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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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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시장 지하1층에 위치한 도깨비수입상가 그릇 코너에 다양한 품목이 진열돼 있다.

도깨비시장은 사전적 의미로 상품, 중고품, 고물 따위 여러 종류의 물건을 도산매ㆍ방매ㆍ비밀 거래 하는, 질서가 없고 시끌벅적한 비정상적 시장을 말한다.

개요

도깨비시장은 생활 필수품에서 사치품에 이르기까지 미제물건, 외제품을 불법으로 공급하는 시장이었다. 도깨비 방망이를 두른 것처럼 없는 물건이 없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국전쟁 이후 막대한 손해를 입은 도깨비시장은 월남한 피난민들이 천막을 치고 상권을 장악하면서 번화하기 시작했다. 피난민들은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군복, 담요, 전투식량 등 다양한 종류의 물건을 팔았다. 1961년 박정희 정권은 밀수와 반사회적 범죄를 근절하기 위해 단속을 벌였다. 단속으로 인해 자유 시장에서 타격을 받은 상인들이 남대문 도깨비 시장에 몰리기 시작하면서 도깨비시장의 규모도 커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70년대와 80년대는 도깨비시장의 전성기였다. 80년대는 수입 개방화 조치로 인해 합법적 거래가 증가했다. 당시 도깨비 시장은 기본적 소비욕구와 함께 새로운 물건에 대한 소비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욕망의 배출구'였다. 70년대 박정희 정부는 가정의례준칙을 제정해 전통적 생활세계에 직접 개입했다. 혼인비용의 기준을 정부가 정해 그 이상 비용을 쓰게 되면 과소비, 허례허식으로 규정해 법률적으로 제약을 가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절약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지속됐다.

근검절약하는 한국인의 이면에는 사치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 한국 경제는 전후 복구 과정 이후 급격하게 성장했다. 50년대 말 한국의 연평균 실질경제성장률은 7.5%에 달했다. 1인당 국민소득 또한 증가했다. 1961년 82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이 1976년에는 799달러가 됐다. 약 10배 증가한 것이다. 1979년에는 1636달러가 됐다. 소득증가에 힘입어 한국인들은 소비욕망 역시 급격히 변화했으며 외양을 중시하는 물질주의적 소비 형태를 보이게 됐다. 80년대에는 과소비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백화점의 등장과 해외여행의 대중화로 인해 도깨비 시장도 변화했다. 도깨비 시장은 백화점 수입코너 보다 싸고 더 많은 물건을 갖춘 공급처가 됐다. 1985년 3월 28일 조선일보 기사에서는 수입품 소비를 통한 과소비가 나타난다고 전했다.

과소비 현상은 '한국병'이라 칭해지며 경제성장 과정의 일시적 부작용으로 취급됐다. 당시 언론은 한국이 일은 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미국병'을 앓고 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더불어 '광적 과소비', '과소비형 경제의 정착'을 비롯한 용어도 사용됐다. 비싼 물건을 살 때 죄의식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면서 과시할 수 있는 물건을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은 한국식 압축근대화의 결과물이며 급격한 사회변화와 더불어, 국가가 생활면에도 개입하면서 모순된 의식과 행동지향이 내부에 공존하게 된 것이다. 이는 '규율적 모더니즘의 소비문화'라 명명했다.

현재 남대문 도깨비시장의 소비자들은 다른 시장에 비해 60대 이상의 노인들이 대다수다. 지금의 도깨비시장은 쇼핑을 즐기는 공간이라기보다 특정 상품의 단순한 구입처로서 작용한다. 현재 도깨비시장의 고객은 젊은 시절 도깨비 시장에서 구매해서 쓰던 물건을 다시 사기 위해 오는 것이다.[1]

도깨비시장의 본거지

남대문시장
선혜정 창내장 풍경(1900년경)
조선후기 남대문로의 가가들(1880년대)

태조가 한양을 처음 건설할 때 종로의 도로변 양측에 시전을 만들었는데, 관립 상가나 다름없었다. 보통 육의전이라 했는데, 그들은 특권을 갖고 있었다. 민간인이 아무 데고 시장을 만들지 못하게 하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가 되자 한양 도처에 이미 난전이 만개했다. 말하자면 난장(亂場)이 선 것인데, 이때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자리다툼을 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 난전들은 배오개(이현, 배고개) 장을 만들어냈고 칠패장을 만들어냈다. 이것들은 각각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의 근원이 되었다. 조선 후기가 되자 한양의 종로와 남대문로에는 도로를 점령한 임시 점포들이 즐비했는데, 이들을 '가가(假家)'라 했다.

조선 후기 박영효는 한양의 도로정비가 필요함을 절감하고 일본에 망명해 있던 김옥균에게 자문했다. 1882년 9월 일본으로 파견된 수신사 정사(正使, 사신 중 우두머리) 박영효는 일본에서 김옥균과 함께 치도(도로 정비)를 논의했다. 이때 김옥균이 '치도략론'을 작성해 주었다. 그리고 이른바 '가가 정리'를 하기로 했다. 그 시행은 대한제국의 이채연이 한성부판윤이 된 뒤, 한성부에 전차가 들어오기 직전에 이루어졌다.

그러면서 남대문로의 가가 상인들에게 선혜청 미곡창고를 내주기로 했다. 선혜청 창내장이 된다. 도로에서 쫓겨난 가가 상인들은 아침마다 일찍 선혜청 미곡창고 앞에 모여 돗자리 하나씩을 받아 장사를 시작했다. 선혜청 창고 앞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서로 먼저 돗자리를 받아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아우성이었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도떼기시장'이란 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니 '정상적 시장이 아닌 일정한 곳에서 상품, 중고품, 고물 따위가 도산매, 투매, 비밀 거래 등으로 북적거리는 시장'을 의미하는 도떼기시장의 원조는 남대문시장인 셈이다.

일제강점기 남대문시장은 경성부 내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상인과 고객 대부분은 조선인이었다. 이 같은 분위기를 달갑지 않게 생각했던 일본인에 의해 시장은 사라질 뻔 했지만, 다행히 경성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장으로 살아남았다.

6.25전쟁 후 남대문시장은 도깨비시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6.25전쟁 후 북한에서 내려온 피란민들도 남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군이나 미군 부대를 통해 세금을 내지 않고 물건 판매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때 관청에서 단속 나오는 소리가 들리면 장사를 하던 상인들이 어느새 '휙' 사라지는 것이었다. 멀쩡히 있던 시장이 사람들 보기에 사라진 것처럼 보이니 도깨비시장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이후 남대문시장상인연합회가 꾸려졌고 1964년 건물주와 상인들이 공동 출자한 주식회사의 형태로 이어졌다. 1960~1970년 수차례의 화재와 재건축을 겪기도 했지만 시장은 비약적 성공과 공간 확장을 이뤘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외제품과 수입품이 넘쳐나 도깨비시장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고양이 뿔 빼놓고는 다 있다'고 하니 서울 사람 아니라도 남대문시장 골목은 헤매 볼 만하다.[2][3]

동영상

각주

  1. 이영나 기자, 〈도깨비시장, 20세기 대한민국의 욕망 배출구〉, 《고대신문》, 2015-08-31
  2. 김란기, 〈도떼기시장의 원조, 도깨비시장의 본거지〉, 《서울&》, 2016-09-22
  3. 장수경 기자, 〈남대문시장, 왜 도깨비시장으로 불렀나〉, 《천지일보》, 2017-11-02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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