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니아석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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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니아석호(리투아니아어: Kuršių marios, 러시아어: Куршский залив, 폴란드어: Zalew Kuroński, 독일어: Kurisches Haff, 라트비아어: Kuršu joma)은 발트해에 위치한 석호로 면적은 1,619km², 수면적은 100,450km², 평균수심은 3.8m, 최대 수심은 5.8m이다. 리투아니아와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 사이에 위치하며 발트해와 쿠로니아 사주를 갈라놓고 있다.[1]
개요[편집]
쿠로니아석호는 쿠로니아 사주(리투아니아어: Kuršių nerija, 러시아어: Куршская коса, 독일어: Kurische Nehrung, 라트비아어: Kuršu kāpas)에 의해 발트해와 분리된 담수 석호이다. 네만강( 리투아니아어 : Nemunas )은 유입수의 약 90%를 공급한다. 쿠로니아석호는 기원전 약 7000년에 형성된 석호는 민물 석호다. 수심 평균 3.8m이며 이것은 수질 오염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생물 다양성이 매우 높다. 녹조의 존재는 2000년대에 확인되었다. 13세기부터 쿠로니아석호 주변에 쿠로니아인과 프루센인이 정착했다. 1252년에는 발트해로 가는 거점을 마련한 튜턴 기사단에 의해 쿠로니아 석호의 북단에 클라이페다가 설립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지금과 같은 경계선이 확립되었다. 쿠로니아 사주는 풍광도 아름다워서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에까지 등재된 리투아니아의 국립공원이다.[2]
역사[편집]
13세기에 석호 주변은 쿠로니아인과 고대 프로이센인 의 조상 땅의 일부였다. 나중에 그것은 리투아니아 소국의 역사적인 지역과 접해 있었다. 석호의 북쪽 끝에 있는 클라이페다 해협은 석호와 발트해를 연결하며, 1252년 튜턴기사단이 메멜부르크성((Memelburg)과 클라이페다시를 건립하기 위해 이곳을 선택했다. 1454년, 카시미르 4세 야기엘론 왕은 반튜턴 프로이센 연맹의 요청에 따라 이 지역을 폴란드왕국에 통합했다. 1466년 평화조약에 따라 석호는 튜턴 기사단이 소유한 영지로서 폴란드의 일부가 되었으며 따라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내에 위치하고 나중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승격되었다. 18세기부터 프로이센 왕국의 일부가 되었고 1871년부터는 독일의 일부가 되었다. 1923년 이후 북쪽의 클라이페다 지역은 리투아니아(1939~45년 독일이 점령)에 넘어갔고, 나머지 지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 넘어갔다.
새로운 전쟁간 경계선으로는 러스네(Rusnė) 부근의 쿠로니아석호로 흘러드는 강이 선택되었다. 독일의 하류 120km는 독일인에 의해 다이 메멜(die memel)이라고 불렸고, 리투아니아에 위치한 상류는 네무나스강(Nemunas River)으로 알려졌다. 국경선은 또한 리투아니아 니다(Nida)의 작은 휴양지 근처의 반도를 분리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리투아니아 지역은 독일이 점령했고, 스핏과 석호의 남쪽 부분은 1945년까지 독일에 남아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석호의 남쪽 끝과 강 남쪽의 독일 지역은 칼리닌그라드 주(Kaliningrad Oblast) 라고 불리는 러시아의 독점 영토가 되었다.
오늘날 쿠르시닌카이라고도 알려진 쿠르세니에키는 거의 멸종된 발트족으로 쿠로니아석호를 따라 살고 있지만, 1649년 메멜(Klaipdada)에서 단치히(Gdańsk)에 이르는 쿠르시닌카이 정착촌이다. 쿠르시닌카이는 몇몇이 아직 살고있는 쿠로니아석호를 제외하고는 결국 독일군에 의해 동화되었다. 쿠르시닌카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라트비아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할 때까지 언어적 주장에 근거한 배려로 라트비아인으로 여겨졌다. 이것이 나중에 취하될 동프로이센의 쿠로니아 스피트, 메멜, 그리고 다른 영토에 대한 라트비아의 주장에 대한 근거였다.
쿠로니아 사주[편집]
쿠로니아 사주(리투아니아어: Kuršių nerija, 러시아어: Куршская коса, 독일어: Kurische Nehrung, 라트비아어: Kuršu kāpas)는 발트해에 위치한 사주로 폭 0.4~4㎞, 길이는 98km, 면적은 33,021ha이다. 쿠로니아석호를 사이에 두고 발트해와 떨어져 있다. 남쪽으로는 삼비아반도, 북쪽으로는 리투아니아 본토에 위치한 항구 도시인 클라이페다까지 뻗어있다. 전체 길이 가운데 52km는 리투아니아에, 나머지 46km는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에 위치한다. 칼리닌그라드에서 육로로 이동할 수 있으며 그 외의 지역에서는 육로로 이동할 수 없다. 모래톱의 끝부분은 리투아니아의 도시인 클라이페다(본토)와 매우 가깝지만, 육로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 페리로 이동해야 한다. 다만 두 지역 사이가 워낙 가까워서 이동 시간은 5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 숲이 잘 발달하여 있고 관광지로 특화되어 여러 조형물이 만들어져 있다. 좁고 긴 땅에 텃밭과 건조용 그물 칠 공간을 남겨 둔 채 이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가옥들은 도로와 직각을 이루며 지어졌다. 20세기에 어부들의 가옥을 확장하고 긴 도로를 따라 가옥을 새로 지은 결과, 정착촌의 외형이 급격히 변했다. 그 밖에 페르발카(Pervalka)에 튼튼한 등대가 있으며, 유오드크란테와 니다에는 신고딕 양식의 복음주의 루터 교회가 있다. 리투아니아 해양 박물관이 이 모래톱의 끝부분에 존재한다.
