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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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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구(城東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동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북쪽으로는 동대문구, 동쪽으로는 광진구, 남쪽으로는 한강의 경계에 있는 강남구, 서쪽으로는 중구, 용산구와 접한다. 한양도성(漢陽都城)의 동쪽이란 뜻에서 구명을 정했다.[1]

개요[편집]

서울특별시의 중동부, 경도상으로는 동경 127˚ 00´ 26˝~127˚ 04´ 22˝, 위도상으로는 북위 37˚ 31´ 31˝~37˚ 34´ 12˝에 위치한다. 동쪽은 광진구, 서쪽은 중구·용산구, 북쪽은 동대문구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남구와 마주한다. 구의 동쪽 끝은 송정동, 서쪽 끝은 옥수동, 남쪽 끝은 성수동 2가, 북쪽 끝은 용답동이며, 동서 간 거리는 6.02㎞, 남북 간 거리는 5.14㎞이다. 면적은 16.8㎢로 서울시 전체 면적의 2.8%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21번째에 해당한다. 행정구역은 17개 행정동(17개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용답동이 전체 면적의 13.8%를 차지하여 가장 크고 왕십리 2동이 전체 면적의 2.4%로 가장 작다. 인구는 2020년을 기준하여 30만 505명으로 서울시 전체 인구의 약 3%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21번째에 해당한다.

구를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느티나무, 새는 참매이다. 구를 대표하는 캐릭터는 개나리를 모티브로 하여 웃음 짓는 얼굴로 형상화한 미소(美笑)이며, 영문 이름(MISO;Mate in Seongdong)에 '성동의 친구' 또는 '성동과 함께'라는 의미를 담아 구민 모두가 항상 미소를 잃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구청 소재지는 행당동이다.

용산구와 함께 사대문 안-강남 사이에 있어, 양방향으로 접근이 용이하고 교통이 잘 발달되어 있다. 사대문 안에서 강남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어 위치상으로도 상당히 요충지이며 2000년대에 들어 왕십리역에 지하철 노선이 4개 이상 개통되며 크게 발전하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 왕십리 일대가 많이 발전했다. 지하철로 경의 중앙선 한 정거장 거리인 청량리와는 접근성이 영 좋지 못한데, 왕십리에서 청량리로 넘어가는 쪽의 간선도로망이 청계천을 건너는 문제로 잘 정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거리상으로만 보면 연담화도 가능하겠지만, 실제 교통상의 문제로 현재는 왕십리 독자적으로 성장 중이다.[2][3]

자연환경[편집]

중랑천청계천이 합류하여 한강으로 흘러들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범람원 지형이다. 성동구와 중구·용산구에 걸쳐 있는 매봉산(175m)을 비롯하여 중랑천과 한강 합류부의 응봉산(95m) 등이 있으나 대체로 해발고도 100m 이하의 낮고 평평한 지형을 이룬다. 북서부에는 중생대 쥐라기 말기에 생성된 대보 화강암이 분포하고, 중랑천과 청계천변을 따라 신생대 제4기의 충적층이 동서로 길게 분포한다. 동남쪽에 광진구로 이어지는 뚝섬 일대의 지질은 신생대 제4기 플라이스토세(홍적세)의 한강 범람으로 형성된 홍적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동부에서 유입되는 중랑천은 남서쪽으로 흐르면서 중심부를 관통하여 한강에 합류하고, 북쪽에서 동대문구와 경계를 이루며 흐르다가 성동구에 유입되는 청계천이 동남쪽으로 중심부를 흐르다가 중랑천에 합류한다.

연평균기온(2001~2010년)은 13.6℃로 서울시 평균(13.0℃)보다 다소 높다. 연평균 일 최고기온은 18.1℃, 연평균 일 최저기온은 9.7℃로 연평균 일교차가 8.4℃로 나타난다. 식물의 성장 가능 기간은 276.2일로 서울시 평균(268.5일)보다 7.7일 길다. 연평균 강수량은 1340.5㎜로 서울시 평균(1387.3㎜)보다 47㎜가량 적으며, 연평균 강수량의 60% 이상이 여름철에 집중하는 하계 다우형이다.

