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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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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

덩샤오핑(중국어: 邓小平 dèng xiǎo píng)은 중국의 정치가이다. 마오쩌둥과 화궈펑 이후, 중국 공산당의 실권을 장악한 중국 최고 지도자이다.

개요

덩샤오핑은 중화인민공화국의 3대 최고지도자이자 군사 전력가, 정치인, 외교가, 혁명가, 사상가이다. 1978년부터 1983년까지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 1981년부터 1989년까지는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역임했다. 중국공산당 당료 2세대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20세기와 21세기의 아시아 위인 중 1위로, 전 세계와 전 인류의 지도자이자, 영도자로 평가되는 존재이다.[1]

덩샤오핑은 문화혁명으로 피폐해진 중국을 다시 재건하기 위해 시장주의 경제를 도입하고 개방정책을 추진하였다. 과감한 개혁조치를 단행하여 중국경제를 크게 성장시켰다. 1989년 6월 천안문사건으로 그의 정치적 위기를 겪게 되지만 무력탄압으로 수습하였고, 무력진압을 반대한 자오쯔양을 해임하였다. 덩샤오핑은 이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덩샤오핑의 생애

덩샤오핑은 1904년(광서 30년) 청나라 쓰촨성 광안의 덩원밍의 첫 아들로 탄생했다. 유복한 집안 출신이며 덩원밍은 아들의 이름을 공자보다 나은 사람이 되라는 뜻의 선성(先聖)으로 지어주었고, 다섯 살 때에 서당 훈장이 희현으로 고쳐주었다.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 당원이 된 후에 만들어낸 별명이다. 아버지가 지주였기 때문에 먹고 살 걱정이 없었으므로, 덩샤오핑은 낙관주의 곧 모든 일을 좋게 생각하기와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원만한 성정을 가지고 있었다. 낙관주의는 정치인으로서의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해주었고, 원만한 성격덕분에 공산당에서 적이 없었다.

덩샤오핑은 유학을 마치고 중국공산당 당원으로서 혁명에 참여했다. 1933년 중국공산당에서는 소련파와 마오파의 당권경쟁이 치열했는데, 마오쩌둥이 지면서 덩샤오핑도 실각했다. 하지만 소련파의 이론은 중국에 맞지 않았다. 소련파는 도시 노동자계급이 혁명의 중심이라면서 도시 무장투쟁을 시도했으나, 도시 노동자 계급이 없는 중국에서는 실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중국 인민의 대부분이 농민이라며 농민소비에트를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주장이 맞다는 것이 입증되자, 1935년 대장정 도중에 열린 회의에서 마오쩌둥의 이론(마오이즘)이 인정되었다.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이래 1929년 제7군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4년 대장정에 참여하였다. 1945년 공산당 중앙위원이 된 후, 정무원 부총리, 재정 부장, 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서기처 총서기, 중소 회담 중공측 대표단장 등을 역임했다. 1968년 문화 대혁명 때 박해를 받기 시작한 이래, 여러 번 마오쩌둥의 박해를 받기도 했지만 기적적으로 복귀, 중화인민지원군 총참모장,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등을 지냈고 1981년 6월 28일부터 1989년 11월 7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최고권력자로 군림하는 한편, 1982년 6월 28일부터 1983년 3월 15일까지는 중공 과도정부 국가원수 권한대행직에 있었으며 1983년 3월 15일부터 1983년 6월 18일까지 후야오방(胡耀邦)이 마지막 후임 중공 과도정부 국가원수 권한대행직(당시 중공 국가부주석: 우란푸)을 수행하였고 1983년 6월 18일을 기하여 8년 5개월 남짓의 중공 과도정부 체제(1975년 1월 17일~1983년 6월 18일)가 종식되었으며 1983년 6월 18일, 리셴녠(李先念)이 정식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취임하였다. 덩샤오핑 취임 이후 중국의 경제 성장은 세계 1위를 달성했으며, 그 경제적인 효과는 약 2경 원에 달하였다. 동시에 중국 내부의 부패를 없애기 위해서 엄타(嚴打)를 엄포했다.

1983년 이후 국가원수직과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직에서 물러났지만 군사위원회 주석직에 머무르며 실권을 쥐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의 강경 진압을 주관하는 한편, 한때 국가 주석직의 교체에 관여하고, 군부 내에 세력을 형성한 양상쿤을 몰락시키고 장쩌민을 후계자로 내정하는 등의 막후 실력을 행사하였다. 덩샤오핑은 오랜 정치 경력을 거치며, 권력을 다졌으며, 197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경제정책은 흑묘백묘론을 통한 실용주의 노선을 추진하고, 정치는 기존의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정경분리의 정책을 통해 덩샤오핑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인 덩샤오핑 이론을 창시했다.

