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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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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상지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 말기의 백제부흥운동 지도자이자 당나라의 무장. 자는 항원(恒元). 흑치준의 아버지이다.

개요

흑치상지는 삼국시대 말기 백제의 장군이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백제부흥운동을 펼쳐 군세를 떨쳤다. 그러나 전세가 약화되자 유인궤에 투항하였다. 당나라로 가서는 여러 정벌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나 주흥의 무고로 옥사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흑치상지는 서부(西部)출신으로서 키가 7척(175cm)을 넘었으며 날쌔고 용감하고 지략이 있었다. 벼슬은 제2품인 달솔(達率)에 이르렀고, 풍달군(風達郡) 군장(郡長)을 겸했다고 한다. 중국에서 발견된 묘지명(墓誌銘)에 따르면, 흑치상지는 백제 무왕(武王) 31년(630)경에 태어나 서기 689년(永昌 원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흑치상지는 의자왕의 아들 왕자 부여융과 함께 당나라인들을 몰아내었으나 적이였던 흑치상지를 당나라는 회유하여 당나라에 귀화하였다. 구당서와 신당서 흑치상지 열전에는 키가 7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흑치상지 묘지명에는 흑치씨의 조상을 백제 왕족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흑치를 성으로 삼게 된 이유를 흑치(黑齒)에 책봉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국 사료에 등장하는 흑치국의 위치인 필리핀으로 비정하는 설이 있으며, 이를 검게 물들이는 문화가 있다.

흑치상지의 생애

흑치상지(630년 ~ 689년) 선조의 성씨는 부여씨(扶餘氏)였는데, 흑치(黑齒) 지역에 봉해졌으므로 흑치로 바꾸었다. 증조할아버지는 흑치문대(黑齒文大), 할아버지는 흑치덕현(黑齒德顯)이며, 아버지는 흑치사차(黑齒沙次)이다. 1929년 10월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시(洛陽市) 망산(邙山)에서 흑치상지와 흑치상지의 아들 흑치준(黑齒俊)의 묘지(墓誌)가 발견되었다. 흑치상지의 묘지는 개석(蓋石)이 사라진 상태로 지석(誌石)만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로 옮겨졌다가 나중에 남경박물원(南京博物院)으로 이관되었다. 지석의 크기는 가로 71.5㎝, 세로 72.7㎝, 두께 14㎝로 알려져 있다. 지석의 가장자리 일부는 깨져서 글자 판독이 어려우며, 전체 글자는 41행 41열 1,604자이다. 묘지는 699년 흑치상지의 무덤을 다시 만들 때 작성하였으며, 지은이와 글쓴이는 밝히지 않았으나 군대에서 흑치상지와 함께 활동한 사람이 찬술한 것으로 추정한다. 흑치상지 묘지명에 따르면, 흑치상지는 630년(무왕 31)경에 태어나서 689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흑치상지는 죽은 지 10년째인 698년 맏아들 흑치준(黑齒俊) 등의 노력으로 억울함이 인정되어 죽기 전의 관직인 좌무위위대장군(左武威衛大將軍) 검교좌우림위(檢校左羽林衛) 상주국(上柱國) 연국공(燕國公)을 되찾았다. 그리고 영혼을 위로하는 뜻에서 좌옥검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을 더하여 주고 훈봉(勳封)은 옛날 그대로 복구하였다. [1]

흑치상지는 백제 서부(西部) 사람으로 묘지명에는 흑치상지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까지의 이름이 등장한다. 묘지명에 따르면 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은 흑치문대(文大), 할아버지는 흑치덕현(德顯), 아버지는 흑치사차(沙次)이다. 묘지명에는 원래 부여씨로부터 나왔지만 흑치(黑齒)에 봉해져 자손들이 성씨로 삼으면서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좌평을 역임하지 못했으니 최상위는 아니더라도 꾸준히 장관급을 배출한 차상위 귀족 집안이라 할 수 있다. 698년에 맏아들 흑치준(黑齒俊) 등의 노력으로 억울함이 인정되어 죽기 전의 관직인 좌무위위대장군(左武威衛大將軍) 검교좌우림위(檢校左羽林衛) 상주국(上柱國) 연국공(燕國公)을 되찾았다. 그리고 영혼을 위로하는 뜻에서 좌옥검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을 더해주고 훈봉(勳封)은 옛날 그대로 복구하였다.

