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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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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

위만(衛滿)은 고조선의 한 국가인 위만조선의 창건자이다.

개요

연나라 왕의 부장으로 있던 위만은 혼란기에 1천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의 준왕(準王)에게 거두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뒤 세력을 키워, 왕위를 빼앗고 도읍을 왕검성(王儉城)에 정했다. 위만조선은 고조선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나라로 꼽힌다.

《사기(史記)》에서는 효혜고후시(孝惠高后時:B.C.194~B.C.180)라고 하였다. 위만이 나라를 세울 무렵 한나라는 건국 초기여서 국가적인 체계가 제대로 서지 못했고, 흉노족의 계속적인 위협을 견제해야 했으므로 조선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정책을 폈다. 위만은 한으로부터 병력과 물자를 원조받아 세력을 신장시키면서 흉노족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또 이웃의 작은 마을과 진번(眞番), 임둔(臨屯) 등을 아울러 복속하여 수천리에 달하는 지역을 다스리게 되고 주위의 여러 씨족사회를 통합하여 갈등을 줄이고 정치의 안정을 도모했다. 위만은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였으며 위만조선은 손자 우거왕에 이르기까지 고조선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나라로 꼽힌다.[1]

위만의 생애

위만의 재위 기간은 B.C.194년~B.C.2세기로 추정된다. B.C.206년 중국 한(漢)나라 고조(高祖)는 중국을 통일한 후 노관(盧綰)에게 연나라를 다스리게 했는데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위만의 출신에 대해서는 연나라 사람이라고 보기도 하고 고조선계 유민으로 보기도 한다.

기원전 202년경 중국을 통일하고 전한(前漢)을 성립한 한고제는 권력에 위협이 되는 통일 공신들을 토사구팽하기 시작했다. 한고제의 어릴 적 친구이자 공신인 연왕(燕王) 노관(盧綰)은 자신 역시 숙청될까 두려워 먼저 모반했다 흉노로 달아나는데 이렇게 연나라 땅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위만은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연나라 땅에서 동쪽에 인접한 고조선으로 망명하였다.

위만이 노관의 수하였다는 설 역시 있으나 사마천의 <사기>에는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연왕 노관이 반역해 흉노로 들어갔고 위만은 망명했다) 라고 나와있다. 이는 연왕 노관이 모반해서 흉노로 갈 때 위만이 망명했다는 내용인데 이 문구를 가지고 위만이 노관의 수하였다고 무작정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다. 건조하게 받아들이자면 노관이 흉노로 들어갈 때 노관의 수하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위만 역시 망명했다는 얘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위만은 고조선의 준왕에게 서쪽의 번병(藩屛)이 되기를 청하였고 준왕은 이에 위만을 박사(博士)로 삼아 100리의 땅을 주고 서쪽 변방(상하장)을 지키게 하였다. 이후 위만은 서쪽 변방을 지키면서 연의 망명한 무리들을 규합하여 계속 세력을 키우다가 기어코 기원전 194년 무렵 반란을 일으켜 왕검성을 함락해 자신을 받아준 준왕을 남쪽으로 축출시키고 스스로 고조선의 군주가 되어 위만조선을 열었다. 위만은 진번(眞番)과 임둔(臨屯) 등 주변의 작은 집단들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위만조선의 영토를 크게 넓혀 현재의 북한에 해당하는 수준의 영역을 조선의 이름 아래 두는 전성기를 열게 된다. 이후 위만조선은 전한과 남쪽의 진국(辰) 사이에서 교통을 막고 직접적인 교역 내지 조공을 방해하였다. 이로 인해 한나라는 기원전 128년 위만조선 근방에 창해군을 설치한 후 얼마 안 가 폐지하기도 했다. 이후 고조선은 결국 손자 우거왕 대에 멸망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위만과 위만조선의 등장은 고대 한국에서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정치 집단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위만은 준왕의 신임을 얻어 서쪽 변방을 지키게 되었는데 위만은 점차 유망민과 결탁하여 자기 세력을 키웠다. 마침내 위만은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거짓으로 한나라의 병사가 십도로 쳐들어오니 들어가 왕을 호위하겠다고 하고는 갑자기 군사를 몰아 준왕을 쳐서 왕위를 빼앗고 도읍을 왕검성(王儉城)에 정했다. 위만은 준왕 때의 통치체제를 그대로 이어받아 국호를 그대로 조선이라 불렀다.

위만조선

위만조선(衛滿朝鮮)은 위만(衛滿)이 집권한 이후 멸망할 때까지의 고조선(古朝鮮)을 가리킨다.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역사발전 단계상에서 후기(後期)에 해당하며, 일반적으로 왕조의 개창자를 국명으로 칭하지 않는 점에서 '위만조선'이라는 용어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위만왕조'나 '위만집권기의 고조선'이라는 개념이 보다 합리적이다.

