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아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소피아(불가리아어: София, 영어: Sofia, 문화어: 쏘피아)는 불가리아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이다. 인구는 약 124만 명이고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의 하나이다. 발칸반도의 중앙에 위치하며 평균 해발고도는 550m이다. 시내 곳곳에는 고대 로마 유적을 비롯한 많은 역사, 문화유산이 있어 도시 자체가 '야외 박물관'이라고 일컬어진다.[1]
개요
- 행정 단위: 불가리아 수도
- 면적: 492km²
- 지역어: 불가리아어
- 정부 공식 홈페이지: https://www.sofia.bg/
소피아는 흑해, 에게해, 아드리아해로 둘러싸인 발칸반도의 중앙에 있다. 불가리아의 수도로 서부의 소피아 분지, 해발고도 550m 지점에 위치한다. 다뉴브강으로 흘러드는 이스쿠르강(Iskur)의 두 지류가 시내를 흐르며, 크고 작은 규모의 300여 개의 공원과 20여 개의 숲이 있다. 불가리아의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고도가 높고 산지로 둘러싸인 지리적 조건으로 공기의 흐름이 제한되어 대기 오염 수준이 높은 편이다. 남부에는 비토샤산이 자리하며 발칸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국립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소피아라는 이름은 슬라브어에서 비롯한 불가리아 대부분의 도시와 달리 6세기에 지어진 성소피아 교회(Saint Sofia Church)에서 유래되었다. 그리스어인 소피아(σοφία)는 지혜(Wisdom)를 의미한다. 소피아의 원래 이름은 세르디카(Serdica)였다. 세르디카는 기원전 7세기경 고대 그리스 북방인 트라키아(Thracia)에 거주하던 세르디(Serdi) 부족이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탄생했다가 14세기 이후 소피아로 불리게 되었다. 1878년 제6차 러시아-투르크전쟁의 결과로 불가리아자치공국이 된 후, 러시아의 임시 정부가 소피아에 수립되었고, 1879년 의회의 결정에 따라 수도로 지정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소피아 재건 계획의 실천을 통해서 근대적인 대도시로 탈바꿈하였다.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 등과 철도와 도로로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로 기계, 섬유, 식품, 피혁, 담배, 제지, 화학, 전기기구 등 공업이 활발하며 많은 금융기관이 있어 상업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주요 대학과 문화기관, 기업들이 몰려있으며, 특히 IT분야를 위주로 한 스타트업 기업들이 몰리는 세계 10대 중심 지역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연평균 10.9°C로 대륙성기후를 보이며 사계절이 뚜렷하다. 7월과 8월이 가장 무더우며 1월에 가장 춥다. 봄과 가을은 상대적으로 기간이 짧으며 눈이나 비가 내리기도 한다. 강수량은 늦봄과 초여름에 가장 많다. 대표적인 중심 거리는 비토샤 거리(булевард)로, 네델랴 광장(Площад Неделя)에서부터 국립문화궁전(Национален дворец на културата)까지 약 1km에 달하는 거리이다. 상업 지구는 할리(Хали)와 재래시장인 줸스끼 빠자르(женски пазар)로, 각종 불가리아 전통 요리와 기념품을 구입 할 수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2]
지리 및 기후
소피아는 불가리아 서부 지역의 비토샤(Vitosha)산 북쪽 기슭인 소피아 계곡에 위치한다. 국토 중앙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발칸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다. 평균 해발고도는 550m이다. 철광석과 지철석, 그리고 하트 돌, 석회석, 점토 등 건축 자재가 풍부하다. 대부분 유럽의 수도와 달리 시내에 큰 강은 없지만 보얀스카(Boyanska), 블라다이스카(Vladayska), 펄로브스카(Perlovska) 등 여러 작은 강이 도시를 가로지른다. 다뉴브강의 지류인 이스카르(Iskar)강은 소피아 동부지역 근처로 흐른다. 이 도시는 광천수(Mineral Spring)로도 유명하다. 49개의 광천과 온천이 있다. 