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구
서대문구(西大門區)는 서울특별시의 중서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북쪽과 서쪽으로는 은평구와 접하고, 동쪽으로는 종로구와 중구, 남쪽으로는 마포구와 접해 있으며 은평구와 마포구는 서대문구에서 분리된 지역이다. 서대문의 명칭은 조선 시대의 도읍지인 한양의 서문인 서대문(돈의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지만, 현재는 서대문이 헐린 자리는 서대문구가 아닌 종로구에 속해 있다.[1]
개요
서울특별시의 북서부, 경도상으로는 동경 126˚ 54´ 04˝~126˚ 58´ 08˝, 위도상으로는 북위 37˚ 33´ 08˝~37˚ 36´ 28˝에 위치한다. 동서 간 거리는 6.15㎞, 남북 간 거리는 6.28㎞이며, 면적은 17.63㎞로 서울시 전체 면적의 2.9%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18번째에 해당한다. 행정구역은 14개 행정동(20개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연희동이 전체 면적의 17.3%를 차지하여 가장 크고 북아현동이 전체 면적의 2.6%로 가장 작다. 인구는 2020년을 기준하여 32만 2952명으로 서울시 전체 인구의 3.3%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19번째에 해당한다. 구를 상징하는 꽃은 장미, 나무는 소나무, 새는 까치이며, 구청 소재지는 연희동이다.
서대문구에는 인지도가 높은 유명 대학들이 많이 위치해 있다. 세브란스병원으로도 유명한 연세대학교가 신촌동에 있고, 이화여자대학교가 대신동에 있다. 충정로동에는 경기대학교 서울캠퍼스가 위치해 있고, 남가좌동과 홍은동에 걸친 지역에는 명지대학교의 인문 캠퍼스와 명지전문대학이, 냉천동에는 감리교 신학대학교가, 북아현동에는 추계예술대학교가, 홍제동에는 디지털 서울 문화 예술대학교와 서울 여자간호 대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연세대와 이화여대, 두 대학교의 근처에 있는 신촌이 대학가로서 서울의 주요한 부도심들 중의 하나로 성장하였다.[2][3]
자연환경
서대문구의 북쪽에 위치한 북한산의 말단에 속하여 대체로 동북쪽이 높고 서남쪽이 낮은 지형을 이룬다. 동쪽에 종로구와 경계를 이루는 인왕산(338m)과 안산(296m) 이 산지를 이루고, 서쪽에는 백련산(215m)이 은평구와 경계를 이룬다. 인왕산은 조선 시대에 낙산·남산·북악산과 더불어 한양도성의 경계를 이루던 내사산(內四山)의 하나로서 서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무악재의 안부(鞍部)를 지나 안산으로 이어진다. 옛 무악재는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였으며, 본래 높고 험난한 고개였으나 근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친 도로 확장에 따라 폭이 넓어지고 높이도 많이 낮아져 지금에 이른다. 하천은 북한산에서 발원하는 홍제천이 구의 동북부로 유입되어 홍은동·홍제동·연희동·남가좌동의 경계를 흘러 마포구에서 한강에 합류하고, 은평구 불광동을 기점으로 하는 불광천이 북가좌동과 은평구 증산동의 경계를 이루며 흐르다가 홍제천에 합류한다.
연평균기온(2001~2010년)은 12.8℃로 서울시 평균(13.0℃)보다 다소 낮다. 연평균 일 최고기온은 17.6℃, 연평균 일 최저기온은 8.8℃로 연평균 일교차가 8.8℃로 나타난다. 식물의 성장 가능 기간은 265.7일로 서울시 평균(268.5일)보다 2.8일 짧다. 연평균 강수량은 1376.1㎜로 서울시 평균(1387.0㎜)보다 다소 적으며, 연평균 강수량의 60% 이상이 여름철에 집중하는 하계 다우형이다. 연평균 강수량이 가장 많은 천연동(1457.6㎜)과 가장 적은 홍은 1동(1331.6㎜)은 120㎜ 이상의 차이를 보인다.
