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
문무왕(文武王)은 신라의 제30대 왕(재위 661∼681)이다.
개요[편집]
- 문무왕은 성은 김(金), 이름(諱)은 법민(法敏), 시호는 문무(文武)이다. 이름을 따서 법민왕(法敏王)이라고도 하며, 《삼국유사》에는 '문호왕(文虎王)'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의 적장자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인 문명왕후(文明王后) 김씨이다. 파진찬(波珍飡) 선품(善品)의 딸인 자의왕후(慈儀王后)를 비로 맞이해 제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을 낳았고, 다른 자녀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에는 왕비는 선품(善品) 해간(海干)의 딸 자의(慈義)로 자눌왕후(慈訥王后)라고도 하며, 어머니는 훈제부인(訓帝夫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무왕은 681년(문무왕 21) 음력 7월에 죽었으며, 유언에 따라 화장해 동해의 큰 바위에 장사지냈다.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에 탁본이 전해지는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에는 당시 나이가 56세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무왕이 죽은 뒤에는 태자인 정명(政明)이 제31대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으로 즉위했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이 죽기 전에 불교식으로 화장하고, 장례를 검소하게 하며, 불필요한 조세를 모두 폐지하고, 법령과 격식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바꾸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나온다. 전설로는 문무왕이 용이 되었으며, 왕의 유해가 안치된 바위를 대왕석(大王石)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문무왕이 왜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감은사(感恩寺)을 지었으나 완성시키지 못하고 죽자 바다의 용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오늘날 경주 문무대왕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의 문무대왕릉은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삼국유사》의 '문호왕 법민(文虎王法敏)' 조에는 문무왕이 즉위하던 해에 사비(泗沘)의 남쪽 바다에서 키가 73척(尺)에 발길이가 6척이나 되는 거대한 여인의 시신이 발견되었으며, 용궁(龍宮)에서 비법을 전해 받은 명랑법사(明朗法師)가 675년(문무왕 15)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고 문두루(文豆婁)의 비법으로 풍랑을 일으켜 신라를 쳐들어온 당나라 배들을 침몰시켰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문무왕이 661년(문무왕 원년)에 자신의 외가 15대조인 수로왕(首露王)의 제사를 지내도록 왕위전(王位田)을 지급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1]
- 문무왕은 신라 제30대 왕이다. 태종무열왕과 문명왕후(김유신의 둘째 누이)의 맏아들로, 김(金)이고, 이름은 법민(法敏)이다. 660년에 태종무열왕을 대신하여 현지에서 신라 정예군을 총지휘하여 백제를 정복하였고, 668년에는 고구려를 정복하였으며,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여 한반도 전 지역을 차지하려 했던 당나라의 군대를 나당 전쟁에서 격퇴함으로써 676년에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왕후는 파진찬 김선품의 딸 자의왕후이다. 삼국사기에서는 문무왕의 용모가 영준하며 뛰어났고, 총명하며 지략이 많았다라는 기록했고, 문무왕릉비에서는 문무왕은 생각하심이 깊고 멀었으며, 풍모가 뛰어났고, 도량은 바다와 하천과 같았으며 위엄은 우레와 같았다라고 기록했다.[2]
- 문무왕은 통일신라의 제30대(재위: 661년~681년) 왕이다.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법민(法敏). 태종무열왕의 원자이다. 어머니는 소판(蘇判) 김서현(金舒玄)의 작은 딸이자, 김유신(金庾信)의 누이인 문명왕후(文明王后)이다. 비(妃)는 자의왕후(慈儀王后)로 파진찬(波珍飡) 선품(善品)의 딸이다. 법민은 영특하고 총명해 지략(智略)이 많았다. 진덕여왕 때 고구려와 백제의 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당(唐)나라까지 가서 외교 활동을 하였다. 부왕 태종무열왕 때 파진찬으로서 병부령(兵部令)을 역임했으며 얼마 뒤 태자로 책봉되었다. 660년(태종무열왕 7) 태종무열왕과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연합해 백제를 정벌할 때 법민도 종군해 큰 공을 세웠다. 661년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미처 통일하지 못하고 죽자 법민이 왕위를 계승해 삼국통일의 과업을 완수하였다. 그러므로 문무왕이 재위한 21년 동안은 거의 백제 부흥군, 고구려 그리고 당나라와의 전쟁의 연속이었다. 문무왕은 즉위하던 해인 661년에 옹산성(甕山城)과 우술성(雨述城)에 웅거하던 백제 잔적(殘賊)을 공격해 항복을 받고 그 곳에 웅현성(熊峴城)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663년(문무왕 3) 백제의 거열성(居列城) · 거물성(居勿城) · 사평성(沙平城) · 덕안성(德安城)의 백제 잔적을 정벌하였다. 