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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許筠)은 조선시대 첨지중추부사, 형조참의, 좌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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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許筠)은 조선시대 첨지중추부사, 형조참의, 좌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문인이다. 조선 시대 여류 작가인 [[허난설헌]]의 남동생이다.
  
 
== 개요 ==
 
== 개요 ==

2024년 11월 20일 (수) 13:17 기준 최신판

허균

허균(許筠)은 조선시대 첨지중추부사, 형조참의, 좌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문인이다. 조선 시대 여류 작가인 허난설헌의 남동생이다.

개요[편집]

허균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이다. 벼슬이 좌참찬에 이르렀다. 소설 《홍길동전》의 작가이다.

허균은 자신의 문집에서 〈관론(官論)〉, 〈정론(政論)〉, 〈병론(兵論)〉, 〈유재론(遺才論)〉등을 통해 민본사상과 국방 강화 정책 추진, 신분계급의 타파와 평등한 인재등용과 붕당배척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적서차별의 부당함과 부패관료를 규탄하는 글을 여러 편 남겨 사회비판적인 의식을 보여주었다. 그는 학론(學論)·정론(政論)·유재론(遺才論)·호민론(豪民論)의 논설을 통해 당시 정부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허균의 생애[편집]

허균(1569년 ~ 1618년)은 허균은 1569년(선조 3년) 음력 11월 3일에 강릉 초당동에서 군수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낸 초당(草堂) 허엽(許曄)과 둘째 부인인 강릉 김씨 예조참판 김광철(金光轍)의 딸 사이에서 삼남 삼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580년(선조 13) 12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했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배웠다.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 배웠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蓀谷里)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다.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허균은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지어 그를 기렸다.

허균은 26세 때인 1594년(선조 27)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지냈다. 1597년(선조 30)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을 했다. 이듬해에 황해도도사(都事)가 되었으나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했다는 탄핵을 받고 부임한지 6달 만에 파직됐다. 그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 형조정랑을 지냈다. 1602년(선조 35) 사예(司藝) ·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했다. 이 해에 원접사 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했다. 1604년(선조 37)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했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허균은 1606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됐다. 그러나 세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했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뒤에 공주목사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다. 또다시 파직 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다.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허균은 1609년(광해군 1)에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에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됐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됐다. 1610년(광해군 2)에 전시(殿試)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됐다. 그 뒤에 몇 년간은 태인(泰仁)에 은거했다. 허균은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徐羊甲) · 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해 대북(大北)에 참여했다.

1614년에 천추사(千秋使)가 돼 중국에 다녀왔다. 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에 『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해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허균은 1617년(광해군 9) 좌참찬이 됐다.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졌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됐다. 그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리니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했다. 1618년(광해군 10)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 났다.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허균에 대한 평가는 상반된다. 한편에서는 총명하고 영민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그 사람됨에 대해서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 보면 몇 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러한 부정적 견해를 대변해 주고 있다.

허균의 사상[편집]

허균은 국문학사에서는 한국 최초의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작가로 인정되고 있다. 한때 이론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그보다 18년 아래인 이식(李植)이 지은 『택당집(澤堂集)』의 기록을 뒤엎을 만한 근거가 없는 이상 그를 「홍길동전」의 작가로 보고 있다. 그의 생애와 그의 논설 「호민론(豪民論)」에 나타난 사상을 연결시켜 보면 그 구체적인 형상화가 홍길동으로 나타났다고 보아도 된다.

허균의 문집에 실린 「관론(官論)」 · 「정론(政論)」 · 「병론(兵論)」 · 「유재론(遺才論)」 등에서 민본사상과 국방정책과 신분계급의 타파 및 인재등용과 붕당배척의 이론을 전개했다. 내정개혁을 주장한 그의 이론은 원시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것으로 백성들의 복리증진을 정치의 최종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 · 도교에 대해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했다고 술회를 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시와 친구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밝히고 있다. 허균은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그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냈다. 은둔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쓴 「한정록(閑情錄)」이 있어 그의 그러한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허균 자신이 서학(西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없으나 몇몇 기록에 의하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학문을 했다고 한다. 이 점은 그가 새로운 문물과 서학의 이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허균은 예교(禮敎)에만 얽매어 있던 당시 선비사회에서 보면 이단시할 만큼 다각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인물이며, 편협한 자기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핍박받는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와 학문에 대한 입장을 피력해 나간 시대의 선각자였다.

