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구
동대문구(東大門區)는 서울특별시의 동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동쪽으로는 중랑구와 광진구, 서쪽으로는 종로구, 남쪽으로는 성동구, 북쪽으로는 성북구와 접한다. '동대문'의 명칭은 조선 시대의 도읍지인 한양의 동문인 흥인지문의 별칭 '동대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지만 현재 흥인지문은 동대문구가 아닌 종로구에 속해 있다.[1]
개요[편집]
서울특별시의 동부, 경도상으로는 동경 127˚ 01´ 23˝~127˚ 04´ 41˝, 위도상으로는 북위 37˚ 33´ 36˝~37˚ 36´ 27˝에 위치한다. 구의 동쪽과 남쪽 끝은 장안동, 서쪽 끝은 신설동, 북쪽 끝은 이문동이며, 동서 간 거리는 4.19㎞, 남북 간 거리는 5.29㎞이다. 면적은 14.25㎢로 서울특별시 전체 면적의 2.4%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중구·금천구 다음으로 작다. 행정구역은 14개 행정동(10개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용신동이 전체 면적의 11.3%를 차지하여 가장 크고, 휘경 1동이 전체 면적의 4.4%로 가장 작다. 2020년을 기준하여 인구는 35만 7014명으로 시 전체 인구의 3.6%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17번째에 해당한다.
청량리역에서부터 서울시립대학교로 이어지는 왕산로가 구의 중앙에 있으며 인근 롯데백화점 청량리점(구 맘모스 백화점)과 경동시장으로 불리는 커다란 재래시장 등이 구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하부에 신설동 로터리, 장안동, 경희대 외대 앞 등의 소 중심지들이 있다. 청량리 지역은 구의 중심일 뿐 아니라 서울 동북부의 중심이며 신촌, 영등포, 강남 지역과 함께 서울의 4대 부도심이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동대문구 청량리 지역은 서울의 주요 부도심이다. 하지만 강남권과 영등포권이 3대 도심으로 성장하면서 현재는 상대적으로 상권이 크게 위축되고 노후화되었다. 서울에서 전통시장이 제일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인데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지. 최근에는 구의 상업중심지 역할을 다른 구에서 담당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청량리가 부도심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민자 역사 완공 후 나아지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미 상당수는 종로구, 중구와 광진구의 건대입구역 일대로 흡수된 양상을 보인다.
구를 상징하는 꽃은 목련,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백로이다. 구를 대표하는 캐릭터는 예로부터 문화교류와 소통의 중심지였던 지역적 특성을 여러 색상의 조화로 표현하고, 구민이 함께 어우러져 활력이 넘치는 문화도시로 성장하고자 하는 꿈과 희망을 담아 귀엽고 친근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형상화한 '꿈동이'이다. 구청 소재지는 용두동이다.[2][3]
자연환경[편집]
전농동과 휘경동에 걸쳐 있는 배봉산(108m)과 회기동 북부의 일부 산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해발고도 100m 이하의 저지대를 형성하며, 대체로 북부의 이문동과 서부의 신설동, 남부의 장안동을 꼭짓점으로 하여 비스듬한 삼각형의 지형을 이룬다. 동쪽으로 경기도 양주시에서 발원하는 중랑천이 중랑구·광진구와 경계를 이루며 남류 하여 한강으로 유입되며, 남쪽으로는 청계천이 성동구와 경계를 이루며 동류하면서 정릉천·성북천 등의 지류와 합쳐져 중랑천에 합류한다. 지질은 배봉산과 회기봉 북부 산지에 중생대 쥐라기의 대보 화강암 또는 서울 화강암이 분포하며, 제4기의 중랑천 범람으로 형성된 충적평야가 넓게 발달하여 시가지 발달에 유리한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다.
청계천은 북악산 서쪽 계곡 지점에서 발원하여 서울을 관통해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이고, 중랑천은 의정부시 수락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다가 성동구 장안교 부근에서 청계천과 합류하여 한강으로 유입된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를 바탕으로 도시 기후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연평균 기온은 13.3℃, 1월 평균기온 -0.4℃, 8월 평균기온 26.5℃, 연 강수량은 1212.3㎜이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를 바탕으로 도시 기후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역사[편집]
동대문구 강 유역 평원지대의 천연적 생활 터전을 바탕으로 동대문 지역은 일찍이 선사 문화를 꽃피웠고 오늘날까지 주거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전농동에서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지금은 동대문구에서 분리된 면목동에서는 후기 구석기 유물이, 망우동·상봉동에서는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었다.
