 나누면서 한강 유역을 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로 개칭하고 한강과 접하고 있는 서울 지역에는 따로 한양군을 두었다. 이로 인해 성북구는 한산주의 한양군에 속하게 되었다.
후삼국시대 ‘성북 지역’은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弓裔)가 895년 한산주 관내의 10여 성을 복속시킴에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왕건(王建)이 건국한 고려에 귀속되었다. 이 일대는 고려 초 양주(이때의 양주는 지금의 양주군이 아니라 고려 초 서울의 이름이다),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한양이라 불리었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설치하여 지방통치체제를 정비할 때 양주목에 속하였고, 1018년(현종 9)에는 지주사(知州事)로 격하되어 광주목(廣州牧)의 관내에 예속되었다. 이어 1067년(문종 21) 한강 북부지역에 남경을 설치하면서 서경(西京)·동경(東京)과 함께 삼경체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068년에는 남경이궁(南京離宮)을 설치하고, 남경으로의 천도론이 제기되어 1101년(숙종 6) 9월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남경 궁궐 후보지를 물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104년 지금의 청와대 부근에 새 궁궐이 낙성되어 왕이 친행해 점검하는 등 거의 천도가 실현될 단계까지 이르렀으나, 이듬해 왕이 죽자 실천되지 않았다. 그 뒤 1308년(충렬왕 34)에 한양부(漢陽府)로 개칭되었고, 유수를 윤으로 고치는 외에도 판관과 사록 등의 관직을 두었는데 이는 그 지위가 격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공민왕 때 이르러 원과의 기반을 끊고 과거의 폐정을 혁신함과 동시에 새로 도읍을 옮길 것을 계획했는데, 이때 천도의 유력한 후보지로 한양이 물망에 올랐고, 왜구의 침략으로 한양 천도론이 고개를 들었다. 우왕과 공양왕 때는 일시 한양 천도가 단행되기도 했으나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가 조선의 개창을 계기로 천도 문제는 최종적인 결정을 보게 되었다. 성북 지역에는 고려 시대 남경의 영화를 보여주듯 보문사(普門寺)·미타사(彌陀寺)·경국사(慶國寺) 등 고려 시대에 창건된 사찰들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고려 말부터 대두되던 한양 천도론은 조선이 개창 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개경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신도읍이 필요했고, 이러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던 곳이 바로 한양이었다. 여러 지역이 도읍 후보지로 거론되었으나 태조는 1394년(태조 3) 8월 24일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확정하였다. 이어 9월 1일 궁궐 건설의 실무를 담당 추진하기 위한 기관인 신도 궁궐 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고, 9월 9일에는 한양에 대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궁궐·종묘·사직과 도로의 건설, 각종 관아의 배치 등 기본계획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25일 천도를 단행하여 3일 후인 10월 28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이어 이듬해 12월에 조선시대 정궁(正宮) 인 경복궁이 완공되어 비로소 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한양부를 한성부(漢城府)라 고치고 이듬해 9월에는 도성과 문루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동·서·남·북·중 5부(部) 52방(坊)으로 나누어 도시 규모를 정비하였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조선의 수도로서 한성이 탄생된 것이다.
성북구 일대는 조선시대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 이내의 지역으로 후기에는 숭신방(崇信坊)과 인창방(仁昌坊)에 속하였다. 특히 성북구는 도성의 북쪽지역이라는 지리적 위치에서 지명이 유래되었고, 서울의 4소문 가운데 하나인 혜화문을 지나 원산에 이르는 동북방 간선도로가 이 지역을 관통하고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여진과의 통로가 되었음은 물론 노원구 일대의 누원점(樓院店)과 연계되어 상인들이 통행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이 외에 동활인서 등 빈민구제기관이 설치되어 운영되기도 하였으며, 삼선평(三仙坪)에는 군사 훈련이 실시되고 성곽 수비를 위한 어영청(御營廳)의 북창(北倉)이 있었다.
1911년 4월 1일 5부 8면제가 실시됨에 따라 이 지역은 경성부 관할의 숭신면(崇信面)과 인창면(仁昌面)이 되었고, 1914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崇仁面)의 관할 하에 있었다. 1936년 경성부의 구역이 확장되면서 숭인면의 23개 리 가운데 14개 리가 경성부에 편입되어 동부출장소의 관할 하에 들어갔고, 나머지 9개 리는 그대로 고양군 숭인면으로 남게 되었다. 1943년 출장소 대신 구(區)제도가 실시되면서 동부출장소는 동대문구역소와 성동구역소로 나뉘었고, 이 지역은 동대문구역소에 속하게 되었다.
