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구 (인천)
중구(中區)는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중부에 있는 구이다. 중구는 1883년 인천항 개항 때부터 동구와 같이 인천광역시의 원도심을 이루었고, 1989년에 영종도, 용유도 등이 편입되었다. 중구에는 대한민국의 항공 관문인 인천국제공항과 서해안 최대 항구인 인천항이 있다. 인천공항 인근 영종도 지역은 인천경제자유구역 및 영종 국제도시로 개발 중이다.[1]
개요[편집]
인천광역시의 중서부, 경도상으로는 동경 126˚ 21' 29"~126˚ 38' 51", 위도상으로는 북위 37˚ 22' 02"~37˚ 34' 37"에 위치한다. 인천의 원도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동쪽으로는 동구, 미추홀구와 접하고, 서쪽과 남쪽으로는 서해에 면하며, 북쪽으로는 서해를 사이에 두고 옹진군과 마주한다. 구의 동쪽 끝은 도원동, 서쪽 끝은 을왕동(용유도), 남쪽 끝은 무의동(팔미도), 북쪽 끝은 중산동이며, 동서 간 거리는 24㎞, 남북 간 거리는 21㎞이다. 면적은 140.28㎢로 인천시 전체 면적의 13.2%를 차지하여 10개 군·구 가운데 강화군·옹진군 다음으로 넓다. 행정구역은 내륙의 7개 동과 도서 지역의 4개 동 등 11개 행정동(52개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서 지역의 면적이 90%를 차지한다. 3개의 유인도와 12개의 무인도가 딸려 있으며, 해안선의 총 길이는 144.77㎞에 이른다. 인구는 2018년을 기준하여 12만 6522명으로 인천시 전체 인구의 4.2%를 차지하여 10개 군·구 가운데 7번째에 해당한다.
구를 상징하는 꽃은 철쪽, 나무는 해송, 새는 갈매기이다. 구를 대표하는 캐릭터는 월미도와 구조(區鳥)인 갈매기, 해양·항공 도시를 모티브로 하여 태극과 월미(月尾)를 결합한 머리 문양과 인천국제공항을 상징하는 갈매기 날개 모양의 귀, 파도를 상징하는 발 등으로 형상화한 '월디(worldee)'이다. 구청 소재지는 관동 1가이며, 운남동에 제2청사가 있다.
중구 지역 경제는 관광과 인천항, 인천국제공항 인근의 물류 단지와 산업단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표적으로 인천역 인근의 관광지와 동인천 역의 상권, 월미도의 관광단지, 신흥동·연안동·항동의 인천항, 영종 국제도시의 인천국제공항으로 나뉜다. 즉 같은 중구인데도 도심과 영종도는 생활권이 다르다.
나중에 합병된 영종-용유도 지역 때문에 다른 지역의 중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땅이 넓은데, 무려 140.18㎢로 인천 내에서 군 지역(강화군, 옹진군)을 제외하면 가장 넓다. 일개 구에 불과하지만 면적만큼은 일개 도시급이다. 대부분의 다른 특별시·광역시에 있는 중구가 그 시에서 최하위권의 면적을 가지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다소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영종도까지 포함한 면적이고, 영종도(125.7㎢)를 제외한 본토 면적은 15㎢로 부산, 대구보단 크고 대전보다 작다. 2023년 기준 인천 중구와 인구, 면적, 인구밀도가 모두 비슷한 해외도시로는 네덜란드 엔스헤데 등이 있다. 수도권의 관문 역할을 하고있는 인천국제공항이 모두 중구 관내에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 수도권에 처음 도착하는 외국인들의 다수는 인천광역시 중구 땅을 맨 처음 밟게 되는 것이다.[2][3]
자연환경[편집]
인천광역시는 한반도 중서부 해안에 위치하기 때문에 높은 산지가 적어 대체로 구릉지나 평지가 전개되며 큰 하천이 발달하지 못했다. 관내의 도서에는 유인도 4개와 무인도 10개가 있는데 유인도 1개는 연륙 도서이다. 인천의 산지는 대체로 남북과 동서의 방향성을 보인다. 중구 일대의 지형은 월미산(93m), 응봉산(69m), 수봉산(112m) 등 낮은 구릉성 산지가 동서로 펼쳐져 있고, 이 구릉지 사이로 싸리재 고개, 도원 고개(황골고개) 등의 교통로가 조성되어 있다. 수봉산 서편에 있는 자유 공원, 송현동, 도림동 등은 해발고도 60m 내외이다. 자유 공원이 있는 응봉산에는 기상대가 위치하고 있으며, 서단의 월미산은 화강암 산지이다. 이 구릉성 산지들의 남쪽은 저지대로 대부분 해안 매립에 의해 조성된 땅이며, 구 면적의 약 2/3를 차지하고 그 위에 항만시설이 입지해 있다. 중구의 소하천으로는 운북동의 동강천, 운남동의 전소천, 무의동의 무의 천 등이 있다. 연평균 기온은 12.7℃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1,159.4㎜, 최대풍속 19.2%, 평균풍속 3.0m/s를 보이고 있다.
