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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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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파스트 성
벨파스트 시청
벨파스트 위치

벨파스트(영어: Belfast, 아일랜드어: Béal Feirste)는 영국도시로, 북아일랜드수도이다. 북아일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로 아일랜드섬에서는 더블린 다음으로 크며 영국 내에서는 인구 규모 17위이다. 인구는 35만 명이며 인근 도시권(Belfast Urban area)까지 포함한 인구는 67만 명이다.[1]

개요[편집]

벨파스트는 더블린의 북쪽 145km, 노스 해협(North Channel) 벨파스트만으로 흘러들어가는 래건강 연안에 있다. 벨파스트는 북아일랜드의 동쪽 해안에 자리잡고 있다. 대부분 앤트림주에 속해 있으나 일부 지역은 다운주에 걸쳐 있다. 벨파스트를 가로지르는 래건강 하구가 아일랜드해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벨파스트만과 연결되어 있어 한때 조선업을 위한 이상적인 지역으로 각광받았다. 주변에는 무려 11개의 서로 다른 작은 강들이 있다. 벨파스트는 래건강의 하구에서 만을 형성하고 있으며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원예에 알맞은 기후를 만들어낸다. 도심에 있는 빅토리아 시대 식물원부터 케이브힐컨트리파크, 광활한 래건계곡, 콜린계곡까지 다양한 대공원과 산림공원들이 있다. 퀸스 대학교(Queen's University)의 랜연 빌딩, 리넨홀 도서관 등 벨파스트 공공건물의 건축 양식은 빅토리아 시대부터 조지왕조 시대까지 다양하다. 시청, 워터프런트 홀은 에드워드 7세 시대에 지은 건물이다. 시청은 1888년 빅토리아 여왕에 의해 부여된 벨파스트의 도시 지위를 반영하기 위해 지은 곳으로 1906년에 완공되었다. 벨파스트 시청의 에드워드 건축양식은 인도 캘커타의 빅토리아 기념관과 남아프리카 더반의 시청 청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돔의 높이는 약 53m이며 문 위의 문구는 "히버니아(hibernia, 아일랜드의 라틴 이름)가 도시의 상업과 예술을 장려하고 장려한다"는 의미이다. 벨파스트에는 공원이 40개 넘게 있다. 2007년부터 2011년 사이 관광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공원 중 하나는 퀸즈쿼터에 있는 식물원이다. 연평균 67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한다. 시청 소유인 벨파스트 동물원은 북아일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 명소 중 하나로 연간 295,000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한다. 동물원에는 140종의 동물 1,200여 마리 이상이 서식하고 있다.[2]

지리 및 기후[편집]

벨파스트는 북아일랜드의 동쪽 해안에 자리잡고 있다. 대부분 앤트림주에 속해 있으나 일부지역은 다운주에 걸쳐 있다. 벨파스트를 가로지르는 래건강 하구가 아일랜드해대서양을 연결하는 벨파스트만과 연결되어 있어 한때 조선업을 위한 이상적인 지역으로 각광받았다. 주변에는 무려 11개의 서로 다른 작은 강들이 있다. 북쪽과 북서쪽으로는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나단 스위프트가 영감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디비스마운틴, 블랙마운틴, 카빌을 포함한 언덕들이 있다.

벨파스트는 대다수 아일랜드 지역과 마찬가지로 온화한 해양성 기후로 인해 일년 내내 기온과 강우량의 변화가 적다. 또한 맥시코 만류의 영향으로 비슷한 위도에 있는 다른 지역들에 비해 상당히 온난하다. 벨파스트 만(灣)의 북쪽 해안은 벨파스트에서도 가장 온화한 기후를 가지고 있어 야자나무와 다른 반열대 식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지역 중의 하나이다. 연평균 157일 강수량 1mm 이상의 비가 내린다. 영국 북부나 스코틀랜드 대부분 지역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더블린이나 아일랜드 남동부 해안보다는 잦은 편이다. 반면 눈은 연간 10일 이내 내린다. 북위 55도에 가까이 위치한 곳이라 동지에는 해가 오전 9시 경에 떠서 오후 4시 이전에 해가 진다. 한편 하지에는 밤 10시에 해가 져서 새벽 5시 이전에 뜬다.[3]

역사[편집]

