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폿집
대폿집은 술을 컵이 아닌 큰 사발로 떠다 마시는 주점을 말한다. 주로 막걸리를 이렇게 사발로 마시기 때문에 대폿집이라 하면 막걸리라는 인식이 있다.
요즈음은 옛 정취를 지닌 간이주점을 흔히 대폿집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본디 대폿집이란 '서서 먹는 선술집' 가운데 안주가 없는 술집이었다. 포(匏)란 표주박이다. 따라서 대폿집이라고 하면 큰 그릇에 막걸리를 가득 담아 벌컥벌컥 마시는 술집이다. 안주도 주지 않는데 왜 대폿집을 갔을까? 대폿집은 안주가 없는 대신 술을 갑절이나 더 주었고 술맛도 좋았다. "5전 한 푼 던지고 막걸리 한 잔 먹고 김치한 쪽 씹으며 나가서 지게 품을 파는 패들이 들끓는 곳", 바로 그곳이 대폿집이다. 노동자뿐만 아니라 한다 하는 술꾼은 대폿집에 가서 열 잔 스무 잔씩 마시기도 했다.
대폿집의 유행
서울시경에서는 약 5000개의 각종 접객업소를 상대로 1961년 10월28일부터 11월9일까지 '사회풍기의 정화'를 위한 단속을 벌였다. 단속 항목에는 요리점이 손님을 끌 목적으로 '대폿집'을 가장한 간판으로 손님을 기만하는 행위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제로 서울시내에 337점이나 되던 요리점이 문을 닫거나 이름을 바꾸었다. 하지만 이런 평가도 있었다. "유명 무명의 갑종들이 그 이름부터 깡그리 자취를 감춘 대신, '대중식사'니 '대폿집'이니 하는 것으로 영업종목을 갈아치운것까진 혁명적이어서 매우 좋다. 그러나 이면을 들여다보면 '외화(外華)'를 '표빈(表貧)'으로 위장, 속으로는 여전히 요정업을 계속하는 곳이 꽤 많다는 것이 소식통들의 폭로하는 험담이다.
왜 고급요정들이 간판을 대폿집으로 바꾸었겠는가는 충분히 짐작하고 남는다. 요정이나 요리옥을 부패의 온상으로 여긴 데 비해 대폿집은 여전히 서민의 안식처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으로 1960년대 초반 대폿집은 서울의 중심가나 변두리를 막론하고 골목마다 자리를 잡을 정도로 일대 유행을 하였다.
그 즈음 시인 김용호(1912~1973)는 '신사조'(제2권 제3호, 1963년 3월)에서 아예 '대폿집에서'란 제목으로 글을 발표했다. "석양 무렵이면 웬일일까. 허전해 온다. 꼭 인생을 어디다 잃고 온 듯하다. 스푼도 못되는 이름을 등에 업고 단골로 찾아오면 생김새 비슷비슷한 낯익은 사람들. 명태찜을 안주하여 두어 사발 쭈욱 들이키니 창자가 후끈해 온다. 드럼통을 둘레하여 모두 원형으로 섰지만 물론 마스게임의 선수일 수 없다."
당시 대폿집의 대표적인 모습 중 하나는 드럼통이었다. 해방 이후 미군의 주둔으로 생겨난 드럼통은 대폿집에서 식탁으로 쓰였다. 드럼통을 세우고 가운데 연탄을 집어넣어 만든 이 식탁은 대폿집의 모습을 선술집으로 만들었다. 의자를 놓지 않은 채 식탁 가운데 구멍에서 피어오르는 연탄불에 각종 안주를 구워먹는 대폿집은 지금의 서울 명동·광화문·청계천·낙원동과 같은 번화가는 물론이고 동대문 밖과 신촌 일대, 그리고 마포 공덕동·창천동에도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서울의 밤은 대폿집부터 시작된다고 할까?"(동아일보 1962년 12월13일자)라고 했을 정도다. "골목마다 즐비하게 늘어선 대폿집 속은 초저녁부터 밀려든 손님들의 담배연기, 술 냄새, 안주를 청하는 고함소리로 숨막힐 지경이다. 대포 한잔에 5원, 안주가 10원에서 20원 정도, 대부분 '살라리맨'들로 보이는 손님들은 그저 마시기 위해 마시는 양 연거푸 큰 술잔을 들이킨다."