흑치상지는 서부(西部) 출신으로 2품관인 달솔(達率)에 올라 풍달군장(風達郡將)을 겸하였다. 660년(의자왕 20)에 사비성(泗泌城)이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해 함락되어 백제가 망하자, 부중(部衆)과 더불어 항복하였다. 그러나 그 뒤, 소정방(蘇定方)이 의자왕(義慈王)과 태자 효(孝)를 비롯해 여러 왕자를 사로잡고 당나라 군사를 풀어서 제멋대로 약탈하자, 이에 분개하여 가까운 족장 10여 명과 반기를 들어 임존성(任存城)을 근거지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부흥군은 곧 3만 명으로 늘어나 한때 소정방의 군사를 물리치고 200여 성(城)을 되찾아 기세를 떨쳤다. 소정방이 당나라로 돌아간 뒤, 나당연합군은 백제유민들이 전개한 부흥운동을 막기 어려워 새로이 원병을 청해 수륙의 두 길로 공격을 강화하였다. 백제 부흥운동의 유력한 한 축을 형성하다가 부흥운동의 본거지였던 주류성(周留城)이 함락된 663년 9월을 전후하여 더 버텨나가기가 어려워 수로(水路)로 공격해온 당나라의 장수 유인궤(劉仁軌)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그는 오히려 당군의 선봉에 서서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보루였던 임존성을 함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부흥운동이 종식된 뒤, 흑치상지는 부여융(扶餘隆)과 함께 당으로 들어가 장안(長安)의 만연현(萬年縣)에 편적 되었다. 그러나 664년에 부여융이 웅진도독(熊津都督)에 임명되어 백제 땅으로 귀환할 때 흑치상지(黑齒常之)도 다른 백제 인사들과 함께 백제 땅으로 돌아와 절충도위 · 진웅진성대(折衝都尉 · 鎭熊津城大), 즉 부여융을 수반으로 하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의 군장이 되었다. 웅진도독부가 신라군의 공격으로 한반도에서 소멸되면서 흑치상지는 당시 당으로 들어갔다. 이후 여러 차례 승진을 거듭하여 좌령군원외장군 양주자사(左領軍員外將軍揚州刺史)가 되어 토번(吐蕃)과 돌궐(突厥)을 치는데 공을 세웠다. 그 관직과 신임이 중국사람보다 두터워 벼슬이 연연도대총관 연국공(燕然道大總管燕國公)에까지 이르렀다. '국공(國公)'이란 당나라에서 9등급으로 분류되어 있던 귀족의 직위 중 세 번째로 3,000호(戶)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어 있었다. 그 뒤, 측천무후(則天武后)의 통치 때 응양장군(鷹揚將軍) 조회절(趙懷節)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주흥(周興) 등의 무고(誣告)로 옥에 갇혔다가 689년 10월 자결하였다. 흑치상지의 억울한 죽음은 9년 후인 698년 장남인 흑치준(黑齒俊)의 노력으로 신원되었다. 측천무후는 제서(制書)를 내려 흑치상지를 좌옥검위대장군(左玉鈐衛大將軍)에 추증하고 훈(勳)과 봉(封)을 회복시켜 주었다. 생전에 그가 받았던 훈은 확인되지 않지만, 봉은 연국공(燕國公)이었다.

흑치상지의 가계

흑치상지의 성은 흑치, 이름은 상지(常之), 자(字)는 항원(恒元)이다. 630년(무왕 31) 백제의 서부(西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사차(沙次), 조부는 덕현(德顯), 증조부는 문대(文大)이다. 당의 무장(武將)인 흑치준(黑齒俊)이 그의 장남이다. 흑치상지는 689년 9월, 조회절(趙懷節)과 반란을 도모했다는 주흥(周興)의 무고로 감옥에 갇혔다가 10월에 사망했다. 흑치상지의 조상은 백제의 왕성인 부여씨(扶餘氏)였으나, 흑치 지방에 봉해졌기 때문에 자손들이 이것을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흑치를 말 그대로 '검은 이'로 이해해서 필리핀 지방으로 보기도 한다.