벨파스트에는 BC 2300년 청동기 시대 때부터 정착민들이 있었다. BC 3세기~2세기에 게일 문화의 등장으로 선사시대는 막을 내렸다. 8세기 말 바이킹의 습격과 정착은 광범위한 문화교류와 군사, 교통기술의 혁신을 가져왔다. 12세기 중반 아일랜드는 여러 개로 분할되어 각각의 왕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1166년 렌스터의 왕 디어마이트 맥무로(Diarmait Mac Murchada)가 코노트(Connacht)의 왕 로리 오코너(Ruairí Ó Conchúir)에 의해 밀려나자 자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1169년 영국의 왕 헨리 2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헨리 2세는 자국 내에서 용병을 모집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이를 빌미로 영국은 아일랜드에 개입하기 시작하여 약 800년간 지배하였다. 용병으로 참전한 존 드 쿠시(John de Courcy)가 아일랜드 왕조에 의해 통치되던 아일랜드 북부를 침략하였다. 1177년 두 번의 격전 끝에 벨파스트가 위치해 있는 얼스터 동부를 정복하였다. 이 혼란을 이용해 1241년 이후 오닐 가(Ó Néill lineage dynasty)는 지위를 굳히고 16세기 후반까지 벨파스트를 둘러싼 대부분의 땅을 수중에 넣었다.

17세기에 벨파스트는 아서 치체스터 경(Sir Arthur Chichester)에 의해 도시로 설립되면서 얼스터 플랜테이션(Ulster plantation)의 일환으로 이주한 개신교 영국인들과 스코틀랜드인들의 정착지가 되었다. 소수인 개신교 신자들과 다수인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갈등이 촉발되었고 아일랜드 남부전쟁(Irish Confederate Wars,1641-1652)과 윌리엄파 전쟁(Williamite war,1689-1691)으로 이어졌다. 그 후 정치권력 대부분은 소수 개신교 신자들이 쥐게 되었다. 가톨릭 신자들과 개신교가 아닌 개신교(예:장로교) 신자들은 연방 법에 따라 심각한 정치적, 경제적 억압을 받았다. 18세기 벨파스트는 급진적인 정치의 중심지였다. 프랑스혁명미국 독립전쟁의 영향을 받은 공화주의자들이 아일랜드인 자원군(Irish Volunteers, 1778)과 통일 아일랜드인 연합회(Society of United Irishmen, 1791)를 창설했다. 아일랜드의 종교적 차별 폐지와 독립을 위해 1798년 봉기(Irish Rebellion)를 일으켰지만 실패로 끝이 났다.

공화주의자들의 봉기 이후, 1801년 1월 1일 아일랜드 의회는 폐지되고 연합 법에 의해 아일랜드는 영국의 일부가 되어 직접 통치받기 시작했다. 19세기 벨파스트는 아일랜드 경제를 지배하는 주요 산업 도시가 되었다. 가톨릭 신자들은 일자리를 찾아 개신교 도시인 벨파스트로 대거 이주하였고, 이로 인해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일자리 경쟁이 심화되며 종파 간 긴장을 초래하였다. 1880년대 아일랜드는 의회 헌법 운동을 통해 아일랜드 자치 정부 수립을 위한 가정법(Home Rule)을 제정하려고 시도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중단되었다가 1914년 제정되었다. 영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있는 동안 1916년 아일랜드 공화당은 더블린에서 영국으로부터 독립된 공화국을 설립하기 위한 부활절 봉기(Easter Rising)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이는 1798년 봉기 이후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봉기이자 아일랜드의 첫 번째 무력시위였다.

아일랜드 독립전쟁(irish War of Independence,1919-1921)에서 아일랜드 공화군(Irish Republican Army, IRA)은 아일랜드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영국군과 게릴라전을 펼쳤고, 1922년 32개의 아일랜드 자치주 중 26개 주의 독립을 이끌어 냈다. 1920년 아일랜드 정부법에 따라 아일랜드는 개신교가 지배하는 북아일랜드(얼스터 지방의 6개주)와 가톨릭이 지배하는 나머지 지역으로 분할됐다. 1921년 벨파스트는 북아일랜드의 수도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벨파스트는 독일군의 폭격을 받은 영국의 주요 도시들 중 하나였다. 영국 정부는 벨파스트가 독일군 폭격기의 사정거리 밖에 있는 것으로 여겨 공습에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고, 1941년 4월 15일 벨파스트의 뉴 로지와 앤트림가(街) 일대, 조선소 주변의 노동 계급 지역이 야간 공습을 당했다. 이 폭격으로 약 1,000여 명이 사망했다. 아이러니 하게 전쟁기간 중공업과 항공우주 산업 생산품의 수요 증가로 벨파스트 경제는 회복되었다.