2세기경에 들어 북방 유이민의 흡수에 따라 마한(馬韓)의 목지국(目支國)을 비롯하여 백제국(伯濟國), 진한(辰韓)의 사로국(斯盧國), 변한(弁韓)의 구야국(狗耶國) 등 유력한 정치세력이 등장하였는데, 이 가운데 동대문구 지역과 관련되는 백제국은 마한 54개국의 하나로 북방 유이민들이 현 서울 지역인 한강 유역에 자리 잡은 군장 사회로, 마한을 정복하고 초기 고대국가인 백제(百濟)로 발전하였다.
백제가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고대국가로 성장 발전함으로써 동대문구 일대는 백제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이들은 한강 유역의 경제성을 이용하여보다 많은 생산활동과 인구의 증가에 따라 한반도 서남부 최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한 군현(漢郡縣)의 세력인 낙랑군(樂浪郡)과 교류하며 선진문화를 받아들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적대관계에 들어갔으며, 백제는 한강 이남으로 도읍을 옮겼다. 동대문구 지역의 위치는 한강 이북에서 백제 세력의 낙랑 지역 진출과 방어에 길목 역할을 하였으며, 4세기 중엽 근초고왕(近肖古王) 때 전성기를 이루었다.
475년 백제는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 내주고 웅진(雄鎭)으로 천도하였고, 향후 77년간 동대문구를 포함한 서울 지역은 고구려의 통치하에 들어갔으나, 553년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독점함으로써 이 지역의 새로운 패자가 되었다. 이후 한강 유역은 신라 삼국통일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신라는 전국을 9주로 나누면서 동대문구를 포함한 서울 지역을 한산주(漢山州)로 편입시켰다. 757년(경덕왕 16)에는 한산 주가 한주(漢州)로 개칭되었고, 서울 지역에는 한양군(漢陽郡)이 설치되었으며, 후삼국시대에는 태봉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918년 왕건(王建)이 고려왕조를 개창 함에 따라 한양군은 고려에 편입되었으며, 940년(태조 23)에는 전국의 행정구역이 재편성되고 군현호(郡縣號)가 개칭됨에 따라 한양군은 양주(楊州), 한주는 광주(廣州)로 개편되었다.
동대문구를 포함한 서울 지역은 대체로 정종(1035∼1046) 때까지 양주, 문종 이후 충렬왕(1275∼1308) 때까지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 한양부(漢陽府)로 불렸다. 즉 한양부는 고양(高陽)·양주(楊州)·포천(抱川) 등 현재 한강 이북 서울 지역과 그 주변 일대를 포괄하게 되었다. 이후 공민왕 5년(1356)에 이르러 다시 한양 부가 남경으로 환원되었지만, 또다시 양주 부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공양왕 3년(1391) 한양 천도가 이루어졌다. 서울 지역은 조선왕조가 개창되어 수도로서 한성부(漢城府)가 되기까지 한양부로 존속되었다.
한양 천도가 실현되고 도성이 축조됨으로써 동대문구 지역은 수도 한성부의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에 편입되었다. 약 18㎞의 도성 수축과 더불어 4대문 가운데 하나인 흥인문(興仁門) 즉 동대문(東大門)이 건립됨으로써 도성 동쪽 지역이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숭신방(崇信坊)과 인창방(仁昌坊)이 설치되었다.
