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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B%AC%BC 유물]〉, 《위키백과》 | * 〈[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B%AC%BC 유물]〉, 《위키백과》 |
2023년 6월 12일 (월) 14:17 판
유물(遺物, Relic)은 과거 인류의 잔존물로, 유적에 비해 작고, 운반이 가능한 것들을 일컫는다. 유물은 조상들이 남긴 공예품이나 서적 등으로, 선사시대의 청동거울이나 조선 시대의 도자기와 같은 것들을 말한다. 유적은 유물과 혼동되는 용어 중 하나인데, 이는 조상들이 남긴 건물이나 건축물 등을 가리킨다. 국보 1호인 숭례문이나 보물 1호인 흥인지문이 유적에 속한다. 문화재는 유물과 유적 중에 역사적 가치나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것으로 판단되어 지정된 것이며, 개인 등이 가진 유물이나 유적은 역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가치가 인정되면 절차에 따라 문화재로 지정되게 된다. 따라서 모든 유물이나 유적을 문화재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문화재에는 유물과 유적만 있는 것은 아니며,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탈춤이나 판소리 등도 그 가치를 인정받으면 문화재로 지정되게 된다.
유물은 도구나 예술 작품, 특히 고고학적 관심 대상과 같이 인간이 만들거나 모양을 부여한 항목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이다. 고고학에서 이 단어는 특정 뉘앙스의 용어가 되었으며 고고학적 노력에 의해 회수된 대상으로 정의되며 문화적 관심을 갖는 문화적 유물일 수 있다.
유물은 고고학에서 사용되는 일반적인 용어인 반면, 박물관에서는 이와 동등한 일반 용어가 일반적으로 "오브젝트"(object)이고 미술사에서는 예술품 또는 "조각"과 같은 보다 구체적인 용어이다. 동일한 항목이 다른 맥락에서 모두 또는 이들 중 일부로 불릴 수 있으며 개별 개체 또는 유사한 개체 그룹에 대해 이야기할 때 더 구체적인 용어가 사용된다.
유물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며 때로는 생태 사실 및 기능과 혼동될 수 있다. 이 세 가지 모두는 때때로 고고학 유적지에서 함께 발견될 수 있다.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작동하는 프로세스에 따라 다양한 유형의 컨텍스트에 존재할 수 있다. 유물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다양한 분석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과학적 고고학을 통한 유물 분석 과정은 유물의 약탈과 수집에 의해 방해를 받을 수 있어 윤리적 논쟁을 촉발시킨다.
개요
유물은 인간의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움직일 수 있는 잔존물이다. 유물은 과거의 인간들이 살아나가면서 필요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도구로서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얻어지며 이를 연구실로 옮겨 복원·정리된다. 유물은 재질에 따라 석기·토기·골기·목기·청동기·철기 등으로, 기능에 따라 가락바퀴·그물추·칼·화살촉·창·검·방울 등으로, 그리고 제작방법이나 형태 등에 의해서도 나누어진다. 유물의 연구는 형식분류, 과학적 분석 등을 통해 각각의 기능과 성격이 파악되며 이를 다른 지역과 비교함으로써 각 지역별 문화적 특성을 알 수 있다.
유물에는 당시의 도구로 사용된 인공유물(人工遺物, artifact) 이외에도 자연유물(自然遺物, ecofact)이 있다. 자연유물은 인간의 활동에 의해 직접 만들어지거나 변형되지 않았지만 과거 인간들의 활동에 관한 많은 지식을 제공한다. 자연유물에는 동물뼈·조개류와 같은 동물자료, 화분·씨앗 등의 식물자료, 그리고 토양과 같은 지질학적 자료 등이 있어 이들의 분석을 통해 과거의 환경, 식생, 자원 등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인공유물과 자연유물의 구분이 애매한 경우가 있다. 즉 주거지 내에서 발견된 변형된 동물뼈(뒤지게, 골화살촉 등)가 있는데 이는 양쪽에 모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고고학이 성립될 당시에는 유물을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으나 지금은 유물뿐만 아니라 유구, 유적 등 고고학적 자료들 모두가 중요시되고 있어 그 비중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에게는 여전히 유물이 귀중한 연구대상이다.
