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제
건륭제(乾隆帝)는 중국 청나라 제6대 황제이다.
개요[편집]
건륭제(1711년 9월 25일 ~ 1799년 2월 7일)는 조부 강희제에 이어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강희 ·건륭 시대'라는 청나라 최성기를 이룩하였으며, 이 시기에 중국 문화가 유럽 사회에도 널리 알려졌다. 문화적으로도 융성하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서양의 학문·기술이 전래되고, 중국 문화가 유럽에 널리 알려지는 등 국제 교류도 확대되었다. 한편 고증학의 번영을 배경으로 《사고전서(四庫全書)》가 편집되고 《명사(明史)》가 완성되는 등 수사사업(修史事業)도 활발하였다.
건륭제는 이름 홍력(弘曆). 시호 순황제(純皇帝). 묘호 고종(高宗). 옹정제(雍正帝)의 넷째 아들로, 모후는 유호록(鈕祜祿: 弘毅公額亦都의 曾孫女)이고 황후는 부찰(富察: 察哈爾總管李榮保의 딸)이며 아들 17명, 딸 10명을 두었다. 옹정제가 제정한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에 따라 1735년 황태자를 거치지 않고 바로 즉위하였다. 조부 강희제(康熙帝)의 재위 기간(61년)을 넘는 것을 꺼려 재위 60년에 퇴위하고 태상황제가 되었는데, 이 태상황제의 3년을 합하면 중국 역대 황제 중 재위 기간이 가장 길다.[1]
건륭제의 생애[편집]
건륭제(乾隆帝)는 옹정제와 효성헌황후의 아들이고, 강희제와 효공인황후의 손자이다. 건륭제는 3명의 황후와 5명의 황귀비, 5명의 귀비 등을 두었고 슬하에 17남 10녀를 두었다. 이 중 효의순황후 소생의 15남인 가경제가 황위를 이었다.
1711년(강희 50년) 9월 25일, 자금성 인근 옹친왕부에서 당시 시첩이던 뉴호록씨와 옹친왕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홍력의 어머니 뉴호록씨는 만주족이었지만 출신이 미천하여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가 수녀(秀女)가 된 뒤 옹친왕부에 배속되어, 윤진의 후궁인 측복진(側福晉) 이씨의 시녀로 있었다. 어머니의 미천한 신분에 의하여 그다지 부각되지 않던 홍력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천자문과 사서오경을 꿰뚫어 암송하고 시를 잘 지어 1720년(강희 59년) 겨울에 할아버지인 강희제가 특별히 궁정에서 기르기 시작하였다.
1735년(옹정 13년) 10월, 옹정제의 몸이 나빠지자 보친왕 홍력은 이복동생 화친왕 홍주(和親王 弘晝)와 함께 옹정제를 간병하였다. 그러나 동년인 1735년(옹정 13년) 10월 8일, 홍력의 아버지이자 당대 청나라 황제인 옹정제는 급격히 병세가 악화되어 58세를 일기로 북경의 원명원에서 과로로 의한 피로 누적으로 붕어하였다. 대학사 장정옥과 악이태(鄂爾泰), 그리고 홍력의 숙부인 장친왕 윤록(莊親王 允祿), 과친왕 윤례(果親王 允禮) 등이 고명대신이 되어 옹정제의 유조를 건청궁 정대광명 편액에서 꺼낸 뒤 유조를 읽었다. 유조에는 제4황자 홍력을 황태자로 책봉하여 황제로 즉위시키라는 내용이었다. 이 유조에 따라, 홍력은 황태자로서 책봉의례를 받은 후, 곧 황위에 오르니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으며 이가 제5대 황제인 고종 건륭순황제(高宗 乾隆純皇帝)이다. 연호를 '건륭'(乾隆)이라 정하였는데 여기서 '건'(乾)은 하늘, '융'(隆)은 높음과 영광이라는 뜻이니, 건륭이란 하늘의 영광이라는 뜻이다. 과거 조부인 강희제나 부황인 옹정제의 즉위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데에 비하여 이미 황자 시절에 경쟁자가 없어진 건륭제의 즉위 과정은 매우 빠르고 안정적으로 진행되었다.