역사[편집]
주로 섬 지역에서 신석기 흔적이 발견되고 있으며 내륙지역에서는 개발로 인해 찾을 수 없다. 중구의 영종도, 삼목도, 용유도, 무의도 일대에서 인천국제공항 건설과 관련한 유적 조사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 많은 신석기 유적이 확인, 조사되었다. 영종도에서는 송산 유적, 눈들 유적이, 삼목도에서는 삼목도(장안 부락) 유적을 비롯한 약 10여 곳이 발견되었다. 용유도에서는 지표·시굴조사를 통해 여러 유적이 확인되었다. 이들 유적에서 확인된 유구의 종류는 화덕자리(송산 유적의 18기, 삼목도 유적의 18기), 집터, 돌무지, 움집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가장 많이 확인된 것은 화덕자리이다. 하지만 바닷가이면서 취사시설을 갖추고 있음에도 조개더미나 다른 유적이 발견되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청동기시대의 흔적으로 지석묘가 발견되었다. 학익동에 7~8기, 주안동에 2기, 문학동에 1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그 현상을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는 학익동 지석묘 2기와 주안동 지석묘 1기, 문학동 지석묘 1기뿐이다.
고려 시대의 중구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은 확인하기 힘들어, 인천사 속에서 중구의 지역사를 가늠해 볼 수밖에 없다. 호족이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등장하였던 나 말 여초를 지나면서 인천 지역에는 인주 이 씨(仁州 李氏)가 대표적인 호족세력으로 대두하였다. 인주 이 씨는 그 시조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아찬의 벼슬에 있던 이허기(李許奇)로 전해내려 온다. 고려 태조 왕건이 해상무역을 통해 성장한 기반을 바탕으로 고려를 성립할 수 있었듯이 인주 이 씨 역시 해상무역을 통해 축적한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하여 고려의 대표적인 문벌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인천 이씨 세보(仁川李氏世譜)』에는 이허겸의 아들 눌(訥)과 손자 성간(成幹)이 있다. 성간의 부인은 개성 왕 씨로서 아버지가 왕건이다. 당시 태조가 혼인관계를 통하여 강력한 호족세력을 통합하고자 하였던 점을 상기할 때 고려 초의 인주 이 씨는 왕실과의 혼인이 이루어질 정도의 강력한 호족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주 이 씨는 문종대에서 인종대에 이르는 7 대 80여 년 동안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동안 왕실과 중첩되는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당시 고려 왕실의 왕자, 궁주 가운데는 인주 이 씨의 외손 또는 생질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왕실과의 혼인관계를 통하여 인주 이 씨는 외척으로서의 권세와 벌족으로서의 지위를 굳혔을 뿐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해주 최 씨, 경주 김 씨, 평산 박 씨, 파평 윤 씨, 강릉 김씨 등의 거족들과도 혼인관계를 맺어 일대 벌족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1459년(세조 5)에 인천이 도호부로 승격된 것은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 씨 때문이다. 정희왕후의 아버지는 파평 윤씨 번이며 어머니는 인천 이씨 문화의 딸이다. 즉 정희왕후의 내향이 파평이고 외향이 인천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파평과 인천의 읍호가 승격되었다. 이때 도호부로 승격된 후 인천은 조선 후기까지 도호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한편 지금의 자유 공원이 있는 응봉산 주변에는 군사 진지였던 제 물량(濟物梁)이 있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인천을 대표하는 지명의 하나인 제물포의 기원이 된다. 제 물량은 조선 초 태종 때 군사제도를 정비하며 설치한 것이고, 종 4품인 만호가 이곳을 담당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인천군 서쪽 15리에 제물량이 있다. 성창포(城倉浦)에 수군 만호(萬戶)가 있어 지킨다.”는 표현이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제물량 영은 인천부 서쪽 19리 되는 곳에 있으며 수군만호 1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조선 초부터 한양으로부터 가까운 해안의 수비를 위해 이곳에 군사 진지를 설치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앞의 『세종실록지리지』의 자료를 자세히 보면, 성창포는 지금의 인천항 일대를 아우르는 지명이었으며 제 물량은 인천항에 있던 작은 나루였음을 알 수 있다.