뜨거운 광천수는 기원전 5~6세기부터 소피아 역사에서 필수 불가결한 삶의 활력소가 되어 왔다. 도시 상징 중의 하나로, 소피아 문장(紋章·coat of arms)에도 들어가 있다. 서기 1세기경엔 로마인들에 의해 광천수 주위에 신전이 지어지기도 했다. 20세기 들어서는 낡은 광천탕 대신 현대적인 시설과 물 처리 설비를 갖춘 크고 아름답고 기능적인 건물의 공중목욕탕이 새롭게 건설되었다. 주변 지역엔 분수와 광장이 조성돼 국내외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소피아의 연평균 기온 10.4°C의 습한 대륙성 기후를 보인다. 연평균 강우량은 582mm, 적설량은 96cm이다. 겨울은 비교적 춥고 눈도 많이 내린다. 1월의 평균기온이 가장 낮으며 -15°C 아래로 떨어지기도 한다. 여름은 꽤 따뜻하고 화창하다. 높은 고도로 인해 일반적으로 불가리아의 다른 지역보다 약간 서늘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가장 더운 계절인 7월과 8월에는 35°C에 이르는 폭염이 찾아오기도 한다. 봄과 가을은 짧으며 일반적으로 변덕스럽고 역동적인 날씨를 보인다.
지리적 위치와 난방 및 자동차 연료의 영향으로 대기오염도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도시를 둘러싼 소피아 계곡 주변 산들의 지형적 특성이 공기 덩어리의 순환을 방해해 대기 중 입자 물질과 산화질소에 의한 오염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난방 및 자동차 운송에 사용되는 연료도 상당한 오염원으로 작용한다. 이에 따라 스모그 현상이 자주 나타나며 미세먼지 농도가 표준치를 넘는 날이 많다. 이에 대응해 시 의회는 2018년 거리 세척 확대 등 다양한 대책을 마련해 시행했다. 그러나 소피아 당국은 난방에 의한 대기오염을 줄이기 위한 정책 추진이나 활발한 산업 활동에 대한 산업오염측정소 운영 등 적절한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유럽 회계감사원(European Court of Auditors) 보고서는 밝혔다. 이에 유럽위원회는 대기오염을 제대로 억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불가리아를 법정에 세우기도 했다.[3]
역사
소피아는 로마 시대를 포함해 7000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도시이다. 시내에선 기원전 5000~6000년대로 추정되는 신석기 시대 마을 터가 발굴되기도 했다. 초기 정착 부족은 고대 그리스 북부 지방을 근거지로 한 트라키안 틸라타이(Thracian Tilataei)족이었다.
트라키안의 짧은 통치는 고대 이란의 아케메니드 제국(Achaemenid Empire)에 의해 중단됐다. 소피아(당시 이름 세르디카)의 공식 역사 기록은 기원전 29년 로마 공화국에 의해 정복되면서 시작됐다. 이후 계속하여 번성해 이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로마 도시가 되었다.
당시 이곳에는 정찰용 탑이 있는 성곽, 군사용 방벽, 공중목욕탕, 행정 및 종교의식용 건물, 원형극장, 서커스 공연장, 대형 서커스(극장) 등이 들어서 있고 시 의회나 대규모 포럼이 열렸다. 로마와 비잔티움(Byzantium·콘스탄티노플·현재 터키 이스탄불)을 잇는 교통요지의 역할도 했다.
로마 황제 아우렐리안(Aurelian : 215~275)과 갈레리우스(Galerius : 260~311)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지속적 성장을 통해 정치·경제적 중심지로 발돋움한 가운데 기독교가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된 최초의 로마 도시 중 하나다. 갈레리우스 황제는 311년 ‘종교관용 칙령(Edict of Toleration)’을 발표해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공식적으로 종식시켰다.
4세기 로마 제국을 재통일한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는 세르디카는 나의 로마(Serdica is my Roma)라고 말할 정도로 이 도시를 높게 평가했다. 그는 세르디카를 콘스탄티노플 대신 비잔틴(동로마) 제국의 수도로 만드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다. 447년 흉노족(Huns)의 침입으로 파괴돼 1세기 동안 폐허가 되었다가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 I)에 의해 재건되었다.
