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大韩民国临时政府旧址, 大韓民國臨時政府遺跡地)는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상하이서 첫 걸음을 시작해 일제의 패망으로 1945년 11월 고국에 돌아올 때까지 27년간 고난에 찬 투쟁을 이어갔다. 그 사이 임시정부는 상하이,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 등 중국 대륙 곳곳을 누비며 1만3천리(5,200㎞)를 이동했다.
목차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경로[편집]
- 상하이(1919. 4〜1932. 5)
- 항저우(1932. 5〜1935. 11)
- 전장(1935. 11〜1937. 12)
- 창사(1937. 12〜1938. 7)
- 광저우(1938. 7〜1938. 10)
- 류저우(1938. 11〜1938. 5)
- 치장(1939. 5〜1940. 9)
- 충칭(1940. 9〜1945. 11)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수립되어 13년간 상하이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홍구) 공원 의거를 계기로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항주)로 옮겨갔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장소와 청사 위치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김신부로(金神斧路) 22호'(현재의 '서금2로 48농 18호')로 추정하지만, 이는 초기 임정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현순의 주거지에서 임시의정원 회의가 열렸을 것이라는 추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정확하지는 않다.
임시정부 청사는 여러 곳으로 옮겨 다녔는데 지금까지 확인되는 것만 해도 12차례 이상이 된다. 임시정부 수립 일주일 후인 1919년 4월 19일경부터 '하비로(霞飛路) 321호'(현재의 '화이하이중루 651호') 청사를 사용한 것이 확인되지만 언제까지 사용했고 실제 이곳에 청사를 두고 활동을 했는지도 파악되지 않는다. 임시정부는 수립 직후 청사에 태극기를 게양할 정도로 공개적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1919년 10월 프랑스 조계당국으로부터 폐쇄조치를 당한 후에는 개인 집이나 기관에 사무소를 두어야 했다.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며 불안정한 활동을 하던 임시정부가 안정적인 청사를 마련한 것은 1926년 3월이었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편집]
한민족이 일제에 항거해 전국에서 독립 만세를 외친 3·1운동 이후 한 달이 조금 지난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는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이자 본거지인 이곳 청사는 임시정부 수립 이후 1926년부터 1932년까지 가장 오래 사용된 임시정부 건물이다.
당시 주소는 백래니몽 마랑로 보경리 4호였고, 현재는 황포구 마당로 306농 4호로 이름이 바뀌었다. 임시정부는 이곳에 청사를 마련해 1932년 5월 항저우로 이동할 때까지 6년간 이곳에서 활동했다. 마당로 4호 청사는 현재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는 한국정부와 상하이시가 1988년부터 1990년까지 공동조사를 통해 현재의 마당로 건물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사용했던 건물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1993년 일제 강점기 활동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현재는 상하이시 황포구 인민정부의 관리 하에 "황포구 문물 보호단위 제174호"(대한민국임시정부유적지)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고 있다.
현재 청사 건물의 1층과 2층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생활했던 공간이 복원되어 있다. 1층에는 회의실과 주방이 있고, 회의실은 회의용 탁자와 함께 임시정부 요인들의 사진, 임시정부 초기 사용했던 태극기가 전시되어 있다. 주방은 당시 사용했던 모습을 그대로 복원했고 2층에는 김구 선생의 집무실 겸 침실, 임시정부 요인들의 집무실, 임시정부 요인들의 숙소가 복원되어 있다. 3층에는 임시정부와 관련된 각종 자료들을 보여주는 전시실이 있는데, 제1전시실 입구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탄생할 때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의 역사가 소개되어 있다. 그 밖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최초로 사용했던 청사 사진과 독립선언서, 국민대회 취지서, 임시정부 요인들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제2전시실에는 상해시기 임시정부의 활동과 유봉길 이봉창 의사의 의거, 이동시기 및 중경에서의 임시정부의 활동과 해방 후 환국 과정 등도 소개되어 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 유적지는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다. 내부 전람시설은 잘 정비되어 있어서 당시의 모습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유적지 옆에는 여전히 주민들이 살고 있어서 한국인들이 역사 유적을 탐방하고 그 의미를 돌아보는 데 다소 불편한 면도 없지는 않다. 한국인 탐방객들에게는 오래된 도시 상하이의 옛 정취가 남아 있는 구시가를 보는 정취도 있지만, 표지판이 없다면 겉에서 봐가지고는 이곳이 유적지인지 알 수도 없다.
