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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이봉창(李奉昌)은 일제강점기 때, 한인애국단에서 일왕 투탄 의거를 시도한 독립운동가이다.

개요[편집]

  • 이봉창은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등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다.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된 후 사형당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봉창은 1901년 8월 10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용산 문창(文昌)보통학교를 졸업,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자점 점원으로 있다가, 1918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 기차운전견습생으로 들어갔으나, 1924년 9월 용산 일대에서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하여 간사로 있으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형 범태(範泰)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에서 철공소 직공으로 일하다가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이름으로 도쿄(東京)·오사카 등지를 전전하였다. 1931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구(金九)의 지시를 받고 일본 왕 히로히토(裕仁)를 암살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기에는 양이섭(梁履涉)과 이춘태(李春泰)도 연루되어 있었다. 1932년 1월 8일 일본 왕이 만주국 푸이(溥儀)와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관병식(觀兵式)을 마치고 돌아갈 때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히로히토를 향하여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1932년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1]
  • 이봉창의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이진구(李鎭球)이다. 서울 출신이다. 천도교가 세운 서울 용산 문창보통학교(文昌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한학 공부를 하다 1913년 일본인 과자점의 점원으로 들어갔다. 일제의 침략으로 한민족의 생계가 위협받는다는 생각에 방랑 생활보다는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 1930년 12월 중국 상해로 갔다. 1931년 1월 한국인 거류민단 사무실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호소했으나 민단 간부들이 이봉창의 거동을 수상하게 여겨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뒤 김구(金九)가 이봉창의 진의를 알고 자신이 조직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시켜, 이봉창의 소신대로 일본천황폭살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거사 자금이 여의치 못해, 월급 80원을 받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인쇄소와 악기점에서 일하며 확실하게 준비를 하였다. 원로 이동녕의 승인하에 김구도 군자금모집을 펴던 중 재미 동포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거사를 촉진시켰다. 당시 중국군 대령으로 복무하던 왕웅(王雄), 즉 김홍일(金弘壹)에게 부탁해 상해공병창에서 수류탄 1개를 구입하고 김현(金鉉)으로부터 또다시 수류탄 1개를 입수하였다. 이 수류탄을 받은 즉시 거사자금 300원을 가지고 1931년 12월 13일 안중근(安重根)의 막내동생인 안공근(安恭根)의 집에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선서식을 마친 뒤 17일 일본 동경으로 향하였다. 1932년 1월 8일, 동경 요요키[代代木] 연병장에서 만주국 괴뢰황제 부의(溥儀)와 관병식을 끝내고 경시청 앞을 지나가는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명중을 시키지는 못하고 체포되어 토요다마(豊多摩)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누가에(犬養) 내각이 총사퇴하고 다수의 경호 관련자가 문책당하였다. 비공개재판에서 전격적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이봉창의 거사가 알려지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였다. 특히, 중국 국민당 기관지인 『국민일보』는 '한국인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였다.'고 보도하여 모든 중국인의 간절한 의사를 대변하여 주었다. 1946년 7월 6일 이봉창의 유해를 서울 효창원에 안장하고 국민장으로 모셔져 오늘에 이른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2]
  • 이봉창(1900년 8월 10일 ~ 1932년 10월 10일)은 일제강점기의 상인,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전주(全州)다. 일본으로 건너가 상인 등으로 활동하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중화민국 장쑤성 상하이로 건너가 한인애국단 단원이 되었다. 경성부의 중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고 상점 점원, 철도청 견습생으로 일했고, 일본으로 건너가 상점 점원과 막노동 등에 종사하였다. 1918년 철도국의 견습사원이 되었으나 1년 후 조선인보다 늦게 입사한 일본인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에 분개하여 철도국을 그만두었고, 1928년에는 히로히토 천황의 즉위식에 구경하러 갔다가, 한글과 한문으로 된 편지를 소지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11일간 수감되었다. 조선인과 일본인을 차별하던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일본 정부에 항거하게 되었다. 1931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 한인거류민단을 통해 김구를 찾아갔다. 능행에 오르던 천황을 눈앞에서 본 것을 밝히고 천황을 제거할 계획을 모의하였다. 1932년 일본에 건너가 도쿄의 경시청 사쿠라다 문(櫻田門) 앞에서 쇼와 천황을 폭탄으로 저격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일본식 이름은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 다른 가명은 아사야마 쇼이치(朝山昌一)이다.[3]
  • 이봉창은 대한민국의 한민족 출신 독립유공자이다. 윤봉길과 더불어 김구 휘하의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 활약하던 인물로 유명하다. 쇼와 덴노를 암살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순국하였다. 1900년 8월 10일 한성부 서서 용산방 동문외계 동문외(現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아버지 이진규와 어머니 밀양 손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2년 경기도 경성부 용산면 청파동(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에 있던 천도교 계열의 미션스쿨인 문창소학교에 입학했고, 1917년 경기도 경성부 금정(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118번지로 이주하였다. 1932년 9월 16일 일본 대심원(일본의 최고사법기관. 現 최고재판소.)에서 첫 공판이 열렸고 1932년 9월 30일 오전 9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죄명은 소위 대역죄(大逆罪)로 교수형이 집행되었고 당시 그의 나이 향년 32세였다. 일본 본토의 고위 관료들에게는 이 사건은 재앙이었다. 실권이 전혀 없는 지금도 극우파에게 만세일계 소리 들으며 숭배받는 존재가 바로 천황인데 하물며 서슬 퍼런 제국 시절 천황의 상징성이나 위치는 당연히 지금과 비교가 불가능하다. 그런 절대권위의 천황이 암살당할 뻔했으니 발칵 뒤집힌 건 당연지사. 당시 수많은 고위 관료들이 책임을 통감한다며 자진 사퇴하고 해임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 입장에서는 독립운동이자 순국이지만 저들 입장에서는 중대한 보안사고나 다름없었다. 광복 후 김구가 1946년 일본 정부에게서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돌려받아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공원의 '삼의사' 묘에 윤봉길 의사 등과 함께 안장하였다. 이봉창 의사는 서울 용산구 출신인 만큼 삼의사 중 유일하게 고향에 안장된 셈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봉창 의사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4]

