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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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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주몽)

동명성왕(東明聖王)은 고구려의 시조이다.

개요[편집]

  • 동명성왕은 고구려의 시조(재위 BC 37∼BC 19)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부여의 금와왕이 데려온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가 낳은 알에서 나왔다고 한다. 활을 잘 쏘고 영특하여 왕자들이 시기해 죽이려 하자 이를 피해 졸본부여로 남하하여 고구려를 세웠다. 이름은 주몽(朱蒙)·추모(鄒牟)·상해(象解)·추몽(鄒蒙)·중모(中牟)·중모(仲牟)·도모(都慕) 등이 전한다. 그를 주몽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 <동명성왕>조에 나와 있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이름이 주몽(朱蒙)이다[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하였다]. 그의 나이 겨우 일곱 살이었을 때에 남달리 뛰어나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으므로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서도 같은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동명왕을 부르는 호칭이 많은데, 이는 당시에는 발음이 같거나 비슷하면 다른 한자로도 같은 이름이나 지명 따위를 표기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동부여왕(東扶餘王) 해부루(解夫婁)가 죽고 금와(金蛙)가 즉위하였는데, 이때 금와왕은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났다. 유화는 말하기를 천제의 아들 해모수(解慕漱)가 자기를 유인하여 사통(私通)하고는 돌아오지 않아 부모에게 쫓겨나 우발수에 살고 있다 하므로, 금와왕은 유화를 데려다 궁중에 유폐시켰다. 어느날 유화는 햇빛을 받고 임신하여 알 하나를 낳았다. 그 알에서 남아(男兒)가 나와 성장하니 이가 곧 주몽이다. 주몽이 7세 때 이미 활을 잘 쏘는 등 영특하고 총명하자 금와왕의 장자 대소(帶素) 등 일곱 왕자 및 여러 신하들이 시기하여 죽이려 하였다. 이에 유화 부인의 뜻을 따라 화를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로 남하, BC 37년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성(姓)을 고(高)라 하였다. BC 36년 비류국(沸流國)의 왕 송양(松讓)의 항복을 받았고, BC 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건립하였으며, BC 33년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고, BC 28년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켰다.[1]
  • 동명성왕은 고구려의 초대 국왕이다. 이름은 주몽(朱蒙),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다. 《국사》(國史) 고구려본기를 인용한 《삼국유사》 및 《삼국사기》에 성은 고(高)이고 휘가 주몽(朱蒙)이라 하였다. 또한, 《삼국사기》 등에는 추모(鄒牟)·중모(中牟)·중해(衆解)·상해(象解)·도모(都牟)·도모(都慕)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다. 부여 금와왕의 아들인 대소의 박해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부여에서 자란 주몽은 총명하고 활을 잘 쏘아 촉망을 받던 중 대소 등 금와왕의 일곱 아들이 그 재주를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자 화를 피하여 이주하였다. 대소의 위협에서 무사히 벗어난 주몽은 유유히 남쪽으로 향하여 마침내 졸본에 정착하여 졸본(이름 미상, 건국설화 중에 다른 설화에는 연타발이라고 되어 있다)의 둘째 딸(이름 미상, 건국설화 중에 다른 설화에는 소서노라고 되어 있다)과 결혼하여 점차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기원전 37년, 주몽은 졸본 부여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건국했다. '고'씨로 전해지지만 주몽의 원래 성씨는 아버지인 해모수에 따른 '해'씨이며, 고구려 태조왕 당시 계루부 고씨가 집권하자 정통성을 위해 시조인 주몽의 성씨를 '고'씨로 바꾸었다. 그리고 국가의 위상을 일신하기 위해 대대적인 영토확장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주몽은 영토확장을 위해서는 우선 변방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변방에 살고 있던 말갈족 부락을 평정하여 말갈족이 더 이상 국경을 넘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기원전 36년에는 훈강(비류수) 상류에 있던 비류국(沸流國)의 왕 송양(松讓)에게 활쏘기 경쟁으로 이겨서 항복을 받아내어 '옛 땅을 회복했다.'라는 뜻의 고구려말인 다물(多勿)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도주로 삼았다. 비류국을 정복한 주몽은 기원전 34년 마침내 졸본성과 궁궐을 완성하여 나라의 위상을 한층 높였다. 기원전 32년에는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를 보내 태백산(백두산) 동남쪽에 있던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였으며, 기원전 28년에는 부위염을 보내 북옥저를 정복하였다. 동명왕릉은 졸본 근처의 용산에 마련되었으며, 시호는 추모성왕(東明聖王)이라고 하였다.
  • 동명성왕은 고구려의 초대 군주이다. 묘호와 시호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시조 '동명성왕'이라 표기되어 있으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는 '태조 중모왕'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태조'라는 묘호를 썼을 가능성도 있다. 뒤에 태조대왕이라는 시호를 받은 인물이 따로 있다는 점도 동명성왕의 호칭인 태조가 묘호일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 준다. 보통 주몽과 동명(東明)을 동일시하지만 당대 기록인 702년 〈연남산 묘지명〉에서는 '동명'(東明)과 '주몽'(=추모/중모)을 별개 인물로 보고 있다. 고구려 때까지는 동명과 주몽이 별개였으나, 삼국시대가 끝난 뒤 훗날 고려 시대 이후 시점에 부여의 동명왕과 고구려의 추모왕이 동일시되는 과정에서 혼선이 생겼다는 설도 있다. 동명성왕의 경우, 그래도 한국 고대사의 왕들 중 사후에도 꾸준히 영광을 얻은 편이다.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 같은 고구려를 계승한 고대 및 중세 국가들의 시조로 오랫동안 추앙받아 왔다. 조선은 국가의 시조로까지 보진 않았으나, 조선 시조 단군과 동격으로 제사를 지냈다. 그 이름에 걸맞게 '신궁(神弓)'으로 불리었으며, 물레 위의 파리를 쏘아 잡았다거나 송양과 나라를 두고 재주를 겨룰 때 100보 바깥의 옥가락지를 깨었다는 등 관련 설화가 전해진다. 오늘날 한국에서도 양궁 선수들을 가리켜 '주몽의 후예'라는 표현을 언론에서 쓸 정도로 현대 한국에서도 명궁의 대명사로 통한다. 드물지만 현재에도 동명신(東明神)을 모시는 무속인들이 있다.[2]
  • 동명성왕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말한다. 왕호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동명성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명왕편』이나 『삼국유사』에서도 왕호는 동명, 이름은 주몽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보통 주몽과 동명은 고구려의 건국 시조라는 동일 인물로 간주된다. 이러한 국내 자료와는 달리 『삼국지』, 『위서』, 『양서』 등 중국 측 자료에서는 주몽(朱蒙)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東明)은 부여의 시조로 엄격히 구분한다. 즉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후한 대에 왕충(王充)이 지은 『논형(論衡)』 길험(吉驗) 편과 3세기의 진 대에 씌어진 『삼국지(三國志)』 부여전에 인용된 『위략(魏略)』에는 부여의 시조를 동명왕(東明王)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후의 역사서는 모두 이를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고구려 시조의 이름에 대해서는 고구려 당대의 금석문인 광개토왕비 등에는 추모(鄒牟)로, 일본 측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추모(鄒牟)⋅주몽(朱蒙) 등으로 나타난다. 또 신라의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에도 주몽(朱蒙),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안승(安勝)에게 내린 책 명문에는 ‘태조(太祖) 중모왕(中牟王)’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역시 추모(鄒牟)와 통하는 것이다. 주몽(朱蒙)과 추모(鄒牟)는 동음이표기(同音異表記)이니 동일한 시조 명이다. 이렇게 고구려의 시조는 고구려 국내는 물론이고 주변 국가에까지 주몽(朱蒙)⋅추모(鄒牟)로 널리 알려져 있던 것이다. 여기서 고구려 당대에는 동명(東明)과는 다른 존재로, 고구려 시조로서의 주몽(朱蒙)을 내세웠음을 알 수 있다.