제물량 영 같은 수군 진지는 해안 방어뿐 아니라 조운선(漕運船)을 호송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였다. 인천 앞바다와 강화도 일대는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삼남(三南) 지방의 곡식을 서울로 운반해 올리던 중요한 해상교통로였다. 이들 세곡(稅穀) 운반을 지키기 위한 목적에서 조선 초에 남양부 화양만에 경기 수영(水營)을 두고 그 산하에 영종진(永宗鎭), 제물진(濟物鎭) 등의 여섯 개 진지를 두었다. 조선 중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강화도 일대의 수비를 보강할 필요성이 대두되자 이들 6개 진지도 변화를 겪는다. 이때 화성군 남양면에 있던 영종진이 1653년(효종 4) 지금의 영종도로 옮겨왔다. 이로써 당시까지 자연도(紫燕島)라 불리던 섬이 영종도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에 1656년(효종 7)에는 제물진이 강화로 이전해 감에 따라 그 뒤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제물포는 한적하고 조그만 어촌과 포구로 남게 되었다.
중구는 우리나라의 개화기를 가장 앞장서서 겪은 곳이다. 개화기 이전 인천의 치소는 남구의 문학동, 관교동 일대에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현 중구 지역은 변두리의 한적한 포구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그 뒤 우리나라 개화기의 역사는 1883년(고종 20) 인천항의 개항에 이어 인천항을 중심으로 한 중구 일대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중구에는 근대적 의미에서 우리나라 최초에 해당하는 역사가 많다. 최초의 서구식 공원, 최초의 근대적 기상대, 최초의 해외 이민, 최초의 무선 전신 등 이곳에서 시작된 일들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중구는 오늘날 인천을 가리키는 이름 가운데 가장 대표적으로 쓰이는 ‘제물포(濟物浦)’가 있던 장소이다. 현재 제물포는 남구 도화동의 경인전철 역사 제물포역 주변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지만, 원래의 제물포는 지금의 인천항 주변 중앙동, 항동 일대에 있던 작은 포구를 지칭하던 지명이었다. 그 지명의 범위가 조금 넓어져 인천항 개항 이전 지금의 중구 관내 대부분이 속해 있던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 지역과, 지금은 동구 관내로 들어간 다소면 고잔리, 송림리, 장천리 일부 등을 통틀어 제물포라 부르기도 했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 이후, 1877년부터 3년 동안 일본 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는 서해안의 답사와 측량을 벌였고, 이를 토대로 일본은 인천만 제물포를 개항장으로 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로써 개펄과 얕은 구릉지에 초가 몇 채가 있을 뿐이었던 당시의 제물포는 서울과 가깝다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급성장하게 되었다. 개항과 함께 제물포에는 현재의 중구 내동에 자리한 인천감리서(仁川監理署)가 설치되었다. 감리는 부사(府使)가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방 행정을 비롯해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외교와 세관 업무까지 처리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또한 감리서 안에는 경찰서와 감옥이 설치되어 사법권까지 관장했다. 이 같은 인천감리서의 설치는 그 이전까지 지금의 관교동에 있던 인천부 청사의 기능을 모두 이곳으로 옮겨옴으로써 인천 지역의 행정 중심이 남구 일대에서 중구 쪽으로 옮겨왔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882년 조·일 수호조규 속 약 이후 제물포에는 응봉산 일대에 조계(租界)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열강들 사이에 본격적인 각축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조계는 19세기 서구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동양에 진출하며 무력을 앞세워 통상 조약을 맺고 개항장에서 자신들이 주권을 행사하며, 이권을 확보해 나가기 위해 만든 교두보적 성격의 지역을 말한다. 제물포의 조계는 지금의 자유 공원과 중구청 주변 15만여 평에 자리를 잡았는데 당시 지금의 중구 지역에는 대부분 동 이름이 없었다. 청국은 일본보다 한 해 늦은 1884년 4월에 조계를 설치하였는데, 청국의 조계라 해서 청관(淸館)이라 불리었으며 현 선린동 일대 5,000여 평에 자리 잡은 뒤 지금까지 한국의 유일한 차이나타운으로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청국과 일본은 각자의 조계를 가졌으나,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은 1884년 10월 지금의 송학동 1~3가, 북성동 1~3가 일부, 송월동 2~3가 일대 14만 2000여 평에 공동으로 넓은 각국 조계를 만들었다. 이들은 신동 공사(紳董公司)라는 공동 관리 기구를 만들어 공동 조계 내의 모든 문제를 협의하고 결정해 나갔다. 특히 건물을 지을 때 자재로는 벽돌, 석재, 철재를 꼭 써야하는 규칙을 적용하기도 하였다. 제물포 앞 바다에는 1911년 사도(沙島)에서 지금의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밑에 이르는 해안 사이를 매립하고, 이곳에 4,500톤 급 선박 3척이 동시 접안할 수 있는 크기의 인공 항만 축조를 시작했다. 이 항만은 최초의 근대적 갑문식 도크 공사로 착공 7년여 만인 1918년 10월에 완공되었다.