여러 이민족의 잦은 침입을 받던 이 도시가 처음 불가리아에 편입된 것은 809년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왕 칸 크룸(Khan Krum) 통치 때였다. 칸 크룸은 불가리아 영토를 거의 두 배까지 넓혔다.
1385년 소피아는 불가리아-오스만 전쟁 과정에서 이슬람국인 오스만 제국에 함락되었다. 1443년엔 잠시 헝가리군에 점령되기도 했다. 이 시기 소피아는 주변 국가와 카라반 무역을 하면서 불가리아에서 가장 큰 수입 수출 기지 역할을 했다.
이어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오스만이 활발한 건축 활동으로 도시의 규모를 키웠다. 인프라, 교육, 지역 경제에 대한 공공 투자가 늘어나면서 다양성도 커졌다.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무슬림의 예배당인 모스크가 많이 늘었다. 세인트 소피아(Saint Sofia)와 같은 유명한 교회들도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17세기까지 100개가 넘는 크고 작은 모스크가 있었는데, 그 중 오늘날에는 반야 바시(Banya Bashi) 모스크만 남아 있다.
소피아는 1877~78년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 사이에 벌어진 러시아-튀르크 전쟁 때 많은 불가리아 주민들이 무장하고 러시아군과 함께 싸워 오스만 통치에서 해방되었다. 대부분의 모스크는 이 전쟁에서 파괴됐으며 종전 후 무슬림 인구의 대부분은 소피아를 떠났다. 이후 1879년 국가 수도로 선포됐다.
20세기 들어서도 전쟁의 참화는 계속됐다. 제1, 2차 발칸 전쟁(1912~1913)을 거치며 많은 영토를 잃었으나 제1, 2차 세계대전의 불길도 피하지 못했다. 불가리아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이어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독일 편에 서면서 많은 시련을 겪었다. 1941년 12월 미국과 영국에 전쟁을 선포한 뒤 1943년과 1944년 미국과 영국 공군에 의해 소피아가 폭격을 당해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소련군의 진주에 이어 1945년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1980년대 후반 동유럽의 민주화 바람을 타고 1989년 11월 소피아를 비롯한 전국에서 민주화 요구 시위가 벌어진 후 1991년 동유럽의 민주화 영향으로 공산정권이 붕괴되고, 신헌법을 채택하여 불가리아 공화국이 수립된 후, 소피아 전체 상업 지구에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며 행정·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이후 2004년 나토(NATO) 가입, 2007년 EU 가입 등 친서방의 길을 걸어왔다.[4]
경제
소피아의 국내총생산(GDP)은 항구 도시인 바르나와 부르가스에 이어 세 번째로 높다. 소재하는 전체 기업의 약 70%가 제조업 분야이며 다음으로 서비스 산업이 발달하였다. 불가리아의 경제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중앙은행과 다수의 상업은행 본사가 소피아에 위치한다. 대표적으로 세계에서 13번째로 오래된 중앙은행인 '불가리아국립은행'과 상업은행인 불가리아개발은행(Българска банка за razvoja, Balgarska banka za razvitie)이 있다. 불가리아국립은행은 화폐를 발행하고 시중 은행의 감독 및 규제 업무를 담당하며, 불가리아개발은행은 불가리아의 개발을 목적으로, 금융 및 자문을 제공하고 소액 금융을 포함한 국가 대출 보증을 제공한다.
교통
- 도로 : 시내 지역에서는 도시를 관통하는 대로가 2개 있으며, 각각 '차리그라츠코 쇼세(황제의 도시의 거리)', '바실 레프스키'라는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 도시 면적은 넓은 편이지만, 주요 관광 스팟이 위치한 시내 및 중심 거리들의 크기는 그렇게 넓지 않아, 한가롭게 돌아다니다 보면 어지간한 명소들은 다 탐방을 할 수 있다.