역사[편집]

성동구는 한강을 오르내리는 내륙수로(內陸水路)의 기항지였던 옥수동의 응봉 기슭은 일찍이 빗살무늬토기의 산포 지로 밝혀져 신석기시대에 우리 조상이 살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30년에는 서기전 700년경의 돌도끼·돌칼·오석(烏石)과 옥수석기(玉髓石器)·채색토기(彩色土器) 등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유물이 혼합된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이것은 이 지역이 신석기시대 이래 청동기시대까지 인류의 생활 터전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고대국가로서 마한이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서기전 18년 부여계 고구려 유이민인 온조(溫祚)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에 백제국(伯濟國)을 건국하고 점차 마한제국을 병합하여 삼국 중 하나인 백제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475년 고구려의 남하로 수도를 공주로 옮길 때까지 500여 년간 이 일대를 지배하였다. 한강 유역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쟁패가 계속 이어졌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때 남하 정책을 펴면서 한강 유역을 공략하여 석현성과 관미성 등 10여 성을 함락하고 이어 백제의 서해안을 공격하여 58개 성을 취하였다. 이어 장수왕 때는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장악하였고, 이 일대에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설치하여 80여 년간 다스렸다.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동맹을 파기하고 이 일대를 독차지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 혹은 신주(新州)를 두어 관리하였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당나라와 직접적인 교섭을 통해 고구려·백제에 대항하였다. 그리하여 동아시아에서는 고구려와 백제를 잇는 수직 라인과 신라와 당을 연결하는 수평 라인이 서로 대립 되었고, 당나라 세력을 이용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통일을 달성한 신라는 전국을 9주로 나누면서 한강 유역을 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로 개칭하고 한강과 접하고 있는 서울 지역에는 따로 한양군을 두었다. 이로 인해 ‘성동구’는 한산주의 한양군에 속하게 된다.

후 삼국시대 성동 지역은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弓裔)가 895년 한산주 관내의 10여 성을 복속시킴에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왕건(王建)이 건국한 고려에 귀속되었다. 고려 건국 초기에는 각 지역에 호족세력들이 건재하였는데 한강 유역 일대에는 왕규(王規)의 세력이 가장 강대하였고, 강감찬(姜邯贊)의 후손인 금주 강 씨(衿州姜氏 혹은 衿川姜氏) 세력과 풍덕유씨(豊德柳氏) 세력 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왕규는 경기도 광주 일대를 중심으로 하고 있었고, 금주 강 씨는 금천구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풍덕유씨 세력들은 한강 하류의 마포 서쪽지역 일대에 웅거하고 있었다.

이 일대의 지명은 고려 초에는 양주(이때의 양주는 지금의 양주 군이 아니라 고려 초 서울의 이름이다),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한양부(漢陽府)라 불리었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설치하여 지방통치체제를 정비할 때 양주목에 속하였고, 1018년(현종 9)에는 지주사(知州事)로 격하되어 광주목(廣州牧)의 관내에 예속되었다. 이어 1067년(문종 21)에 한강 북부지역에 남경을 설치하면서 서경(西京)·동경(東京)과 함께 삼경체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양주가 남경으로 승격된 것은 서울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주로 연기사상(延基思想)이라는 일종의 풍수지리적 쇠왕설(衰旺說)을 배경으로 시행된 것이다. 이 때 남경의 범위는 동으로 대봉(大峰: 지금의 낙산), 서로 기봉(岐峰: 지금의 안산), 북으로 면악(面嶽: 지금의 북악산), 남으로 사리(沙里: 지금의 용산)에 이르렀다.

1068년에는 남경이궁(南京離宮)을 설치하고, 남경으로의 천도론이 제기되어 1101년(숙종 6) 9월 남경 개창도감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남경 궁궐 후보지를 물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104년(숙종 9)에 지금의 청와대 부근에 새 궁궐이 낙성되어 왕이 친행해 점검하는 등 거의 천도가 실현될 단계까지 이르렀으나, 이듬해 왕이 죽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뒤 무인 정권과 몽고 침략 등의 정치적·군사적 시련을 겪는 사이에 남경은 서경과 함께 국왕 순주(巡駐)의 이경(離京)으로서의 가치가 감소 되어 1308년(충렬왕 34)에 한양부(漢陽府)로 개칭되었고, 유수를 윤으로 고치는 것 외에도 판관과 사록 등의 관직을 두었는데 이는 그 지위가 격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325년 8월 충숙왕은 왕비인 조 국장 공주(曺國長公主)와 함께 한양에 행차하여 용산의 높은 언덕에 올라 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장막을 치고 행궁(行宮)으로 삼아 머물기도 하였다. 공민왕 때 이르러 원과의 관계를 끊고 과거의 폐정을 혁신함과 동시에 새로 도읍을 옮길 것을 계획했는데, 이때 천도의 유력한 후보지로 과거의 남경인 한양이 물망에 올랐다. 그 뒤 왜구의 침략으로 조운이 원활하지 않자 개경에까지 영향이 미쳤고 곧이어 수도의 안보 문제가 거론되자 또다시 한양 천도론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하여 우왕 때는 한양 천도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추진되어 한때 실현되었고, 공양왕 때에도 일시 한양 천도가 있었다. 그러나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가 신왕조인 조선의 개창을 계기로 천도 문제는 마침내 최종적인 결정을 보게 되었다.