위만조선에 대해서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반고의 《한서(漢書)》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조선왕 위만은 옛날 연나라 사람으로, 요동 일대로 망명하였다가 다시 무리 천여 명을 모아 동쪽으로 도망하여 준왕(準王)의 외신(外臣)으로 있었다. 이후 차츰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의 오랑캐 및 옛 연·제 지역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한다. 그때가 바로 혜제(惠帝:BC 195~BC 188) 때이다. 이처럼 위만왕조는 이전 준왕(準王) 단계의 통치체제를 이어받아 국호를 그대로 '조선'으로 하고, 위만을 중심으로 하는 유이민 집단과 토착 고조선인 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 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한때는 위만조선을 중국인 이주자들이 지배하는 식민지정권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점은 위만왕조 정치구조의 연구 결과 그것이 조선 독자의 체제를 갖추고 있고, 또한 지배세력의 주요 부분이 토착인이라는 점에서 부정되고 있다.

위만 집권 시기는 고조선의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시기이다. 위만은 중국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외신(外臣)의 임무에 대한 대가로 군사적 위세와 재물을 얻어 주변 지역을 침략하고, 진번과 임둔(臨屯) 등도 모두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 뒤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右渠王) 때에 이르러서는 더욱 강성해져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러한 고조선의 세력확장에 대한 불만과 고조선이 흉노(匈奴)와 연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漢)은 마침내 BC 109년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동원해 고조선을 침략하였다. 고조선은 끈질기게 저항하였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지배층의 분열이 나타났다. 결국 BC 108년 우거왕(右渠王)이 살해되고 왕검성(王儉城)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

위만조선은 한의 대군과 맞서 1년 가까이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강하였다. 이 당시의 부장품으로 압도적으로 많이 발견되는 것이 실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단검·창·도끼들이며, 또한 전차로 추측되는 거여구(車輿具)라는 점에서 이 당시에 고조선사회가 정복전쟁이 잦았고 지배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위만 집권기에는 철기문화의 보급이 한층 진전되면서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발전을 기반으로 정치적 통합도 한 단계 진전되어 나갔다. 이 당시 고조선사회는 이미 상당한 정도의 계급분화가 진척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노비제도의 존재와 사유재산에 대한 법적 보호조처를 보여주는 팔조금법(八條禁法)에서 대표적으로 확인된다. 이를 통해 위만조선의 사회구성은 노비·촌락의 일반민·귀족으로 대별됨을 알 수 있다. 귀족은 노예와 토지·재화 등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따로 지니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촌락공동체를 대표하는 수장으로서의 면모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노비는 이 시기에 상당수 존재하였으나 많은 수의 노비를 사역하는 대규모의 노비경영은 발달하지 않았다. 이는 노예제 경영이 발달된 사회에서 보이는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이나 큰 도시의 발달 등의 면모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촌락공동체의 일반민은 기본적인 생산활동을 담당했는데, 이들은 지역의 경제발전 상태에 따라 그 존재 양태가 균일하지 않았고, 경제적 상태와 피수탈 정도에서 차이를 나타냈다.

위만조선은 사회발전에 따른 국가적 성장과 여러 사회구성원을 통치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 지배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사료에는 상(相)·대신(大臣)·장군(將軍)·비왕(裨王) 등의 관직을 지닌 관료들이 존재하였음이 보인다. 즉 위만조선은 중앙에는 세습적 지위를 누리던 왕(王)을 정점으로 하여 그 밑에는 각 지역공동체에 상당한 기반을 유지하고 있는 수장(首長)들을 중앙 관직체계에 편입시켜, 문관직인 상직(相職)과 무관직인 장군직(將軍職)으로 편제하여 국가적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정치적 지배체제를 갖춘 고조선은 국가적 통치를 위해 일정 지역들을 지역적 구분을 두고 통치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었음도 확인된다.

위만조선의 국가 형태는 최고 수장인 국왕을 정점으로 하여 재지수장층의 누층적 지배를 기본으로 하는 국가형태였다. 그러나 위만조선 단계에는 충분한 관직 및 통치체제는 발전되지 못하였다. 다만 우세한 병기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지역에 대한 정복을 통해 광역의 영토를 가졌고, 정복지역에 대해 공납적 지배관계를 실현하는 국가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는 삼국 초기까지 이어지다가 4세기 이후 고대국가가 완성되면서 공동체적 제약을 극복하고 왕에 의한 전제적 고대국가가 완성되었다.

삼한정통론

삼한 정통론은 마한정통론이라고도 불린다. 이 이론은 조선 후기 국학 계열의 실학자들에 의해 발흥한 이론으로 기자조선이 위만조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이론이다. 이유는 위만은 찬탈자로 유교적 사상에 근거하면 적통으로 볼 수 없고 적통인 준왕이 쫓겨 내려가 마한의 군주가 되었기 때문에 기자조선의 적통은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족보들의 내용으로는 준왕의 씨족은 기씨(箕氏)에서 한씨(韓氏)로 바뀌었다는 내용들이 있다. 중국 기록에서는 그전부터 바뀐다고 나온다. 그래서 기자의 혈통과 유지는 마한, 더 넓게는 삼한으로 계승되었고 삼한은 한국사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은 현대적인 실증 사관은 아니고 조선시대의 관념론적 사관이라 할 수 있다.

동영상

각주

  1. 위만(衛滿)〉, 《두산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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