쿠로니아 사주는 기원전 3000년경에 빙퇴석이 모래를 통해 연결되면서 지금과 같은 사주가 형성되었다. 800년경부터 1016년까지는 이교의 교역 중심지였던 카우프(Kaup)가 존재했다. 13세기에 튜턴 기사단이 쿠로니아 사주를 차지하면서부터 메멜(Memel, 1252년 설립, 현재의 리투아니아 클라이페다), 노이하우젠(Neuhausen, 1283년 설립, 현재의 러시아 구리옙스크), 로시텐(Rossitten, 1372년 설립, 현재의 러시아 리바치)을 건립했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사구가 새로 형성되었다. 지나친 방목, 선박 제조, 주거를 위한 목재 벌목 등으로 인한 삼림 파괴로 인해 사주가 사구로 바뀌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프로이센 당국은 1825년에 대규모 삼림 복원 사업, 녹화 사업을 전개했다. 이에 따라 현재의 사주 가운데 대부분이 숲에 뒤덮였다. 19세기에는 쿠르세니에키인(Kursenieki)이 처음 거주했으며 사주 남부에는 소수의 독일인, 리투아니아인이 거주했다. 쿠르세니에키인은 1945년 이전에 독일인에 동화되면서 거의 소멸되었다. 20세기 이전까지는 이 지역에 거주하던 주민들의 대부분이 어업으로 생계를 꾸렸다.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니다(Nida)를 비롯한 쿠로니아 사주 북부가 리투아니아에 편입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소련 군대가 쿠로니아 사주를 점령하면서 이 지역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이 추방되었다. 소련의 붕괴 이후에는 관광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리투아니아, 독일 출신 관광객이 다수를 차지한다. 2000년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3]
발트해[편집]
발트해(독일어: Baltisches Meer, 러시아어: Балтийское море, 영어: Baltic Sea)는 북유럽의 바다로, 스칸디나비아반도와 북유럽, 동유럽, 중앙유럽, 그리고 덴마크의 섬들로 둘러싸인 바다를 말한다. 카테가트해협과 스카게락해협을 통해 북해, 대서양과 연결되어 있다. 백해-발트해 운하를 통해 백해와, 킬 운하를 통해 북해와 바로 연결된다. 발트해는 육지에 둘러싸인 염수이다. 입구가 윌란 반도로 막혀 있어 거의 내해나 다름없기 때문에 조석 간만의 차가 거의 없다. 하천으로부터의 풍부한 하천수의 유입과 냉량한 기후로 인한 증발량이 적어 0.6~0.3%의 낮은 염분 함유량을 나타낸다. 발트해는 길이 1600km, 폭 193km, 평균 수심 55m이다. 가장 깊은 곳은 459m(1506 ft)이다. 면적은 약 377,000km², 체적은 약 21,000km³이다. 둘레는 약 8000km이다. 발트해는 지구의 북반구 고위도에 위치하여 겨울동안 많은 지역이 얼어붙는다. 보트니아만과 핀란드만, 리가 만을 포함한 최대 45%의 지역이 겨울에 얼어붙는다. 보트니아만 북부에서 생기기 시작한 얼음은 1월이 되면 보트니아 만 전체로 퍼진다. 1월 말이 되면 핀란드 만과 리가만도 얼게 된다. 겨울철에 형성된 해빙은 2월 - 3월 까지도 존재한다. 보트니아 만 북부의 경우 얼음의 두께가 70cm이상이 된다. 발트해는 하나의 거대한 만과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어, 수질 오염에 취약하다. 1970년 룬트홀름은 발트해의 심층부에서 산소가 급격하게 줄고 인이 늘어나 부영양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고하였다. 1968년 환경 조사에서는 황화수소마저 검출되었다. 발트해 연안의 국가들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발트해 어젠다 21을 시행하고 있다. 또한 유네스코와 협력하여 발트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발트해의 수질, 대기 등에 대한 교육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지구온난화에 의한 영향도 나타나, 지난 200년간 연평균 기온은 1도 정도 상승하였고 해수면 역시 20 cm 정도 상승하였다. 또한 매년 얼음이 어는 지역이 줄어들고 있다.[4]
지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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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