그렇다면 대폿집의 '대포'는 무슨 뜻일까? 대개 '대포'의 한자를 '大匏'라고 써서 큰 바가지에 막걸리를 담아 판매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그 이름이 생겼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중국 고사에 나오는 '천하대포'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상나라의 군주인 주왕이 ‘주지육림’에 빠져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생각한 후대의 천자들은 술 마시는 일을 엄격하게 규정으로 다스렸다. 유학을 국가경영 이념으로 내세웠던 한나라 때의 율령에는 "세 사람 이상이 까닭 없이 한 자리에 모여 술을 마시면, 일금 넉 냥의 벌금을 내야 한다"고 했다. 이른바 '군(群)음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황제가 내린 사급(賜給)이 있을 때만 군음주를 할 수 있었다. 이것을 '천하대포'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대포'라는 말은 천하의 신하와 백성들이 경사로운 잔치에서 함께 마시는 술을 부르는 말이었다. 아마도 고전에 익숙한 누군가가 1940년대에 선술집에서 무리를 지어 술 마시는 모습을 두고 '대폿집'이라 부른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식민지 시기 신문·잡지에서 대폿집에 대한 자료를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식민지 시기 자료에서 선술집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나 많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선술집은 서서 마시는 술집이다. 익히 알고 있는 조선후기의 김홍도(1745~?)나 신윤복(1758~?)이 그린 주막은 그야말로 앉을 자리도 없는 선술집이었다. 1930년 4월16일자 중외일보에서도 선술집을 묘사한 삽화가 나온다. 중외일보에서는 1930년 4월12일부터 '가두풍경'이란 이름으로 좌파 문학인 이갑기(1908~?)가 그린 삽화와 글을 연재하였다. 그 다섯번째 주제가 바로 '선술집풍년'이었다. 삽화에는 거리 한편에 부뚜막을 갖추고 나무판에 각종 안주를 올려놓은 부인이 나온다. 그 앞에는 남자 다섯이 섰다. 셋은 술을 마시고 있고 둘은 멱살을 붙잡고 싸움을 벌인다.
사실 선술집은 조선적인 정조를 대표했다. 여기에 민중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1920년대 경성의 종로통에는 조선인 술꾼들을 위한 선술집이 골목마다 들어섰다. 이미 1920년대 초반부터 익숙해진 식민지 경험은 경성의 조선인들로 하여금 술만 마시도록 만들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불어 닥친 대공황은 조선요리옥도 청요리옥도 불경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러자 "료리집 못가는 신사들은 선술집으로만 모혀들어"(시대일보 1924년 12월23일자)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러자 이갑기가 묘사한 길거리 선술집과 달리 신사만 들어오는 한양루라는 선술집도 생겨났다. "재작년까지는 그리 말속한 손님은 볼 수가 업고 로동자 비슷한 사람이 만텨니 작년부터는 신사양반이라할는지 양복을 말속말속하게 차린 손님이 태반 이상이더니 요즘 와서는 것이 밧작성하야 전부가 양복입은 양반으로 판을 채리는 심인데 그 주머니에서 백여원이라는 돈이 쏘더지는 모양이외다"라고 했다.
