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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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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리가 위치

리가(라트비아어: Rīga, 에스토니아어: Riia, 러시아어: Рига, 리투아니아어: Ryga)는 라트비아수도로, 발트해와 다우가바강에 접해 있다. 리가는 발트 3국 가운데 가장 큰 도시로 면적은 307.17km², 인구는 약 67만 명이며 라트비아 인구의 3분의 1, 발트 3개국의 전체 인구 중 10분의 1이 거주하고 있다. 리가의 구시가지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1]

개요[편집]

  • 행정 단위: 수도
  • 면적: 302.8km²
  • 지역번호: 66, 67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s://www.riga.lv/lv

리가는 발트해의 리가만(Gulf of Riga)에 위치한 항구도시로서 천연의 군사적 요새로 공산주의 시절에는 소련의 발트함대가 위치하였다. 리가는 발트 3국의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Vilnius)와는 300km 그리고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Tallinn)과는 310km로 떨어져 있다. 리가는 중구(Central District), 북구(Northern District), 쿠르제메구(Kurzeme District), 젬갈레지역(Zemgale Suburb), 비제메지역(Vidzeme Suburb), 라트갈레지역(Latgale Suburb) 등 6개의 행정구역(district)으로 나뉘는데 공산주의 시절 인구가 늘면서 3개의 행정구역이 추가된 것이다. 리가는 러시아제국 시절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바르샤바에 이어 제국 내에서 4번째로 인구가 많은 거대 도시였다. 리가는 중세 초기에 바이킹의 무역 중심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13세기에 독일인 알베르트 주교가 리가에 와서 도시의 초석을 놓았다. 17세기에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러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1918년 독립했다. 1941~1944년 나치독일에 점령되었고 전후에 다시 소련의 지배를 받다가 1991년에 독립하였다. 리가는 중세 이후 발트지역의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였고 현재는 금융과 경제 허브로 기능한다. 리가는 라트비아 총 GDP와 고용의 약 50%를 점하며 항구와 공항이 위치하여 라트비아 수출의 약 50%가 리가를 통해 이루어진다. 리가를 통해 수출되는 상품은 목재가공품, IT 기구, 식음료, 의약, 운송과 기계장비 등이다. 도시에는 46개의 대학과 여러 고등교육기관이 위치하여 라트비아 고등교육기관이 있다. 리가는 중세의 교회가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아르누보 건축물이 다수 보존되어 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리가는 2003년 유로비죤송콘테스트(Eurovision Song Contest) 그리고 2006년 NATO 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2014년에는 유럽연합의 문화수도로 지정되었다.[2]

지리 및 기후[편집]

리가는 다우가바강 하류에 위치하여 도시가 강에 의해 동서로 나뉘어 있다. 리가시의 총면적은 307km²로 해발고도는 10m 이내의 평지로 구성되었다. 도시의 역사적 중심지는 동쪽에 있다. 강 위에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자추사라섬이 있다. 동부지역에 구시가지와 쇼핑몰, 시장과 터미널 등 상업시설이 집중되어 있다. 리가시 전역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에서 유행하였던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이 약 800여 개나 산재하여 건축양식에 관심이 있는 학생과 전문가가 많이 찾아온다. 이외에 외곽으로는 20세기 초에 건축된 2층 구조의 가옥과 공산주의 시절 공급된 5~18층 높이의 아파트가 줄지어 있어 시내 중심부의 아름다운 건축물과 대비된다.

리가는 습도가 많은 대륙성 기후로 겨울철 1~2월 평균기온은 -5°C로 기온이 내려가고 가장 추운 날에는 -25°C까지 온도가 내려가며 일주일 이상 쉬지 않고 눈이 내리기도 한다. 반면에 여름은 높은 위도로 7-8월 평균기온은 18°C로 선선하며 비도 자주 내린다. 리가시는 녹지가 풍부하여 시 전역의 약 40%가 녹지이며 시내 중심가에도 잘 가꾸어진 공원이 산재한다.[3]

역사[편집]

다우가바강은 고대 이래로 무역 루트였다. 그것은 바이킹이 드비나드니에페르강을 지나 비잔티움으로 가는 길의 일부였다. 다우가바강의 하구에서 상류로 15km 떨어진 곳에 자연 항구(오늘날의 리가 자리)가 오랜 옛날부터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2세기에 두나우르브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 고대 핀족인 리보니아족이 정착했다.