1945년 10월 16일 구역소를 구청으로 하고 구장(區長)을 구청장(區廳長)으로 개칭하면서 동대문구역소도 동대문구청으로 바뀌게 되었다. 1949년에는 경기도 고양군에 속했던 숭인면 전 지역이 서울시 구역에 편입되었고, 동대문구 관내의 일부와 숭인면 지역을 합하여 성북구가 탄생되었다.
1955년에는 종래의 동회(洞會)를 동(洞)으로 개칭하고 각 구청에 행정동을 따로 정하여 행정업무를 담당하도록 함에 따라 성북구에는 23개의 행정동이 있었다. 1962년에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蘆海面, 노원구 일대)이 서울시로 편입되면서 성북구의 관할구역이 대폭 확장되어 1970년에는 45개의 행정동으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1973년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구되면서 성북구의 관할구역은 대폭 축소되었고, 1975년에는 성북구의 석관동, 종암동, 안암동 4·5가의 일부가 동대문구로, 성북구 정릉동과 하월곡동 일부는 도봉구로, 동대문구 보문동 1~7가와 신설동 일부는 성북구로, 도봉구 미아동 일부는 성북구로 각각 편입 조정이 이루어짐에 따라 성북구에는 모두 32개의 행정동이 있었다. 이후 인구증가에 따라 분동이 이루어져 성북구에는 39개의 법정동과 20개의 행정동이 있다.
1977년 안암 1~2동을 안암동으로 합동하고 장위 1~2동에서 장위 3동을 분동하였으며, 길음동을 길음 1동으로, 인수동을 길음 2동으로, 송천동을 길음 3동으로 개칭하였다. 1980년 삼선 2~3동을 삼선 2동으로, 보문 1~2동을 보문동으로 합동하여 30개 행정동으로 재편하였고, 1988년 하월곡 1~4동을 월곡 1~4동으로 개칭하였다. 2007년에는 성북 1~2동과 동소문동 일부를 성북동으로, 삼선 1~2동과 동소문동 일부를 삼선동으로, 동선 1~2동을 동선동으로, 길음 3동을 길음 2동으로, 종암 1~2동을 종암동으로, 석관 1~2동을 석관동으로 각각 합동하여 20개 행정동으로 개편하였다. 2020년을 기준하여 행정구역은 20개 행정동(길음 1~2동·돈암 1~2동·동선동·보문동·삼선동·석관동·성북동·안암동·월곡 1~2동·장위 1~3동·정릉 1~4동·종암동) 39개 법정동(길음동·돈암동·동선동 1~5가·동소문동 1~7가·보문동 1~7가·삼선동 1~5가·상월곡동·석관동·성북동·성북동 1가·안암동 1~5가·장위동·정릉동·종암동·하월곡동)으로 이루어져 있다.[4]
산업[편집]
교육서비스업을 비롯한 서비스업의 비중이 가장 크다. 2018년을 기준하여 지역 내 총생산(GRDP)은 6조 548억 원으로 서울시 GRDP의 1.4%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20번째에 해당한다. 경제활동별 부가가치의 비중은 교육서비스업(22.2%)이 가장 크고, 이 밖에 도소매업(9.8%), 보건업·사회복지 서비스업(9.5%), 사업서비스업(8.8%), 건설업(7.2%) 등의 순이다. 교육서비스업의 부가가치(1조 2537억 원)는 서울시 교육서비스업 총 부가가치의 6.6%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강남구·서대문구 다음으로 비중이 크다.