역사
서대문구 지역에서 발견된 구석기·신석기 시대 유적은 아직 없다. 그러나 이 지역이 한강 하류에 위치하고 있고, 한강 유역의 하남시 미사리 유적이나 강동구 암사동 유적에서 선사 시대 인류가 살았던 흔적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도 구석기 시대에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대국가로서 마한이 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서기전 18년 부여계 고구려 유이민인 온조(溫祚)가 남하하여 한강 유역에 백제국(伯濟國)을 건국하고 점차 마한제국을 병합하여 삼국 중 하나인 백제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475년 고구려의 남하로 수도를 공주로 옮길 때까지 500여 년간 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를 한강 유역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장악하였고, 이 일대에 북한산군(北漢山郡)을 설치하여 80여 년간을 다스렸다.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체결하여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동맹을 파기하고 이 일대를 독차지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 혹은 신주(新州)를 두어 관리하였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당나라와 직접적인 교섭을 통해 고구려·백제에 대항하였다. 이후 통일을 달성한 신라는 전국을 9주로 나누면서 한강 유역을 한산주(漢山州) 또는 한주(漢州)로 개칭하고 한강과 접하고 있는 서울 지역에는 따로 한양군을 두었다.
후 삼국시대 양길의 부하였던 궁예(弓裔)가 895년 한산주 관내의 10여 성을 복속시킴에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왕건(王建)이 건국한 고려에 귀속되었다. 이 일대는 고려 초에는 양주(楊州, 이때의 양주는 지금의 양주군이 아니라 고려 초 서울의 이름이다),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한양이라 불리었다.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설치하여 지방 통치체제를 정비할 때 양주목에 속하였고, 1018년(현종 9)에는 지주사(知州事)로 격하되어 광주목(廣州牧)의 관내에 예속되었다. 이어 1067년(문종 21) 한강 북부지역에 남경을 설치하면서 서경(西京)·동경(東京)과 함께 삼경체제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068년에는 남경이궁(南京離宮)을 설치하고, 남경으로의 천도론이 제기되어 1101년(숙종 6) 9월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여 본격적인 남경 궁궐 후보지를 물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104년 지금의 청와대 부근에 새 궁궐이 낙성되어 왕이 친 행해 점검하는 등 거의 천도가 실현될 단계까지 이르렀으나, 이듬해 왕이 죽자 실천되지 않았다.
그 뒤 무인 정권과 몽고 침략 등의 정치적·군사적 시련을 겪는 사이에, 남경은 서경과 함께 국왕 순주(巡駐)의 이경(離京)으로서의 가치가 감소되어 1308년(충렬왕 34)에 한양부(漢陽府)로 개칭되었고, 유수를 윤으로 고치는 것 외에도 판관과 사록 등의 관직을 두었는데 이는 그 지위가 격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공민왕 때 이르러 원과의 기반을 끊고 과거의 폐정을 혁신함과 동시에 새로 도읍을 옮길 것을 계획했는데, 이때 천도의 유력한 후보지로 과거의 남경인 한양이 물망에 올랐다. 그 뒤 왜구의 침략으로 조운이 원활하지 않자 개경에까지 영향이 미쳤고, 곧이어 수도의 안보문제가 거론되자 또다시 한양천 도론이 제기되었다. 이리하여 우왕 때는 한양천도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추진되어 한때 실현되었고, 공양왕 때에도 일시 한양천 도가 있었다. 그러나 다시 개경으로 환도했다가 신왕조인 조선의 개창을 계기로 천도 문제는 마침내 최종적인 결정을 보게 되었다.
고려 말부터 대두되던 한양천 도론은 조선이 개창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개경에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신도읍이 필요했고, 이러한 요건을 갖추고 있었던 곳이 바로 한양이었다. 태조는 다양한 논의를 거쳐 1394년(태조 3) 8월 24일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확정하였다. 이어 9월 1일 궁궐 건설의 실무를 담당 추진하기 위한 기관인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였고, 9월 9일에는 한양에 대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궁궐·종묘·사직과 도로의 건설, 각종 관아의 배치 등 기본계획을 작성하도록 지시하였다.
수도 건설을 위한 궁궐 공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태조는 1394년 10월 25일 천도를 단행하여 3일 후인 10월 28일 한양에 도착하였다. 이어 이듬해 12월에 조선시대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완공되어 비로소 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 한양부(漢陽府)를 한성부(漢城府)라 고치고 이듬해 9월에는 도성과 문루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동·서·남·북·중 5부(部) 52방(坊)으로 나누어 도시 규모를 정비하였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조선의 수도로서 한성이 탄생된 것이다. 당시 서대문구에 해당하는 지역에 도성의 4대문 가운데 하나인 돈의문(敦義門, 서대문이라고도 함)이 건설되어 이 일대의 지명이 되었다.