1795년(건륭 60년) 말 건륭제는 스스로 황위를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즉위할 때 한 약속이기도 하였는데 1735년(옹정 13년) 당시 즉위할 때 쓴 칙서에서는 즉위 60년째에 황위에서 물러나겠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본래 건륭제는 즉위할 때 첫 번째 부인 효현순황후 소생의 차남 영련(永璉)을 후계자로 염두에 두었으나 영련이 1738년(건륭 3년)에 죽은 이후로는 건저(建儲)를 오랫동안 보류하였다. 그 후 건륭제는 한족 출신 후궁인 영의황귀비를 사랑하여 그 아들인 15남 영염(永琰)을 1773년(건륭 38년) 은밀히 후계자로 세우고 영염의 이름이 담긴 함을 건청궁 정대광명 편액 뒤에 넣어놓았다. 1789년(건륭 54년) 건륭제는 영염을 가친왕(嘉親王)에 봉한 뒤 정무와 군무를 처리하도록 하였고, 1795년(건륭 60년) 9월 4일 편액에 넣어놓은 유조를 꺼내어 영염을 황태자로 봉하였다. 그리고 1795년(건륭 60년) 음력 12월 30일, 즉 양력으로는 1796년 2월 9일 건륭제는 황위에서 내려왔고 그다음 날인 1796년 음력 1월 1일(양력 1796년 2월 10일)에 자금성 태화전에서 열린 양위식에서 전위조서를 내리고 황위를 황태자 영염에게 넘겨주니, 이가 가경제이다. 1799년(가경 4년) 2월 7일, 음력으로는 1월 4일에 60년간 재위하고 4년간 태상황제로서 황제보다 더 많은 실권을 장악하였던 건륭제는 노환으로 89세를 일기로 자금성 양심전(養心殿)에서 붕어하였다.[2]
위링[편집]
위링(裕陵)은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탕산(唐山) 청동릉(淸东陵)에 있는 청나라 건륭제의 묘이다. 청나라 순치제의 능인 샤오링(孝陵)의 서쪽에 있다. 건륭제 때인 1743년(건륭 8)에 착공하여 1752년(건륭 17)에 마무리되었다. 이곳에는 건륭제를 비롯하여 그의 황후(皇后)인 효현(孝贤)과 효의(孝仪), 황귀비(皇貴妃)인 혜현(慧贤), 철민(哲悯), 숙가(淑嘉)를 포함하여 모두 16명이 안장되어 있다.
건륭제가 집권했던 시기는 청조(淸朝)가 가장 부흥했던 시기이며, 능침(陵寢) 규제는 전(前) 왕조의 것을 따르되, 새로운 것을 덧붙이는 방식이었다. 이곳에 석상생(石像生) 8쌍을 세웠는데, 그의 조부(祖父) 강희제보다 기린, 낙타, 사자가 각 1쌍씩 더 많다. 능 입구의 위다이허[玉带河] 위에는 규정과 동일한 아치형 다리가 있다. 위링의 지궁(地宫)은 기존에 출토된 청대의 황릉 중 가장 웅장한 규모를 가지고 있다. 이곳에는 본래 진귀한 보물들이 많이 있었으나 대부분 도굴당하고, 오로지 불교를 소재로 한 조각만이 남아 있다.
문화와 예술의 발전[편집]
건륭제는 시를 짓는 것을 좋아하여 주로 정무를 본 오전과는 달리, 오후와 저녁에는 시를 지으며 낙으로 삼아 평생 4만 수가 넘는 시를 지었다. 그러나 그 중 상당수는 어법이 틀리고 질도 낮아 잘 지어진 시는 아니었다. 간행된 시문집으로는 《낙선당전집》, 《청고종어제시집》 등이 있다. 그러나 서예에는 실력이 뛰어나 자금성 안의 여러 편액들을 썼으며 대신들의 생일 때에는 자신이 손수 쓴 글귀를 선물해주기도 하였다. 또한 그리기를 좋아하여 여러 그림을 남겼는데 자신이 좋아하던 후원과 정자를 주로 그렸다. 건륭제는 순행에서도 그러하였듯이 황궁인 자금성에 예술가들을 초대하여 차를 대접하며 그들의 학식과 예술성에 감탄하였다.
건륭제는 청나라 각지의 궁전, 행궁, 도로, 운하, 성벽, 사원 등을 새로 짓거나 증축하는 데에도 힘썼다. 건륭제는 본래 자신이 태어난 잠저인 옹친왕부였으나 옹정제 때 라마교 사원과 행궁으로 개축된 옹화궁을 대폭 증축하였고 명나라 때 지어진 자금성이 너무 인위적이고 낡아서 자신의 쉼터가 될 만한 곳, 즉 큰 연못과 나무 등이 많은 거대한 후원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는 최고의 장인, 석공, 목공 등을 불러 후원을 만들었는데 그때 처음 만들어진 후원이 북경 서북쪽에 있는 청의원(淸漪園)으로 훗날 이화원으로 개명되었다. 다른 한 후원은 바로 원명원으로 본래 아버지 옹정제가 가지고 있던 작은 후원을 대폭 증축하고 옆에는 그 부속 후원인 장춘원(長春園), 기춘원(綺春園)을 새로 지였다.