2018년 사업체 수는 2만 3287개로 서울시 전체 사업체의 2.8%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20번째에 해당하며, 도소매업체(20.6%)와 숙박·음식점 업체(19.2%), 운수·창고업체(13.2%), 협회·단체 수리 및 기타 개인 서비스 업체(11.5%), 제조업체(9.5%)가 전체 사업체의 74%를 차지한다. 석관동·동선동·종암동·삼선동·월곡2동의 5개 동에 전체 사업체의 약 40%가 분포하고, 개인 사업체가 86%, 종사자 5인 미만의 소규모 업체가 82%를 웃돈다. 사업체 종사자는 10만 8200여 명으로 서울시 전체 종사자의 2.1%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21번째에 해당한다. 다만 다양한 교육 시설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서비스업 종사자(2만 1481명)가 전체의 약 20%를 차지하여 서울시 전체 평균(6.6%)를 크게 상회하는 특징을 보인다. 제조업은 인접한 동대문 상권의 배후 생산지로서 섬유·봉제업이 활발하다. 제조업체는 2214개로 서울시 전체 제조업체의 3.8%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9번째로 많으며, 섬유·봉제업체가 70% 가까이 차지한다.
상업은 정릉동에 정릉 아리랑 시장과 정릉시장, 길음동에 길음 시장, 석관동에 석관시장과 돌곶이시장(석관황금시장), 동소문동에 돈암시장, 장위동에 장위전통시장과 장곡 시장, 하월곡동에 밤나무골 시장 등의 전통시장이 상설시장으로 운영된다. 이 밖에 유통 업체로는 백화점 1개소, 대형 할인점 3개소, 복합 쇼핑몰 1개소, 그밖에 대규모 점포 15개소 등이 있다.
교통[편집]
서울 도심과 동북부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도시고속화도로인 내부순환로가 종로구에서 성북구를 거쳐 동대문구로 이어지고, 하월곡동을 기점으로 하는 북부간선도로가 내부순환로와 이어져 장위동·석관동을 거쳐 경기도 남양주시까지 이어진다. 송파구에서 경기도 의정부시까지 이어지는 동부 간선도로가 중랑천을 따라 성북구 동부의 석관동 외곽으로 지나간다. 주요 간선도로는 국도 3호선의 일부인 도봉로가 길음동을 기점으로 하여 강북구를 거쳐 도봉구 도봉동까지 이어지고, 이 밖에 동소문로·종암로·보문로·북악산로·창경궁로·혜화로·오패산로·정릉로·지봉로 등이 구의 내·외곽을 연결한다.
철도 교통은 1985년 상계역을 기점으로 하는 서울 지하철 4호선이 개통하여 성북구의 길음역~성신여대입구역~한성대입구역까지 운행하였으며, 이후 수도권 전철 4호선으로 확장되어 노원구 상계역에서 성북구를 거쳐 경기도 시흥시 오이도역까지 운행한다. 2000년에 응암역~신내역을 운행하는 수도권 전철 6호선이 개통하여 성북구의 보문역~안암역~고려대역~월곡역~상월곡역~돌곶이역을 경유한다. 2007년에는 강북구의 북한산우이역을 기점으로 하여 동대문구의 신설동역까지 운행하는 서울 경전철 우이신설선이 개통하여 성북구의 북한산 보국문 역~정릉역~성신여대입구역을 경유하며, 성신여대입구역에서 수도권 전철 4호선과, 보문역에서 수도권 전철 6호선과 각각 접속한다.
관광[편집]
북한산국립공원의 일부가 성북구에 속하여 정릉탐방지원센터를 기점으로 하여 넓적 바위~깔딱고개를 거쳐 북한산성의 보국문에 이르는 보국문 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서울과 경기도에 걸쳐 북한산 주변에 조성된 북한산 둘레길 21개 구간 가운데 북한산 생태숲에서 정릉 주차장까지 2.1㎞ 구간의 솔샘길, 정릉 주차장에서 청수사를 거쳐 형제봉에 이르는 2.4㎞ 구간의 명상 길이 성북구에 속한다.
역사 명소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 왕릉' 가운데 태조의 정비 신덕왕후의 묘역인 서울 정릉(사적)이 정릉동에, 제20대 왕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의 묘역인 서울 의릉(사적)이 석관동에 있다. 조선 초기에 낙산·인왕산·남산·북악산 등 내사산(內四山)의 능선을 따라 약 18㎞에 걸쳐 축조된 서울 한양도성(사적) 성곽이 복원되어 성북구와 종로구의 경계를 이루며, 한양도성을 따라 형성된 성북동 북정마을과 삼선동 장수마을이 성곽마을로 지정되어 있다. 예전에 성락원(城樂園)이라 부르던 성북동 별서(別墅)는 조선시대 전통 정원의 원형을 간직한 곳으로서 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다워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이 밖에 성북동에 조선의 역대 왕비들이 누에신[蠶神]으로 알려진 서릉씨에게 제사를 지내며 양잠의 풍요를 기원하던 서울 선잠단지(사적), 만해 한용운이 직접 짓고 기거하다가 생애를 마친 만해 한용운 심우장(사적), 한국 현대소설에 큰 자취를 남긴 이태준이 작품을 집필하던 상허 이태준 가옥(서울민속문화재), 'ㅁ'자 평면의 전형적 경기지방 한옥양식을 보여주는 서울 성북동 최순우 가옥(국가등록문화재) 등이 있다.
