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 (서울)
중구(中區)는 서울특별시의 중앙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서울 도심부 중앙에 있다. 동쪽으로는 성동구, 서쪽으로는 서대문구와 마포구, 남쪽으로는 용산구, 북쪽으로는 종로구와 접한다. 서울의 대표적인 산인 남산이 있다. 서울특별시청 등 각종 관공서와 기업체들의 본사 건물, 재래시장 등이 밀집한 곳이다.[1]
개요
서울특별시의 중앙부, 경도상으로는 동경 126˚ 57´ 44˝~127˚ 01´ 33˝, 위도상으로는 북위 37˚ 32´ 27˝~37˚ 34´ 09˝에 위치한다. 동서 간 거리는 5.76㎞, 남북 간 거리는 3.31㎞이며, 면적은 9.96㎢로 서울시 전체 면적의 1.6%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가장 작다. 행정구역은 15개 행정동(74개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장충동이 전체 면적의 13.7%를 차지하여 가장 크고 동화동이 전체 면적의 2.6%로 가장 작다. 인구는 2020년을 기준하여 13만 4635명으로 서울시 전체 인구의 1.4%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가장 적다.
구를 상징하는 꽃은 장미, 나무는 소나무, 새는 까치이다. 구를 대표하는 캐릭터는 서울시의 중심부를 상징하는 하트와 주민과의 소통을 상징하는 고리를 결합하여 형상화한 '하티'이다. 구청 소재지는 예관동이며, 태평로 1가에 서울시청이 있다.
중구라는 명칭은 일제강점기 때 정해진 것으로, 조선인들이 북촌(北村, 현재의 종로구), 일본인들이 남촌(南村)에 많이 모여 거주하였기 때문에, 남촌 일대가 경성부의 중심이라 하여 중구라 명명되었다. 대한민국의 많은 광역시에서 중구라는 자치단체명을 사용하기 때문에 대민 표어 등에는 서울 중구란 표기를 흔히 볼 수 있다. 서울특별시청 소재지이다.[2][3]
자연환경
서울시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며, 산악으로 둘러싸인 서울 분지의 남쪽 절반을 차지하여 대체로 남쪽이 높고 북쪽은 낮은 남고북저형(南高北低形)의 지형을 이룬다. 낙산·인왕산·북악산과 더불어 내사산(內四山)의 하나인 남산(271m)이 남쪽에 솟아 용산구와 경계를 이루고, 북쪽에는 청계천이 종로구와 경계를 이루며 동쪽으로 흘러 성동구에서 중랑천에 합류한다. 조선시대에 수도 한양의 중심부를 흐르던 청계천은 일제강점기와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복개되었다가 2000년대에 복원되어 서울 곳곳에서 취수한 물을 인공으로 방류하는 형태로 하천을 유지하고 있다. 지질은 대부분의 지역이 중생대 쥐라기에 생성된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산 정상부에서 서쪽의 서울역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선캄브리아 시대의 흑운모 편마암이 부분적으로 분포한다. 연평균 기온은 13.3°C, 1월 평균기온은 -1.5°C, 8월 평균기온은 26.1°C, 연 강수량은 1,449.1㎜이다.
역사
서기전 1세기 말엽경 한반도의 중심부인 서울 지방에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였다.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 세력에서 분파하여 남쪽으로 이주해 온 온조·비류 집단은 한강 이남의 마한 50여 개국을 통합하여 백제국을 건설하는 주체가 되었다. 온조 집단은 한강 유역에 위례성(慰禮城)을 쌓고 성읍국가(城邑國家)로서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위례성은 다산 정약용에 의하여 한강 이북임이 논증되었다. 5세기 말엽(475년) 고구려의 백제 도성 함락과 백제의 웅진(熊津, 현 공주) 천도로 한강 유역의 중요 지대는 고구려로 넘어가게 되었다.