- 도시철도 : 소피아 지하철(메트로) (1~4호선), 노면전차 및 트롤리버스가 있다. 지하철은 1998년 1월 28일 1호선이 개통되었으며, 이어 2012년 2호선, 2015년 4호선, 2020년 3호선이 개통됐다. 노면전차는 불가리아 공국 시절인 1901년 개통되었고 14개 노선이 있다. 트롤리버스는 1941년 첫 운행하였고 10개 노선이 있다.
- 공항 : 소피아 공항이 있다. 한국과의 직항 노선이 없어 이스탄불에서 환승해야 한다. 공항 2터미널은 지하철과 연결되어 있으며 1.6레프(한화 약 1000원)에 시내로 들어올 수 있다.[5]
관광
시내 중심부에 있는 불가리아 최대의 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은 2015년부터 국립미술관(National Art Gallery), 국립외국미술관(NGFA·National Gallery for Foreign Art), 현대미술관-소피아 아스널(Museum of Contemporary Art-Sofia Arsenal)을 합병해 운영하고 있다. 최대 전시 공간은 NFGA에 위치한 크바드라트(Kvadrat)500으로, 28개 전시관에 2000여 점의 유물,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아프리카 아샨티 제국(Ashanti Empire)의 조각품들과 불교 미술품, 네덜란드 황금시대 회화부터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의 작품까지 다양한 문화 아이템을 포함한다.
국립미술관 외에 소피아 시립 미술관(Sofia City Art Gallery)도 유명하다. 이 미술관은 1928년 해방 반세기와 불가리아문자 황금시대 1,000 주년을 맞아 당시 시장이었던 블라디미르 바조프(General Vladimir Vazov)장군의 명령으로 설립됐다.
시립 미술관의 건물은 소피아 건축 문화의 기념물로 평가받는다. 이 건물은 1908년 카지노용으로 건축가 토르보프(N.Torbov)의 디자인으로 지어졌다. 1940년 확장됐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당한 후 1948년 재건됐다.
미술관은 미술, 조각, 그래픽, 현대미술 및 사진의 네 부문으로 운영되며, 19세기 말부터 현재까지 불가리아 예술가 작품 8,000여 개를 소장하고 있다.
소피아 남부의 부촌 보야나(Boyana)에 위치한 국립역사박물관(National History Museum)은 선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65만 점 이상의 방대한 역사적 유물들을 보관한다. 하지만 공간 부족으로 1만 점만 영구 전시하고 있다. 불가리아 최대 지식정보보관소인 시릴 메소디우스(Cyril and Methodius) 국립도서관은 약 180만 권의 책과 7만 개가 넘는 문서, 원고, 지도, 기타 물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중세의 보야나 교회(Boyana Church)에는 240여 점의 인물상과 89점의 장면이 그려진 사실적인 프레스코화(벽에 석회를 바르고 그린 그림)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들 작품에서 드러나는 생동감 있고 인간적인 현실주의는 유럽 예술의 절정기에 있던 르네상스 시대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한다.
소피아에는 불가리아의 대표적인 공연 예술단들이 몰려있다. 극장은 가장 인기 있는 공연예술 공간이다. 연극 극장은 영화관 다음으로 관람객이 많이 찾는다. 클래식 연극이 주로 공연되며 도심 중앙에 위치한 이반바조프(Ivan Vazov)국립극장이 가장 유명하다.
불가리아의 국립오페라와 발레단은 1891년에 각각 설립된 후 통합해 운영되고 있다. 정기 공연은 1909년 시작되었다. 니콜라이 기아우로프(Nicolai Ghiaurov), 게나 디미트로바(Ghena Dimitrova) 등 불가리아의 대표적인 오페라 가수들이 국립오페라발레단 무대에 첫 등장했다.
지도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 지도 위 글자를 클릭하면 해당 페이지로 이동합니다. |
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 〈소피아〉, 《위키백과》
- 〈소피아〉, 《두피디아》
- 〈소피아(도시)〉, 《나무위키》
- 〈Sofia〉, 《Wikipedia》
- 〈소피아〉, 《요다위키》
- 〈소피아(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 〈소피아(유럽지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
같이 보기
동남유럽 같이 보기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