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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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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지

고선지(高仙芝)는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唐) 나라 장수이다.

개요[편집]

고선지 장군은 혼자서 압바스 왕조, 우마이야 왕조를 정복하고자 안서도호부에서 훨씬 서북쪽으로 떨어진 탈라스강까지 원정군을 이끌고 먼 길을 떠났으나, 탈라스강까지 가는 동안 정복전쟁을 했지만 탈라스 전투(751년)에서 패했다.

탈라스 전투에서 당 제국의 제지기술자를 통해 서방에 제지기술이 전해진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고선지의 전쟁사적 위업은 오렐 스타인의 중앙아시아 답사로 발굴되고 서양 세계에까지 널리 재인식되면서 영향을 끼쳤다. 고선지의 뛰어난 부하장군에는 봉상청, 이사업이 있었고 봉상청은 안사의 난 때 죽었지만, 이사업은 북정절도사로써 안사의 난 진압에 강력한 군공을 세웠다.[1]

고선지의 생애[편집]

고선지는 당나라 사진교장(四鎭校將) 고사계(高舍鷄)의 아들이다. 당나라의 사진절도사(四鎭節度使) · 안서절도사(安西節度使)를 지냈다. 그래서 그를 하서 혹은 안서 출신의 고구려 후예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근거는 고구려 유민이 사막곡(沙漠曲)으로 많이 유입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를 고구려인으로 보는 자료로는 ≪구당서≫ · ≪신당서≫와 ≪자치통감≫ 등이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 고선지전에는 그를 명확히 고구려인이라 하였고, ≪구당서≫와 ≪자치통감≫에는 선임 안서절도사 부몽영찰(夫蒙靈詧)이 고선지가 세운 전공을 시기한 나머지 '개똥 같은 고구려 놈'이라고 욕을 했다는 내용이 있다.

호삼성(胡三省)이 ≪원화성찬 元和姓纂≫에 의한 주(注)를 단 것을 보면, '부몽(夫蒙)'이라는 성(姓)은 본래 서강인(西羌人)이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중국에 동화된 이민족 사이에서 상대방을 업신여기고 욕할 때, 한화(漢化)의 정도를 기준으로 종족적 멸시를 표현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한 예가 호장(胡將) 안록산(安祿山)과 가서한(哥舒翰) 사이에서도 보인다. 이와 같이, 고선지는 한화된 호장이나 주변인으로부터 시기를 받을 만큼 빛나는 전적(戰績)을 세웠다. 마지막 참형을 당하였을 때도 그 배후에는 그에 대한 시기가 깔려 있다.

≪신당서≫ 권 135에는 고선지의 용모가 말쑥하고 수려하여 무장답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 사계는 그가 유완(儒緩)한 것에 대해 늘 근심을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일을 처리하는 데 영민하고 도량이 넓으며 용감하여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하서군(河西軍)에 예속되어 중급 장교로 있다가 사진교장이 되었다. 20여 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를 따라 안서로 갔다. 거기서 아버지가 세운 음공(蔭功)을 입어 유격장군이 되었으나 곧 아버지와 같은 반열에 섰다고 하며, ≪구당서≫와 ≪신당서≫에서는 모두 그를 보통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안서군에 있을 때, 절도사 전인완(田仁琬)과 개가운(蓋嘉運)은 그가 장차 큰 재목이 될 것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뒤 부몽영찰에 의하여 여러 차례 발탁되어 언기진수사(焉耆鎭守使)가 되었고, 개원(開元) 말에 이르러 병력 2,000을 거느리고 톈산 산맥(天山山脈) 서쪽의 달해부(達奚部)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가 되었다가, 곧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가 되었다.

고선지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747년 소발률국(小勃律國 : Gilghit)을 원정하고 돌아온 뒤부터였다. 즉, 747년 토번(吐蕃 : 티베트)과 사라센 제국이 동맹을 맺고 서쪽으로 팽창하던 당나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동진하자, 그는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로 발탁된다. 토번족 정벌이라는 임무를 띤 그는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오식닉국(五識匿國 : 지금의 Shignan 지방)을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어 토번족의 군사기지인 연운보(連雲堡)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계속 진격하여 험난하기로 이름난 힌두쿠시 준령을 넘고 소발률국의 수도 아노월성(阿弩越城)을 점령한 후, 사라센 제국과의 유일한 교통로인 교량을 파괴하여 그들 간의 제휴를 단절시켰다.

