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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 (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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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adal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1월 21일 (목) 13:5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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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

박연(朴淵)은 네덜란드에서 귀화한 조선의 무관이다. 본명은 얀 얀서 더 벨테브레이(Jan Janse de Weltevree)이고, 귀화 후 하사받은 조선 이름은 박연이다.

개요[편집]

  • 박연은 조선 인조 때에 귀화한 네덜란드인이다. 일본을 향하던 중 제주도에 상륙하였다가 체포되었고 이후 조선에 귀화하였고 여생을 마쳤다. 본명은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Jan. Janse. Weltevree)이다. 홀란디아호 선원으로 아시아에 왔다가 1628년 우베르케르크호(Ouwerkerck)로 바꿔 타고 일본 나가사키를 향하여 항해하던 중 태풍에 밀려 제주도에 해안에 표착되었다. 동료 D.히아베르츠, J.피에테르츠와 함께 식수를 구하려고 해안에 상륙하였다가 관헌에게 붙잡혀 서울로 호송되었다. 이들 세명은 조선에 귀화하여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무기를 제조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조선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출전하였고 박연을 제외한 두 사람은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박연은 포로가 된 왜인들을 감시·통솔하는 한편 명나라에서 들여온 홍이포(紅夷砲)의 제조법·조작법을 조선군에게 지도하였다. 1653년 H.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하였을 때 제주도로 내려가 통역을 맡았고 그들을 서울로 호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하멜이 도감군오(都監軍伍)에 소속되자 그를 감독하는 한편 조선의 풍속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박연은 조선여자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선에서 여생을 마쳤다. 박연의 고향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북쪽 드 레이프(De Rijp)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1]
  • 박연 또는 얀 얀스 벨테브레이(네덜란드어: Jan Jansz Weltevree)는 조선 후기의 무신이다. 네덜란드인으로 인조 통치 시 유럽인 최초로 귀화하였다. 1627년 제주도에 표착하였고 병자호란에도 참전하였다. 한반도에 처음으로 유럽을 소개했다고 전해진다. 공식적으로 귀화인이 된 박씨다. 벨테브레이는 네덜란드에 후손들이 있었다. 벨테브레이의 아버지도 네덜란드 사람이다. 박연과 결혼한 여성의 집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단지 박연과 결혼할 위치의 집안에 대해서는 박연이 조선에 와서 살아온 행적을 보면 추측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박연의 집안과 박연의 부인의 가문에 대한 어떤 역사적 기록이 상세하게 구체적으로 남겨져있지 않다. 그리고 박연과 결혼한 여자집안에 대한 추론도 결국 정확하지 못하다. 박연이 원산 박씨의 시조라고 하지만 그 계통이 후대로 연결되지 못하였는지 원산 박씨에 대한 기록이 매우 적다.[2]
  • 박연은 조선 후기 네덜란드에서 조선에 귀화한 유민이다. 네덜란드 사람으로 원명은 벨테브레이(Weltevree,J.J.)이다. 한자 표기는 '朴燕' 또는 '朴延'으로도 쓴다. 네덜란드 리프 지방에서 태어나 1626년 홀란디아(Hollandia)호 선원으로 동양에 왔다가 이듬해 우베르케르크(Ouwerkerk)호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동료 선원 히아베르츠(Gijsbertz,D.)·피에테르츠(Pieterz,J.)와 함께 음료수를 구하려고 상륙했다가 조선 관헌에게 잡혀 1628년(인조 6)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 뒤 동료 2인과 함께 훈련도감에서 총포의 제작·조종에 종사하였다.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훈련도감군을 따라 출전, 분투했고 이때 히아베르츠와 피에테르츠는 전사하였다. 1653년(효종 4) 하멜(Hamel, H.) 일행이 표류해 도착했을 때는 제주도에 가서 통역을 맡으며 이들을 지휘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병영(兵營)으로 이송되기까지 3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조선의 풍속과 말을 가르쳤다. 큰 키에 노란 머리, 푸른 눈을 지녔으며 겨울에 솜옷을 입지 않을 정도로 건장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견문한 동양 각국의 풍물과 천기(天氣) 관측에 대해 즐겨 이야기하고, 자주 선악(善惡)과 화복(禍福)의 이치를 말해 도자(道者)와 같은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개신교의 나라 네덜란드 태생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한 것이 아닌가 한다. 서울에서 조선 여자와 혼인해 1남 1녀를 두었는데, 이들의 거취에 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3]
  • 박연은 조선 중기 제주에 표착하여 귀화한 네덜란드인이다. 네덜란드 리프 지방에서 태어났다. 한국명은 박연, 중국식 이름은 호탄만(胡呑萬), 원명은 벨테브레(J.J.Weltevree)이다. 조선 여자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1626년(인조 4) 홀란디아(Hollandia)호 선원으로 출항하여 1627년 우베르케르크호(Ouwerkerk)를 타고 일본으로 향하던 중 풍랑으로 제주에 표착하였다. 1628년(인조 6) 9월에 동료 선원 히아베르츠(D.Gitsbertz), 피에테르츠(J.Pieterz)와 함께 음료수를 구하려고 상륙하였다가 관헌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히아베르츠와 피에테르츠와 함께 훈련도감에서 총포의 제작 및 조종에 종사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훈련도감 군사를 따라 출전하였는데, 이때 히아베르츠와 피에테르츠는 전사하였다. 1653년(효종 4) 8월 제주에 표착한 네덜란드의 하멜 일행의 통역을 하기 위해 제주에 파견되었다. 박연은 25년 동안이나 네덜란드어를 사용하지 않아 통역이 불가능하였으나 1개월 뒤에는 겨우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하멜 일행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전라도 병영으로 이송되기까지 3년 동안 같이 지내면서 조선의 말과 풍속을 가르쳤다. 또한 자신이 견문한 동양 여러 나라의 풍물과 천기(天氣) 관측에 대하여 즐겨 이야기하고, 자주 선악과 화복의 이치를 말하여 도인과 같은 면모를 보였다. 개신교의 나라 네덜란드 출생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4]