고려 말부터 대두되던 한양 천도론은 조선이 개창 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개경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신도읍이 필요했고, 이러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던 곳이 바로 한양이었다. 여러 지역이 도읍 후보지로 거론되었으나 태조는 이들 지역을 직접 답사하기도 하고 신하들을 보내 정밀 조사하도록 한 후 다양한 논의를 거쳐 태조 3년(1394) 8월 24일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확정하였다. 이어 9월 1일 궁궐 건설의 실무를 담당 추진하기 위한 기관인 신도 궁궐 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박차를 가하였다. 9월 9일에는 한양에 대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궁궐·종묘·사직과 도로의 건설, 각종 관아의 배치 등 기본계획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도시 계획안이 조선 시대 500여 년간의 수도 서울을 지탱하여 갔다.

수도 건설을 위한 궁궐 공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태조는 하루라도 빨리 개경을 떠나 새로운 도읍지로 옮기고자 하는 열망에 궁궐 공사가 시작된 한 달 후인 태조 3년 10월 25일 천도를 단행하여 3일 후인 10월 28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이어 이듬해 12월에 조선시대 정궁(正宮) 인 경복궁이 완공되어 비로소 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한양부(漢陽府)를 한성부(漢城府)라 고치고 이듬해 9월에는 도성과 문루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동·서·남·북·중 5부(部) 52방(坊)으로 나누어 도시 규모를 정비하였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조선의 수도로서 한성이 탄생된 것이다.

성동구 일대는 조선 시대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 이내의 지역으로 한성부 동부의 인창방(仁昌坊)과 남부의 두 모방(豆毛坊)에 속하였다. 이 당시 두 모방에는 두모포계(豆毛浦契)·신당리계(神堂里契)·전관일계(箭串一契)·전관이계(箭串二契)·신촌리계(新村里契)·수철리계(水鐵里契)·중촌리계(中村里契)가 있었으며, 용산 방에는 마장리계(馬場里契)·답십리계(踏十里契)·왕십리계(往十里契)가 있었다.

이 지역은 한강을 접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여 일찍부터 물류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조선 시대는 두모포가 한강 상류로부터 내려오는 각종 물산과 목재 등이 모이는 장소였으며, 일본에서 오는 사신들도 두모포에서 배를 내려 광희문을 통해 동평관(東平館)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이 지역은 도성의 동쪽 교외에 해당하며, 응봉을 중심으로 국왕의 사냥터로서 주목을 끌던 곳이었다. 이른바 살곶이벌로 응봉 기슭에는 매사냥을 관장하는 응방(鷹坊)이라는 관청을 두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 말을 기르는 목장이 이 지역에 있었으며, 조선 전기에는 군사들의 열무장으로도 사용되던 곳이었다. 옥수동에는 조선 시대 전문 관료를 양성하는 독서당(讀書堂)이 있었으며, 한강에서 겨울에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하던 동빙고(東氷庫)가 있었다.

1911년 4월 1일 5부 8면제가 실시됨에 따라 이 지역은 경성부의 인창면(仁昌面)과 두모면(豆毛面)에 속했으며, 1913년 인창면 일부가 경성부 동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경성부의 5부 8면제를 폐지하고 경성부를 축소시킬 때 인창면이 폐지되었고, 이 일대는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纛島面)과 한지면(漢芝面)에 편입되었다. 그 뒤 1936년 고양군 한지면 내 9개 리가 경성부에 재편입되면서 동부출장소에 소속되었으며, 1943년에는 구제(區制)가 실시되면서 성동구가 신설되었다.