제1차 원정에서 불름(佛菻 : 동로마) · 대식(大食 : 아라비아) 등 72개국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사라센 제국의 동진을 저지한 공으로, 귀국하여 홍려경어사중승(鴻臚卿御史中丞)에 올랐으며 이어 특진 겸 좌금오대장군 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이 되었다. 750년 제2차 원정에 나가 사라센 제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석국(石國 : Tasuhkent 부근)을 토벌하고 국왕을 잡아 장안(長安)으로 호송하였다. 이 공으로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다.

장안의 문신들이 포로가 된 석국왕을 참살하자, 이에 분기한 서역 각국과 사라센은 이듬해 연합군을 편성하여 탈라스(怛羅斯, Talas)의 대평원으로 쳐들어 왔다. 이를 막기 위하여 고선지는 다시 7만의 정벌군을 편성하여 제3차 원정에 출전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와의 동맹을 가장한 카를루크(葛邏祿, Karluk)가 배후에서 공격하자 패배하고 후퇴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탈라스 전투'이다.

제2차 탈라스 원정에서 돌아오자, 당나라 현종은 그를 다시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에 전임시키고 우우임군대장군(右羽林軍大將軍)에 임명하였다. 755년 밀운군공(密雲郡公)의 봉작을 받았다. 755년 11월 안록산이 범양(范陽)에서 난을 일으키자, 토적부원수(討賊副元帥)가 되어 출전하였다. 이때 그가 거느린 병력은 비기(飛騎) · 확기(彍騎)와 삭방(朔方) · 하서(河西) · 농우(隴右) 등의 군대였다. 여기에 증원군을 더 보충하기 위하여 경사(京師)에서 5만 명을 선발군으로 뽑아 패전한 봉상청(封常淸)과 교대하였다. 반란군이 동관으로 쳐들어 오자 본래 방어 지역인 협현(狹縣)을 무단으로 떠나 동관(潼關)으로 이동했는데,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있던 부관 변영성(邊令誠)이 이 사실을 과장하여 밀고함으로써 진중에서 참형되었다.

고선지의 사적에 관한 자료는 ≪구당서≫와 ≪신당서≫의 고선지 열전이 있다. 이 두 문헌을 두루 살펴볼 때, 소발률(小勃律 : 지금의 Gilghit 부근)과 안서절도사 부몽영찰과의 관계 등에 관한 기록은 ≪구당서≫가 ≪신당서≫보다 상세하다. 고선지에 대한 연구로는, 프랑스의 동양학자 샤반느(Chavannes, Ed.)가 종래의 중국 문헌 이외에 새로이 서방 · 아랍 등의 문헌을 섭렵한 후 고선지가 세운 탁월한 사적을 발굴해내어 밝힌 ≪서돌궐사료 Documents Sur les Tou · Kiue Occidentaux≫가 있다. 또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 슈타인(Stein)은 고선지의 전적지를 직접 답사하였다. 이들은 모두 고선지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천재적인 전략가로 평가하였다. 또한 세계 최초로 섬유질의 제지법이 고선지에 의해 유럽에 전파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주목할 만하다. 751년 제2차 탈라스 전투에서 이들에게 잡힌 포로 중에 제지장(製紙匠)이 있었던 것이다. 우우림대장군 고선지의 주택은 장안 선양방(宣陽坊)의 서문(西門) 남쪽에 있었다. 또 영안방(永安坊)에도 별택(別宅)을 가지고 있었다.

고선지의 서역 정벌[편집]

747년부터 토번 제국의 공격으로 당군이 후퇴했던 타림 분지 일대에 안서도호부를 다시 복구하는 과정에서 고선지가 여러 차례 큰 전공을 올렸다. 고선지의 직책은 안서도호부 부도호 겸 안서사진 도지병마사였는데 자신 바로 밑에 있는 고선지가 전공을 세워 바로 황제에게 보고를 하자 여기에 위기의식을 느꼈다. 이 사태는 감군으로 있었던 환관 변영성(邊令誠)이 현종에게 서신을 보내 고선지로 하여금 안서절도사를 삼고, 부몽영찰을 하서절도사로 삼게 하며, 고선지가 부몽영찰을 이전과 같이 상관으로 대우하게 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고선지는 전공으로 당시에 명성이 높아졌으며, 747년, 파미르 산맥을 넘어 계빈[5]를 정복하여 토번(= 티베트) 세력을 쫓아내고, 750년, 재차 파미르 산맥을 넘어 토하리스탄 및 소그디아나의 서투르키스탄을 정벌하여 서역에 당제국의 권위를 확립하고 천하에 대당의 중흥을 알리는 대전공을 세웠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고선지의 서역 정벌이다.