삼국통일 후 신라 군사 조직의 기간은 신라 민과 피정복 민으로 구성된 중앙의 9서당(誓幢)과 지방의 9주에 설치된 10정(停)이었다. 9서당은 대체로 신문왕 대에 완성되는 것이지만, 9서당 중에서 백금서당(白衿誓幢)은 문무왕이 백제 지역을 온전히 점령한 다음 해인 672년에 백제 민으로써 조직한 것이다. 또 같은 해에 장창당(長槍幢)을 두었는데 이것은 693년(효소왕 2)에 비금서당(緋衿誓幢)이 되었다. 이로써 9서당 편제의 기초는 이미 문무왕 대에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 밖에 672년에 기병을 위주로 하는 지방군제의 하나인 5주서(州誓)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문무왕의 체제 정비 작업은 675년에 백사(百司)와 주군(州郡)의 동인(銅印)을 제작, 반포한 데서 잘 나타난다. 시호는 문무(文武)이며, 장지는 경상북도 경주시 감포(甘浦) 앞바다의 해중왕릉(海中王陵)인 대왕암(大王巖)이다.[3]
문무왕의 생애[편집]
-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은 외모가 영특하고 총명하며 지략이 많았다. 650년(진덕여왕 4)에는 사신으로 당나라로 건너가 당나라 고종(高宗, 재위 649~683)에게 진덕여왕(眞德女王, 재위 647∼654)이 지은 《태평송(太平頌)》을 전했고, 대부경(大府卿)의 지위를 받고 귀국했다. 654년(무열왕 원년) 무열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파진찬(波珍湌)의 지위에 올라 병부령(兵部令)으로 임명되었고, 655년(무열왕 2)에 태자로 봉해졌다. 660년(무열왕 7)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를 공격할 때에는 병선 1백 척을 이끌고 덕물도(德物島, 지금의 덕적도)로 가서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를 맞이했고, 두 나라 군대가 각각 해로와 육로로 진격해 사비성(泗沘城)에서 만나기로 협의했다. 그리고 웅진성(熊津城)에서 백제 의자왕(義慈王, 재위 641~660)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도 공을 세웠다.
- 문무왕은 661년(무열왕 8) 무열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아버지 무열왕의 뜻을 계승해 백제 잔존세력의 저항운동을 진압하고, 668년(문무왕 8)에는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 평양성을 함락시켜 삼한일통(三韓一統)의 대업을 완수했다. 676년(문무왕 16)에는 나당전쟁(羅唐戰爭)에서 승리해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옛 고구려의 남쪽 지방까지 영토를 크게 넓혔다. 그래서 문무왕은 아버지 무열왕과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왕으로 숭배되었다. 《삼국사기》의 '잡지(雜志)'에는 신라의 종묘(宗廟) 제도에 관해 설명하면서 아버지·할아버지와 함께 김씨 왕조의 시조인 미추왕(味鄒王), 무열왕과 문무왕을 5묘(五廟)로 정해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40대 애장왕(哀莊王, 재위 800~809) 때에는 고조부부터의 4대와 시조를 5묘로 정했는데, 그때에도 무열왕과 문무왕의 2묘(二廟)를 별도로 세워 제사 지냈다고 전해진다.
- 문무왕은 661년(문무왕 원년)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백제의 나머지 지역의 평정에 나섰다. 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전해 웅현정(熊峴停)에 주둔하며 옹산성(甕山城)을 점령했고 그곳에 웅현성(熊峴城)을 쌓았다. 662년(문무왕 2)에는 김유신과 김인문(金仁問) 등으로 하여금 평양성 공략에 나선 당나라 군대에 식량을 전하게 했고, 국주(國主) 도동음률(徒冬音律)의 투항을 이끌어내 백제의 속국이던 탐라국(耽羅國, 지금의 제주도)을 복속시켰다. 663년(문무왕 3)에는 백제 지역의 거열성(居列城)·거물성(居勿城)·사평성(沙平城)·덕안성(德安城) 등을 점령했고,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이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扶餘豐)을 왕으로 세우고 웅진성(熊津城)을 포위·공격하자 당나라 군대와 연합해 이를 물리쳤다. 당나라는 손인사(孫仁師)가 이끄는 40만의 병력을 추가로 파병했는데, 신라는 이들과 연합해 임존성(任存城)·두릉윤성(豆陵尹城)·주류성(周留城) 등에서 백제 저항운동을 진압했다. 664년(문무왕 4)에는 일선주(一善州)와 한산주(漢山州)의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의 돌사성(突沙城)을 점령했고, 666년(문무왕 6)에는 당나라에 고구려 정벌을 위한 군사를 요청했다. 고구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동생인 연정토(淵淨土)가 투항해오자 그를 금성(金城)에 살게 했으며, 함께 투항해온 12개 성 가운데 8개 성에 군대를 보내 지키게 했다. 667년(문무왕 7)에는 당나라의 요청에 따라 동생인 김지경(金智鏡)과 김개원(金愷元)을 요동 전투에 참전시켰고, 평양성 공격에 나선 당나라 군대와 합공하기 위해 김유신 등 30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한성정(漢城停)으로 갔다. 문무왕은 장새(獐塞, 지금의 황해도 수안)까지 진군했으나 당나라 군대가 물러났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왔다. 668년(문무왕 8)에는 아마(阿麻)가 복속해왔으며, 연정토를 당나라로 보냈다. 그리고 한성주(漢城州)로 가서 각 주의 총관들에게 당나라 군대와 연합할 것을 지시했고, 마침내 당나라와 함께 평양성을 포위·공격하여 고구려 보장왕(寶臧王, 재위 642~668)의 항복을 받았다.