서대문구 일대는 조선 시대 한성부 서부의 반석방(盤石坊)·반송방(盤松坊)과 북부의 성저십리(城底十里) 이내에 해당하는 상평방(常平坊)·연은방(延恩坊)·연희방(延禧坊) 지역이었다.
1911년 4월 1일 5부 8면제가 실시됨에 따라 이 지역은 서부 반석방 반송방과 연희면(延禧面) 지역이 되었다. 1914년에는 서대문구의 행정구역이 축소되면서 용강면(龍江面)·연희면·은평면(恩平面) 지역이 고양군에 속하였고, 현 충정로 일대는 죽첨정(竹忝町) 등이 일제식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동시에 이 일대는 서대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15년에는 경성부 직할로 변경되었다. 1936년 고양군에 속했던 이 지역의 대부분이 경성부로 편입되었고, 1943년 출장소 대신 구(區)제도가 실시되면서 이곳은 서대문구역소(西大門區役所)에 속하게 되었다. 이어 1944년 마포구역소가 신설되면서 서대문구 관할구역의 일부가 마포구역소로 넘어갔다.
1945년 10월 16일 구역소를 구청으로 하고 구장(區長)을 구청장(區廳長)으로 개칭하면서 서대문구역소도 서대문구청으로 바뀌게 되었다. 1949년 은평면 11개 리와 연희면 7개 리를 서울에 편입하여 서대문구 은평출장소에 편입하였으며, 1955년에는 종래의 동회(洞會)를 동(洞)으로 개칭하고 각 구청에 행정동을 따로 정하여 행정업무를 담당하도록 함에 따라 서대문구에는 53개의 행정동을 두게 되었다. 1962년에는 대신동을 신설하였고, 1964년에는 서대문구의 노고산동과 대현동 일부가 마포구에 편입되고, 마포구의 아현동 일부가 서대문구로 편입되었다. 1970년 동명칭과 관할구역을 변경하면서 행정동을 53개에서 41개 동으로 축소하였다.
1973년에는 진관동을 신설하였고, 연희동 일부가 마포구로 그리고 마포구의 동교동과 서교동 일부가 서대문구로 편입되었다. 1975년 대규모의 구 관할구역 변경에 따라 서대문구 관할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즉 서대문구 관할의 평창동, 구기동, 부암동, 홍지동, 신영동, 행촌동, 송월동, 홍파동, 평동과 교남동, 교북동, 현저동, 충정로 1가의 각 일부가 종로구에 편입되었고, 서소문동, 정동, 순화동, 의주로 2가, 중림동과 의주로 1가, 충정로 1가, 합동, 충정로 3가, 만리동 1·2가의 각 일부는 중구에 편입되었다. 상암동, 성산동과 수색동, 중동, 남가좌동, 연희동 각 일부를 마포구로 넘겨주고 만리동 1·2가 일부를 용산구에 넘겨주었으며, 마포구의 동교동 일부를 서대문구에 편입하여 행정동이 42개 동에서 37개 동으로 축소되었다.
1977년에는 북가좌 2동과 증산동을 신설하였고, 1978년에는 영천동을 폐지하였다. 이어 1979년 은평 출장소를 없애고 은평구청을 신설하면서 서대문구 중 녹번동, 불광동, 갈현동, 구산동, 대조동, 응암동, 역촌동, 신사동, 증산동, 진관내동, 구파발동, 수색동 등 13개 동이 서대문구 관할에서 제외되어 종래 39개 동이 23개 동으로 축소되었다.