리가는 중세 초기에 바이킹의 무역 중심지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리가 주민들은 주로 어업, 목축과 무역을 하면서 살았고 나중에 목재, 철 등을 가공하는 수공업을 발전시켰다. 12세기에 라틴어로 쓰여진 헨리의 리보니아연대기는 리가가 무역 중심지였으며 포르투스 안티쿠스(고대 항구)라고 했다.

1158년 독일 상인들이 리가 근처에 전초 기지를 세웠다. 1199년 독일인 알베르트 주교가 브레멘과 함부르크의 대주교에 의해 리보니아 주교로 선포되었다. 알베르트는 1200년 배 23척과 베스트팔렌의 십자군 500명을 이끌고 리가에 상륙하였다. 1201년 독일 상인들이 드리나강을 거쳐서 노브고로드에 도착했다. 1202년 알레르트 주교는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을 만들었다. 리보니아인들의 기독교화가 계속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필립 황제가 알베르트에게 리보니아를 봉토로 주었다.

알베르트는 모든 독일 상인들은 발트해의 무역을 리가를 통해서 해야 한다는 교황의 교서를 얻음으로써 리가 상업의 미래를 확실히 했다. 1211년에 알베르트는 리가 돔 성당을 짓기 위한 초석을 놓았다. 1212년 그는 오늘날 벨라루스에 있는 폴로츠크에서 독일 상인들이 자유롭게 강을 통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작전을 시작했다.

1225년 교황의 관여에 따라 리가는 세금을 리가 주교에게 내지 않아도 되게 되었고 리가 시민들은 그들의 치안판사와 도시 의회 의원들을 뽑을 권리를 획득했다. 1226년에 알베르트 주교는 돔 성당을 봉헌하였고 성야고보교회(오늘날의 성당)를 지었으며 성게오르그교회에 교구 학교를 설립하였다.

알베르트 주교는 1229년 1월에 죽었다. 그는 대주교로 임명되고자 하는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발트해 세계에서 그가 세운 독일의 헤게모니는 7세기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1262년에 리가는 한자동맹의 회원국이 되었다. 한자는 리가에 경제와 정치의 안정을 주는 데에 중요했고 리가가 근대에까지 이르는 정치적 굴곡을 견뎌낸 강한 기초를 제공했다. 한자동맹의 영향력이 시들자 리가는 외국의 군사적,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야망의 대상이 되었다. 리가는 1522년 종교개혁을 받아들였고 대주교의 권력을 종식시켰다.

리보니아전쟁 때에 리가는 20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자유제국도시의 지위에 있었다. 이후 1581년 드로히친조약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연방의 영향 아래 놓였다. 1621년 폴란드-스웨덴전쟁 중에 리가와 다우가브그리바 요새는 스웨덴왕 구스타부스 아돌푸스에 의해 지배되었다. 리가는 1710년까지 스웨덴 왕의 지배 아래 있던 가장 큰 도시 중의 하나로 남아 있었다. 이 기간에 리가는 상당한 독립적인 자치 정부를 유지했다.

1710년에 표트르대제 아래의 러시아인들이 리가를 포위했다. 다른 리보니아 도시들과 함께 리가는 러시아에 항복했으나 대체로 도시 특권을 유지했다. 리가는 리가행정구역의 수도가 되었다. 1721년에 맺어진 니스타드조약으로 북부 유럽에서 스웨덴의 영향력 약화와 러시아의 부상이 공식화되었다.

20세기 초에 리가는 러시아제국의 가장 큰 목재 수출항이었고 무역량에서 세 번째를 기록했다. 1900년에 리가는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 바르샤바, 오데사 다음으로 다섯 번째로 큰 러시아제국의 도시였다.

여러 세기에 걸친 전쟁과 발트해 권력 변화 중에서도 리가의 발트해 독일인들은 지배적인 위치를 유지했다. 1867년에 리가 인구의 43%가 독일인이었다. 리가는 1891년에 차르 알렉산데르가 러시아어를 공식 언어로 확정할 때까지 독일어를 발트해 지역의 공식적인 행정 언어로 삼았다.

라트비아 부르주아의 부상은 1868년 리가라트비아협회의 탄생, 1873년 최초의 민족노래축제와 함께 리가를 라트비아민족각성운동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네오라트비아의 민족주의 운동에 이어 리가의 급속한 공업화와 함께 사회주의자새물결운동이 나타났고 라트비아사회민주주의노동자당이 주도한 1905년 혁명으로 절정에 달했다.