건륭제는 원명원을 서양과 동양이 만나는 궁전이 되길 원하여 조부 때부터 궁정에서 일하던 예수회 선교사 중 최연장자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중국 이름 랑세녕(郞世寧))와 프랑스에서 온 천문학자 미셀 베누아에게 원명원의 개·보수를 명하였다. 카스틸리오네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바로크 양식과 로코코 양식을 본따 지었는데 지붕은 중국식, 건물 외벽은 서양식으로 지어 혼합 양식을 따 지었고 안에는 유럽 왕실에서 쓰는 진귀한 물건을 가져다 놓아 전시하는 등 매우 화려하였다. 북경 밖으로는 강희제 때 지어져 승덕 땅에 있던 피서산장을 1743년(건륭 8년)에 대대적으로 정비하기 시작하여 49년 후인 1792년(건륭 57년)에야 완성을 하였다.
건륭제는 전임 황제들인 강희제, 옹정제와 같이 궁정의 선교사들을 우대하며 그들에게 부분적인 선교 활동을 허락하였다. 하지만 건륭제 자신은 조부와 부황과 같이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선교사들의 예술적, 과학적 지식만을 이용하려고 하였다. 건륭제의 증조부인 순치제부터 이미 아담 샬 폰 벨을 시초로 건륭제 때에도 이그나츠 쾨글러, 안토 고가이슬 등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천문대인 흠천감을 이끌며 중국의 천문학과 지리학에 도움을 주었다. 1769년(건륭 34년) 이들의 도움으로 완성된 《건륭황여전람도》(乾隆皇與全覽圖)는 서양식으로 그린 지도로 청나라의 강역을 세밀히 그려냈다. 프랑스 선교사인 조제프마리 아미오는 여러 개의 황실 정원을 프랑스식으로 꾸며주고 《손자병법》과 같은 중국의 유명한 고서적이나 건륭제가 지은 시 등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출판하기도 하였다.
건륭제에 대한 평가[편집]
건륭제는 어릴 때부터 제왕이 지녀야 할 자질이 보여 할아버지 강희제와 아버지 옹정제에게 인정을 받았다. 1735년(옹정 13년), 옹정제가 급사하자 저위비건법에 따라 황위에 올라 먼저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의 갈등을 조정하며 내치를 다진 후 대규모 정복 사업과 문화 사업을 펼쳤다. 그 자신 역시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아 시와 서화를 즐겼고 각지의 시인과 화가들을 독려하였다. 특히 10년의 세월을 들여 고금의 도서를 수집하여 중국 역사상 최대의 대편찬 사업인 《사고전서》를 편찬함으로써 고서적들을 많이 발굴케 하였으나 문자의 옥도 단행하여 청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책들은 모두 금서로 만들었다. 한족들의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하고 명나라 출신 한족 여성들을 기녀로 삼는 기녀방을 운영하고 만주족의 한족 정복과 지배를 확고히 만들었다.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시대착오적인 정책을 내놓고 여기에 사치, 반란, 서방과의 부실한 외교, 그리고 희대의 탐관오리로 평가받는 화신을 20여 년간 총애하여 말년엔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빈번히 일어나고 국고가 비어 결국 청 제국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796년(건륭 60년) 말, 자신은 감히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재위 기간을 넘을 수 없다며 재위 60년째에 태상황제로 물러났지만, 막후에서 정책 최고 결정권을 행사하여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었다.
재위 기간 60년에 태상황제로서 실권을 장악한 4년까지 합치면 건륭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실권을 장악한 황제였다.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 열 번의 원정을 모두 승리로 이끈 노인)이라 칭하고 그렇게 불리기를 좋아하였으며, 중국 최후의 태평성세인 강건성세(康乾盛世)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장수한 황제이며 중국 최후의 태상황제로 그의 생모와 신분, 즉 한족의 피가 흐르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어서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민간의 전설이 많은 황제이기도 하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 ↑ 〈건륭제(乾隆帝,1711.9.25.~1799.2.7)〉, 《두산백과》
- ↑ 〈건륭제〉,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 〈건륭제(乾隆帝,1711.9.25.~1799.2.7)〉, 《두산백과》
- 트러블메이커, 〈건륭제, 그의 장수의 비결 2편: 각양각색 연회와 차(tea)를 즐긴 황제〉, 《네이버블로그》, 2023-07-19
- 리히튼, 〈건륭제의 계황후와 효의순황후 출신과 내력 일부 정리〉, 《네이버블로그》, 2024-09-29
- 내일에듀, 〈강건 성세의 정점, 건륭제의 치세 : 할아버지를 닮으려고 노력하다〉, 《네이버포스트》, 2021-09-28
- 지중혜, 〈역사상 가장 긴 통치를 한 건륭제의 인재관리술 (관엄호제 寬嚴互濟)〉, 《네이버블로그》, 2022-11-05
- 이동경 기자, 〈(신간) 건륭제, 그는 누구인가…'건륭 : 63년 4개월의 절대 권력'〉, 《연합뉴스》, 2023-12-26
- 최종석 기자,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통치했던 건륭제는 무엇을 남겼나 (책마을)〉, 《한국경제》, 2024-01-03
- 〈건륭제〉, 《위키백과》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