아일랜드 분할 통치 이후 쌓여온 북아일랜드 내부의 오랜 갈등이 1960년대 후반 폭발하였다. 신 · 구교도들 사이의 치열한 대립이 이어지자 이에 영국 정부는 1969년 군대를 동원해 벨파스트를 개신교와 가톡릭 등 구교도들의 거주 지역을 분리시켰다. 종파 간 날카로운 대립은 계속되었다. 1972년 1월 30일 북아일랜드 제2의 도시 런던데리에서 벌어진 시위를 진압하던 영국군 공수부대가 시민에게 발포하여 14명이 숨지는 '피의 일요일'사태가 발생하였다. 1972년 6월말 윌리엄 화이트로가 이끄는 영국정부 대표단은 IRA 임시 대표단과 비밀 회담을 가졌다. IRA 대표단은 북아일랜드에서 영국군의 철수와 공화군 포로석방을 요구했으나 영국은 거절했다. 회담의 결렬로 IRA는 벨파스트 도심에서 폭탄 22개를 터뜨려 9명을 숨지게 하는 '피의 금요일'을 일으켰다.

1980년대 초 정치적 폭력에 의한 유럽 제조업의 쇠퇴는 도시 경제를 황폐화시켰다. 이 기간을 북아일랜드 분쟁(The troubles) 기간이라 일컫는다. 분쟁 기간동안의 정치적 이견을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1998년 4월 벨파스트 협정(Belfast Agreement)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으로 영국과 아일랜드 정부 모두 수감 중인 포로들을 석방을 약속했고, 2005년 아일랜드 공화군의 공식적인 해체를 발표했다.[4]

관광[편집]

벨파스트의 대표적인 볼거리로는 벨파스트 시청과, 근처의 퀸스 대학교 벨파스트와 캠퍼스 내부의 식물원과 얼스터 박물관이 있다. 시청 바로 앞 관광정보센터에서는 언제든지 표를 사서 북아일랜드 관광버스를 타고 북아일랜드의 대표 명소인 자이언트 커즈웨이, 부쉬밀 위스키 증류소 등등을 하루 코스로 둘러볼 수 있다. 특히 이 코스엔 왕좌의 게임을 촬영한 세트와 장소들이 있고, 아예 왕좌의 게임 관광 버스도 있다.

도시의 가장 큰 건물 중에는 과거 은행이었던 건물이 두 개 있다. 워링 거리에 있는 얼스터 은행(1860년 준공)과 도니골 거리 근처에 있는 노던 은행(1769년)이다. 치체스터 거리에 있는 왕실 법원은 북아일랜드의 대법원이 있는 곳이다. 가장 오래된 건물들은 대부분 벨파스트에 있고, 이 지역은 주요 문화와 관광 지역으로 개발 중이다. 높이 80m인 윈저 하우스는 23층이며 아일랜드에서 두 번째로 높은 빌딩이다. 할랜드 앤 울프 조선소가 갖고 있는 유럽에서 가장 큰 두 곳의 선박 건조 도크에는 '삼손과 골리앗'이라 불리는 거대한 크레인이 있다. 벨파스트에는 워터프런트 홀과 오디세이 아레나를 포함한 예술 공연장이 몇 군데 있다.

그랜드 오페라 하우스의 건축은 동양적인 양식으로 지어졌고 1895년에 완성되었다. 이 건축물은 북아일랜드 분쟁 시기에 여러 번 폭격을 당했지만 지금은 옛 영광을 되찾았다. 리릭 극장은 영국에서 유일한 풀타임 제작 극장으로, 영화배우 리암 니슨이 데뷔한 무대이다. 얼스터 홀은 원래 웅장한 춤을 추기 위해 설계되었으나 지금은 주로 콘서트와 스포츠 경기장으로 사용된다.[5]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벨파스트〉, 《위키백과》
  2. 벨파스트〉, 《나무위키》
  3. 벨파스트(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4. 벨파스트〉, 《요다위키》
  5. 벨파스트(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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