덩샤오핑의 정치 활동으로 대표적 업적으로 엄타를 꼽을 수 있다. 범죄를 없애겠다는 명분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중국공산당집정사십년>이라는 책에 기재된 내용을 보면, 최소한 861,000명이 처리되었고, 24,000명이 총살로 사형당했다. 1983년 9월 2일, 전국인대 상임위원회는 <사회치안을 엄중하게 위해하는 범죄분자를 엄벌하는데 관한 결정>등 3개의 중대한 결정을 통과시킨다. 이는 형법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이다. 깡패죄 등 10여 종의 범죄를 "형법에 규정한 최고형 이상으로 처형하고, 사형까지 처할 수 있다"고 하였다. 1983년의 엄타이후, 다시 1996년, 2001년에도 전국범위에서 엄타를 진행하며 중국공산당 권력을 공고화했다.

경제를 개혁하고 개방하면서, 덩샤오핑은 그 절차를 정형화하여 공산당의 힘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덩샤오핑의 후속 행보는 지도부가 본래 의도했던 것보다 더 큰 권력을 갖도록 야기했다. 1989년에 양상쿤 주석은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의장인 덩샤오핑과 협력하여 주석의 명의로 1989년 천안문 사태를 진압하도록 베이징에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과 당의 다른 원로들에게 발탁된 촉망받는 후계자였고, 당 서기 자오쯔양을 대신할 인물로 뽑혔다. 장쩌민은 학생 시위대에게 온건하다고 평가되었다. 톈안먼 사건과는 직접적으로는 관련되지 않았지만, 장쩌민은 텐안문 사건 이후에 상하이에서 비슷한 시위를 예방하기 위한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중앙위원으로 승진되었다. 덩샤오핑은 1997년 2월 19일 장쩌민을 권력의 중심에 올려놓은 후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서거했으며 향년 93세였다.

마오쩌둥과의 모순

덩샤오핑은 1952년 마오쩌둥에 의해 정무원(政務院) 부총리에 임명되었으며, 1954년 당중앙위원회 비서장, 1955년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6년 제8기 중앙전당대회에서 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당서열 6위에 올랐으며 중앙 서기처 총서기로 당의 일상 업무를 총괄하게 되었다.

1958년 마오쩌둥이 주도한 대약진운동이 실패하자 자신의 실책을 만회하기 위해 극좌 사회주의 운동인 문화혁명을 추진하게 되자 덩샤오핑은 마오쩌둥과 대립하게 되었다. 덩샤오핑은 대약진운동이 추진되는 동안 중국경제의 변화를 시도했으며 류사오치(劉少奇) 등과 함께 경제발전을 위하여 물질적 보상제도를 채택하고, 엘리트를 양성하자는 실용주의노선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마오쩌둥과 노선갈등을 빚어 1966년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紅衛兵)으로부터 반모주자파(反毛走資派)의 수괴라는 비판을 받고 실각하였다. 실각한 등소평은 트랙터 공장에서 강제노동을 하였다.

덩샤오핑의 개혁정책

1977년 10월 전당대회에서 국무원 상무 부총리로 임명되었으며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으로 복직하였다. 그는 문화대혁명의 폐해를 수습하고 대학입학시험을 통일하였으며 일본을 방문하여 산업시설을 시찰하고 일본의 선진기술을 중국에 도입하였다. 1977년 10월 문화대혁명을 부정하고 중국 사회주의의 현대화와 개혁개방정책 노선을 결정하여 중국 사회주의의 결정적인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1979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대통령 지미 카터와 회담하였으며 중국의 발전을 위한 개방정책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천안문 사건

천안문 사건(天安门事件) 또는 제3차 천안문 사태(第三次天安門事態), 또는 6·4 항쟁은 1989년 6월 4일, 후야오방의 사망 이후 발생한 천안문 광장 등지에서 시위대와 인민이 전개한 반정부 시위를 중화인민공화국의 개혁개방 정권이 유혈 진압한 사건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일반적으로 이 사건을 1989년 춘하계 정치풍파라 지칭하는 반면, 비판적인 반체제 세력 및 서방세계에서는 천안문 광장 저항시위 또는 천안문 광장 도살, 89년 민주운동이라고 칭한다.

애초 공식 발표로는 민간인 사망자 300여 명, 부상자 7,000여 명이 발생한 사건이며, 국제적십자협회는 2,600여 명으로 사망자를 발표했고, 비공식 집계로는 10,000여 명 사망했다. 그 후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가 1990년 7월 10일 제5차 국무원 보고에서 정식 발표한 것을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4,550명이었으며, 군인과 전경은 56명이 사망, 7,528명이 부상당했다. 작은 범위의 의미에서 '6·4사변'은 중국 인민해방군이 천안문 광장에 진입해 시위대에게 철수를 요청한 특정 날짜를 따서 명명됐다. 중국 본토 이외의 중국어권 지역에서는 청산사건을 "6.4 진압" 또는 "6.4 대학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건 이후 서양 세계와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덩샤오핑이 새로운 후계자를 물색하게 되었다. 보수파의 압력으로 덩샤오핑은 권좌의 중심에서 물러났다.

동영상

각주

  1. 덩샤오핑〉, 《위키백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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