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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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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백제 제13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346년~375년이다.

개요[편집]

  • 근초고왕(300년대 초 ~ 375년 음력 11월 재위: 346년 음력 9월 ~ 375년 음력 11월)은 백제의 제13대 국왕이다. 이름은 중국의 《진서(晉書)》에 의하면 여구(餘句), 일본의 《고사기》에는 조고왕(照古王), 《일본서기》에는 초고왕(肖古王) 등의 이름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는 속고왕(速古王)으로도 불린다. 근초고왕은 마한 54개 연맹체 중 하나였던 백제국이 차츰 부족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출 무렵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크고 용모가 기이하였으며, 식견이 넓었기 때문에, 둘째 아들임에도 346년 계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근초고왕은 남으로 전라도 지역까지 마한 연맹체를 부분적으로 통일하였고, 북으로는 평양성을 공격하여 371년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1]
  • 근초고왕은 백제의 제13대 군주이자 어라하. 태어난 해는 미상이고 346년에 즉위해 375년에 사망했다.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끈 정복왕으로 평가받는다. 《삼국사기》에는 재위 2년부터 21년 사이의 기록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가 그동안 나라를 어떻게 다스렸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일본 측 기록인 《일본서기》에 남아있는 왜곡된 기록을 이주갑인상과 주체 교체론 등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으로 그의 업적이 드러난다. 현존하는 백제의 기록이 얼마나 부실한지 알 수 있는 사례.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명군임에도 재위 기간의 2/3에 가까운 시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백제 멸망 이후 수백 년 이후인 고려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의 한계를 볼 수 있다.[2] 근초고왕이 즉위하기 전 백제는 북쪽으로 완충 지대 역할을 하던 낙랑군과 대방군이 314년 부로 전부 미천왕의 고구려에 의해 축출되면서 고구려와 처음으로 국경선이 맞닿았고, 고구려의 위협이 눈앞의 현실로 다가온 중차대한 위기 상황이었다. 게다가 백제는 분서왕 때 기록을 보아 대방군과 친하여 혼인 동맹도 맺는 반면 고구려와는 별로 좋은 사이가 아니었는데, 이렇게 고구려가 백제 북쪽을 전부 차지하게 되면서 상황이 난처해졌고 결국 두 국가의 충돌은 불가피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내정도 어지럽게 흘러가고 있었는데, 바로 백제의 왕통이 초고왕에서 이어지는 초고왕계와 고이왕에서 이어지는 고이왕계 둘로 분열되어 매우 불안정한 구도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서로 계통이 다른 것으로 보이는 고이왕과 비류왕의 경우 기록에서 주장하는 그대로 나이를 추산하면 100살이 훌쩍 넘는 엄청난 수명을 자랑한다.
  • 근초고왕은 백제 13대 임금으로, 서기 346년에 즉위하여 375년까지 3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활발한 정복활동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대외관계의 폭을 넓히고, 역사서 편찬, 수도의 확장, 왕권 강화, 해상 무역 등을 발전시키는 등 다방면에 걸친 업적을 남긴 임금이다. 또한 백제 초기 불완전했던 왕권을 강화시키고 중앙 집권화를 한층 강화시켜 백제를 고대국가로 완성한 임금이라고 평가받는다. 근초고왕의 활약 탓에 백제는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전성기를 이룩했다. 근초고왕은 영토 확장 외에도 박사 고흥을 시켜 백제의 역사서를 기록하게 했으며, 371년 수도를 한산으로 옮겨 평지에 위치한 기존의 궁성과 함께 거대한 수도권을 만들었고, 372년 진(晉)나라와 사신 왕래를 하는 등 외교 활동 무대를 넓혔다. 무엇보다 그는 백제 사람들에게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게 한 업적을 남겼다. 고구려, 신라, 가야가 모두 두려워했던 강력한 국가를 건설했던 점은 백제 사람들에게 큰 자긍심으로 남았다. 근초고왕이 개척한 길을 따라 백제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 일본열도와 대륙 동해안은 물론, 차츰 동남아시아와 인도까지 활동무대를 넓혀갔다.

근초고왕의 왕위계승[편집]

  • 근초고왕은 조고왕(照古王) 또는 초고왕(肖古王)으로도 전해진다. 『진서(晉書)』에는 '여구(餘句)'라고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제11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다. 왕비는 진씨이고, 아들은 근구수왕 (近仇首王, 재위 375~384)이다. 346년부터 375년까지 30년간 백제를 다스렸다. 서울 석촌동 3호분을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근초고왕의 즉위 이전 왕위계승은 초고계와 고이계에 의해 분립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근초고왕 이후부터는 근초고왕의 직계가 계속 왕위를 계승하면서 초고계에 의한 단선적인 왕위계승이 확립되었다. 왕위계승이 안정됨으로써 왕권이 안정되었고, 정국 운영의 주도권도 귀족이 아닌 왕이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국내 정치의 안정은 근초고왕이 대외 정복활동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 백제사에서 분서왕(汾西王, 재위 298~307)부터 근초고왕까지의 왕위계승은 매우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백제 왕계를 이원적으로 보는 입장에서 보면 이른바 초고계와 고이계가 번갈아서 왕위에 오르는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먼저 10대 분서왕은 고이왕-책계왕 으로 이어지는 고이계 왕이었다. 그런데 분서왕 사후 비류왕(比流王, 재위 307~344)이 왕위를 계승했다. 비류왕은 초고왕-구수왕으로 이어지는 초고계이다. 그런데 11대 비류왕이 죽자, 이번에는 분서왕의 맏아들인 고이왕계 계왕(契王, 재위 344~346)이 즉위했다. 계왕은 즉위 3년 만에 사망하는데, 그 뒤를 이어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자 초고계인 근초고왕이 즉위하게 된 것이다.