문무왕의 업적[편집]
- 문무왕은 삼국통일로 넓어진 영토를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의 행정체계의 정비에 나섰다. 661년(문무왕 원년) 감문군(甘文郡, 지금의 김천)을 설치했고, 663년(문무왕 3) 금성 외곽에 부산성(富山城)을 쌓았다. 665년(문무왕 5)에는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歃良州, 지금의 양산)를 설치했고, 667년(문무왕 7)에는 율령(律令)을 담당하는 우리방부(右理方府)를 설치했다. 668년(문무왕 8)에는 함경도 일대에 비열홀주(比列忽州)를 다시 설치하고 파진찬 용문(龍文)을 총관으로 임명했으며, 680년(문무왕 10)에는 촌도전(村徒典)을 설치했다. 671년(문무왕 11)에는 소부리주(所夫里州, 지금의 부여)를 설치하고 아찬 진왕(眞王)을 도독으로 임명했으며, 집사부(執事部)·병부(兵部)·창부(倉部)·승부(乘府)·사정부(司正府)에 사(史)의 직위를 2∼6명씩 증원했다. 병부에는 노사지(弩舍知)와 노당(弩幢)의 직위를 신설했다. 672년(문무왕 12)에는 한산주(漢山州)에 4,360보에 이르는 주장성(晝長城)을 쌓았고, 673년(문무왕 13)에는 서형산성(西兄山城)과 사열산성(沙熱山城)을 증축하고, 북형산성(北兄山城)·소문성(召文城)·이산성(耳山城)·주양성(走壤城)·주잠성(主岑城)·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골쟁현성(骨爭峴城) 등을 쌓았다.
- 문무왕은 673년에 국원소경(國原小京, 지금의 충주)에 둘레가 2,925보에 이르는 성을 쌓았고, 지방관의 비리를 감찰하는 외사정(外司正)을 두었다. 675년(문무왕 15)에는 모든 관청과 주와 군의 인장을 구리로 주조해 나누어 주었고, 함경도의 안북하(安北河)를 따라 관문과 성을 세우고 철관성(鐵關城)을 쌓았다. 그리고 조부(調府)와 예부(禮部), 승부(乘府), 사정부(司正府), 영객부(領客府)에 경(卿)의 직위를 1인씩 추가했다. 677년(문무왕 17)에는 관리들의 녹봉과 녹읍을 관장하는 좌사록관(左司祿館)을 설치했고, 영창궁의 관리를 담당하는 영창궁성전(永昌宮成典)도 설치했다. 678년(문무왕 18)에는 선박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선부(船府)를 설치했으며, 북원소경(北原小京, 지금의 원주)을 설치해 대아찬 오기(吳起)에게 지키게 했다. 679년(문무왕 19)에는 궁궐과 남산성(南山城)을 중축했는데, 이때 동궁(東宮)을 처음 짓고 궁궐 안팎의 모든 문의 이름도 지었다. 680년(문무왕 20)에는 이찬 김군관(金軍官)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했고, 금관소경(金官小京, 지금의 김해)을 설치했다. 681년(문무왕 21)에는 관리들의 녹봉을 담당하는 우사록관(右司祿館)을 만들었다. 이 해에 문무왕은 도읍을 새로 단장하려 했으나 의상(義湘)의 간언을 받아들여 중지했다.
- 문무왕은 삼국통일과 나당전쟁의 과정에서 군사조직도 확충했다. 661년 각 주(州)의 군주(軍主)를 총관(摠管)으로 개칭했고, 671년(문무왕 11) 중당(仲幢)을 창설했다. 672년(문무왕 12)에는 백제 사람들로 백금서당(白衿誓幢)을 만들었고, 뒷날 비금서당(緋衿誓幢)이 되는 장창당(長槍幢)도 창설했다. 청주(菁州)·완산주(完山州)·한산주(漢山州)·우수주(牛首州)·하서주(河西州)의 다섯 주에 오주서(五州誓)를 설치했고, 우수주(지금의 춘천)에는 계당(罽幢)도 설치했다. 그리고 우수주와 내토군(奈吐郡, 지금의 제천)에는 672년에, 내생군(奈生郡, 지금의 영월)에는 676년(문무왕 16)에 삼천당(三千幢)을 설치했다. 675년(문무왕 15)에는 3무당(三武幢)의 하나인 백금무당(白衿武幢)을 창설했고, 676년에는 구칠당(仇七幢)을 만들었다.