동명성왕의 백제 시조설[편집]

  • 일본에서는 동명성왕 주몽을 백제의 시조로도 본다. 속일본기에는 "백제 원조(遠祖) 도모(都慕)왕은 하백의 딸이 일정(日精)에 감응하여 태어났다."라고 연력 8년 1월조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신찬성씨록과 일본서기에도 백제의 시조를 도모(주몽)으로 설정하고 있다. 백제왕실의 후예인 인정(仁貞)은 백제의 태조를 온조왕이 아니라 주몽으로 지목하고 있다. 또한 칸무 천황의 생모인 고야신립의 묘비명에는 "백제의 먼 조상인 도모왕(都慕王)이라는 사람은 하백(河伯)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서 태어난 사람인데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라고 기록되어 백제에서 주몽을 시조로 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구려의 뜻[편집]

  • 고구려에서는 성(山城, 都城)을 '구루(溝婁)'라고 하였다. 고구려의 '구려'는 '구루'와 통하는 말로 '성'이라는 뜻이다. 우리말의 골, 홀이라는 말과 통하는 것이다. '고(高)'는 '대(大)'와 같은 뜻으로 '크다, 높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대성(大城), 즉 큰 성이라는 뜻으로 해석함이 타당하다. 뒤에 고구려는 국명을 '고려(高麗)'로 바꾸었는데, 그 시기는 대략 평양 천도 이후로 추정된다. 그리고 주몽 신화에는 주몽이 건국 후, 고구려라는 국명에서 왕실의 성씨를 따서 '고씨(高氏)'로 칭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2대 유리왕부터 5대 모본왕까지는 성씨를 '해(解)'라고 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전하고 있으며, 고구려 본기에도 4대 민중왕과 5대 모본왕의 이름에는 '해(解)'가 들어 있다. 이를 통하여 고구려의 왕실 교체를 설명하기도 한다.