고구려는 새로운 개척지인 서울 지역에 북한산군을 설치하여 남평양이라 불렀다. 7세기 중엽 한강 유역을 두고 삼국 간에 공방이 치열하였으나, 660년(무열왕 7)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되고, 668년(문무왕 8) 고구려도 나당군에 의해 멸망되자, 신라는 통일 지역에 9주 5소경 제를 실시함으로써 지금의 서울 지방은 한산주(광주)에 편입되었다. 757년(경덕왕 16)에 한산주는 한주로 개칭되었고, 당시 서울 지방은 한양군으로 개칭되어 그동안 북한산주에서 한성 등으로 호칭되던 것이 한양군으로 개칭되어 한주에 예속되었다. 북한산성과 한성이 고구려 당시에는 남별도로서 주요 군사기지였으나, 통일신라 이후 정치·경제·군사적 면에서 그 중요도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 후 한양군은 신라 말까지 한주의 예속 군으로 지속되었으며, 고려왕조를 창건한 940년(태조 23) 양주(楊州)로 개칭되기까지 그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고려 시대에 중구 지역을 포함한 서울 지방은 대체로 국초에서 정종 때까지는 양주(楊州),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한양(漢陽)으로 불리었다. 서울 지방은 숙종 때에 이르러 남경으로 승격되어 근기 지방(近畿地方)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남경의 규모는 동서로는 대봉(大峰) 즉 오늘날 낙산(駱山)에서부터 지봉(岐峰) 즉 안산(鞍山)에 이르고 있으며, 남북으로는 사리(沙里), 즉 용산 한강변에서 북악산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이렇게 볼 때 중구 지역은 남경의 중심지였으며, 당시 남경의 크기는 지금의 서울 도심지역을 합한 것만큼의 큰 규모였다. 1308년(충렬왕 34)에 즉위한 충선왕은 중앙과 지방의 관제를 개편하면서 남경을 한양부로 개편함과 동시에 부윤(府尹)·판관(判官)·사록(司錄)의 관제를 마련하였다. 다른 부와 마찬가지로 왕의 순주와 어의안치(御衣安置) 등은 한양부에서 사라지고 개경과 가깝기 때문에 국왕의 유행(遊幸)과 사냥터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원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공민왕은 배원사상(排元思想)에 의거한 관제의 환원정책과 천도(遷都)계획을 세웠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우왕은 왕 8년에 잠시 한양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의 천도결의도 무산되어 한양은 또다시 지방행정 단위의 위치로 돌아갔다.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가 1394년 10월 28일 한양에 도착함으로써 도읍지가 옮겨졌으며, 다음 해 한양부를 한성부로 개칭하여, 이후 한성부는 1910년 10월 1일 경성부로 개칭될 때까지 518년간 조선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1395년 9월 종묘와 경복궁이 이루어지고 12월에 왕이 경복궁에 입어하게 되어 신도의 면모를 차츰 갖추게 되었다. 또한 관아·시가·도성·궁성 등의 건설이 차례로 이루어졌다. 다음 해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동·서·남·북·중의 5부 52방으로 구획하고, 도성과 문루를 완성하여 한성부는 일국의 수도로서 내용과 외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때 오늘날의 중구 지역은 한성부 5부 가운데 남부 전역과 서부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였다.
조선 초기의 한성부 관할 행정구역은 도성으로부터 사방 10리까지로 정하였는데, 동쪽으로는 양주 송계원(松溪院)과 대현(大峴), 서쪽으로는 양화도(楊花渡), 덕수원(德水院), 남쪽으로는 한강과 노도(露渡)까지 이르는 지역으로 하였다. 1396년에는 백악산·낙산·목멱산·인왕산을 연결하는 약 18㎞의 도성을 쌓았으며, 도성 내외를 통과할 수 있는 4대 문과 4소문을 건설하였다. 중구 지역은 도성 안의 남쪽 일대를 점하고 있어 왕실·고관의 저택과 신사·궁묘 등이 산재하였다. 목멱 신사(木覓神祠), 국사당(國師堂)은 남산 정상에, 저경궁(儲慶宮)은 남대문로 3가에, 인현왕후(仁顯王后) 생가는 순화동에, 풍운 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노인정은 남산 북쪽 기슭에 있었다.
1880년(고종 17) 최초의 외국공관인 일본공사관이 서대문 밖에 설치되었다. 임오군란(1882년), 갑신정변(1884년) 등으로 일본과 청나라의 침탈이 더욱 거세지면서 한성조약 체결 후인 1885년을 계기로 중구 지역 일대에 각 구미인들의 입경과 거류가 시작되었다. 1897년 10월 12일에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이 거행되고 대한 제국을 선포하였지만, 일제의 조선 침략을 막을 수가 없었다. 1910년 10월 1일 칙령 제357호와 부령 제7호에 의해 경기도 관할이 되면서 경성부로 바뀌어 경성부 관할 아래 있었으며, 1943년 6월 10일 부령 제163호로 구(區) 제도를 실시하여 도성 안을 종로구와 중구로 나누었다. 일제는 중구 남대문로와 을지로에 경제 침탈 기구인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동양 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를 세우고 서울의 금융지구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단초를 마련하였다. 이들 금융기관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대기업체와 백화점도 동시에 입지하게 되었다. 중구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활동으로 강우교(姜宇奎)가 1919년 9월 2일 서울 남대문역에 도착한 사이토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의열단원 나석주(羅錫疇)가 1926년 7월 동양척식회사를 폭파하기로 의논하고 권총과 폭탄을 입수하여 동년 12월 28일 먼저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고 다시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1개를 던졌으나 불발된 동양척식회사 투탄사건이 있다.