- 주소 : 상하이시 마당로 푸칭리 4호(上海市马当路306弄4号)
- 입장료 : 20위안
두번째 임시정부 청사, 항저우 청사[편집]
당시 임시 정부와 김구는 함께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면 모두가 위험해지는 상황이 되니깐. 김구는 자싱의 작은 마을에 몸을 숨기고, 임시 정부는 항저우로 옮겨 갔다. 일본군을 피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었다. 일본군의 폭격 때문에 지하에 숨어 지내기도 하고, 먹을 것이 없어 굶는 날도 많았다 한다. 그런 중에도 독립을 향한 열망은 변함이 없었다.
임시 정부의 두 번째 청사가 항저우에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가 않다. 그래서 항저우 거리를 다니다 임시 정부 청사를 그냥 지나칠 가능성이 높다. 임시 정부 사람들은 1932년부터 1935년까지 항저우 청사에 머물며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다. 2층으로 된 청사를 돌아보면, 힘든 조건 속에 나라를 지키고, 독립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저절로 알게 된다. 일제의 공격에 항저우에서의 생활도 오래 가지 못하고 친장으로 이동해야 했다.
광복 후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항주 임시정부 청사는 2002년 항주시 복원계획과 우리나라 독립기념관의 협력으로 2007년에 문을 열고 재단장 후 2012년에 재개관했다.
항일 투쟁의 마지막 근거지, 충칭 청사[편집]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대륙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는 대장정을 계속해야 했다. 임시 정부가 자리 잡은 곳에 일제의 폭격이 이어졌다. 결국 몇 개월 만에 짐을 싸 이동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1940년, 마침내 중국 국민당 도움으로 충칭에 도착해 청사를 마련했다. 충칭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임시 수도가 마련된 곳이었으며 충칭 청사는 1940년부터 1945년 11월까지 사용되었던 곳이다. 이 시기를 충칭시기라고 한다. 충칭 청사는 항일 독립 투쟁의 마지막 근거지였던 곳이다.
이 시기 임시 정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합류하여 대일전쟁에 힘을 보탰다. 충칭시기 임시정부는 헌법도 개정하고, 건국의 방향을 보여주는 '건국 강령'도 제정하는 등 눈부신 발전을 했다.
언덕 위 비좁은 골목 계단 옆에 위치한 청사를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충칭 청사는 상하이나 항저우 청사와 달리 제법 규모가 크다. 청사로 사용된 건물이 몇 동이 있는데, 비교적 잘 복원되고 보존된 편이다.
충칭에 청사를 마련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을 중심으로 일제에 적극적으로 맞섰다. 1940년 9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인 한국광복군도 만들었다고 한다. 독립 전쟁을 벌이기 위한 준비였다.
임시 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일제에 선전 포고를 했다. 1943년에는 영국군과 인도, 미얀마 전선에서 일제에 맞서 싸웠으며 미국전략정보국(OSS)과 함께 국내에 침투할 작전도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대한민국은 마침내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임시 정부 사람들에게는 아쉬운 일이었다. 당당하게 전쟁을 해 승리를 거두고 일본의 항복을 받아 낼 기회를 잃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임시 정부 사람들이 국내로 돌아오는 것도, 임시 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돌아와야 했다. 통합된 정부가 아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복원[편집]
1945년 일본이 투항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산했고 구성원들도 한국으로 떠났다. 임시정부 사무실도 방치되다가 이후 주민들의 거주지가 됐다. 상하이와 한국의 연락도 소원해졌다. 1978년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하자 중·한 양국간 경제 왕래가 점차 회복됐다. 중국의 '외자도입' 정책의 영향으로 한국 투자자들이 속속 중국을 찾았다. 하지만 당시 한국 투자자는 대부분 산둥(山東)성과 랴오닝(遼寧)성에 투자했다. 1990년 중국이 상하이 푸둥(浦東) 개방을 결정하자 과거 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상하이에 다시금 한국인의 관심이 쏟아졌다.