비류[편집]

  • 비류(沸流)는 전설 속의 인물로서,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주몽(朱蒙)의 아들이자 백제의 건국시조인 온조(溫祚)의 형으로 전한다. 《삼국사기》에는 그의 행적에 관해 이야기가 기재되어 있다. 그중 하나에 따르면, 비류는 북부여(北扶餘)출신의 주몽과 졸본부여(卒本扶餘)왕의 둘째 딸 사이에서 태어나 아우인 온조와 함께 자랐는데, 어느날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리(琉璃)가 와서 태자가 되자 온조와 함께 따르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한강유역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신하들이 모두 한강 남쪽에 자리 잡자 권하고 아우인 온조도 그 말에 따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자리 잡고 싶어 했으나, 비류는 바닷가에서 살고 싶어 해 백성을 나눠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살았는데,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자신이 거느린 백성은 편히 살지 못하는 반면 온조의 백성들은 편히 살게 되자 부끄럽게 여겨 후회하다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류가 죽자 비류의 백성들이 모두 온조에게로 왔고, 이에 온조가 서기전 18년에 백제를 세웠다는 이야기에 착안해 비류가 서기전 18년에 죽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건을 빗댄 건국설화이므로 비류와 온조를 개인이 아닌 집단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이 보통이며, 비류집단과 온조집단의 경쟁에서 온조집단이 승리했다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또, 비류가 부여 출신이라는 점에 주목해 비류의 성씨는 해(解)씨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왕실 성씨는 원래 해(解)씨였다가 나중에 부여(扶餘)씨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학자들 중에는 비류집단을 해씨, 온조집단을 부여씨로 보는 사람이 적지 않다.

도모[편집]

  • 도모(都慕)는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별칭이다. 일본의 사서에 주몽을 음차하여 '쓰모'라고 표기되어 있다. 일본의《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과《속일본기(續日本紀)》에 나온다. 이들 사서에서는 "백제의 먼 조상인 쓰모왕[都慕王]이라는 사람은 하백(河伯)의 딸이 태양의 정기(精氣)에 감응해서 태어났다"고 하였는데, 이는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에 대한 다른 표기이다. 곧 동명성왕은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아 주몽이라 불렸는데, "쓰모"는 주몽과 같은 의미를 지닌 고유의 음차(音借)에 해당한다.

고등신[편집]

  • 고등신(高登神)은 고구려 시조 주몽(朱蒙)의 신상(神像)이다. 《위지(魏志)》 〈고구려전(高句麗傳)〉에 "국왕이 있는 곳(居所:왕궁) 좌우에 신묘(神廟)를 세워 귀신을 제사지내고..."라 하였고, 이어 《북사(北史)》 〈고구려전〉에 "두 신묘의 하나는 부여신(夫餘神)인 하백녀(河伯女:주몽의 생모 柳花)이고, 하나는 고등신(高登神)인 고구려 시조 주몽"이라 하였다. 이로 미루어 고구려에서는 주몽과 유화부인의 신묘를 지어 목각 신상을 만들어 놓고 제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유화부인[편집]

  • 유화부인(柳花夫人)은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 주몽의 어머니이다. 고구려 건국설화에 따르면 수신(水神) 하백의 딸인 유화는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사통한 죄로 태백산 남쪽 우발수로 귀양 보내졌다. 거기서 동부여왕인 금와왕을 만났다. 유화의 몸에 태기가 있어서 알 하나를 낳았는데 알에서 나온 아이가 바로 주몽이다.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보면 주몽은 영특하여 금와왕의 아들들이 시기하고 죽이려 하였다. 이에 유화부인이 남쪽으로 피신시키면서 여러 곡식의 씨앗을 주었는데 보리씨앗만 빼놓는 바람에 비둘기를 이용해 주몽에게 씨앗을 전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사실로 보아 유화부인은 맥류경작(麥類耕作)과 관련된 농업신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고구려에서는 고등신(高登神)으로 받든 주몽과 함께 부여신(扶餘神)으로 섬기며 제사를 지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동명성왕(東明聖王,BC 58~BC 19)〉, 《두산백과》
  2. 동명성왕〉,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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