1946년 8월 14일 서울특별시 헌장을 미군 정 정보부가 특별 발표하고 동년 9월 18일 법령 제106호로 「서울특별시의 설치」를 발표하였다. 9월 28일 서울특별시가 정식으로 탄생되고 서울시는 종로구·중구·마포구·서대문구·동대문구·용산구·영등포구의 8개 구로 구획되었다. 수도 서울의 관문 서울역을 비롯하여 한국은행, 저축은행, 식산은행, 동화백화점, 경성전기를 비롯한 각 기관의 고층건물들이 즐비하게 되었다. 충무로 일대의 번화가와 명동 부근의 번성으로 수도 서울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대가 된 중구는 인구의 밀도나 경제면 그리고 완비된 문화시설 등으로도 중심 도심 지대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중구 관내의 건물 78%가 파괴되었고, 1953년 3월 말 기준 난민 총수는 9237가구에 4만 894명에 달하였다. 부산에 피난해 있던 서울시청이 복귀하여 정상적인 행정체제를 갖추게 된 것은 1952년 초부터의 일이었다. 도심부 재건의 중앙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제1지구는 상업지역으로서 지리적, 역사적 특성을 증진시키고, 제2지구는 상업 및 주거지역으로서 복지 증진을 목적으로 1965년 시행되었다.
중구청은 한국전쟁 후 종로 3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대규모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여 현대·아세아·청계·대림·삼풍·풍전·신성·진양의 8개 건물과 이 건물을 연결하는 공중회랑 도로를 각 건물 3층 양쪽에 설치하고 청계천로·을지로·마른 내길 위에는 육교 형식으로 연결하였다. 종로~청계천 구간에 들어선 현대상가는 1966년 9월 8일 착공되었고, 청계천~을지로 구간은 10월 25일에 기공되어 세운 상가로 불렀다. 1963년에 동아백화점을 인수한 삼성그룹이 신세계백화점으로 이름을 바꾼 뒤부터 직영체제로 전환하여 1970년대 초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게 되었다. 대농그룹이 인수한 미도파백화점도 1973년에 건물을 개수하고 직영체제로 바꾸게 되자 서울의 중심상권은 충무로·명동으로 다시 옮겨갔다.
1975년 10월 1일부터 중구 구역이 크게 확장되었으며, 이때의 행정구역 확장으로 중구의 면적은 6.34㎢에서 9.99㎢로 58% 정도 넓어졌다. 1981년 12월 31일까지를 유효기간으로 하는 임시 법인 「주택 개량 촉진에 관한 임시 조치법」이 제정되어 불량 무허가 건물 집단지구의 재개발을 촉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76년 도시계획법에서 재개발 조항을 삭제하고 도시재개발법을 단일법으로 제정하여 보다 적극적이고 계획적인 재개발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조치가 마련되었다. 당시 도심재개발사업의 초점은 화교들의 집단 거주 지역인 소공동의 재개발이었으며, 1973년 건설부고시에 의해 서울시내 10개 재개발지구가 ‘개발촉진지구’로 지정되고 1973년 12월 소공지구에 대형 호텔 건물의 기공식이 거행되면서 본격적인 도심재개발사업이 시작되었다.