유물의 발굴
뉴스나 신문을 보면 '백제시대 유물 발굴'과 같은 기사를 가끔 볼 수 있다. 이처럼 유물이나 유적은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발굴되기도 하고, 원래에 있던 문화재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굴되기도 한다. 여기서 발굴은 땅 속이나 흙더미, 돌더미 등에 파묻힌 것을 찾아서 파낸다는 뜻이며, 체계적인 과정과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유물 발굴지인 서울의 풍납동 토성은 초기 백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인데, 1925년 한국에 있었던 대홍수로 그 모습을 세상에 처음 알렸다. 그러나 초기에는 체계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후 1997년 아파트를 건설하기 위해 땅을 파면서 그 안에 있던 유적과 유물이 모습을 드러내자 건설이 중단되고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발굴은 길게는 몇 년에 걸쳐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조심스럽게 땅을 파헤쳐, 유물이나 유적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호미나 붓 같은 작은 도구들로 섬세히 작업한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추후 연구에 어려움이 없도록 사진과 동영상, 발굴일지에 하나하나 기록하게 되며, 최대한 원래의 모습 그대로 발굴하고, 발굴한 유물은 다시 연구실 등으로 옮겨져 체계적인 연구와 분석을 진행하게 된다. 이후에도 더 연구할 수 있거나 보존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발굴 현장은 최대한 원래 모습이 훼손되지 않게 보호하며, 사정이 있어 현장을 보존할 수 없는 경우는 발굴할 때의 사진과 기록 등을 참고하여 원래 모습에 가깝게 보존하면서 이동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유적이나 유물의 발굴이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유적이나 유물이 묻힌 곳은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전이었기 때문에 유적이나 유물의 발굴은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
풍납동 토성의 경우 발굴과정에서 발굴단과 지역 주민 사이에 마찰이 있기도 하였으며, 경주에서는 자신 소유의 땅이어도 마음대로 집을 짓거나 개발하는데 제한이 있어 땅 주인들이 불만을 품기도 했다. 이렇게 유적이나 유물의 발굴은 지역 주민이나 그 지역, 국가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양보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체계적인 문화재 발굴, 보존 원칙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다.[1]
고구려 유물
유물이 출토되는 고구려의 고분은 구조상 도굴이 쉬운 탓에 많은 유물이 남아있지 않으며, 일제 강점기 동안에는 발굴을 명분으로 많은 유적이 파괴됐다. 고구려 유물은 다양한 종류의 금동공예품과 토기를 비롯한 기와·벽돌 등 소조품, 각종 철기 및 청동기 등으로 나눠볼 수 있다.
토기는 고구려 유물 중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데, 시간적·공간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고구려 토기는 바닥이 납작한 평저기(平底器)가 많고, 고운 점토로 된 니질(泥質) 태토가 많으며, 표면색조는 황색·흑색·회색이 주를 이룬다.
철기는 무기류와 마구류, 농공구류 및 용기류로 구분되는데 각각의 기능에 따라 서로 다른 재질의 철기를 사용하였으며, 제작 기법도 다양하다. 철제 무기와 마구의 발달은 전력의 향상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기병전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금동공예의 대표적인 것으로 금동관(金銅冠) 및 관장식을 들 수 있다. 불꽃무늬맞새김금동관(火焰文透彫金銅冠)은 인동(忍冬)무늬를 맞새김한 테두리 위에 아홉 개의 불꽃무늬를 세워 장식하였으며, 테두리의 양쪽에는 옷고름과 같은 모양의 드리개 장식을 두 개 늘어뜨렸다.
고구려의 불상은 5~6점에 불과하지만 제작 연대와 제작 동기 등을 기록한 명문이 남아있는 예가 많아 중요하다.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보다 먼저 기와를 사용하였는데, 국내성(國內城) 도읍기에 이미 기와제작기술을 받아들여 기와를 얹은 목조건물을 축조했다. 기와의 종류는 암키와, 수키와, 그리고 막새기와(瓦當)·반쪽막새기와(半瓦當)·치미기와(鴟尾) 등 다양하다.[2]
동영상
각주
- ↑ 대한민국 교육부, 〈유물, 유적의 발굴〉, 《티스토리》, 2015-08-05
- ↑ 〈고구려 유물〉,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04-09-01
참고자료
- 〈유물〉, 《위키백과》
- 〈유물〉, 《고고학사전》
- 대한민국 교육부, 〈유물, 유적의 발굴〉, 《티스토리》, 2015-08-05
- 〈고구려 유물〉,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04-09-01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