1867년(고종 4) 한성부는 5부 47방 340계로 분할되었다. 이때 동대문구 지역은 동부 숭신방의 일부와 인창 방에 해당되었는데, 이때 숭신방에는 숭신동계(崇信洞契)·월곡리계(月谷里契)·사아리계(沙阿里契)·안암동계(安岩洞契)·종암동계(鐘岩洞契)·장위리계(長位里契)·능동계(陵洞契)·수유촌계(水逾村契)·가오리계(加五里契)·우이리계(牛耳里契)·어창계(御倉契)·신설계(新設契)·벌리계(伐里契) 등이 있었고, 인창 방에는 인창동계(仁昌洞契)·왕십리 일계(往十里一契)·이계(二契), 사계(私契), 마장리계(馬場里契)·답십리계(踏十里契)·중랑상리계(中浪上里契)·중랑하리계(中浪下里契)·청량리계(淸凉里契)·전농리계(典農里契)·제기리계(祭基里契) 등이 있었다.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에는 한성부 5부를 5서로 고치고, 계를 줄이는 대신 동(洞)을 새로이 두어 47방 228계 775동으로 개편되었다. 이때 동대문구 지역은 동서 숭신방 동문외계(東門外契)와 동소문외계(東小門外契), 인창방 동문외계, 동소문외계·왕십리계 지역에 해당되었다. 농정을 중심으로 한 자급자족 경제체제에서 왕이 풍작을 기원하는 제단으로서 선농단(先農壇)이 설치되어 선농제(先農祭)를 국왕이 행하는 등 동대문구 지역은 상징적으로 봉건국가 경제를 선도하는 지역이었다. 아울러 동대문을 지나 원산시(元山市)·경흥(慶興)에 이르는 서울 동북방의 간선 도로가 이 지역을 관통하고 있어, 조선 동북방의 물산이 한성에 집결하는 통로가 되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 들어서 사상(私商)이 발달하고 누원점(樓院店)의 도매와 이현시장(梨峴市場)이 연결되는 등 상업 활동의 중심지역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보제원(普濟院) 등이 있어 역원(驛院)의 기능, 노인 위로잔치와 빈민 구휼 및 환자 치료를 위한 진제장(賑濟場)으로도 운영되었다. 장안평(長安坪)에는 국립목장이 있어 왕실의 사냥터가 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왕실의 능묘 지역으로 주목받아 홍릉(洪陵)·영휘원(永徽園)·숭인원(崇仁園)·휘경원(徽慶園) 등이 자리 잡기도 하였으며 식민지 시기인 1914년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경성부 8면 중에서 일부는 경성부로 편입되었고 6개 면은 고양 군 숭인 면에 편입되었다. 숭인 면은 휘경원·답십리·전농 리·청량리·회기 리·병점리·장위리·석환 리·상월곡 리·하월곡 리·제기리·용두리 등 12개 리로 형성되었다. 1936년 4월 1일을 기하여 경성부는 행정구역을 약 4배로 확장하자 인구가 증가하게 되었다.
일제는 고양 군의 숭인 면을 경성부에 편입하면서 동 명칭을 일본 식인 정(町)으로 바꾸었고 동부출장소를 두어 그 관내에 속하도록 하였다. 당시 고양 군 관내에서 편입된 지역은 안암리·성북리·신설 리·종암리·돈암 리·답십리·전농 리·청량리·회기 리·휘경 리·이문리·제기리·용두리 등이었다.
1943년 구제(區制) 실시로 동부출장소에 동대문구 역소와 성동구 역소가 설치되어 종전의 마을이 동대문구에 속하게 되었다. 아시아 대륙으로 군수물자와 군대를 수송해야 했던 일본은 중앙선을 개통하였고, 청량리역의 역할은 확대되었다.
8·15 광복과 함께 서울시에 소속되었고, 1946년 경성부가 서울시로 개칭되고 일제식 행정구역 명칭인 정·통 등이 동·가(街)·로(路)로 변경되었다. 1949년 서울시가 특별시로 승격되면서 동대문구의 돈암동·안암동·성북동·종암동 등이 신설된 성북구에 편입되었으며, 1955년 서울 전역에 동제(洞制)가 실시되어 동대문구는 21개 행정동으로 편제되었다. 1963년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의 상봉리·중화리·묵동리·신내리·망우리와 성동구의 면목동 등이 동대문구에 편입되었으며, 1973년 면목동 일부가 성동구에 편입되고 성동구의 중곡동 일부가 동대문구에 편입되어 36개 행정동으로 개편되었다. 1975년에는 동대문 지역을 포함하여 창신동·숭인동과 신설동 일부가 종로구에, 면목동·용두동·답십리동의 일부가 성동구에, 보문동과 신설동 일부가 성북구에 각각 편입되었으며, 성동구의 중곡동·능동·군자동 일부가 동대문구에 편입되어 장안동이 신설되는 등의 개편을 통하여 32개 행정동으로 축소되었다.
