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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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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

조선 태종(太宗)은 조선의 제3대 왕(1367~1422)이다. 성은 이(李). 이름은 방원(芳遠). 자는 유덕(遺德)이다.

개요[편집]

  • 조선 태종은 조선의 제3대 국왕.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1367년(공민왕 16년) 6월 13일, 아버지 이성계와 어머니 신의왕후의 5남으로 태어났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고려에서 관료 생활을 처음 시작하였으며 이후 아버지의 역성혁명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도왔다. 1398년(태조 6년)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계모인 신덕왕후의 소생이자 이복 막내동생인 왕세자 이방석과 그 친형인 무안군, 세자를 지지하던 개국공신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일파를 모두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하였고, 마침내 조선의 제3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후에는 왕권의 강화를 위해 정적뿐 아니라,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면 자신의 집권에 기여한 공신들과 외척들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냉정하게 숙청하였으며, 이는 자신의 후계자인 세종의 훌륭한 치세의 바탕이 되었다. 그 외에도 혼란스럽던 건국 초기의 상황을 잘 수습하고 신생 국가 조선의 기틀을 마련하며 사실상의 2대 군주로서 그 책무를 훌륭히 수행함으로써 태종이라는 묘호에 어울리는 업적을 쌓았다. 태종이란 묘호 자체가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공에 버금갈 임금에게 바치는 최고 영예의 묘호이다. 사후에 업적을 인정받아 묘호가 태종으로 정해졌고 신하들의 절대적 찬사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또한 용비어천가에서는 태종을 달리 불러 성종(聖宗)이라 칭하였다. 일종의 '별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아버지인 태조의 별호는 '성조(聖祖)'였었다.[1]
  • 조선 태종은 조선의 제3대 국왕(재위 : 1400년 11월 28일 ~ 1418년 9월 9일)이자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유덕(遺德)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정부인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이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웠다. 왕자 시절 받은 작호는 정안군(靖安君), 정안공(靖安公)이다. 이후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으며, 동복형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왕위에 올라 공신들을 축출하고, 사병을 혁파하였으며 호패법과 6조 직계제를 실시하였다. 자신의 처가와 사돈 등을 비롯한 왕실의 외척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1421년 9월 7일 의정부에서 이미 상왕이었던 태종의 휘호(徽號)를 올릴 것을 청하여, 개국의 공을 인정받아 태상왕으로 진봉되어 9월 12일 '성덕신공태상왕(盛德神功太上王)'으로 존숭되었다. 7개월 후인 1422년 4월, 날씨가 화창하여 세종과 함께 철원의 고석정(高石亭) 근처에서 사냥을 하며 노루와 멧돼지를 한 마리씩 잡았고, 또 22일에는 다시 세종과 동교(東郊)에서 매사냥을 하다가 낙천정(樂天亭)에서 쉬기도 하였는데, 이날 태종은 환궁하였다가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리고 보름이 넘게 병석에 있다가 1422년 5월 10일, 천달방(泉達坊) 신궁(新宮)에서 세종, 양녕대군, 효령대군 등 아들들과 후궁 및 그 자식들, 그리고 신하들이 애통해 하는 가운데 56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묘호는 태종이며, 시호는 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다.[2]