탈라스 전투[편집]

탈라스 전투(Battle of Talas)는 751년 7월 ~ 8월 사이에 고구려 출신 당나라 절도사 원정군 고선지 장군이 지휘하는 당군이 탈라스를 침공. 이에 아바스 칼리파국, 카를루크 등 이슬람 방어군은 키르기스스탄 영토인 탈라스강 유역에서 고선지의 서역 진출을 막으려 하였다. 751년 4만 명의 이슬람 방어군 군대가 진격하였고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에 있는 탈라스강에서 고선지의 원정군이 진격하였으나 중간에 고선지의 동맹군이던 카를루크가 배신하여 이슬람 측에 붙는 바람에 병력 열세를 감당하지 못해 패전한다.

고선지의 원정군은 탈라스강까지 진군하는 과정에서 72개가 넘는 국가를 정복하면서 피로가 극에 달해있었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동맹군으로 같이 참전한 텐산 북쪽에 유목생활을 하는 유목민 카를룩족이 아바스 왕조측으로 돌아서는 등 연이은 악재로 패전했다. 당나라는 탈라스 전투 직후 안사의 난이라는 거대한 내전이 발발하면서 더 이상의 중앙아시아 원정을 중단해야 됐다. 그 직후 당나라 주둔군이 철수한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들 사이에서 이슬람 종교가 서서히 전파되기 시작했다. 또한 당나라의 기술자가 아바스 왕조로 갔는데, 그들 중에 종이를 만드는 기술을 갖고있는 제지기술자가 포함되어 있기에 제지술이 이슬람 세계에 전파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고선지에 대한 평가[편집]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서역을 정벌한 당나라 장군이라는 이유 때문에 한국에서 꽤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단, 고선지가 한때 중국 대륙에서 한민족의 기개를 떨친 민족 영웅인 것처럼 한국에서 주목받았던 것은 현재에는 상당히 비판을 받는 민족주의적인 관점이다.

고선지는 고구려 출신이긴 하지만 역사적으로 고구려부흥운동 등 고구려, 발해 및 당시 한국사와 별 관련이 있는 인물도 아니었고, 그저 당나라 현종에게 충성한 당나라의 장군으로 당대 중국사에 더 밀접한 위인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민족주의적인 평가를 떠나서 고선지는 당시 당나라에서 역사적 자취를 남긴 고구려 유민들의 활동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충분한 위인이다. 중국사에서도 고선지는 고대 중국의 중앙아시아 경략의 최선봉으로써 연구 대상이며, 고선지를 억울한 죽음으로 몰고 간 탓에 "조기에 토벌시킬 수도 있었던 안녹산의 난을 세계사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하고 치열한 안사의 난이라는 내전으로 더 장기화시켰다."는 분석도 많다. 고선지의 원통한 최후로 파급된 안사의 난과 중당 이래 번진 절도사들의 군웅할거, 오대십국, 북송 때까지 이어지는 난세를 초래했다는 역사를 생각하면 의외로 비중이 적지 않은 인물인 셈이다.

고선지의 개인적인 행적만 보더라도, 당나라에서 이민족 출신으로 입지전적인 불후의 전공을 세워 출세했다가 억울한 최후를 당한 극적이고 파란만장한 생애이기도 하다. 고구려 출신이라는 점과 억울하게 숙청당한 일화를 배제하고 외교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는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탈라스 전투 직전에 약속을 어기는 등의 행보로 인해 당나라의 외교적 입지를 깎아 먹었고 결국 중앙아시아 지역의 여론이 아바스 왕조로 넘어가는 데 기여했기 때문이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고선지〉, 《위키백과》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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