허균·허난설헌 시비공원[편집]

허균·허난설헌 시비공원은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초당동에 있는 시비(詩碑)공원이다.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초당동에 있는 시비(詩碑)공원으로 1998년에 개관하였다. 공원은 강릉 출생의 대표적인 문인인 허균(許筠)과 허난설헌(許蘭雪軒)을 비롯한 허씨 5문장가의 예술혼을 기리고 시민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공원 부지는 강릉시 초당동의 허균 생가 일대이며, 허엽시비, 허성시비, 허봉시비, 허균시비, 허난설헌시비 등을 세우고 시민 모두가 자연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문화산책로로 조성하였다.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편집]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은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에 초당동에 위치한 공원으로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난설헌로 193번길 1-29(초당동 477)에 위치한다. 조선 중기 한국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교산(蛟山) 허균(許筠)과 조선, 중국일본에서도 천재성을 인정받았던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두 남매를 기리기 위한 공원이다. 2007년 2월 1일 개관하였다. 공원 안으로 허난설헌 생가터와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 전통차 체험관, 허난설헌 동상, 허씨5문장 시비 등이 있다.

허균의 작품[편집]

허균은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를 자신이 편찬해 죽기 전에 외손에게 전했다. 그 부록에 「한정록」이 있다. 그가 25살 때에 쓴 시평론집 『학산초담(鶴山樵談)』은 『성소부부고』에 함께 실려 있는 「성수시화(惺叟詩話)」와 함께 그의 시비평 안목을 보여 주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시를 보는 그의 감식안은 시선집 『국조시산(國朝詩刪)』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허균의 저서 『국조시산』에 덧붙여 자신의 가문에서 여섯 사람의 시를 뽑아 모은 『허문세고(許門世藁)』가 전한다. 이 밖에 『고시선(古詩選)』 · 『당시선(唐詩選)』 · 『송오가시초(宋五家詩抄)』 · 『명사가시선(明四家詩選)』 · 『사체성당(四體盛唐)』 등의 시선집이 있었으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임진왜란의 사실을 적은 「동정록(東征錄)」은 『선조실록』 편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하지만 역시 현재에 전하지 않는다. 저술했다는 기록만 있고 현재 전하지 않는 저작으로 「계축남유초(癸丑南遊草)」 · 「을병조천록(乙丙朝天錄)」 · 「서변비로고(西邊備虜考)」 · 「한년참기(旱年讖記)」 등이 있다.[1]

강릉 초당동 고택[편집]

강릉 초당동 고택은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초당동에 있는 고가이다. 1985년 1월 17일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신 허엽(許曄)이 살았고, 그의 딸 허난설헌(許蘭雪軒)이 태어난 집이다. 집의 구조는 ㅁ자형의 본채와 一자형의 행랑채로 구분된다. 본채는 화강암을 잘 다듬은 장대석을 사용하여 기단을 쌓았다. 대문을 사이에 두고 안채와 사랑채로 나뉘며, 그 사이에 광이 있다.

사랑채는 기와로 된 팔작지붕으로 이어져 있고, 전면에 툇마루, 오른쪽에 대청 2칸이 있다. 사랑채의 왼쪽 끝 상노인방은 안채 출입문간으로도 드나들 수 있다. 창호로 둘러싸인 사랑 대청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고 윗부분의 판대공(板臺工)과 대들보는 퇴간만큼 앞쪽으로 돌출되어 구조적인 미를 풍기고 있다. 잘 다듬어진 정원이 앞에 있고, 그 앞으로 공간을 구분하는 담과 협문이 있다.

행랑채는 기와로 된 팔작지붕의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하여 오른쪽으로 3칸 크기의 광이 있고, 왼쪽으로는 행랑방과 마구간이 있다. 솟을대문은 사랑채를 출입하는 남자들이 주로 사용하며, 옆면의 협문은 안채로 출입하는 여자들이 사용하였다. 이때의 시선 차단을 위하여 출입 통로를 따라 담을 쌓았다.

후원이 잘 꾸며져 있어 한국의 아름다운 정원 풍경을 볼 수 있다. 집 주위로 담이 둘러싸여 있고, 집 바깥에는 초가로 된 디딜방앗간이 한 채 있다.

강릉 교산 시비[편집]

강릉 교산 시비는 조선 중기 문신 겸 소설가 허균(許筠)의 시비로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에 있다. 조선중기 문신 겸 소설가 허균(許筠)의 시비로 1983년 8월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를 중심으로 건립하였다.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 2리 하평마을의 교산 언덕에 있다. 비두(碑頭)와 비신(碑身)은 흑요암으로 만들었고, 비좌(碑座)는 대리석을 사용하였다.

전체 높이는 2m이고, 비신은 높이 130cm, 두께 30cm, 너비 70cm,의 크기이다. 전면에는 허균의 한시 누실명(陋室銘)을 김동욱이 번역하여 새겼다. 뒷면에는 소재영이 지었고, 정양완이 글씨를 쓴 약전과 취지문이 새겨져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허균(許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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