박연의 생애[편집]

  • 박연은 알크마르의 마을인 드레이프(네덜란드어판)에서 태어났다. 1626년(인조 4) 홀란디아(네덜란드어: Holandia) 호의 승무원으로 취업하여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향하였고, 1627년(인조 5년)에 사략선 아우에르케르크(네덜란드어: Ouwerkerck) 호의 Hoofdman(Captain or 과장을 의미)으로 부임하여, 중국 상선을 나포하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본부가 있는 바타비아(네덜란드어판)로 항해하던 도중 풍랑을 만나 부하 두 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했다. 부하 디럭 헤이스버르츠(네덜란드어: Direk Gijsbertz) 및 얀 피터르 페르바스트(네덜란드어: Jan Pieter Verbaest)와 함께 땔감과 음료수를 구하러 제주도에 상륙했다가 관헌에게 붙잡혀 한양에 호송되고 훈련도감에서 근무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들이 남만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나중에서야 그들이 네덜란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훈련대장 구인후의 지휘를 받아 항복해 온 일본인과 포로가 된 청나라 군인을 통솔 감시했고, 명나라에서 수입한 홍이포의 제작법·조종법을 지도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세 사람은 모두 출전하여 박연을 제외한 두 사람은 전사하였다.
  • 1648년(인조 26년) 8월 25일 인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정시를 설행하여 문과에 이정기 등 9인을, 무과에 박연 등 94인을 뽑았다'라고 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의 '본조등과총목'에도 박연이 장원으로 급제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박연은 벨테브레이로 여겨진다. 박연은 조선 여성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낳았다. 《하멜 표류기》에 따르면, 1653년(효종 4년) 헨드릭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이르렀을 때 파견되어 하멜 등을 서울에 호송하고 하멜이 도감군오(都監軍伍)에 소송되자 이를 감독하는 한편 한국의 풍속을 가르쳐 주고 통역했다고 한다. 박연은 겨울에 솜옷을 입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으며, 동양 각국의 풍물 및 선악(善惡), 화복(禍福)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의 출신을 고려할 때 개신교의 교리를 조선인들에게 설파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기도 하다.

최초로 조선인이 된 서양인[편집]

  • 제주도 해안에 나타난 서양의 배와 서양인. 때는 1627년, 정묘호란이 끝난 직후였다. 네덜란드 사람 세 명이 제주도에서 관리들에 의해 붙잡혔다. 이중 한 명의 이름은 네덜란드어로 벨테브레이(Jan J. Weltevree). 나중에 박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바다에서 길을 잃은 표류자를 본 제주도 관리들은 이들을 부산에 있는 왜관으로 보냈다. 왜관은 당시 조선이 일본과의 외교를 관리하던 외교 기관이었다. 원래 그 당시 서양인 표류자들은 보통 중국으로 보내졌고 청으로 보내지면 그곳에서 자기 나라를 찾아갔다.
  • 처리가 애매해진 서양인들. 원래대로라면 벨테브레이 일행은 청으로 보내져야 했다. 하지만 정묘호란으로 나라가 어수선한 상황에서 이들을 적국이었던 청에 보내기도 애매했다. 하지만 왜관에서도 벨테브레이 일행을 받아 주지 않았다.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조선은 이들이 조선에 머무는 것을 허락했다. 조선 관리들은 곧 벨테브레이 일행이 대포를 만들 줄 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들을 한성으로 보냈고 훈련도감에 근무하게 했다. 또 병자호란에도 참여해 전투를 치르게 했다. 벨테브레이만 목숨을 구하고 나머지 두 명은 병자호란 중 전사하고 말았다.
  • 조선인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벨테브레이는 조선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름도 조선식 이름인 박연으로 바꾸었다. 『인조실록』에 보면 무과에 박연이 뽑혔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제 박연은 당당하게 조선의 백성으로 살게 된 것이다. 무과에 응시해 급제한 박연을 불러 인조는 특별한 임무를 주었다. 조선의 화포를 좀 더 우수하게 개량하는 것과 조총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효종 대에 박연은 훈련도감에서 북벌 정책의 핵심적인 역할인 신식 무기 제조 임무를 맡았다.
  • 조선 여인과 결혼해 조선에서 산 벨테브레이. 고향에 가고 싶던 박연은 때때로 일본으로 보내 달라고 청했지만 왕은 유능한 박연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후 박연은 조선 여인과 결혼해 1남 1녀를 두었으며, 원산 박씨의 시조가 되었다. 또 효종 대에 표류해 온 또 다른 서양인 하멜 일행의 통역을 맡기도 했다.

동영상[편집]

각주[편집]

  1. 박연(朴淵/朴燕/朴延,?~?)〉, 《두산백과》
  2. 박연 (1595년)〉, 《위키백과》
  3. 박연 (朴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박연〉,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자료[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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