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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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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돈

이차돈(異次頓)은 신라승려로 한국 불교사상 최초의 순교자이다.

개요[편집]

  • 이차돈은 신라 법흥왕(法興王)의 근신이자 불교 순교자이다. 거차돈(居次頓)이라고도 하며, 《삼국유사》에는 염촉(厭觸 또는 猒觸), 이처(伊處), 처도(處道)라는 다른 이름 표기도 소개되어 있다. 신라의 불교 전래 과정에서 있었던 재래 종교와의 갈등을 상징하는 인물로 한국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꼽힌다. 이차돈의 가계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왕족인 것으로 추정되며, 성씨는 김씨라는 설과 박씨라는 설이 존재하며, 김씨 설에 의하면 내물왕(재위: 356년 ~ 402년)의 아들 습보 갈문왕(생몰년 미상)의 후손이고, 박씨 설에 의하면 흘해왕(재위: 310년 ~ 356년)의 후손이 된다.[1]
  • 이차돈이 죽은 뒤 일어난 기적이 조신들의 마음을 돌려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었다. 자는 염촉(厭觸), 염도(厭都), 거차돈(居次頓), 처도(處道)라고 했다.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증손이며 속성 박(朴)씨이다. 법흥왕의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근신(近臣)으로서 벼슬은 내사사인(內史舍人)이었다. 당시 법흥왕불교를 신라의 국교로 삼아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재래의 토착신앙을 신봉하는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이차돈은 신하들의 의견에 반대하여, 불교의 공인(公認)을 주장하였다. 527년 순교(殉敎)를 자청하고 나서 만일 부처가 있다면 자기가 죽은 뒤 반드시 이적(異蹟)이 있으리라고 예언하였다. 예언대로 그의 잘린 목에서 흰 피가 나오고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꽃비가 내리는 기적이 일어나 신하들도 마음을 돌렸고 마침내 527년 불교를 신라의 국교로 공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817년(헌덕왕 9) 국통(國統)·혜륭(惠隆) 등이 그의 무덤을 만들고 비를 세웠으며 이차돈의 순교를 기록하는 6각 석당을 경주 백률사에 세웠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이차돈이 528년(법흥왕 15)에 순교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는 《삼국사기》를 인용하면서도 527년(법흥왕 14)에 순교한 것으로 적혀 있다.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흥법(興法)>편에만 실려 있는데,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비(阿道碑)>에는 순교할 때 이차돈의 나이가 26세로 적혀있는 반면, 일념(一念)이 지은 <촉향분례불결사문(香墳禮佛結社文)>에는 22세라고 적혀 있어 차이가 있다. <아도비>를 따르면 이차돈이 태어난 해는 502년 무렵이 되고, <촉향분례불결사문>을 따르면 506년으로 추산할 수 있다.[2]
  • 이차돈은 신라의 승려로, 이름은 염촉(厭髑) 혹은 거차돈(居次頓)이라고도 불린다. 속성(俗姓)은 박(朴)씨 또는 김(金)씨인데, 일반인들은 아마도 다들 성이 이씨고 이름이 차돈인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지만 삼국유사에 나와있는 대로라면 성이 박 또는 김이고 이름이 이차돈인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이사부가 있다. 신라가 불교 국가가 되고 이후에도 계속 한국 불교가 이어지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신라 당대에도 신라십성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불교가 국가적으로 공인되기 전 신라에는 고유 신앙이 강하고 폭넓게 자리잡혀 있었다. 박혁거세김알지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거나 알에서 태어났다거나 계룡이 지켜줬다는 신화에서 신라에 천신 신앙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하늘의 후손이라는 사상은 배타적인 선민사상이 포함될 수밖에 없었고, 신라의 정복으로 복속된 피정복민들은 신라에 공감하고 흡수되기 어려웠다. 신라가 경주와 영남을 넘어 큰 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부분이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불교를 국교화하려는 법흥왕에 맞서 신라 귀족층의 절대다수는 기존의 토착신앙을 고수하며 외래 종교인 불교를 반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차돈은 귀족 계층 중에서는 사실상 혼자서 불교 도입을 지지하였다. 불교가 공인되는 과정은 귀족들의 반대로 인해 험난했지만, 이차돈의 순교 이후 신라는 빛의 속도로 독실한 불교 국가로 탈바꿈했다. 법흥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진흥왕은 말년에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처럼 하고 다녔고, 아들들과 친척의 이름을 석가모니의 가족 이름으로 지어버릴 정도였다. 보편 종교의 힘으로 백성들의 사상을 통합해 국왕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한 행정 군사 체제를 갖출 수 있었으며, 이는 진흥왕 대의 폭발적인 국력 신장과 더 나아가 삼국통일전쟁 승리까지 바라보는 원동력이 됐다. 이런 결과를 보면 이차돈의 순교로 확실하게 역사가 바뀐 셈이다. 9세기 통일신라에서는 이차돈을 성자로 칭송하며 추모하는 결사가 유행하기도 했는데, 기타 문단에 있는 이차돈 순교비 유물도 이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3]
  • 이차돈은 신라의 불교순교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학문과 무예를 열심히 닦아 장차 나라를 이끌 큰 인물이 될 것이라며 주위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법흥왕의 근신(近臣)으로서 벼슬이 내사사인(內史舍人)에 올랐다. 그가 장성하자 왕은 그를 공주와 결혼시켜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그가 다른 여인을 사랑하고 있다고 하자 왕의 노여움을 사서 고구려로 쫓겨났다. 고구려에서 불교를 알아 승려가 되었으며, 불법의 빛을 모든 신라 백성들에게 전파하여 그들을 미망에서 벗어나게 하여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귀국하였다. 법흥왕 앞에서 설법을 하였고, 그 후 왕은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572년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國敎)로 하고자 했으나 재래의 토착신앙에 젖은 조신(朝臣)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신라에 불교를 전파한 그는 마땅한 절을 지을 터를 물색하던 중 천경림(天鏡林)이란 명당을 찾았으나, 그곳은 당시에 왕성하던 재래토착 신앙에서 신성시하는 지역이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아 마침내 그들의 모함을 받아 주살(誅殺) 당하게 되었다. 그는 만일 부처가 있다면 자기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적(異蹟)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과연 예언대로 잘린 그의 목에서 흰 피가 나오고 하늘이 컴컴해지더니 꽃비가 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 후 신하들도 마음을 굽혀서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다. 817년(현덕왕 9) 국통(國統) 혜륭(惠隆)은 그를 찬양하는 비를 세웠다.