1988년 동대문구의 망우동·면목동·묵동·상봉동·신내동·중화동이 분리되어 중랑구가 신설되었고, 2008년 용두 1~2동이 용두동으로, 청량리 1~2동이 청량리동으로, 전농 2·4동이 전농 2동으로, 답십리 3·5동이 답십리 3동으로 각각 합동되어 22개 행정동으로 재편되었다. 2009년에는 용두동과 신설동이 용신 동으로, 제기 1~2동이 제기동으로, 답십리 1·3동이 답십리 1동으로, 답십리 2·4동이 답십리 2동으로, 장안 1·3동이 장안 1동으로, 장안 2·4동이 장안 2동으로, 이문 1~2동이 이문 1동으로 합동되고, 전농 3동과 이문 3동이 각각 전농 2동과 이문 동으로 변경되어 지금의 14개 행정동 체제가 갖추어졌다. 2020년을 기준하여 행정구역은 14개 행정동(답십리 1~2 동·용신동·이문 1~2동·장안 1~2동·전농 1~2동·제기동·청량리동·회기동·휘경 1~2동) 10개 법정동(답십리동·신설동·용두동·이문동·장안동·전농동·제기동·청량리동·회기동·휘경동)으로 이루어져 있다.[4]
산업[편집]
도소매업을 비롯한 서비스업의 비중이 가장 크다. 2018년을 기준하여 지역 내 총생산(GRDP)은 7조 3282억 원으로 서울시 전체 GRDP의 1.7%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15번째에 해당한다. 경제활동별 부가가치의 비중은 도소매업이 17.8%로 가장 크고, 이밖에 부동산업(14.5%), 교육서비스업(14.0%), 사업서비스업(10.7%), 보건업·사회복지 서비스업(9.6%), 제조업(8.5%) 등의 순이다.
2018년을 기준하여 사업체 수는 3만 1878개로 서울시 전체 사업체의 3.9%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11번째로 많다. 사업체별로는 도소매업체(1만 923개)가 34.3%로 가장 많고, 이 밖에 숙박·음식점 업체(15.3%), 운수·창고업체(11.3%), 제조업체(10.3%), 협회·단체 수리 및 기타 개인 서비스 업체(8.1%) 등의 순이다. 개인 사업체와 종사자 5인 미만의 소규모 사업체가 약 85%를 차지한다. 사업체 종사자는 14만 748명으로 서울시 전체 종사자의 2.7%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14번째에 해당하며, 업종별로는 도소매업 종사자(22%)가 가장 많다.
상업은 청량리역과 제기동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경기 북부와 강원 지역의 농산물이 청량리역을 통하여 반입되면서 제기동에 경동시장이 형성되어 대규모 재래시장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경동시장의 한약재 전문시장이 확대되어 1995년 서울약령시로 지정된 데 이어 2005년에는 한방산업특구로 지정되었다. 서울약령시는 전국 한약재 유통의 약 70%를 차지한다. 이 밖에 제기동에 청량리 농수산물시장·청량 종합도매시장·청량리 청과물도매시장·청량리 종합시장·제기 시장·동서시장·경동 광성 상가, 청량리동에 청량리전통시장, 답십리동에 동부시장·답십리 현대시장·답십리시장, 전농동에 전농로터리시장, 장안동에 전곡시장, 용두동에 용두시장·청량리 수산시장, 휘경동에 이경시장, 이문동에 이문제일시장, 회기동에 회기시장 등이 상설시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2018년을 기준하여 백화점 1개소, 대형 할인점 2개소, 대규모 점포 16개소 등의 유통 업체가 있으며, 도소매업의 부가가치(1조 1983억 원)는 서울시 도소매업 총부가가치의 약 2%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14번째에 해당한다.
제조업체 수는 3297개로 서울시 전체 제조업체의 5.6%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7번째로 많고, 의류봉제를 위주로 하는 의복·의복액세서리 및 모피 제품(41.8%) 제조업체를 비롯하여 섬유제품(13.8%)·식료품(12.8%)·금속가공 제품(6.7%) 제조업체의 비중이 75%를 웃돈다. 제조업 종사자는 1만 3543명으로 서울시 전체 종사자의 약 5%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8번째로 많다. 2018년 제조업 부가가치(5704억 원)는 서울시 제조업 총 부가가치의 3.5%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10번째로 비중이 크다.
교통[편집]
서울 동북권의 교통 요지로서 도시고속화도로인 내부순환로가 동대문구의 청량리동·제기동·용두동을 경유하고, 송파구에서 경기도 의정부시까지 이어지는 동부 간선도로가 중랑천을 따라 동대문구 동부의 이문동·휘경동·장안동을 거쳐 간다. 주요 간선도로는 국도 3호선의 일부인 천호대로가 신설동을 기점으로 하여 강동구 상일동의 상일 나들목까지 이어져 수도권 제1순환 고속도로와 연결되고, 이 밖에 고산자로(성동구 성수동~동대문구 제기동), 망우로(동대문구~중랑구), 청계천로(종로구 세종로~동대문구 답십리동), 보문로(종로구~동대문구~성북구), 사가정로(동대문구 답십리동~경기도 구리시), 왕산로(동대문구 신설동~휘경동), 종암로(동대문구 제기동~성북구 하월곡동), 난계로(성동구~동대문구~종로구), 한빛로(동대문구 신설동~용두동) 등이 구의 내·외곽을 연결한다.