이 외에도 제물포 내동에는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목사가 세운 내리교회 사택에 1893년 최초의 서구식 초등교육기관이었던 영화학당이 설치되었다. 내리교회의 2대 목사였던 존스(G. H. Jones)는 내리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102명을 모아 인천항에서 하와이로 이민을 보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이민 역사로 기록되어 있다. 1885년에는 제물포와 서울을 잇는 우리나라 최초의 육로 전선이 개통되었고, 1910년에는 월미도 해안을 순시하며 세관 감시 업무를 하던 광제호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무선 전신이 시작되었다. 1888년에 만국공원(萬國公園) 또는 각국공원(各國公園)이라는 이름으로 완공된 지금의 자유 공원은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었으며, 이 공원 북쪽 언덕에 자리 잡고 1905년부터 업무를 시작한 인천기상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기상대였다. 외국인 조계가 있던 자유공원 일대는 1914년 이후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로 도시계획이 시행된 곳이었고, 여기에 적용된 건폐율이나 미관지구 개념은 1930년대 이후 전국 주요 지역의 도시 계획의 시초가 되었다.
1945년 8·15광복 후 1949년 8월 지방자치법 시행에 따라 인천 부가 인천시가 된데 이어, 1962년 5월에는 시 조례에 따라 중부 출장소가 생겼다. 그리고 1968년 1월 1일 법률 제1919호에 의해 동구, 남구, 북구와 함께 중구가 탄생하였다. 이때 북부출장소 관할이었던 송월동이 중구에 편입되었으며, 1973년 7월에는 동구에 속해 있던 월미도가 중구로 들어왔다. 1981년 인천시가 직할시가 되면서 경기도에서 분리되었고, 1989년에는 경기도 옹진군에 있던 영종도와 용유도가 편입되어 영종동과 용유동이 되었다. 2001년 3월에는 영종도에 신공항이 개항되었다. 영종도와 용유도는 본래 인천부 영종면과 용유면이었는데, 1914년 부천군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부천군에서 옹진군으로 편입되었던 지역이다. 중구는 그 뒤 1995년 3월 1일 법률 제4789호에 따라 인천시가 광역시로 개청되면서 인천광역시 중구로 명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동 1가 9번지에 있는 구청 청사는 원래 인천시청 청사가 있던 곳이다.
2001년 영종도에 건설된 인천국제공항이 개항하였으며, 2012년 영종동에서 운서동이 분 동하였다. 2018년 영종동에서 영종 1동이 분 동하였으며, 2021년에는 북성동과 송월동을 병합하여 개항동을 신설하였다. 2021년을 기준하여 행정구역은 11개 행정동(개항동·도원동·동인천동·신포동·신흥동·연안동·영종동·영종1동·용유동·운서동·율목동) 52개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4]
산업[편집]
산업구조의 비중은 운수·창고업을 중심으로 하는 3차 산업이 가장 크다. 지역 내 총생산(GRDP)은 2018년을 기준하여 14조 5598억 원으로 인천시 전체 GRDP의 16.4를 차지하여 서구·남동구 다음으로 비중이 크다. 경제 활동 별 부가가치의 비중은 운수·창고업(6조 8001억 원)이 52.1%를 차지하고, 이 밖에 제조업(11.1%), 건설업(5.7%), 도소매업(5.6%), 공공행정·국방 및 사회 보장 행정 업 (4.5%) 등의 순이다. 인천국제공항과 인천항을 기반으로 하는 운수·창고업의 부가가치는 인천시 운수·창고업 총 부가가치의 78%를 차지한다. 농특산물로는 영종 용유도에서 생산되는 섬쌀·호박고구마·포도·고추 등이 있다. 전통시장은 신포동의 신포시장을 비롯하여 선화동의 신흥시장, 항동의 인천종합어시장 등이 상설시장으로 운영된다.