이차돈순교비[편집]

  • 이차돈순교비(異次頓殉敎碑)는 불교를 제창하다 527년(法興王 14)에 순교한 이차돈(異次頓)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그가 순교한지 290년이 지난 818년(憲德王 10년)에 세운 6면 비석이다. 비석의 5면에는 정간(井間)을 치고 글씨를 새겼으나 마멸이 심하여 읽기 어렵다. 나머지 1면에는 이차돈의 순교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순교장면은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는 흰 피가 솟아오르는 장면이 좁은 석면(石面)에 간결하면서도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비석은 받침돌과 육각 기둥 모양의 몸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높이는 106㎝, 각 면의 너비는 29㎝이다. 원래 지붕 모양의 옥개석(屋蓋石)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남아 있지 않다. 받침돌은 네모난 석재 윗면을 육각형으로 도드라지게 높이고 윗부분에 연꽃무늬를 새겼다. 육각형의 한 면에는 이차돈의 순교 장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땅이 진동하고 꽃비가 내리는 가운데 잘린 목에서 피가 솟아오르는 장면이 간결하면서도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나머지 다섯 면에는 각 면에 바둑판처럼 가로 세로로 교차하는 7행 25칸의 정간(井間)을 치고 그 안에 한 글자씩 해서체로 음각(陰刻)하였다.
  • 이차돈순교비는 신라 때 불교 공인을 위하여 순교한 이차돈(異次頓)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비석. 이차돈공양탑(異次頓供養塔)·이차돈공양당(異次頓供養幢) 또는 백률사석당(栢栗寺石幢)이라고도 한다. 527년(신라 법흥왕 14)에 불교를 공인받기 위하여 순교한 이차돈을 추모하여 그가 순교한 지 290년이 지난 818년(헌덕왕 10)에 건립한 것으로, 조각과 비문(碑文)이 결합된 비상(碑像)의 일종이다. 원래 경주 백률사(栢栗寺)에 있었으나, 1914년 백률사가 일시 폐허가 되자 경주 시내의 고적보존회로 옮겼다. 고적보존회는 1926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바뀌었다가 광복 후에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을 거쳐 1975년 지금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승격하였다. 비문은 심하게 마멸되어 읽기 어려우나 마멸되기 전에 탁본(拓本)한 것이 여러 책에 실려 있고, 석당기(石幢記)를 목판에 새긴 《흥린군신각금생서(興隣君新刻金生書》《원화첩(元和帖)》이 전하여 대강의 내용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법흥왕이 백성들을 위하여 불법(佛法)을 일으키려고 하자 이차돈이 고의로 잘못을 범한 것으로 꾸며 자신의 목을 치게 하여 순교한 일, 그의 목을 베자 목에서 흰 우유(白乳)가 한 마장이나 솟구치면서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땅이 흔들린 일,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장례를 치르고 사당을 세운 일 등을 묘사하고 있다. 현존하는 불교 공인에 관한 사료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며, 통일신라시대의 복식(服飾) 및 조각사를 연구하는 데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이차돈의 가계[편집]

