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제
강희제(康熙帝)는 중국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이다.
개요[편집]
강희제는(재위 1661∼1722)는 중국 역대 황제 중 재위 기간이 가장 길다. 삼번의 난을 평정한 뒤 국가는 재정적, 내정적으로 안정되었다. 외정적으로는 중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강희제는 청나라의 정치를 안정시키며 태평성대를 이루는데 기초를 다진 황제로 평가된다. 아들 옹정제와 손자 건륭제까지 청나라의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재위 61년 동안 백성들에게 성군으로 불리었다. 특히 중국대륙의 이민족들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만주족과 한족의 동화를 위해 노력했다.
강희제는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로 스스로 모범을 보이며 항상 공익을 우선하였으나 후계자인 황세자 윤잉과 갈등을 빚어 역모사건이 일어나는 등 가족관계에서 문제점이 드러나기도 했다. 해마다 범람하여 자연재해가 심했던 장강과 황하의 재방을 쌓아 방지했으며 외교적으로는 대만과 몽골을 정복하고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북방의 경계를 안정화시켰다.[1]
강희제의 가계[편집]
강희제(1654년 5월 4일 ~ 1722년 12월 20일)는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한 직후 청 제국이 산해관을 넘은 뒤 자금성에서 청 제국의 군주가 천명을 상실한 명나라의 주씨를 대신하여 중국의 새로운 수명천자(受命天子)가 되었음을 선언한 이래 두 번째 황제이다. 청 제국의 제3대 황제인 순치제의 셋째 아들인 그는 순치제의 후궁 출신인 효강장황후 퉁갸씨(孝康章皇后 佟佳氏)의 소생으로서 자금성에서 태어난 첫 청 제국 군주이기도 하다.
1661년(순치 18년) 부친인 순치제가 천연두로 붕어하자,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로 즉위하여 1722년(강희 61년)까지 61년간 재위함으로써 청나라 역사상 가장 긴 재위 기간을 가진 황제이다. 강희제는 60년간의 통치를 통해 청 제국의 성장과 안정에 비범한 개인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청 제국을 근세(근대 초기)의 제국들 가운데 가장 큰 국가로 만든 것은 대체로 그의 굉장한 지적 능력, 정치적 직감, 체력 덕댁이었다고 평가된다. 또한, 황후 4명 등 총 64명의 후비(后妃)와 잉첩(媵妾)을 거느려서 청 제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후궁을 둔 황제이며 아들 35명과 딸 20명을 두어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자식들을 둔 황제이기도 하다.
강희제에 대한 평가[편집]
강희제의 이름은 애신각라현엽(玄燁/玄曄)이며 순치제(順治帝)의 셋째 아들이자 숭덕제(崇德帝) 홍타이지의 손자로 출생하였다. 7살에 순치제에 의해 황태자로 지명되었으며 순치제가 갑자기 사망하자 어린 나이인 8세 때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14세 때 친정을 시작하였는데, 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 재위 기간이 61년으로 가장 길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을 깨치는 속도가 빨랐으며 청나라의 중국 대륙 지배는 그의 재위 기간에 완성되었다. 이후 아들 옹정제(雍正帝) 손자 건륭제(乾隆帝)로 계승되어 청나라 전성기를 이루었다. 즉위 초에는 아버지의 유조(遺詔)로 4명의 신하가 만주 기인(旗人)이 보정대신(輔政大臣)이 되어 집정(執政)의 임무를 맡았다. 그동안 정무의 혼란을 가져온 환관들을 모두 없애고 안정을 꾀했으나 보정대신 중 오배의 권력이 막강해져 그를 처형하고 난 1669년부터 실질적인 친정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강희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강희제의 훌륭한 정치는 후대에게도 큰 본보기가 되었다. 아들인 옹정제는 부황 강희제가 이룩한 태평성대에서 내치를 더욱 다져서 청나라를 안정시켰으며, 강희제의 손자이자 옹정제의 아들인 건륭제는 조부인 강희제처럼 내정에 신경을 썼지만 역시 외정에도 적극적이어서 위구르와 준가르를 완전히 복속시켰다. 강희제에서 건륭제에 이르는 이 시기를 흔히 강건성세라 한다. 건륭제는 강희제를 평생 모범으로 삼고 감히 조부를 뛰어넘을 수 없다 하여 강희제의 재위 기간인 61년보다 적은 재위 60년 만에 퇴위를 하였다.