  • 조선 태종은 본명이 이방원(李芳遠), 자(字)는 유덕(遺德)이다. 1367년(공민왕 16) 5월 16일 신묘일에 함흥부(咸興府) 귀주(歸州)에서 태조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와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 무렵은 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공민왕(恭愍王)의 신임을 얻어 원의 침입을 막아 내고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던 시기였다. 다른 형제들이 그다지 문재(文才)가 있지 않았던 것에 비해 이방원은 어렸을 때부터 글 읽기를 좋아했다고 전한다. 태종은 일찍 죽은 동생인 방연을 제외하고 태조의 자식들 중 유일한 문과 급제자였다. 그는 16세인 1382년(우왕 8)에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으며, 1383년(우왕 9)에 병과 7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문과의 좌주(座主)는 문하평리(門下評理) 우현보(禹玄寶),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인민(李仁敏)이었으며 당시 같이 급제한 동년(同年)으로는 김한로(金漢老), 심효생(沈孝生) 등이 있었는데, 김한로는 태종의 사돈으로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장인이 되었으며, 심효생은 방석의 장인으로서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야사에서는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가 태종의 영특함을 부러워하였으며, 태조는 태종의 과거 급제 당시에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으며, 문한을 담당하는 제학(提學)으로 임명되었을 때에는 그 임명장을 소리 내어 몇 번씩 읽게 하였다고 전한다. 이외에도 태조가 문신들을 초청할 때면 시를 짓는 등의 일을 담당함으로써 교유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등 무장 출신인 태조가 할 수 없었던 영역을 태종이 보완할 수 있었다. 태종의 비인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民氏)의 본관은 여주(驪州)이고, 민제(閔霽)의 딸이다. 6대조 민영모(閔令謨) 이래로 유력한 중앙 관료 집안이었다. 민제는 성품이 온화하고 청렴 검소한데다가 성리학을 존숭하여 이단을 물리치는 데 힘썼다. 또한 평생 존귀함과 영화로움이 극진했음에도 불구하고 부귀한 티를 내는 바가 없어 태종이 평생의 사부로 존경하였다고 전한다.
  • 조선 태종은 조선의 제3대(재위: 1400년~1418년) 왕이다. 재위 1400∼1418.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다. 비는 민제(閔霽)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이다.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길재(吉再)와 같은 마을에 살면서 학문을 강론하기도 하였다. 한때 원천석(元天錫)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1383년(우왕 9) 문과에 급제하였다. 1388년(창왕 즉위년)부터 이듬해까지 고려 왕실을 보호할 의도에서 감국(監國)을 요청하는 사명을 띠고 명나라에 파견된 정사 문하시중 이색(李穡)의 서장관이 되어 남경(南京)에 다녀왔다. 1392년(공양왕 4) 3월에는 이성계(李成桂)가 해주에서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이를 기화로 수문하시중 정몽주(鄭夢周)는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이 공양왕에게 상소하게 하여 정도전(鄭道傳) 등 이성계파의 핵심인물을 유배하고 이성계까지 제거하려 하였다. 이때 이방원은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 등을 시켜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써 대세를 만회하였다. 같은 해 정도전 등과 공작하여 도평의사사로 하여금 이성계 추대를 결의하게 하였다. 왕대비(王大妃: 공민왕 비 안씨)에게 압력을 넣어 공양왕을 폐위시킨 뒤 이성계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조선이 개국되자 1392년(태조 1) 8월에 정안군(靖安君)으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강비(康妃: 태조의 계비) · 정도전 등 개혁파의 배척으로 군권과 개국공신책록에서 제외되고 세자 책봉에서도 탈락하였다. 1394년 명나라에서 왕자를 입조시키라고 요청하자 남경에 가서 명나라 태조와 회견하고 생흔(生釁) · 모만(侮慢) 문제에서 비롯된 입명문제 등을 해결하였다.[3]