철도 교통은 1911년 청량리역이 영업을 시작하여 서울~원산 간의 경원선이 운행하였으며, 1939년에는 청량리역을 기점으로 하여 서울~경주를 잇는 중앙선이 개통하였다. 1974년에는 서울 지하철 1호선이 개통하여 동대문구의 청량리역~제기동역~신설동역을 거쳐 인천·수원 방면으로 운행하였으며, 2000년부터 수도권전철 1호선으로 확장되어 동대문구의 신이문역~외대앞역~회기역~청량리역~제기동역~신설동역 등 6개 역을 경유한다. 이 밖에 서울 주요 지역을 순환하는 수도권 전철 2호선의 성수지선이 성수역에서 동대문구의 용두역~신설동역까지 운행하고, 수도권 전철 5호선이 강서구 방화역을 기점으로 하여 동대문구의 장한평역을 거쳐 강동구 상일동역까지 운행한다. 중앙선과 경춘선이 각각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과 수도권 전철 경춘선에 편입되어 동대문구의 청량리역~회기역을 운행하고, 수도권전철 수인 분당선이 청량리역을 기점으로 하여 인천시 중구 인천역까지 운행한다. 2017년에는 서울 경전철 우이선이 개통하여 강북구 북한산우이역에서 신설동역까지 운행한다.
관광[편집]
동대문구 역사 명소로는 청량리동에 조선 고종의 후궁인 순헌황귀비 엄 씨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첫째 아들 이진(李晉)의 묘역인 영휘원과 숭인원(사적), 제기동에 신라 이래 역대 왕조의 왕들이 농경의 신이라 전하는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제사를 지내고 친경(親耕) 하는 의식을 거행하던 선농단(사적)이 있다. 명성황후의 능이 있던 청량리동의 홍릉숲에는 2000종이 넘는 국내외 다양한 식물을 보유한 홍릉수목원(홍릉 시험림)이 조성되어 있으며, 전농동의 나지막한 배봉산에는 근린공원과 둘레길이 조성되어 도심의 산책로로 인기가 높다. 답십리동에는 1970년대부터 하나둘씩 들어선 고미술점이 140여 개의 고미술상가를 형성하여 지역의 명소가 되었고, 용두동 고산자교 부근의 청계천 버들습지와 장안동 중랑천 벚꽃길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이다. 제기동의 경동시장·서울약령시와 더불어 신설동에 조성된 서울풍물시장도 각종 생활용품과 관광 기념품 및 토속 상품, 민속 먹거리 등이 다양하고 전통문화 소품을 직접 만들어볼 수 있는 전통문화체험관을 갖추어 국내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먹거리촌으로는 용두동에 주꾸미특화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교육[편집]
전통 교육기관은 조선 초기에 설립된 성균관과 4부 학당이 공공 교육기관 역할을 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918년 경성공립농업학교가 개교하여 서울농업대학·서울 산업대학 등의 변천을 거쳐 1981년 서울 시립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한 뒤 1987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여 지금의 서울시립대학교에 이른다. 초등교육기관은 1919년 동명학원(지금의 서울 삼육초등학교), 1922년 숭인 공립보통학교(지금의 서울 종암 초등학교), 1937년 경성 청량 공립보통학교(지금의 서울 청량초등학교) 등이 개교하였다. 중등교육기관은 1908년 개성에서 설립된 개성정화여자실업중학교가 한국전쟁 후 1953년 종로구 충신동에서 정화여자중학교로 재개교한 뒤 이듬해에 제기동의 현 위치로 이전하였고, 1947년 대광중·고등학교와 흥국공업초급중학교(지금의 동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고등학교) 등이 개교하였다.
2019년을 기준하여 교육기관은 대학교 3개교(서울시립대학교·경희대학교·한국외국어대학교)와 전문대학 1개교(삼육 간호보건 대학), 고등학교 11개교, 중학교 15개교, 초등학교 21개교 등이 있다. 학생 수는 13만 6190여 명으로 25개 구 가운데 종로구·성북구 다음으로 많다.
문화재[편집]
-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 - 사적 361호
- 서울 선농단 - 사적 436호
- 서울 선농단 향나무 - 천연기념물 제240호
- 서울 영휘원 산사나무 - 천연기념물 제506호
- 세종대왕신도비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1호
- 청량리역 검수차고 - 등록문화재 제269호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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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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