흑치상지가 백제부흥운동을 전개했던 예산 지역의 옛 지명을 근거로 이곳이 흑치라고 주장하며, 여기에서 나아가 백제의 지방통치제도인 담로제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이 경우 '흑치' 가문의 성립은 흑치상지 출생 이전이 된다. 흑치상지의 집안이 원래 왕족이었고, 대를 이어서 달솔(達率)을 역임할 정도로 유력한 귀족가문이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흑치상지의 증조부와 조부, 아버지까지 3대가 모두 달솔을 역임했고, 흑치상지 역시 20살이 되기 전 젊은 나이에 달솔에 올랐기 때문이다. 흑치상지는 어려서부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나 『사기(史記)』, 『한서(漢書)』 등 유학과 역사를 익혔다. 뿐만 아니라 말타기와 활쏘기 등 무장으로서의 자질이 뛰어났고, 음양오행에 대한 이해도 깊었다.

문무(文武)의 소양을 겸비했던 흑치상지는 20세가 되기 전에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서 달솔에 올랐고 후에는 풍달군장(風達郡將)을 역임했다. 군장은 민정과 군정 모두를 담당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어릴 적 교육과 경험이 큰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현재 흑치상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 상황이다. 흑치상지가 백제를 배신하고 부흥운동을 끝내는데 앞장 섰다는 점에서 역사적 평가를 박하게 내리기도 한다. 반면에 당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구당서』와 『신당서』 열전에 실릴 정도로 성공한 이민자의 한 모델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리고 백제의 멸망을 지켜보면서 부흥운동을 일으켰지만 실패했고, 타국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기는 했지만 무고로 희생당하고 마는 비운의 인물로 보는 입장도 있다.

흑치씨는 백제 또는 고구려계의 유장(遺將)으로 흑치상지의 경우와 같이 당나라에 들어가 군공을 세워 '천병중군부사 우오위장군 상주국 준화군 개국공(天兵中軍副使右吾衛將軍上柱國遵化郡開國公)'에까지 관위가 올라간 순(珣)의 부인이다. 흑치씨는 706년에 남편 및 그의 가족들과 힘을 합쳐 8세기 전반기의 중국불교조각을 대표하는 산서성(山西省) 천룡산(天龍山)의 당대 석굴(唐代石窟, 11∼15, 17∼21굴)에 삼세불상(三世佛像)과 제현성(諸賢聖)을 조각하였다. 이 불상조각은 707년에 완성되었다. 707년 10월에 불상이 조각된 사연을 적은 공덕비(功德碑)가 세워져 불교미술 분야뿐만 아니라, 당제국에 있어서 한반도 출신의 유민활동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흑치상지 묘지명

흑치상지 묘지명(黑齒常之 墓誌銘)은 백제 말기의 장군으로 당에 들어가 활동한 무장(武將) 흑치상지의 묘지명이다. 흑치상지의 생애와 활동을 기록해 무덤에 부장하였다. 크기는 세로 72㎝, 가로 71㎝로 정방형에 가깝다. 이 묘지명은 지금까지 알려진 각종 사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여러 가지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백제사 연구에서 빠트릴 수 없는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흑치상지의 생애와 활동을 보다 자세하게 밝힐 수 있게 되었다.

흑치씨의 유래가 왕족 부여씨에서 분파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백제 왕실의 분지화를 시사하고 있다. 흑치상지 가문이 대대로 달솔에 머물고 있거나 그 자신 20세가 되기 전에 가문의 지위에 힘입어 달솔이 된 내용이 확인된다. 흑치상지가 수학기에 『춘추좌씨전』 · 『사기』 · 『한서』 · 『논어』 등의 경사서를 읽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백제 귀족의 학문적 소양에 대한 일반적 지견을 얻을 수 있다. 흑치상지의 역관이나 활동상을 통해 당의 백제고지(百濟故地)에 대한 통치책이나 당에 끌려간 백제유민의 대우와 행방 등에 대해서도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동영상

각주

  1. 흑치상지〉,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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