강희제의 정치는 백성들을 중심으로 그에 맞는 정치를 펼치면 역사 또한 그를 성군으로 평가하게 되는 좋은 예였다. 강희제의 붕어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당시 많은 백성들과 대신들이 부음을 접하자마자 바로 무릎을 꿇고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였다 하는데, 이것도 바로 그가 성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정책 역시 강건성세 시기에는 대체로 변하지 않았으나, 점차 해외 열강들이 청나라의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강희제가 추진하고 이룩한 정책들은 결국 폐기되었다.
청나라 이전에 한족을 제외한 다른 유목 민족들이 중국을 통치할 때, 그들은 언제나 백성들에게 폭압을 가하였으나, 강희제는 오히려 방법을 달리하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보다는 공익이 먼저였고 자신의 재위 기간인 61년간의 기나긴 희생으로 당시 백성들의 삶은 그 뒤로 70여 년간 윤택해지고 안정되었다. 강희제는 당시 아직까지 중국 곳곳에서 반대가 심하였던 만주족의 황조를 굳건히 다졌고 만주족들에게 한족의 문화를 대거 소개함으로써 만주족의 지식과 예절 수준을 높였으나, 훗날 만주족들은 너무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어 자신의 정체성과 전통을 거의 잃어버리고 만다.
청나라 멸망 때에는 강희제의 동화 정책 때문이었는지, 만주어를 잘 아는 만주인은 흔치 않았다 한다. 그는 평생 배움에 뜻을 두어 학식 역시 뛰어났다. 명나라의 역사서인 《명사》를 편찬하여 명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하였으며, 오배와 오삼계 등의 내부의 반대자를 처단하고 황제권을 강화하여 자신의 오랜 재위 기간 동안 신하들이 함부로 넘보지 못할 절대 황제권을 확립하였다.
강희제는 황하와 장강을 보수하여 근처 백성들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당시까지도 이 두 강은 여름에 계속 범람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 그러나 재빨리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한 후 완성시키자 한 해에 범람 횟수가 아예 없거나 그전에 비하여 현저히 줄어들었다. 또한 강희제는 자금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중국 곳곳을 돌아다니고 장강 이남으로 순행을 많이 떠나 북방과 남방의 교류를 활발히 만들었으며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청나라의 동북방에 있던 소요를 잠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강희제는 자신이 실정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겸허히 수렴하여 즉시 시행하였고 황제로서의 책임을 솔선수범하여 군주의 모범을 보였다.
유교의 장려와 서양문물 유입[편집]
국내외 정치에서의 성공은 문화에도 반영되었는데 강희제는 통치철학으로 유교를 장려했다. 강희제 자신 또한 학문을 좋아했기 때문에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한족의 문화를 만주족에게도 주입하여 만주족과 한족의 융화를 꾀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중국 최대의 유서(類書)인 《고금도서집성》의 편찬과 1711년 한자사전인 《강희자전》 42권 출판을 비롯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 하지만 만주족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쓴 한족 학자들은 잔인하게 처형하기도 하였다.
당시 청나라에 들어온 가톨릭 예수회 선교사들을 면담했으며 청나라에서 이교인 가톨릭 포교를 허락하였다. 이들이 가져온 서양문물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들로부터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도입하도록 명령하였으며, 중국에서 처음으로 위도(緯度)를 적은 정밀한 지도인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를 작성시키는 등 과학문화발전에도 기여하였다. 하지만 1704년 교황 클리멘스 11세 때 조상에 대한 숭배를 금지하자 선교사들을 추방하기도 하였다.
정치활동[편집]
명(明)나라의 마지막 세력이었던 계왕(桂王)은 이미 멸망하고, 대만을 거점으로 한 호족이자 반청세력이었던 정성공(鄭成功)도 사망하여 만주족의 중국의 지배가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평정(平定)을 맡았던 윈난(雲南)의 평서왕(平西王) 오삼계(吳三桂), 광둥(廣東)의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푸젠(福建)의 정남왕(靖南王) 경계무(耿繼茂)와 그 아들 정충(情忠)의 삼번왕(三藩王)은 강력한 군사력과 함께 독립정권을 유지하며 청나라를 위협하였다.