  • 이차돈은 삼국시대, 신라에 불법을 널리 알리려던 법흥왕을 위해 흥륜사 공사 강행에 대한 책임을 지고 순교한 법흥왕의 신하이다. 이차돈(異次頓)은 신라 법흥왕 때 귀족들이 흥륜사 건립 공사를 강행하는 것에 항의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목숨을 바친 법흥왕의 측근 신하이다. 이차돈을 사형할 때 흰 피가 솟아나고 꽃비가 내리는 이적이 일어나 흥륜사 건립 공사를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9세기에 들어 이차돈을 추모하는 결사가 형성되었다.
  • 이차돈(異次頓)은 거차돈(居次頓) 또는 염촉(猒髑)이라고 한다. 그의 성은 박 씨(朴氏)이다. 부친의 이름은 미상이지만 조부는 아진종(阿珍宗)으로 습보갈문왕(習寶葛文王)의 아들이었다.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비(阿道碑)」에는 이차돈의 부친은 길승(吉升), 조부는 공한(功漢), 증조부는 걸해대왕(乞解大王)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법흥왕과 이차돈은 당숙과 조카 사이가 된다.

삼국사기의 이차돈[편집]

  • 『삼국사기』에는 불교를 공인하였다는 기록과 함께 김대문의 『계림잡전』(鷄林雜傳)을 인용하여,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할 당시 대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고 이때 이차돈이 나서서 불교를 공인할 것을 적극 주장하며 자신을 죽임으로써 왕의 위엄을 세우고 신하들의 반대를 가라앉힐 것을 청했다. 이에 왕은 대신들을 모아 놓고 불교를 공인할지의 여부를 의논하였고, 대부분의 대신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이차돈이 나서서 찬성하였다. 왕은 대신들이 모두 반대하는데 이차돈 혼자서 찬성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그를 처형할 것을 명했다. 이차돈은 죽기 직전에 "부처께서 계신다면 내가 죽은 뒤 이적(異蹟)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의 목이 베여 떨어지는 순간 붉은색이 아닌 흰색의 피가 한 길 넘게 솟구쳤고,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꽃비가 내렸다. 대신들은 이후 불교를 받아들이는 것에 어떠한 반대를 하지 못했고,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차돈의 상훈과 추모[편집]

  • 남간사(南澗寺)의 승려 일념(一念)이 지은 「촉향분례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에는 법흥왕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찰 창건을 강행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법흥왕이 무기와 형을 집행하는 도구들을 늘어놓고 위엄을 갖춘 다음, 신하들을 불러 '자신이 명한 사찰의 창건을 누가 지체시키는가'라며 추궁하였다. 신하들이 두려워하며 왕명을 거역한 일이 없다고 할 때, 왕은 사인 이차돈을 불러 꾸짖고 그의 처형을 명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신라의 불교 공인과 관련해 이차돈뿐만 아니라 법흥왕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향전(鄕傳)』에서는 당시 상황을 조금 다르게 전하고 있다. 염촉, 즉 이차돈이 왕명이니 절을 지으라고 사람들을 속이자 신하들이 왕에게 이를 간하였고, 화가 난 왕이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냈다며 이차돈을 처형하였다는 것이다. 즉 「촉향분례불결사문」은 이차돈과 함께 법흥왕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데 비해 『향전』은 법흥왕을 소극적으로 묘사하며 이차돈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있다.
  • 이차돈이 순교한 뒤, 해마다 그의 기일에 맞추어 많은 사람들이 흥륜사(興輪寺)에 모여 그를 추모하였다고 한다. 흥륜사 금당에는 신라 십성(十聖)의 소상(塑像) 중 이차돈의 소상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차돈을 위해 자추사(刺楸寺)가 건립되기도 하였다. 9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차돈 순교비는 경주의 백률사(栢栗寺)에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영흥사터에 복원한 경주 흥륜사 금당에는 이차돈을 포함한 신라 십성의 영정(影幀)이 봉안되어 있다. 또한 영흥사터 뜰에는 새로 조성한 6면의 석당 백률사 석당기가 세워져 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이차돈〉, 《위키백과》
  2. 이차돈(異次頓,502/506~527)〉, 《두산백과》
  3. 이차돈〉, 《나무위키》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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