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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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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

동명왕(東明王)은 부여의 건국 시조이다.

개요[편집]

  • 동명왕은 부여를 건국한 초대 왕(재위년 미상)이다.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 백제의 시조로 언급되는 동명처럼, 부여 계통의 국가에서 공통되게 시조로 모시는 현상이 나타난다. 또한 북쪽의 고리국(탁리국)에서 왔다는 문헌으로 추정해 보아 북부여, 동부여의 시조일 가능성도 있다.[1] 부여는 만주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송화(쑹화)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농경과 목축을 주로 하였고, 특산물로는 말, 주옥, 모피 등이 유명하였다. 부여는 이미 1세기 초에 왕호를 사용하였고,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는 등 발전된 국가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북쪽으로는 선비족,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하고 있다가 3세기 말에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은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부여에는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이들 가(加)는 저마다 따로 행정 구획인 사출도를 다스리고 있어서,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가들은 왕을 추대하기도 하였고, 수해나 한해를 입어 오곡이 잘 익지 않으면 그 책임을 왕에게 묻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이 나온 대표 부족의 세력은 매우 강해서 궁궐, 성책, 감옥, 창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왕이 죽으면 많은 사람을 껴묻거리와 함께 묻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부여의 법으로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으며,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에는 물건값의 12배를 배상하게 하고,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한다는 것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이는 고조선의 8조의 법과 비슷한 종류임을 알 수 있다.
  • 동명왕은 《논형》(論衡) <길험>편에 전하는 부여의 시조다. 또한 고려시대 이후의 문헌에서 고구려의 시조 추모를 지칭하는 명칭이기도 하나 현재 역사학에서는 추모와는 다른 인물로 여기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북부여의 시조라고 전해지는 해모수를 계승한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졸본에 도읍을 정해 부여를 건국하고, 훗날 고구려 건국에 영향을 준 인물이라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 고주몽이 졸본부여를 계승했다고 한다. 이는 해석상의 차이로서 논란이 있는 부분이며, 졸본에 도읍을 정해 부여를 건국한 인물은 일반적으로 주몽(추모)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주몽을 부여의 건국자로 보는 이유는 단순히 이름이 동명으로 같아서 그렇게 보는 것뿐이며 이에 대한 근거가 미흡하다. 오히려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를 보면 주몽이(졸본부여에 도착하여) 졸본부여왕의 왕위를 계승했다고 나온다. 즉 졸본 도착 이전 졸본부여라는 나라는 이미 있었으며, 주몽은 졸본부여를 계승한 계승자이지 건국자는 아니었다. 또한 백제의 실질적인 건국자는 온조왕으로 이 해석이 타당하다. 고려시대 이후의 문헌에서는 동명왕과 주몽을 같은 인물로 여기고 두 사람을 구분하지 않았지만, '광개토대왕릉비' 및 '<모두루 묘지명>' 등 고구려의 금석문에서 자신의 시조를 오직 추모(주몽)로 표기하고 있을 뿐 동명이라 한 예는 없고, 고구려 당대 인물인 <연남산 묘지명>에서는 동명과 추모를 서로 다른 사람으로 구분하고 있다.[2]

동명왕의 출생[편집]

  • 《논형(論衡)》과 《위략》 등의 기록에 따르면, 동명은 북쪽의 고리국(櫜離國)에서 이주하여 부여를 건국한 인물이다. 고리국 왕이 외출을 한 사이 시중을 드는 소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기운을 받아 임신을 하였다. 왕은 소녀를 가둬두었다가 소녀가 남자 아이를 낳자 돼지우리, 마구간에 차례로 버렸으나, 돼지와 말이 아이를 품어주어 살아남았다. 왕이 아이를 신령스럽게 여겨 돌려주고 기르게 하였으니, 그 아이가 바로 동명(東明)이다. 장성한 동명이 활을 잘 쏘고 용맹을 떨치자 왕이 동명을 죽이려 하였다. 동명은 남쪽으로 도망쳐 엄호수를 건너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이후의 생애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현재 문헌으로 밝혀진 이러한 동명의 출생 및 이주 과정은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건국설화와 거의 동일하다. 이에 따라 동명과 주몽의 관계에 대해 몇 가지 견해가 있는데, 부여 시조로서의 동명을 인정하지 않고 동명과 주몽이 동일 인물이라 보는 견해와 부여 시조인 동명의 신화가 원형이고 주몽이 동명 신화를 차용한 것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