1946년 경성부가 서울시로 되고, 1949년 서울특별시로 승격되면서 서울시 확장에 따라 뚝도면을 편입해 뚝도 출장소를 두었다. 1963년에는 경기도 광주군의 4개 면인 구천면(九川面)·중대면(中垈面)·대왕 면(大旺面)·언주면(彦州面)이 성동구에 편입되었고, 천호·송파·언주 출장소를 설치하였다. 이후 1973년 송파·언주 출장소를 폐지하고, 천호·영동출장소를 설치했으며, 영등포구 잠원동과 서초동, 양재동이 성동구로 편입되었다.

성동구 중곡동 일부가 동대문구 면목동으로, 동대문구 면목동 일부가 성동구 중곡동에 편입되는 등 구역 조정이 이루어졌다. 1975년에는 강남구가 분구됨에 따라 성동구 관할하에 있던 한강 이남의 영동·천호 출장소가 성동구에서 분리, 강남구로 편입되었다. 또한 성동구 관할의 신당동 상왕십리 일부가 중구로, 성동구 옥수동 일부가 용산구로, 성동구 중곡동과 장안동 일부가 동대문구로, 동대문구 답십리 제4동과 용두동·장안동 일부를 합하여 용답동이 신설되면서 성동구로 편입되는 등 행정구역 조정이 이루어졌다. 1977년에는 강남구 신천동 일부를 성동구 구의동에 편입했고, 1995년에는 동일로를 경계로 성동구에서 광진구가 분구됨에 따라 성동구 20개 동, 광진구 16개 동으로 분구되었다.

2008년 왕십리 1동과 도선동이 왕십리 도선동으로, 금호 2가동과 금호 3가동이 금호 2·3가동으로, 옥수 1~2동이 옥수동으로 각각 합동되어 17개 행정동으로 개편되었다. 2020년을 기준하여 행정구역은 17개 행정동(금호 1가동, 금호 2·3가동, 금호 4가동, 마장동, 사근동, 성수 1가 1동, 성수 1가 2동, 성수 2가 1동, 성수 2가 3동, 송정동, 옥수동, 왕십리 도선동, 왕십립 2동, 용답동, 응봉동, 행당 1~2동) 17개 법정동(금호동 1~4가·도선동·마장동·사근동·상왕십리동·성수동 1~2가·송정동·옥수동·용답동·응봉동·하왕십리동·행당동·홍익동)으로 이루어져 있다.[4]

산업[편집]

서비스업의 비중이 가장 크고, 오랫동안 지역 경제의 기반이 되어온 제조업의 비중도 크다. 2018년을 기준하여 지역 내 총생산(GRDP)은 11조 6572억 원으로 서울시 전체 GRDP의 2.8%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12번째로 비중이 크다. 경제활동별 부가가치의 비중은 도소매업(1조 8691억 원)이 17.5%로 가장 크고, 이 밖에 사업서비스업(17.1%), 제조업(15.5%), 부동산업(13.3%), 정보통신업(9.3%) 등의 순이다.

2018년을 기준하여 사업체 수는 2만 7868개로 서울시 전체 사업체의 3.4%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14번째로 많다. 사업체별로는 도소매 업체(7385개)가 26.5%로 가장 많고, 이 밖에 제조 업체(15.9%), 숙박·음식점 업체(13.8%), 운수·창고업체(9.4%), 협회·단체 수리 및 기타 개인 서비스 업체(7.6%) 등의 순이다. 전체 사업체의 약 45%가 성수동 1~2가에 분포하며, 개인 사업체가 약 72%, 종사자 5인 미만의 소규모 업체가 약 74%를 차지한다. 사업체 종사자는 17만 4819명으로 서울시 전체 종사자의 3.4%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11번째로 많다.

제조업은 1960년대에 성수동 일대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자연발생적으로 공업지역이 형성되었으며, 대규모 공장들이 수도권과 지방으로 분산된 오늘날에도 성수동 1~2가 지역은 서울에서는 드문 준공업지역으로서 특히 수제화 업체가 밀집한 수제화 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2018년 제조업체 수는 4444개로 서울시 전체 제조업체의 7.5%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중구 다음으로 비중이 크고, 제조업 종사자(2만 7062명)는 금천구·중구 다음으로 많다. 업종별로는 의복·의복 액세서리 및 모피제품 제조업체(20.6%)를 비롯하여 가죽·가방 및 신발(10.8%), 인쇄·기록 매체 복제(10.5%), 금속가공 제품(10.2%), 섬유제품(7.5%) 제조업체가 약 60%를 차지한다. 2018년 제조업 부가가치(1조 6520억 원)는 서울시 제조업 총부가가치의 10.2%를 차지하여 금천구·강남구 다음으로 비중이 크다.