20세기 들어 제1차 세계대전에 이어 1917년의 러시아혁명이 리가에 영향을 미쳤다. 유글라전투의 결과 독일군은 1917년 9월 러시아로 진격했다. 1918년 5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사조약이 조인되어 발트해 국가들은 독일에 넘어갔다. 1918년 11월 휴전으로 독일은 그 조약을 포기해야 했고 라트비아와 다른 발트해 국가들은 독립을 주장할 수 있는 위치가 되었다. 라트비아는 리가를 수도로 삼아 1918년 11월 18일 독립을 선언했다.

1차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인 1918년부터 1940년까지 리가와 라트비아는 초점을 러시아로부터 서유럽 나라들로 돌렸다. 주요 무역 상대국으로 러시아 대신 영국과 독일을 택했다. 발트해의 독일인들 대다수는 1939년 후반에 다시 리가에 정착했다.

2차대전 중 라트비아는 1940년 6월 소련에 점령되었고 이어서 1941년 7월부터 1944년 10월까지 나치독일에 점령되었다. 소비에트 붉은 군대는 1944년 10월 리가에 재입성했다.

1940년 6월 소련군은 라트비아에 쳐들어와 교량, 전화, 전신, 방송국을 점령했다. 3일 뒤에 라트비아 대통령 카를리스 울마니스는 강제로 친소정부를 승인했다. 소비에트 당국은 공포정치를 실시하였고 대량 추방을 시작했다. 라트비아 합법 정부의 종사자 중 20%가 포함된 약 15,600명이 쫓겨났다. 스탈린의 추방에는 수천 명의 라트비아 유대인들도 대상이 되었다.

나치는 리가 점령기에 유대인 공동체를 게토로 몰아넣었고 나치강제수용소를 카이저발트에 지었다. 나치는 라트비아 유대인 약 24,000명 중 대부분을 학살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남아 있던 발트해 독일인들은 독일로 쫓겨났다. 그 후 몇 년 동안 노동자, 관리, 군인과 그 가족이 러시아와 다른 소비에트 국가에서 대량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층 아파트들이 노동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세워졌다.

전쟁 때 폭격으로 리가의 역사적인 중심지는 심하게 파괴되었다. 전쟁 후에 유명한 건물들을 재건하고 복구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행해졌다. 화재로 목조 탑을 잃어버린 성베드로교회가 그 중 하나이다. 다른 예로 블랙헤드의 집이 있다. 이 건물은 완전히 파괴되어 흔적조차 없어졌다. 복원한 건물이 1995년에 세워졌다.

2004년에 저비용항공사가 생겨나 런던, 베를린 같은 다른 유럽의 도시들로부터 싼 비행편이 가능해졌고 관광객이 상당히 늘었다. 2013년 11월 슈퍼마켓 지붕이 붕괴해 적어도 54명이 죽었다. 리가는 2014년도 유럽의 문화수도로 지정되었다. 라트비아는 유럽연합(EU) 위원장국을 맡아 2015년에 제4차 동부파트너십 정상회의를 리가에서 열었다.[4]

교통[편집]

시내 교통은 버스, 전차(트램), 트롤리버스가 담당한다. 2023년 기준 1회권이 1.5유로로 비싼 편은 아니지만 1회권으로는 환승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같은 번호의 버스, 전차, 트롤리버스의 운행 구간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대중 교통을 이용할 일이 있으면 어떤 교통 수단인지 정확히 확인해야 한다. 1970-1980년대에 인구증가에 따라 리가 지하철을 건설할 계획이 세워졌지만, 지반 문제와 함께 도시철도 건설로 인하여 러시아계 이주자가 더 몰려올 것이라는 위기감 때문에 반대가 심했다. 결국 도시철도 계획은 미뤄지다가 소련이 해체되면서 백지화되었다. 이후로 라트비아와 리가의 인구가 감소하고 있어 앞으로도 건설될 계획은 없는 듯하다.

국제공항으로 리가 국제공항이 있고, 발트 3국 중 최대 항공사인 에어 발틱이 이곳을 허브로 쓰고 있다. 시내까지는 버스로 약 40분 걸린다. 한국에서 리가로 바로 갈 수 있는 직항은 없다. 아니, 아시아 주요 공항에서 여기로 가는 직항이 없다. 핀에어, LOT 폴란드 항공, 루프트한자, 터키 항공 등의 환승편을 이용하면 올 수 있다. 에스토니아의 탈링크가 스톡홀름까지 운항하는 페리를 운영한다.