이봉창 의사 동상[편집]

  • 이봉창 의사 동상(李奉昌義士銅像)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효창공원에 있는 독립운동가 이봉창 의사의 동상이다. 1932년 1월 일본 도쿄에서 히로히토[裕仁]에게 수류탄을 투척한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기리기 위하여 이봉창의사기념사업회와 이봉창의사동상건립위원회가 동아일보사의 후원을 받아 효창공원 안에 건립한 동상으로, 1995년 10월 10일에 제막하였다. 이봉창이 수류탄을 던지는 모습을 형상화하였으며, 좌대(座臺)의 높이는 3m, 동상의 높이는 3.5m이며, 부지 면적은 22㎡이다. 2002년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동상 주변에는 건립 배경을 설명하는 건립문과 이봉창의 선서문을 새긴 비석이 세워졌다. 선서문은 이봉창이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원이 되어 적국 일본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는 내용으로, 그의 친필을 음각으로 새겼다.

이봉창 의사 선서문[편집]

  • 이봉창 의사 선서문(李奉昌 義士 宣誓文)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선서문이다. 2022년 12월 27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선서문은 일왕을 처단하고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되찾겠다는 이봉창(李奉昌, 1900~1932) 의사의 결의를 기록한 역사적인 문서이다. 작성 시기는 1931년 12월 13일이다. 이봉창 의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 김구(金九)가 결성한 항일 독립운동 단체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제1호 단원인데, 선서식 때 이 선서문을 작성해 한인애국단에 제출했다. 《백범일지》에는 1931년 12월 13일 중국 상하이에서 김구가 이봉창 의사를 안중근 의사의 동생이자 한인애국단 임원이던 안공근(安恭根)의 집으로 데려가 한인애국단 선서식을 거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서식 후 태극기 앞에서 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양손에 수류탄을 든 채 환하게 웃는 이봉창 의사를 찍은 흑백 사진(독립기념관 소장)이 전해지는데, 사진 속 선서문이 바로 이 이봉창 의사 선서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봉창 의사 선서문은 일제강점기 이봉창 의사가 결행한 의거의 과정과 결의를 증명하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또한 훙커우공원의거를 단행하는 윤봉길 의사가 작성한 선서문과 함께 한인애국단의 항일 투쟁을 상징하는 유물 중 하나이자,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가치가 높은 사료이다. 이봉창 의사의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높으며,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2022년 12월 27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사쿠라다문의거[편집]

  • 사쿠라다문의거(櫻田門義擧)는 1932년 1월 8일 이봉창(李奉昌)이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거사이다. 당시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대륙침략을 발판을 마련하였고, 독립운동은 자금 부족과 조직의 분규로 침체되어 있었다. 이에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을 창설하고 의열투쟁을 벌여 독립운동을 활성화할 것을 결정하였다. 한인애국단의 단원 이봉창은 일본 천황을 살해할 것을 선서한 뒤, 1931년 12월 22일 일본 도쿄에 도착하였다. 기회를 엿보던 그는 1월 8일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열리는 육군 신년 관병식에 천황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때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1월 8일 사쿠라다문 밖에서 천황 행렬에 폭탄을 던졌으나, 일본 궁내부 대신의 마차를 천황의 것으로 잘못 알고 던져 궁내부 대신의 마차가 파괴되는 것에 그쳤다. 이봉창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1932년 9월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10월 10일 형이 집행되었다. 천황 살해는 실패하였으나 이 사건으로 침체하였던 독립운동이 활기를 되찾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정계에도 큰 영향을 미쳐 일본 내각이 총사직서를 내었고 경시청장 등은 파면되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이봉창(李奉昌,1901.8.10.~1932.10.10)〉, 《두산백과》
  2. 이봉창 (李奉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이봉창〉, 《위키백과》
  4. 이봉창〉,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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