2005년 을지로 3·4·5 가동이 을지로동으로 개칭되었고, 2013년에는 신당 1~4동이 각각 신당동·다산동·약수동·청구동으로 개칭되고 신당 6동이 동화동으로 개칭되었다. 2020년을 기준하여 행정구역은 15개 행정동(광희동·다산동·동화동·명동·소공동·신당동·신당 5동·약수동·을지로동·장충동·중림동·청구동·필동·황학동·회현동) 74개 법정동(광희동 1~2가·남대문로 1~5가·남산동 1~3가·남창동·남학동·다동·만리동 1~2가·명동 1~2가·무교동·무학동·묵정동·방산동·봉래동 1~2가·북창동·산림동·삼각동·서소문동·소공동·수표동·수하동·순화동·신당동·쌍림동·예관동·예장동·오장동·을지로 1~7가·의주로 1~2가·인현동 1~2가·입정동·장교동·장충동 1~2가·저동 1~2가·정동·주교동·주자동·중림동·초동·충무로 1~5가·충정로 1가·태평로 1~2가·필동 1~3가·황학동·회현동 1~3가·흥인동)으로 이루어져 있다.[4]
산업
서울시의 25개 자치구 가운데 면적은 가장 작지만 금융 관련 기업, 언론사 및 상점들이 밀집하여 금융·보험업과 도소매업, 정보통신업을 비롯한 서비스업이 발달하였다. 2018년을 기준하여 지역 내 총생산(GRDP)은 54조 2746억 원으로 서울시 전체 GRDP의 12.8%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강남구 다음으로 비중이 크다. 경제활동별 부가가치의 비중은 금융·보험업(19조 2763억 원)이 39.6%로 가장 크고, 이 밖에 도소매업(14.7%), 정보통신업(12.2%), 사업서비스업(11.6%), 공공행정·국방 및 사회보장 행정업(5.6%), 운수·창고업(3.0%) 등의 순이다. 금융·보험업의 부가가치는 서울시 금융·보험업 총 부가가치의 약 40%, 전국 금융·보험업 총 부가가치의 약 20%를 차지한다. 또한 정보통신업(5조 9321억 원)과 사업서비스업(5조 6735억 원)의 부가가치는 25개 구 가운데 3번째로 비중이 크다. 주요 기관·기업으로는 한국은행을 비롯하여 우리은행·IBK기업은행·삼성카드·미래에셋증권·금호석유화학·한화솔루션·한진칼·CJ대한통운·CJ제일제당·SK텔레콤 등의 본사 및 본점이 중구에 있다.
2018년을 기준하여 사업체 수는 6만 957개로 서울시 전체 사업체의 7.4%를 차지하여 강남구 다음으로 많다. 사업체별로는 도소매업체(3만 1547개)가 약 52%를 차지하고, 이 밖에 제조업체(15.4%), 숙박·음식점 업체(9.9%), 전문·과학 및 기술 서비스 업체(4.5%), 협회·단체 수리 및 기타 개인 서비스 업체(3.5%) 등의 순이다. 전체 사업체의 74%가 신당동·회현동·을지로동·광희동·명동의 5개 동에 분포하고, 개인 사업체가 약 81%, 종사자 5인 미만의 소규모 업체가 약 84%를 차지한다. 사업체 종사자는 39만 530명으로 서울시 전체 종사자의 7.5%를 차지하여 강남구·서초구 다음으로 많다. 제조업은 인쇄·기록매체 복제업과 의류봉제업체가 주류를 이루며, 제조업의 부가가치(1조 2833억 원)는 서울시 제조업 총 부가가치의 약 8%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5번째로 비중이 크다.
상업은 1897년 남대문 인근에 한국 최초의 근대적 상설시장인 남대문시장이 조성되었고, 1906년에는 지금의 충무로에 일본 미쓰코시 백화점의 임시 출장소인 오복점이 개점한 뒤 1930년 근대적 백화점의 면모를 갖춘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이 신축되어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으로 이어진다. 또한 입정동 일대에 일제강점기와 8·15해방을 거쳐 공구점들이 하나둘씩 들어서면서 청계천 공구상가가 형성되었고, 1967년 서울시청 앞 을지로 1가에 국내 첫 지하상가인 새 서울 지하상가가 개점하였다. 오늘날 전통시장은 남대문시장을 비롯하여 신당동의 동평화시장·남평화시장·제일평화시장·청평화시장, 방산동의 평화시장 등 30여 개소가 상설시장으로 운영된다. 이 밖에 유통업체로는 백화점 3개소, 대형 할인점 2개소, 쇼핑센터 8개소, 기타 대규모 점포 38개소, 상점가 6개소 등이 있다. 2018년 도소매업의 부가가치(7조 1843억 원)는 서울시 도소매업 총 부가가치의 11.7%를 차지하여 강남구 다음으로 비중이 크다.