리가는 라트비아의 여러 지역과 철도로 연결되어 있다. 철도는 러시아, 벨라루스로도 국제열차를 운행하고 있다. 표준 궤도를 이용하여 리가를 경유하여 탈린과 바르샤바를 연결하는 고속열차 건설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리가국제버스터미널에서는 국내와 국제 노선을 운행하고 있다. 국제 노선은 에스토니아의 탈린, 러시아의 모스크바, 노브고로드, 오데사, 상트페테르부르크, 리투아니아의 빌뉴스, 클레이페다, 커우너스, 우크라이나키이우, 벨라루스민스크, 폴란드바르샤바, 체코프라하, 불가리아소피아, 독일베를린, 슈투트가르트, 본, 네덜란드의 로테르담 등지로 가는 노선이 있다.[5]

관광[편집]

리가의 구시가지인 베츠리카(Vecrīga)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유서 깊은 곳으로 화재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여러 번 파괴되었다. 그러나 구시가지는 공산주의 시절인 1967년부터 보존지역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아왔다. 라트비아 정부는 1990년대 후반에 리가 구시가지에 위치한 검은머리전당(House of the Blackheads)을 복원하여 현재 많은 관광객이 이곳을 찾고 있다. 구시가지에 위치한 시청광장(Town Hall Square) 역시 대표적인 관광명소로 2003년에 17세기 양식을 참조하여 새롭게 건설된 시청이 위치한다. 또한 리가성(Riga Castle)과 그 안에 들어선 국립역사박물관(National History Museum), 그리고 발트 지역 최대 규모의 중세성당인 리가성당(Riga Cathedral) 역시 주요 명소이다. 리가중앙시장(Riga's Central Market) 역시 유럽에서 규모가 가장 큰 재래시장으로 3,000개 이상의 작은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강 옆에 위치한 라트비아국립도서관 건물도 리가의 대표적 명소이다. 유명한 건축가 군나르 비르케르츠가 설계한 이 건물은 2008년 착공되어 도서관 창립 95주년이 되는 2014년 8월 29일 개관하였다. 이곳은 회의장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2015년 5월 EU동유럽파트너십 제4차 정상회의가 이곳에서 열렸다.

레포르마치야스라우쿰스거리의 리가성베드로교회는 리가에서 가장 높은 교회로 13세기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다. 이 교회는 1524년까지 로마가톨릭교회였으나 1526년부터 리가루터교회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포화로 크게 부서져 전후에 복구 사업이 이루어졌다.

돔광장 앞의 리가성당은 라트비아의 중요한 랜드마크 중 하나로 1211년에 처음 지어졌다. 복음주의루터교성당인 이 교회는 발트해 국가에서 가장 큰 중세 교회로 인정받고 있다. 지난 세월 동안 많은 보수가 이루어졌다. 1939년부터 1989년까지 소비에트의 지배 기간에는 종교 행사가 금지되었고 콘서트홀로 사용되었다. 리가성당의 오르간은 1882~83년에 독일인들에 의해 설치되었다.

필스라우쿰스거리의 리가성은 다우가바강 옆에 있다. 이 성은 1330년에 처음 지어졌고 1497년에서 1515년 사이에 완전히 새로 지어졌다. 1641년에 스웨덴사람들이 이 성을 차지한 뒤 넓은 부속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은 17세기와 19세기 사이에 계속해서 증축되고 재건되었다. 오늘날 이 성은 라트비아대통령의 공식 주거지이고 여러 박물관들이 이곳에 들어와 있다.

리가에는 많은 공원이 있다. 도시 서쪽에 있는 라트비아대학식물원은 온실 안에 든 열대 식물의 종류가 대단히 많다. 시내 중심의 자유기념비 옆에 있는 바스테이칼른스공원에는 작은 운하 위로 많은 자그마한 다리가 놓여 있다. 베르마네스공원도 자유기념비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산책하기에 좋은 조용하고 깔끔한 공원이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리가〉, 《위키백과》
  2. 리가(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3. 리가(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4. 리가〉, 《요다위키》
  5. 리가〉,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북유럽 같이 보기[편집]

북유럽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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