조선 태종의 가계[편집]

  • 1367년(공민왕 16년) 6월 13일(음력 5월 16일) 고려 함흥부 귀주(歸州)에서 이성계와 부인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성계의 아들들이 대개 무인으로 성장했지만 이방원은 어릴 때부터 무예나 격구보다는 학문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운곡 원천석이 태종의 잠저 시절 스승 중 한 명이었다. 1382년(우왕 9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383년(우왕 10년) 문과에 병과 7등으로 급제하였는데 급제하였을 당시, 아버지 이성계와 어머니 한씨 부인이 매우 기뻐하였다. 1388년(우왕 15년) 위화도 회군 당시 가솔들과 함께 동북면으로 피신했으며, 명나라에 파견되는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이색을 따라 북경에 다녀온 이후, 아버지를 도와 고려 왕조 유지 세력을 제거하였다. 특히 부하인 조영무와 함께 정몽주 제거 계획을 세운다. 1390년(공양왕 2년),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에 임명되었고, 1391년 어머니 한씨가 사망하자 개성군 상도리에 장사하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조선 태종의 즉위[편집]

  • 1398년 정도전 일파가 요동 정벌계획을 적극 추진하면서 자신의 마지막 세력 기반인 사병마저 혁파당할 처지에 이른다. 이에 평소의 불만을 폭발시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로써 정도전과 세자 방석(芳碩) 등을 제거한 뒤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정변 직후에는 여러 사정을 감안해 세자 추대를 사양하였다. 단지 정안공(靖安公)으로 개봉되면서 의흥삼군부우군절제사와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를 겸하였다. 또한 정사공신(定社功臣)을 논의 결정하여 1등이 되었다. 이어 개국공신 1등에도 추가로 올랐다.
  • 1399년(정종 1)에 새로 설치된 조례상정도감판사(條例詳定都監判事)가 되었다. 그리고 강원도와 동북면의 군사를 분령(分領)하였다. 1400년 방간(芳幹)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박포(朴苞) 등이 주동이 된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였다. 그 뒤 세자로 책봉되면서 내외의 군사를 통괄하게 되었다. 병권을 장악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고자 사병을 혁파하고 내외의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시켰다. 그리고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쳐 정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치고 군정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어 1400년 11월 정종의 양위를 받아 등극하였다. 태종은 이성계를 보필해 조선왕조 개창에 공헌하였다. 개국 초에는 한때 불우하기도 했지만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고 국권을 장악하였다. 정종의 뒤를 이어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을 이룩함으로써 세종 성세의 토대를 닦았다. 1418년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의 존호를 받았다. 1421년에는 성덕신공태상왕으로 가봉(加封)되었다.

조선 태종의 생애[편집]

  • 어머니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이고, 비는 민제(閔霽)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이다. 1383년(우왕 9)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이 되고, 후에 아버지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신진정객(新進政客)들을 포섭하여 구세력의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다. 1388년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오고, 13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를 제거하여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혔으며, 같은 해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로서 등극(登極)하자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 태조가 이모제(異母弟)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398년(태조 7) 중신(重臣)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을 살해하고, 이어 강씨 소생의 방석 ·방번(芳蕃)을 귀양보내기로 하고, 도중에 죽여 버렸다. 이것을 제1차 왕자의 난이라 하며 방원은 이때 세자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동복형(同腹兄)인 방과(芳果:定宗)에게 사양하였다.
  • 1400년(정종 2) 넷째 형인 방간(芳幹)이 박포(朴苞)와 공모하여 방원 일당을 제거하려 하자, 이를 즉시 평정하고 세자에 책봉되었다. 방간·박포의 난을 제2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대신들 가운데 일부가 동모제(同母弟)를 세자로 삼은 전례가 없다며 왕태제(王太弟)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정종은 동생을 아들로 삼겠다며 왕세자(王世子)로 책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해 11월 정종에게서 양위(讓位)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 조선 태종은 사병을 혁파(革罷)하고 1400년 문하부(門下府)를 폐지하였으며 의정부(議政府)를 설치하였다. 또 낭사(郞舍)는 사간원(司諫院)으로 분립시켰으며, 삼사(三司)는 사평부(司平府)로 개칭하고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신설하였으며, 1405년 1월에는 의정부의 서무(庶務)를 육조(六曹)에서 분장(分掌)하게 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한편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의 많은 사찰(寺刹)을 폐쇄한 후, 그 사찰에 소속되었던 토지 ·노비를 몰수하였으며, 또 비기(秘記) ·도참(圖讖)의 사상을 엄금하여 미신타파에 힘썼다. 한편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여 양반 ·관리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가 이를 소지하게 함으로써 인적 자원(人的資源)을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며, 개가(改嫁)한 자의 자손은 등용을 금지하여 적서(嫡庶)의 차별을 강요하였다.
  • 조선 태종은 국방정책으로서 10년 여진족의 일파인 모련위(毛憐衛) 파아손(把兒孫)의 무리를 죽였고, 노략질이 심한 야인(野人:여진인)들을 회유하여 변방의 안정에도 힘을 기울였다. 또 문화정책으로서 주자소(鑄字所)를 세워 1403년(태종 3) 동활자(銅活字)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으며, 하륜(河崙) 등에게 《동국사략(東國史略)》 《고려사(高麗史)》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경제정책으로서 호포(戶布)를 폐지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저화(楮貨)를 발행하여 경제유통이 잘 되도록 유의하였다. 1402년(태종 2) 상하 국민의 남소(濫訴) ·월소(越訴)를 엄금하였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기 위하여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였는데, 그 뜻은 매우 좋은 것이었으나 뚜렷한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다. 고려 말기의 순군제도(巡軍制度)를 여러 차례 개편하여 최고의 법사(法司)인 의금부(義禁府)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국왕 직속의 근위대(近衛隊)로서 역모(逆謀)를 방지하는 기관이었다. 1405년 송도(松都)에서 한성(漢城)으로 천도하였으며, 1418년 세자(世子:世宗)에게 선위(禪位)하고 상왕(上王)으로서 국정을 감독하였다. 태종의 능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릉(獻陵)이며 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태종(조선)〉, 《나무위키》
  2. 태종(조선)〉, 《위키백과》
  3. 태종(太宗)〉,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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