정릉동의 봉국사와 경국사를 비롯하여 돈암동에 흥천사, 안암동에 개운사, 보문동에 미타사 등의 고찰(古刹)이 있으며, 1990년대에 창건한 성북동의 길상사는 《무소유》 등의 수필로 잘 알려진 법정(法頂)이 회주로 주석하던 사찰로서 수려한 경관과 함께 템플스테이·미술대회·자선음악회 등이 열리는 도심의 문화공간으로도 유명하다. 북악산 능선을 따라 종로구의 창의문(자하문)에서 아리랑고개까지 이어지는 북악스카이웨이는 나선형의 도로가 조성되어 드라이브코스로 유명하고, 1968년 1·21사태 이후 40여 년간 군사통제구역이었던 북악산 일대에 산책로 북악하늘길이 조성되어 찾는 이가 많다. 먹거리 명소로는 칼국수·잔치국수부터 파스타까지 다양한 면류를 맛볼 수 있는 성북동 누들거리(국수거리)가 있다.
교육[편집]
전통 교육기관은 조선 초기에 설립된 성균관과 4부 학당이 수도 한양의 공공 교육기관 역할을 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08년에 삼산의숙(삼산학교)이 처음으로 설립되어 1942년 공립삼산 국민학교로 전환되었으며, 1946년에 이를 모태로 한 서울 성북국민학교가 출범하여 지금의 서울성북초등학교로 이어진다. 1934년에는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가 안암동의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같은 해에 설립된 조선 무선강습소가 조선 무선중학교(6년제)를 거쳐 1952년 남대문중학교와 동국 무선고등학교(지금의 노원구 광운전자공업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이밖에 1936년 성신여학교(지금의 성신여자중학교·성신여자고등학교), 1937년 숭인 공립보통학교(지금의 서울 숭인초등학교), 1940년 욱구 공립중학교(지금의 경동고등학교), 1942년 동구 가정실 수여학교(지금의 동구여자중학교와 동구마케팅고등학교), 1944년 계성 여자상업전수학교(지금의 계성고등학교), 1945년 한성 고등여학교(지금의 한성여자중학교·한성여자고등학교), 1946년 서울대학교사범대학 부설중·고등학교와 성도 중학교(지금의 용문중학교·용문고등학교) 등이 개교하였다.
2019년을 기준하여 교육기관은 대학교 8개교(고려대학교·국민대학교·성신여자대학교·동덕여자대학교·한성대학교·서경대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를 비롯하여 고등학교 13개교, 중학교 18개교, 초등학교 29개교 등이 있다. 학생 수는 15만 309명으로 25개 구 가운데 종로구 다음으로 많다.
문화재[편집]
국가 지정 문화재로는 국보 5점(청자 상감운학문 매병·분청사기 인화 국화문 태항아리·혼천의 및 혼천시계·동궐도(1989)·용감수경 권 3~4)과 삼국유사 권 3~5·대동여지도(1985)·수선전도 목판을 비롯한 보물 23점, 정릉·의릉·서울 고려대학교 본관을 비롯한 사적 6개소, 명승 1개소(서울 성북동 별서), 국가무형문화재 1점(번외장), 국가 민속문화재 2점(사영 김병기 일가 옷·고대박물관 소장 홍진종 의복) 등이 있다. 이 밖에 1939년에 건립된 한옥 주택으로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에 거처하던 서울 돈암장을 비롯한 15점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시 지정 문화재로는 삼군부 총 무당·흥천사 극락보전·보문사 석가 불도·개운사 감로도·경국사 목관음보살좌상을 비롯한 서울유형문화재 59점, 성북동 이종식 별장을 비롯한 서울 민속문화재 4점, 정각사 석가불도·미타사 감로도를 비롯한 서울문화재자료 11점 등이 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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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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