부여[편집]

  • 부여(扶餘,夫餘, 기원전 4세기~494년)는 고리국의 동명왕이 건국한 예맥족 국가이며, 영토는 지금의 창춘시 이퉁강 유역을 중심으로 솽양과 남쪽으로는 랴오닝성, 북쪽으로는 아무르강(헤이룽강)에 이르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의 마지막 왕은 잔왕이며, 494년에 고구려의 공격으로 부여는 멸망하였다. 기원전 4세기부터 여러 한민족 예맥 계열의 나라가 세워졌다. 동명왕이 세운 부여,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와 해부루가 세운 동부여, 그리고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와 그 영향을 받은 백제가 한민족 예맥 계열의 나라이다. 이들은 일찍부터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였고, 은력(殷曆, 은나라 역법)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궁궐 · 성책 · 창고 · 감옥 등 진보된 제도와 조직을 가졌었다. 신분계급은 왕과 그 밑에 마가(馬加) · 우가(牛加) · 저가(猪加) · 구가(狗加) 등 4가(四加) 등의 지배층, 그 밑에 하호(下戶)라고 불리던 읍인으로 구성된 계급의 둘로 나뉘었다. 이른바 4가는 부여 전국을 4등분한 사출도(四出道)를 각기 맡아 다스렸는데, 국도(國都)만은 왕의 직접 지배하에 있었던 것 같다. 즉 4가는 국왕의 통솔을 받지만, 4출도에서 각기 소속의 호족과 하호들을 영솔해 마치 영주(領主)와 영읍(領邑)의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 적의 침구가 있을 때는 4가가 친히 출전하고, 하호는 모두 군량을 부담했는데, 특히 국민개병제가 실시된 듯 집집이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 기원후 49년 부여는 중원에 있는 국가에 사신을 보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혼인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부여는 국력이 강하여 선대부터 한 번도 패하지 않았고 한나라 이래로 동쪽의 읍루(숙신)를 신하로서 복속시키고 있었다. 또한, 위(魏)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려 할 때 고구려의 침략을 받던 부여는 군량을 제공하였고, 부여가 선비족의 침입으로 위태로울 때 진(晋)나라는 선비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진나라의 세력이 북방 민족에게 쫓겨져 남쪽으로 천도하면서 부여는 고구려의 침략을 더욱 받게 되었다. 서쪽에는 선비족 남쪽에는 고구려의 침략을 받았으며 특히 고구려는 부여를 보호국으로 삼고 부여를 지나서 북중국을 수시로 공격하였고 많은 북중국인들은 고구려에 끌려가 노예가 되었다. 285년, 고구려 서천왕 16년 선비족 모용외에게 공격을 받아 북옥저로 도망하였다가 후에 다시 본국을 회복하기는 하였으나(이때 북옥저 지역에 일부가 남아 동부여를 형성했다.), 346년 연왕(燕王) 모용황에게 공격을 받아 쇠약해졌으며, 이후 고구려의 보호를 받다가 494년(문자왕)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부여의 시조 동명왕[편집]

  •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고구려 시조 주몽을 '동명성왕'이라 칭했다. 드라마나 소설에서도 주몽과 동명왕은 대체로 동일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고구려 때 만들어진 광개토대왕비문에는 시조 주몽이 '추모성왕'으로 기록됐다. 또 '위략'과 '후한서' 등 중국의 고대 역사서는 동명왕을 고구려가 아닌 부여의 건국 시조로 기록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 역사서를 보면 부여는 전성기 때 인구 8만 호에 사방 2천 리의 영토를 가진 큰 나라였다. 당시 인구 3만 호에 불과한 고구려보다 국력이 훨씬 강대한 나라였다. 또 한반도에서 청동기 유물인 세형동검을 사용할 때, 부여는 수준 높은 철제 무기를 사용한 군사 강국이었다.
  • 건국 신화에 따르면 부여를 세운 동명왕은 '탁리국'에서 남하해 '엄호수'를 지나 부여를 세웠다고 한다. 또 고구려 주몽이 부여 동명왕과 동일시된 것은 고구려가 부여 동명의 건국신화를 차용해 부여를 계승하는 의식을 대내외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구려뿐 아니라 백제도 성왕 때 국호를 남부여로 칭했으며, 가야와 발해는 자신들의 뿌리가 부여라는 의식이 있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동명왕〉, 《위키백과》
  2. 동명왕〉,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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