1993년 중·한 수교 이듬 해 상하이시는 한국의 부산시와 '자매도시' 결연을 맺었다. 이는 중국과 한국의 지방정부가 최초로 진행한 도시 외교였다.
1994년 3월 김영삼 당시 한국 대통령이 중국 방문 기간 동안 특별히 상하이 푸둥신구를 참관하면서 한국인들의 푸둥 투자 서막이 열렸다. 한국측 투자 자료에 따르면 2000년까지 한국 기업이 상하이에 투자한 금액은 4억7000억 달러에 달했다.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자 상하이의 매력은 한층 높아졌다.
상하이 시 정부 통계에 따르면 2016년 상하이의 외국인직접투자 계약액은 3840억3100만 달러였고, 이 가운데 한국측과 체결한 계약액은 46억7900만 위안(약 7605억원)으로 한국은 상하이의 7대 외자 도입국이 됐다.
중·한 수교 전후로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복원 작업이 대대적으로 추진됐다. 1988년부터 1990년까지 중국과 한국의 무역 왕래가 점차 증가하면서 한국인의 상하이 방문도 늘어났다.
한국 혁명열사 후손들이 이 곳을 찾아왔으며, 중·한 양국의 전문가들도 역사 연구를 시작했다. 이후 중국 정부는 마당로 306로 4호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로 확정했다.
1990년 10월 상하이시 루완(盧灣)구 정부는 쑹산로(嵩山路) 거리에 문물보호관리소를 설립하고 이 유적지를 역사문물로 보호했고, 1993년 3월 마당로 306로 4호를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관리처'로 개명했다. 같은 해 4월 13일 수리를 거쳐 임시정부 유적지가 대외에 공식 개방됐다.
다시 개방된 임시정부 유적지는 역사 전시관에 그치지 않고 중·한 민간 교류의 중요한 장이 됐다. 1997년 임시정부 유적지 관리처와 상하이 푸단(復旦)대학교 한국연구센터, 상하이기록보관소가 공동으로 '중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在中國)'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해 한국 측의 주목을 받았다.
중·한 수교 이후 2018년 말까지 한국 대통령 총 6명이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방문하고 기념사를 남겼다. 주(駐)상하이 한국 총영사관 직원들은 이곳을 자주 찾는 '단골'이고, 한국인 관광객에게 임시정부 유적지는 꼭 방문해야 할 곳이 됐다.
임시정부 유적지는 날로 늘어나는 한국인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지도[편집]
동영상[편집]
참고자료[편집]
- 〈항일 운동의 중심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 《우리역사넷》
- 조수연 기자, 〈상해에서 중경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다〉, 《대한민국정책브리핑》, 2018-08-15
- 〈상하이 임시정부 유적지에 대한 중국의 시각〉, 《사이트명》
- 정서원, 〈고양 차세대 글로벌리더가 찾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항주 유적지’〉, 《경기도청》, 2014-12-10
- 〈대한민국 임시정부 26년, 그 고난과 역정의 역사① - 역사의 현장 상하이에서〉, 《통일뉴스》, 2019-04-09
- 임영태, 〈상하이 임시정부 ②〉, 《통일뉴스》, 2019-04-23
같이 보기[편집]
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 문서는 한국관광지에 관한 글로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위키 문서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습니다. [편집]을 눌러 문서 내용을 검토·수정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