교통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사통팔달의 교통망이 발달하였다. 도로 교통은 국내에서 폭이 가장 넓은 도로인 세종대로 가 중구의 남대문로 5가를 기점으로 봉래동 1가~태평로 1가를 거쳐 종로구 광화문에 이르고, 삼일대로가 용산구 한남동을 기점으로 중구를 거쳐 종로구 재동까지 이어진다. 이 밖에 용산구 서빙고동을 기점으로 회현동 1가까지 이어지는 녹사평대로와 용산구 이촌동을 기점으로 남대문로 5가까지 이어지는 한강 대로를 비롯하여 을지로(소공동~신당동)·퇴계로(봉래동 2가~신당동)·통일로(봉래동 2가~경기도 파주시)·청계천로(종로구~중구~동대문구)·청파로(용산구 이촌동~중림동)·난계로(성동구~중구~종로구)·장충단로(용산구 한남동~신당동)와 남대문로·동호로·새문안로·서소문로·충무로·칠패로·후암로·손기정로·수표로·창경궁로 등이 중구의 내·외곽을 연결한다.
철도 교통은 중구와 용산구에 걸쳐 있는 서울역이 1900년에 영업을 시작하여 서울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으며, 경부선·경부고속철도(KTX)와 경의선(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등이 운행한다. 지하철은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소요산역을 기점으로 중구의 시청역~서울역을 거쳐 인천시(인천역)·충남 아산시(신창역)·경기도 오산시(서 동탄역)·광명시(광명역)까지 운행하고, 서울 주요 지역을 순환하는 2호선이 중구의 시청역~을지로 입구역~을지로3가역~을지로4가 역~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신당역을 경유한다. 이밖에 3호선(을지로 3가역~충무로역~동대입구역~약수역), 4호선(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충무로역~명동역~회현역), 5호선(을지로 4가역~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청구역), 6호선(버티고개역~약수역~청구역~신당역)이 중구를 경유하고, 인천국제공항철도가 서울역과 서울국제공항·인천국제공항을 연결한다. 시청역에서 1호선과 2호선이, 서울역에서 4호선·경의중앙선·인천국제공항철도가, 을지로3가역에서 2호선과 3호선이, 을지로4가역에서 2호선과 5호선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2호선·4호선·5호선이, 동대문역에서 1호선과 4호선이, 충무로역에서 3호선과 4호선이, 약수역에서 3호선과 6호선이, 청구역에서 5호선과 6호선이, 신당역에서 2호선과 6호선이 각각 접속한다.
관광
서울시의 6개 관광특구 가운데 명동·남대문·북창 관광특구와 동대문 패션타운 관광특구의 2개 지구가 중구에 속한다. 명동·회현동·소공동·무교동·다동 일원의 명동·남대문·북창 관광특구는 첨단 유행과 쇼핑의 명소이자 한국 가톨릭의 상징인 서울 명동성당(사적)이 자리한 명동, 조선 건국과 함께 한양도성의 사대문의 하나로 남쪽에 세워진 서울 숭례문(사적)과 국내 최대의 전통시장으로 꼽히는 남대문시장, 맛집이 즐비한 북창동 음식거리와 무교동 낙지골목, 다동 먹자골목 등이 명소로 꼽힌다. 광희동·을지로 5~7가·신당동 일원의 동대문 패션타운 관광특구는 동대문종합시장·평화시장을 비롯한 전통시장과 두타몰·밀리오레 등의 복합 쇼핑몰, 도매상가 등이 밀집한 쇼핑의 명소이며,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복합문화공간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와 동대문 역사 문화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역사 명소로는 정동에 조선시대의 덕수궁(사적)과 궐내의 전각으로 세워진 중화전 및 중화문(보물)·함녕전(보물), 1890년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된 구 러시아 대사관, 1898년 국내 첫 본격 개신교 교회 건축물로 세워진 서울 정동교회(사적), 1926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성공회 서울성당(서울유형문화재) 등이 있다. 이 밖에 광희동 2가에 한양도성 사소문의 하나로 세워진 광희문(남소문), 소공동에 삼국시대부터 국가적 제천 의례를 거행하던 환구단(사적), 중림동에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교회 건축물인 서울 약현성당(사적), 봉래동 2가에 1925년 경성 역사로 준공되어 서울의 관문 역할을 한 구 서울 역사(사 적), 조선 태조 때 지금의 남산에 설치된 목멱산 봉수대 터(서울기념물) 등이 있다.