전통시장은 마장동에 마장축산물 시장을 비롯하여 성수동에 뚝도시장, 금호동에 금남시장, 행당동에 행당시장 등이 상설시장으로 운영되며, 용답동의 장안평 중고차 시장은 서울의 대표적 중고 자동차 매매 집합상가로 꼽힌다. 이 밖에 유통 업체로는 대형 할인점 2개소와 상점가 5개소, 복합 쇼핑몰 1개소, 전문점 1개소, 대규모 점포 9개소 등이 있다. 2018년 도소매업 부가가치는 서울시 도소매업 총부가가치의 약 3%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9번째로 비중이 크다.

교통[편집]

영동대교·성수대교·동호대교가 한강을 가로질러 강북의 성동구와 강남구를 연결한다. 도로 교통마포구경기도 남양주시를 연결하는 강변 북로가 성동구의 옥수동·금호동·성수동을 거쳐 가고, 송파구에서 경기도 의정부시까지 이어지는 동부간선도로가 성수동·송정동을 경유한다. 마포구를 기점으로 하는 내부순환로가 서대문구·종로구·성북구·동대문구를 거쳐 성동구로 이어진다. 성동 분기점에서 내부순환로와 동부간선도로가, 성수대교 분기점에서 동부간선도로와 강변북로가 각각 접속한다. 이밖에 동대문구 신설동에서 성동구를 거쳐 강동구 상일 나들목까지 이어지는 천호대로를 비롯하여 고산자로·동일로·난계로·동호로·뚝섬로·마장로·아차산로 등의 간선 도로가 성동구의 내·외곽을 연결한다.

철도 교통은 1911년 서울~원산을 잇는 경원선이 개통하여 성동 지역의 독도 역(지금의 왕십리역)을 경유하였다. 이후 1978년 경원선의 용산역~청량리역 구간이 수도권 전철에 편입되어 성동구의 성수역(지금의 응봉역)~왕십리역을 운행하였으며, 2014년 수도권 전철 경의 중앙선으로 확장되어 성동구의 옥수역~응봉역~왕십리역을 경유한다. 1984년에는 서울 주요 지역을 순환하는 수도권 전철 2호선이 개통하여 성동구의 상왕십리역~왕십리역~한양대역~뚝섬역~성수역을 경유하고, 2호선의 성수지선이 성동구의 성수역~용답역~신답역을 거쳐 동대문구의 신설동역까지 이어진다. 이밖에 수도권 전철 3호선이 성동구의 금호역~옥수역을 경유하고, 수도권 전철 5호선이 성동구의 신금호역~행당역~왕십리역~마장역~답십리역을 경유하며, 수도권 전철 수인 분당선이 성동구의 왕십리역~서울숲역을 경유한다. 왕십리역에서 수도권 전철 2호선·5호선·경의 중앙선·수인 분당선이, 옥수역에서 수도권 전철 3호선과 경의 중앙선이 각각 접속한다.

관광[편집]

성수동의 서울숲, 행당동의 살곶이다리와 왕십리광장, 응봉산과 청계천 등이 대표적 명소로 꼽힌다. 뚝섬 일대의 서울숲에는 문화예술공원·체험학습원·생태숲·습지생태원 등의 4개 테마공원에 곤충식물원·나비 정원·숲속 놀이터·생태 학습장·조류관찰대·자전거도로·산책로 등이 조성되어 도심의 휴식처로 인기가 높다. 한양과 동남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로 이용되었던 살곶이 다리(전곶교)는 조선 시대에 건설된 가장 긴 다리(76.2m)로서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청계천 자락과 연결되는 살곶이길이 산책 명소로 알려져 있다. 사랑의 시계탑과 김소월의 〈왕십리〉 시비가 세워진 왕십리역 앞의 왕십리광장은 다양한 행사와 축제가 열리는 성동구의 중심가로서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풍성하다. 중랑천과 한강의 합류부에 자리 잡은 응봉산의 팔각정에 오르면 한강·뚝 섬나루·관악산·청계산·롯데월드타워 등이 한눈에 펼쳐지고, 특히 서울의 화려한 야경이 일품이다. 생태하천으로 복원된 청계천은 총길이의 절반 가량이 성동구와 잇닿아 흐르며, 천변에 청계천박물관·청계천생태학교·청계천 판잣집 체험관과 연인들을 위한 청혼의 벽 등이 조성되어 있다.