1920년대 중반이 되면 선술집은 더 이상 서서 마시는 술집만을 가리키지 않았다. 넓은 홀이 있고 탁자도 있었다. 한쪽에서 주모가 무쇠화로에 고기 안주를 구웠다.(이기영 <인간수업>, 조선중앙일보 1936년 3월30일) 쇠고기나 돼지고기로 갈비를 굽든지 북어를 굽기도 했다. 술국이라고 불리는 각종 국이나 탕도 있었다. 당연히 족발·편육·두부김치·짠지 따위도 마련되었다. 위생을 내세워 나무젓가락이 제공되기도 했다. 술 먹는 사람은 자기 손으로 안주를 골라서 먹었다. 조선후기 이래 그랬듯이 본래 선술집에서는 술값만 받고 안주 값은 받지 않았다. 그런데 술보다 안주를 더 많이 먹는 손님으로 인해 다툼이 자주 일어났다. 더욱이 물가가 오르면서 잔술 값이 5전에서 7전으로 올랐다.(동아일보 1924년 3월9일자) 방을 별도로 마련한 선술집에서는 '고용녀'라고 불리는 여성이 손님을 접대했다. 내외주점과 마찬가지로 일부 선술집에서는 매춘이 행해졌다. 결국 조선총독부에서는 1934년 7월부터 선술집도 카페취체법으로 관리하였다. 술값과 함께 안주 값도 받도록 했고, 심지어 방에 앉아서 술을 마시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이런 와중에 거리에서 잔술을 팔던 오래된 선술집은 무허가로 지목받아 변두리로 쫓겨났다.
해방 이후 주모 한 명이 운영하는 선술집은 대폿집이 되었고, 고용녀를 둔 선술집은 '니나노집'이 되었다. 그래도 잔술로 막걸리를 파는 대폿집에서는 안주를 공짜로 주기도 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쌀로 만든 막걸리가 사라지고 막걸리 판매도 지역별로 경계가 정해지면서 더 이상 대폿집에서 술값만으로 버티기 어려웠다. 그래서 술 두 잔에 10원, 안주국 한 그릇에 오원을 받았다.(동아일보 1962년 12월13일) 월급쟁이가 다니는 회사가 밀집해 있던 1960년대 초반 명동에는 100여 군데 넘는 대폿집이 골목을 장악하고 있었다. 서울의 변두리는 물론이고 지방의 중소도시 주택가 입구에는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친 가장들을 위한 대폿집이 들어섰다. 심지어 대학가 근처에도 어김없이 대폿집이 자리를 잡고 세상을 향해 품었던 불만을 쏟아붓게 해주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이 되면 대폿집의 주류는 막걸리가 아니라 희석식 소주로 바뀌어갔다. 특히 급작스럽게 서울로 이주를 한 농촌 출신들이 증가하면서 그들이 생계를 해결했던 노동 현장 근처에는 돼지갈비나 갈매기살, 심지어 돼지껍질을 소주 안주로 내놓는 대폿집이 자리를 잡았다. 비록 큰 사발에 나오는 막걸리로 인해서 왕대폿집의 이름도 1970년대까지 이어졌지만, 말이 왕대포이지 날이 갈수록 대폿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술꾼은 줄어들었다. 결국 1970년대 말부터 서울의 중심가에 있던 대폿집은 도시개발과 입맛의 변화로 문을 닫거나 상호를 바꾸고 홍어회·족발·두루치기·전골 따위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식당이 되었다. 서울의 봄을 무너뜨린 신군부는 5·16쿠데타를 흉내 내어 온갖 정화운동을 펼쳤지만, 다시 한 번 요정이 대폿집으로 간판을 바꾸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요정이 룸살롱으로 그 면모를 바꾸고 있었기 때문이다.[1]
동영상
각주
- ↑ 주영하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주영하의 음식 100년>(21) 대폿집의 유행〉, 《경향신문》, 2011-07-26
참고자료
- 〈대포〉, 《나무위키》
- 주영하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주영하의 음식 100년>(21) 대폿집의 유행〉, 《경향신문》, 2011-07-26
- 최규진 성균관대 동아시아연구소 수석연구원, 〈선술집과 대폿집, 막걸리 마시는 소리〉, 《서울사랑》, 2018-07
- 김정효 기자, 〈추억의 대폿집 돌아오다〉, 《한겨레》, 2007-02-26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