- 문무왕은 당나라와의 문화적 교류에 기초해 문물의 정비에 기여했다. 664년(문무왕 4) 부인들도 중국의 의복을 입게 하는 교서를 내렸고, 성천(星川)과 구일(丘日) 등 28명을 웅진부성으로 보내 당나라의 음악을 배우게 했다. 그리고 백성들이 재물과 토지를 함부로 절에 시주하는 것을 금지했다. 665년(문무왕 5)에는 명주와 베 한 필(匹)의 단위를 길이 7보(步), 폭 2자(尺)로 정했다. 674년(문무왕 14)에는 대나마(大奈麻) 덕복전(德福傳)이 당나라에서 역술(曆術)을 배우고 돌아오자 새 역법(曆法)으로 바꾸어 사용했다. 676년(문무왕 16)에는 의상으로 하여금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게 했으며, 679년(문무왕 19)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다.
문무왕릉비[편집]
-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는 신라 문무왕의 능비이다. 신라 30대 문무왕(재위 661∼681)의 무덤이다. 동해안에서 200m 떨어진 바다에 있는 수중릉으로, 신라인들의 창의적인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또한 병부, 창부 등 중앙관청을 창설하였고, 지방통치를 위한 5소경제도와 9서당 10정의 군사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국가 체제 완성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 대왕암은 자연 바위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그 안은 동서남북으로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바닷물은 동쪽에서 들어와 서쪽으로 나가게 만들어 항상 잔잔하게 하였다. 수면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 모양의 돌이 덮여 있는데 이 안에 문무왕의 유골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죽으면서 불교식 장례에 따라 화장하고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아래 동해를 향한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문무왕에 대한 평가[편집]
- 문무왕은 신라의 제30대 임금이자 통일신라의 첫 군주이다. 부친은 제29대 태종 무열왕이고 모친은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명왕후였다. 남동생으로 김인문이 있었고, 여동생 지소부인은 김유신의 부인이었다. 왕비는 자의왕후였다. 또 다른 여동생 김고타소는 김품석의 부인인데, 대야성 전투로 인해 일찍 죽었다. 그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고, 한때 동맹국이었던 당나라와의 총력전까지 승리하여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군주였다. 문무왕은 태자 시절부터 즉위 후까지 문·무 양면에서 활약해서 왕명도 '문무왕'(文武王)이 되었다. 한마디로 화전양면전술의 달인. 거대한 국력을 가진 세계제국 당나라와의 전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화전양면전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문무왕의 뛰어난 지략에 기인한 바가 컸다.
-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완수하였고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의 시대는 굉장히 어려운 축에 속하였다. 백제와 고구려가 망한 후 본격적으로 나당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정면으로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신라와 동맹을 맺고 협동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도 멸망시켰다. 원래는 백제 땅은 신라에게 주기로 한 약속을 무시하고 백제를 본인들이 관리하기 위해 웅진도독부를 설치했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는 고구려 지방을 관리하는 안동도호부도 설치하였다. 심지어 서라벌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계림대도독부의 수장으로 임명할 정도로 신라땅 지배에 노골적인 야심을 드러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신라는 나당전쟁 초반에는 승승장구하였으나 석문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해 공세에서 수세로 몰렸고 전쟁 패배의 압박을 받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유신도 나당전쟁이 끝나기 전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그러나 문무왕은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삼국통일을 완수하고, 외세의 침공을 막아낸 업적으로 현재까지도 신라사 명군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다. 다만 《동국통감》의 평가는 삼한통일을 이룩한 공을 세웠지만 당나라를 배신해 국체를 보존하지 못할 뻔한 왕으로 평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참고자료[편집]
- 〈문무왕〉, 《위키백과》
- 〈문무왕〉, 《나무위키》
- 〈문무왕(文武王,626~681)〉, 《두산백과》
- 〈문무왕(文武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문무왕 설화(文武王 說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리치바이,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의 이야기가 서려 있는 곳, 경주 감은사지〉, 《네이버블로그》, 2024-09-29
- 바다출판사, 〈흉노가 신라의 왕족이었다?〉, 《네이버포스트》, 2024-09-13
- 달뫼, 〈7월 1일 / 신라 문무왕 죽음〉, 《네이버블로그》, 2024-07-01
- 주군, 〈문무왕 업적 삼국을 통일한 왕〉, 《네이버블로그》, 2024-06-10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