이 밖에 성동교에서 장평교까지 중랑천을 따라 벚나무·은행나무·플라타너스가 늘어서서 봄 벚꽃과 가을 단풍, 여름에는 녹음 짙은 산책길로 유명한 송정 제방길, 서울숲 진입로에 100여 개의 컨테이너를 활용하여 편집숍·소호몰·레스토랑·프리마켓·공연장·전시장 등의 창업·창작 플랫폼으로 조성한 언더스탠드애비뉴, 용답동에 새활용(업사이클링) 관련 전시와 교육·체험 프로그램 및 편집매장·공방 등을 운영하는 서울새활용플라자, 성수동에 옛 정미소 건물을 카페로 개조하여 랜드 마크로 떠오른 대림창고와 수제화 거리·구두 테마공원·카페거리 등의 명소가 있다.

교육[편집]

전통 교육기관은 조선 초기에 설립된 성균관과 4부학당이 공공 교육기관 역할을 하였으며, 중종 때 젊은 문신들이 사가독서(賜暇讀書)하던 독서당(讀書堂)이 두모포(지금의 옥수동)에 설치되어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이라 불렀다.

근대 교육기관은 1913년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 서뚝도리(지금의 성동구 성수동1가)에서 뚝도 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한 뒤 경동 공립 심상소학교·경동 공립 국민학교·경동 종합국민학교 등의 변천을 거쳐 지금의 서울 경동초등학교로 이어지며, 이 학교를 모태로 하여 서울경수초등학교·서울 경일 초등학교 등이 개교하였다. 1915년에는 고양군 한지면 하왕십리(지금의 성동구 하왕십리동)에서 왕십리 공립 보통학교가 개교하여 지금의 서울 무학 초등학교로 이어지며, 이 학교를 모태로 하여 서울 금호 초등학교·서울 행당 초등학교·서울 금북 초등학교·서울 행현 초등학교 등이 개교하였다.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1910년 지금의 중구에서 개교한 공립 수하동 실업 보습학교가 1951년 덕수상업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1978년 행당동의 현 위치로 이전하여 지금의 덕수고등학교로 이어진다. 1937년 지금의 종로구에서 개교한 경성 공립 공업 전수 학교를 전신으로 하는 광희중학교가 1978년 응봉동의 현 위치로 이전하여 지금에 이르고, 이밖에 1940년 경성 무학 공립 고등여학교(지금의 무학중학교·무학여자고등학교), 1960년 한양 여자중·고등학교(지금의 한양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중학교·고등학교) 등이 개교하였다.

고등교육기관은 1939년 지금의 행당동에 설립된 동아공 과학원이 건국기술학교·한양 야간 공업대학·한양공과대학 등의 변천을 거쳐 지금의 한양대학교로 이어진다. 2019년을 기준하여 교육기관은 대학교 1개교(한양대학교)와 전문대학 1개교(한양여자대학교)를 비롯하여 고등학교 9개교, 중학교 11개교, 초등학교 21개교 등이 있다. 학생 수는 7만 9239명으로 서울시 전체 학생의 4.1%를 차지 한다.

문화재[편집]

국가 지정 문화재로는 보물 2점(최유련 개국원 종공신 녹권·서울 살곶이 다리)이 있으며, 1964년에 제작된 '아날로그 전자계산기 3호기'와 '서울 한양대학교 구 본관'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시 지정 문화재로는 서울유형문화재 2점(뚝도수원지 제1정수장·미타사 금보암 금동관음보살좌상)과 서울 민속 문화재 1점(행당동 아기씨당 무신도)이 있다. 이밖에 행당동의 '아기씨당'과 하왕십리동의 '안정사터 마애불 명문 약사불'이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성동구〉, 《위키백과》
  2. 성동구〉, 《네이버 지식백과》
  3. 성동구〉, 《나무위키》
  4. 성동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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