백제의 왕호 사용[편집]

  • 백제의 왕계를 살펴보면 위와 같은 대응이 이루어지므로, '근초고왕'의 가까울 근(近)이 이전의 왕과 구분 짓기 위해 부기된, 서양의 '2세'와 비슷한 의미의 글자로 추정되기도 하고 한국어 '큰'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고구려에서도 궁(宮)과 이를 따온 위궁(位宮)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 착안한 다른 일설에는 고이왕계인 계왕을 물리치고 초고왕계 왕통을 복구해서 왕명이 근초고왕이 된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근개루왕의 용례와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았을 때, 단순한 동명이인이라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함부로 결론을 짓기는 애매한 상황이다.
  • 동성왕 이전까지 백제의 왕 대다수가 이름을 왕호로 사용한 점으로 미루어 이름은 초고 / 조고 / 속고로 추정된다. 셋은 의미상 동일한 단어의 다른 표기인데, 고대 한국어에서 같은 파찰음인 ㅊ, ㅈ, ㅅ 음가의 상호 호환성은 옆나라 신라의 김흠순(純)과 김흠춘(春), 용수(樹)와 용춘(春), 관창(昌)과 관장(壯)과 같은 이표기 사례들을 참고하면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백제 왕실의 국성이 부여씨(扶餘氏)라는 점에 미루어 《진서》에 기록된 '여구'라는 이름은 성을 '여', 이름을 '구'로 축약 표기한 것으로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이런 축약 표기의 사례는 다른 기록들에서도 흔하게 나타난다. 고가 구가 된 것은 고대인의 인명 표기 시 방언이나 필사자의 모어, 습관 등의 이유로 모음의 전이가 일어난 것으로 역시 비슷한 사례가 자주 관찰된다. 근초고왕의 경우는 이 표기가 많이 남아서 더욱 쉽게 알 수 있다.

근초고왕의 외교[편집]

  • 백제가 중국과 처음으로 외교관계를 맺은 것은 372년(근초고왕 27) 정월이다. 백제가 동진(東晉)에 사신을 보내자, 동진은 같은 해 6월, 근초고왕을 진동장군 영낙랑태수(鎭東將軍 領樂浪太守)에 책봉해준 것이다. 이로써 양국 간 최초로 공식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다. 근초고왕은 이듬해에도 동진에 사신을 보냈고, 이것은 근구수왕 대에도 이어졌다. 근초고왕이 동진과 책봉·조공을 특징으로 하는 공식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백제의 대외적 성장과 관련이 있다. 근초고왕은 남쪽으로 진출해 마한 잔여세력을 통합하고, 정치적으로 복속시켰다. 이전까지 마한 세력은 독자적으로 사신을 파견했지만, 372년 이후에는 백제라는 이름으로 중국과의 외교관계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북쪽으로의 영역 확대 과정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는 등 국제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근초고왕은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동아시아 국제무대에 백제왕이라는 이름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 한편 동진에 처음 사신을 보내던 372년, 근초고왕은 왜에 칠지도(七支刀)를 보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칠지도는 일본의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에 소장되어 있는 백제 시대의 철제 칼이다. 명문에 보이는 연호를 태화(泰和) 4년으로 파악하고 이를 근거로 369년(근초고왕 24)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칠지도의 명문 내용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다. 일본에서는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반면에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하사의 주체는 근초고왕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칠지도의 존재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백제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근초고왕은 왜에 선진문물을 전해주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을 왜국에 보내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주었는데, 이들은 일본 유학의 시조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인적·물적 교류와 더불어 군사적 협력까지 생각한다면, 당시 백제와 왜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근초고왕의 평가[편집]

  • 근초고왕은 백제의 최전성기를 이끈 백제사 최고의 명군이자 삼국시대의 정복군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오늘날 근초고왕이 대한민국에서 평가받는 모습은 한국 고대사가 평가받는 것처럼 때로는 과장, 때로는 축소로 얼룩져 있다. 처음부터 근초고왕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사료의 부족이겠지만 대한민국 사회가 색안경을 끼고 본 탓도 크다. 흔히 알려진 업적은 고구려와 싸워서 평양성까지 치고 올라갔고 싸우던 와중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군의 화살을 맞아 사망한 정도인데 그의 치적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바로 그 직전까지 무수한 정복 활동을 진행한 것으로 추정되며 중국에 기록상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국가로서 인정받고 일본과도 외교 관계를 최초로 여는 등 외교적으로도 백제라는 이름을 각인시켜 백제를 고구려와 맞서는 한 축으로 당당히 성장시켰다.
  •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신라의 진흥왕과 비견될 만하지만 광개토대왕은 18세에 즉위하자마자 백제 10성을 점령하는 등 치세를 전쟁과 정복으로 보낸 진정한 정복 군주이며 진흥왕도 10대 후반~20대의 나이 때 영토를 즉위 시점의 2배~3배로 확장시켰다. 하지만 근초고왕은 약 20년 동안이나 힘을 축적하고 이를 바탕으로 재위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복에 나섰다는 점이 다르다. 광개토대왕과 진흥왕이 젊은 패기와 뛰어난 군사적 식견으로 전장을 휩쓰는 패왕 유형의 군주였다면 근초고왕은 약 20년 동안이나 힘을 비축하며 가만히 기다리다가 치밀한 국제 정세의 분석과 조정을 통해 최소한의 전력 소모로 단번에 패권을 휘어잡는 것을 보면 대단히 치밀하고 경제적인 성격의 군주인 것이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근초고왕〉, 《위키백과》
  2. 근초고왕〉,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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