중구와 용산구에 걸쳐 조성된 남산공원은 대표적 시민공원으로서 중구의 남산케이블 카와 용산구의 남산 서울타워가 연계되어 서울의 랜드마크로 꼽히며, 번화한 도심에서 전통문화를 접할 수 있는 남산골 한옥마을이 인접하다. 서울시청 앞에는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는 서울광장이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처로 인기가 높고, 철거를 앞둔 서울역 앞 고가도로를 공중보행로와 문화공간으로 재생한 서울로 7017, 근현대 건축물과 조선시대의 골목길이 남아 있는 신문로 2가의 돈의문 박물관 마을도 관광객의 발길을 끄는 명소이다. 걷기 명소로는 가을 단풍길로 유명한 덕수궁 돌담길, 개화기부터 근대 초기의 유서 깊은 건물들과 더불어 고풍스러운 정취가 배어 있는 정동길, 남산 남쪽 기슭을 따라 서울 시내를 조망하는 산책로로 조성된 소월길 등이 있다.
교육
전통 교육기관은 조선시대에 한성부에 속하여 성균관과 4부 학당(4학)이 공공 교육기관 역할을 하였으며, 중등교육기관에 해당하는 4부 학당 가운데 서학(西學)과 남학(南學)이 각각 지금의 중구 태평로 1가와 필동에 설치되었다.
근대 교육기관은 1885년 지금의 중구 정동에 설립된 배재학당(지금의 배재중·고등학교와 배재대학교)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으로 기록되며, 같은 해 정동에서 경신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경신학교가 개교하였다. 1886년에는 지금의 서소문동에 최초의 관립 근대 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이 설립되었고, 같은 해 정동에 이화학당이 설립되어 지금의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의 모태가 되었다. 이후 1910년 공립 수하동 실업 보습학교가 개교한 뒤 덕수 상업학교 등을 거쳐 1951년 덕수중학교와 덕수상업고등학교(지금의 덕수 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이 밖에 1933년 경성 원예학교(지금의 장충중학교·장충고등학교), 1937년 경성공립공업전수학교(지금의 성동공업고등학교), 1941년 경성제3공립고등여학교(지금의 창덕여자중학교·창덕여자고등학교) 등이 개교하였다.
초등교육기관은 1895년 관립 정동 소학교가 개교한 뒤 경성 봉래 공립국민학교 등을 거쳐 지금의 서울 봉래초등학교로 이어지고, 같은 해에 관립 남학 소학교가 개교한 뒤 경성 광희 공립국민학교 등을 거쳐 지금의 서울광희초등학교로 이어진다. 이 밖에 1912년 경성 여자공립보통학교(지금의 서울 덕수초등학교), 1924년 경성 남산 공립심상소학교(지금의 서울 남산초등학교), 1937년 경성앵구공립소학교(지금의 서울 청구초등학교), 1938년 경성 장충공립심상소학교(지금의 서울 장충초등학교) 등이 개교하였다. 고등교육기관은 1906년에 설립된 명진학교가 불교 사범학교·혜화 전문학교·동국대학 등을 거쳐 195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여 지금의 동국대학교로 이어진다. 2019년을 기준하여 교육기관은 대학교 1개교(동국대학교)와 전문대학 1개교(숭의여자대학교), 전공대학 1개교(정화예술대학교), 고등학교 11개교, 중학교 8개교, 초등학교 12개교 등이 있다. 학생 수는 1만 5237명으로 25개 구 가운데 가장 적다.
문화재
국가 지정 문화재로는 숭례문·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권6·백자 청화‘홍치2년’명 송죽문 항아리를 비롯한 국보 8점, 삼국유사 권2·안중근의사 유묵 -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금강반야바라밀경·제왕운기(1986)를 비롯한 보물 40점, 덕수궁·환구단·서울 구 러시아공사관를 비롯한 사적 8개소 등이 있다. 이 밖에 1928년에 세워진 서울 남대문로 한국전력공사 사옥과 구 서울특별시 청사를 비롯한 18점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시 지정 문화재로는 장충 단비·수표교·경희궁 숭정전·성공회 서울성당을 비롯한 서울유형문화재 15점, 서울무형문화재 1점(궁장),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배재학당 동관을 비롯한 서울기념물 8점, 와룡묘·관성묘·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을 비롯한 서울 민속문화재 7점, 서울 문화재자료 2점(농기 일괄·원구단 정문) 등이 있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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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 ↑ 〈중구 (서울특별시)〉, 《위키백과》
- ↑ 〈중구 (서울특별시)〉, 《네이버 지식백과》
- ↑ 〈중구 (서울특별시)〉, 《나무위키》
- ↑ 〈중구 (서울특별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
- 〈중구 (서울특별시)〉, 《위키백과》
- 〈중구 (서울특별시)〉, 《네이버 지식백과》
- 〈중구 (서울특별시)〉, 《나무위키》
- 〈중구 (서울특별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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