2018년 사업체 수는 1만 3291개로 시 전체 사업체의 6.6%, 사업체 종사자는 9만 7759명으로 시 전체 사업체 종사자의 9.1%를 차지한다. 사업체별로는 도소매업체(3617개)가 27%로 가장 많고, 이 밖에 숙박·음식점 업체(23%), 운수업체(19%), 협회·단체 수리 및 기타 개인 서비스 업체(7%), 제조업체(4%) 등의 순이다. 제조업은 산업용 기계·장비 수리 업을 비롯하여 식료품, 금속가공 제품, 인쇄·기록 매체 복제업, 기타 기계·장비 제조업종의 비중이 크다. 영종 용유도 일원에 복합관광·항공물류·항공산업을 아우르는 관광레저 복합도시로서 영종국제도시를 조성하여 송도 국제도시·청라 국제도시와 함께 인천경제자유구역을 구성하며, 영종국제도시 내 운북동 일원에 영종 항공일반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교통[편집]
영종도는 영종대교와 인천대교를 통하여 육지와 연결되고, 2019년에 개통한 무의 대교가 영종도와 무의도를 연결한다. 도로 교통은 제2경인고속도로가 중구 운서동을 기점으로 하여 인천대교를 거쳐 성남시 중원구까지 이어지고,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가 중구 운서동에서 고양시 덕양구까지 이어진다. 또한 화성시를 기점으로 하는 수도권 제2순환 고속도로가 중구를 거쳐 경기도·인천 지역을 순환한다. 이 밖에 일반국도는 6호선(중구~강원도 강릉시)·42호선(중구~강원도 동해시)·46호선(중구~강원도 고성군)·77호선(부산시~중구~파주시), 국가지원 지방도(국지도)는 84호선(강화군~중구~강원도 원주시)·98호선(수원시~중구~수원시)이 중구를 거쳐 간다.
철도 교통은 1899년 경인선이 개통되어 인천역~노량진역 간을 운행하였다. 이후 경인선은 1974년에 개통된 서울 지하철 1호선과 직결되었고, 2000년 수도권 전철 1호선에 포함되어 중구의 동인천 역과 종점인 인천역까지 운행한다. 청량리역을 기점으로 하는 수도권 전철 수인·분당선은 중구의 신포 역을 거쳐 인천역을 종점으로 한다. 이 밖에 서울역을 기점으로 하는 인천국제공항 철도가 중구의 영종역 등 4개 역을 거쳐 인천공항 2터미널 역을 종점으로 하고, 2016년에 개통한 인천공항 자기 부상 철도가 인천공항 1터미널 역~용유역 간의 6개 역을 운행한다.
항공 교통은 2001년에 개항한 인천국제공항이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등의 국적 항공사와 델타항공·중국 남방항공 등의 외국계 항공사의 거점 공항이 되어 80여 개의 항공사를 통하여 50여 개국 170여 개 도시를 취항하며, 국내선은 국제선 환승용으로 운영한다. 2018년을 기준하여 운항 편수는 국제선 38만 1640여 편, 국내선 5750편, 여객 수송 인원은 국제선 6767만 6140여 명, 국내선 58만 3610여 명, 화물 수송량은 국제선 295만 2069t, 국내선 54t이다.
해상 교통은 개항 이래 근대화의 관문이 된 인천항에 내항·남항·북항·연안항·신항 등의 부두 시설과 국제여객터미널·연안여객터미널·크루즈터미널 등이 조성되어 서해안의 대표적 무역항으로 발전하였다. 국제여객터미널에서는 국제 항로를 오가는 외항선을 운항하고, 연안여객터미널에서는 백령도·덕적도를 비롯한 국내 항로를 운항한다. 2018년 여객 수송 인원은 외항선 80만 9050여 명, 연안여객선 140만 9570명이며, 화물 수송량은 외항 화물 1억 3743만 4790t, 연안 화물 2642만 8889t이다.