1673년 평남왕의 철번(撤藩)을 계기로 삼번의 난이 일어나 오삼계는 스스로 황제로 자처하며 주나라를 세웠지만 그해 노환으로 사망하자 강희제는 단호한 태도로 이에 대처하여 곤명을 함락시키고 1681년 이들을 평정하는데 성공하였으며, 대만의 정씨(鄭氏)도 내분으로 1683년에 멸망함으로써 마침내 청나라의 중국대륙 지배는 완성되었다. 삼번의 난을 평정한 후에는 이에 소비되던 방대한 비용이 필요 없게 되자 국가재정은 여유가 생겨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50년간의 면세 총액이 1억 냥(兩)을 넘었으며, 1712년에는 인두세(人頭稅)를 정액화하고, 조운(漕運)을 정비하며, 황허강[黃河江]의 치수(治水)에 힘쓰는 등 내정상으로도 안정된 시대를 이루었다.
강희제의 자녀 교육[편집]
청나라 황제 강희제(1654~1722년)는 중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하나로 꼽힌다. 중국 역사상 최장기간 황위에 있었던 강희제는 지칠 줄 모르는 일꾼, 발명가이자 백성을 귀히 여긴 문필가였다. 그의 통치하에 중국은 번영했고 제국은 태평성대를 누렸다. 강희제는 또한 황후들과 후궁들 사이에서 56명의 자녀를 두었다. 교육을 매우 중시해서 그 많은 자녀와 손주들을 올바르게 길러내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강희제는 자녀들을 엄격하게 훈육하며 '쉼 없는 방'이라는 뜻의 교실 무일재(無逸齋)에서 수업하도록 했다. 낮이 긴 여름이면 아침 5시에 수업이 시작된다. 먼저 선생님들이 도착해 숙제를 검사하고 아침 7시까지 수업을 계속한다. 이때쯤 진즉에 일어나 이미 서너 시간 국사를 본 강희제가 무일재로 건너간다. 강희제는 자녀들이 외우고 있던 책에서 한 구절을 무작위로 골라 암송을 시키곤 했다. 완벽히 외우도록 요구하였다. 아침 9시가 되면 강희제는 국정을 수행하기 위해 자리를 떴고 아이들은 점심시간까지 붓글씨를 연습했다. 점심식사 후에는 마당에서 말타기와 활쏘기를 배웠다.
아주 바쁜 날에도 강희제는 오후 5시에 돌아와 자녀들이 활 쏘는 모습을 한 명 한 명 지켜보곤 했다. 직접 아이들과 함께 과녁을 맞히기도 했다. 실제 시범을 보여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자녀들을 사냥, 국사 시찰, 심지어 전쟁터에까지 데리고 나갔다. 강희제는 실제 해보는 경험이 교실에서 배우는 이론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강희제는 황자들뿐 아니라 제국 전체를 위해 교육이 중요하다고 확고히 믿는 교육 신봉자였다. 사전과 백과사전을 편찬토록 했고, 그 스스로도 서양인 개인 교사까지 두고 평생학습을 실천했다. 자녀들로선 엄격한 훈육이 항상 달갑지만은 않았겠지만, 훗날 자라서 매우 훌륭한 인재들이 되었다. 중국 마지막 제국의 최고 전성기에 황제, 정치가, 학자, 과학자, 예술가 등으로 활동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강희제(康熙帝,1654.5.4.~1722.12.20)〉, 《두산백과》
참고자료[편집]
- 〈강희제(康熙帝,1654.5.4.~1722.12.20)〉, 《두산백과》
- 〈강희제〉, 《나무위키》
- 중화TV, 〈<강희암행록> 청나라를 62년간 통치했던 '강희제'가 주인공인 드라마〉, 《네이버블로그》, 2024-04-04
- 내일에듀, 〈(청나라의 전성기) 강희제, 백성들의 편에 서서 정치를 하다〉, 《네이버포스트》, 2021-09-06
- 쎄굴라, 〈청나라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황제〉, 《네이버블로그》, 2024-01-31
- 민앤차이나, 〈강희제가 술 담배를 끊게 된 계기〉, 《네이버블로그》, 2024-02-12
- 〈강희제〉, 《위키백과》
- 〈강희제의 가족〉, 《위키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