관광[편집]
바다와 섬, 개항기의 역사 유적 등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월미도 일대는 인천의 대표적 관광 명소로서 월미도를 중심으로 하여 신포동·개항동·연안동·동인천동·신흥동 일원이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 월미도에는 서해와 인천대교 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조선시대의 정원을 재현한 월미전통정원 등이 조성된 월미공원, 해안에 조성된 월미문화의 거리, 다양한 놀이 기구를 갖춘 월미테마파크 등이 있으며, 인천 앞바다를 둘러보는 유람선과 지상 7~18m 높이에서 월미도를 순환하는 월미 바다열차가 운행하는 등 놀 거리·볼거리·먹거리가 풍성하다.
이 밖에 청나라 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중국인들이 정착하여 형성된 인천 차이나 타운,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에 걸쳐 인천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사교 클럽으로 지어진 구)제물포구락부(인천유형문화재)를 비롯한 근대 건축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개항장 거리, 인천 시가지와 인천 앞바다·항만 등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자유공원, 한국 최초의 등대가 세워진 팔미도와 유람선, 동화를 테마로 한 벽화와 조형물들로 가득한 송월동 동화마을과 다양한 입체그림들로 새로운 시각 체험을 선사하는 트릭아트스토리, 레일바이크·인공암벽폭포·야외공연장·조형분수·전망대 등으로 조성된 영종국제도시 씨사이드파크, 수도권에서 유일하게 바다 위로 해가 뜨고 지는 일출·일몰 광경을 모두 볼 수 있는 거잠포 해변 등의 명소가 있다.
레저·휴양지로는 을왕리 해수욕장·하나 개 해수욕장·선녀바위해수욕장·실미해수욕장·왕산해수욕장, 팔미도 산림욕장·호룡곡산 산림욕장, 왕산가족 오토캠핑장·영종도 힐링캠프·영종 씨사이드캠핑장·만 정 캠핑장 등이 있다. 어촌 체험마을로는 갯벌 체험과 바다낚시 등을 즐길 수 있는 큰무리 어촌체험마을·포내 어촌체험마을 등이 있으며, 먹거리촌으로는 항동의 연안 부두 밴댕이회 무침 거리, 전동의 동인천 역 앞 삼치골목이 있다. 도보 관광으로는 중구청에서 개항장 거리와 차이나타운, 자유 공원 등지를 문화 관광해설사와 함께 둘러보는 인천 개항 누리 길을 1~3시간의 3개 코스로 운영한다.
생활 문화[편집]
매년 4월에 자유 공원 일원에서 벚꽃축제가 열려 문화공연과 지역 예술인 공연, 전시·체험 프로그램과 먹거리 장터 등이 펼쳐진다. 개항장 문화지구 일원에서는 근대화의 관문인 개항장과 밤마실을 연계한 '인천개항장 문화재 야행'이 연중 상·하반기 2차례에 걸쳐 개최되어 아름다운 야경을 연출하는 경관 조명과 함께 무대 공연과 버스킹, 근대문화 및 무형문화재 체험, 근대 거리 재현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된다. 이 밖에 월미문화의 거리 일원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는 인천상륙작전 월미 축제가 9월 중에 열리고, 12월에는 원도심과 영종국제도시 일원에서 크리스마스트리 문화축제가 열린다.
문화재[편집]
국가 지정 문화재로는 사적 2개소(인천 답동성당·인천 팔미도 등대)가 있으며, 구 인천 부 청사·인천 선린동 공화춘을 비롯한 6점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시 지정 문화재로는 구)인천 일본 제1은행 지점·인천 우체국·용궁사를 비롯한 인천유형문화재 10점, 대금정악(대풍류·대금)을 비롯한 인천무형문화재 3점,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을 비롯한 인천 기념물 3점, 인천민속문화재 1점(용동 큰우물), 송학동 옛 시장 관사를 비롯한 인천 등록문화재 2점, 남북동 조병수 가옥을 비롯한 인천문화재자료 3점 등이 있다.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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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중구 (인천광역시)〉, 《위키백과》
- 〈중구(인천광역시)〉, 《네이버 지식백과》
- 〈중구(인천광역시)〉, 《나무위키》
- 〈중구(인천광역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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