1980년 홍은 4동이 홍은 2동에 편입되었고, 1998년 현저동이 천연동에 편입되었다. 2008년에는 충정로동과 북아현 3동이 충현동으로, 북아현 1~2동이 북아현동으로, 대신동과 창천동이 신촌동으로, 연희 1~3동이 연희동으로, 홍은 1~2동이 홍은 1동으로, 홍제 1~2동이 홍제 1동으로 각각 합동되었으며, 홍제 4동이 홍제 2동으로, 홍은 3동이 홍은 2동으로 각각 개칭되어 14개 행정동으로 정비되었다. 2020년을 기준하여 행정구역은 14개 행정동(남가좌 1~2동·북가좌 1~2동·북아현동·신촌동·연희동·천연동·충현동·홍은 1~2동·홍제 1~3동) 20개 법정동(남가좌동·냉천동·대신동·대현동·미근동·봉원동·북가좌동·북아현동·신촌동·연희동·영천동·옥천동·창천동·천연동·충정로 2~3가·합동·현저동·홍은동·홍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4]
산업
교육서비스업과 부동산업을 비롯한 서비스업의 비중이 크다. 2018년을 기준하여 지역 내 총생산(GRDP)은 8조 3640억 원으로 서울시 전체 GRDP의 약 2%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14번째로 비중이 크다. 경제활동별 부가가치의 비중은 교육서비스업(1조 3721억 원)이 17.8%로 가장 크고, 이 밖에 부동산업(13.4%), 보건업·사회복지 서비스업(11.2%), 금융·보험업(10.1%), 도소매업(9.9%), 사업서비스업(9.6%) 등의 순이다. 다양한 교육 시설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서비스업의 부가가치는 서울시 교육서비스업 총 부가가치의 7.2%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강남구 다음으로 비중이 크다.
2018년을 기준하여 사업체 수는 1만 9796개로 서울시 전체 사업체의 2.4%에 그쳐 25개 구 가운데 도봉구·강북구 다음으로 비중이 낮다. 사업체별로는 숙박·음식점 업체(4315개)가 21.8%로 가장 많고, 이 밖에 도소매 업체(20.3%), 운수·창고업체(14.7%), 협회·단체 수리 및 기타 개인 서비스 업체(10.8%), 교육서비스 업체(5.5%), 부동산업체(5.2%) 등의 순이다. 신촌동·북가좌 2동·연희동·충현동에 전체 사업체의 절반 이상이 분포하고, 개인 사업체와 종사자 5인 미만의 소규모 업체가 82%를 웃돈다. 사업체 종사자는 10만 9490명으로 서울시 전체 종사자의 2.1%에 그쳐 25개 구 가운데 20번째에 해당하지만, 교육서비스업 종사자는 전체 종사자의 17%를 웃돌아 서울시 평균 (6.6%)를 크게 상회한다. 제조업은 의류·봉제와 식료품이 주류를 이루며, 제조업의 부가가치(898억 원)는 서울시 제조업 총 부가가치의 0.6%에 그쳐 동작구·은평구 다음으로 비중이 낮다.
전통시장은 남가좌동의 백련 시장·모래내시장·서중시장, 홍제동의 인왕시장, 영천동의 영천시장, 홍은동의 포방터시장·유진상가 등이 상설시장으로 운영된다. 이 밖에 유통 업체로는 백화점 1개소, 상점가 4개소, 기타 대규모 점포 8개소 등이 있다. 2018년 도소매업의 부가가치(7634억 원)는 서울시 도소매업 총 부가가치의 1.2%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16번째에 해당한다.
교통
도로 교통은 도시 고속화 도로인 내부순환로가 마포구 성산대교 북단을 기점으로 홍제천을 따라 서대문구를 거쳐 성동구의 성동 분기점까지 이어지고, 국도 1호선의 일부인 통일로가 중구를 기점으로 서대문구를 거쳐 경기도 파주시까지 이어진다. 이 밖에 마포구 망원동에서 서대문구 현저동까지 이어지는 성산로를 비롯하여 세검정로(홍은동~종로구 신영동)·수색로(연희동~은평구 수색동)·신촌로(창천동~충정로 3가)·연희로(마포구 동교동~홍은동)·진흥로(은평구 역촌동~서대문구~종로구 신영동)와 가좌로·가재울로·연세로·충정로·독립문로 등이 서대문구의 내·외곽을 연결한다.
철도 교통은 1920년 신촌역이 영업을 개시하여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경의선이 운행하였으며, 이후 광역 전철 시대가 열리면서 경의선은 수도권 전철 경의 중앙선의 운행계통에 포함되었다. 경기도 파주시의 문산역을 기점으로 하는 수도권 전철 경의 중앙선은 서대문구의 가좌역을 거쳐 경기도 양평군의 용문역·지평역까지 운행하는 노선과 가좌역에서 분기하여 신촌역을 거쳐 서울역까지 운행하는 노선이 있다. 서울 주요 지역을 순환하는 수도권 전철 2호선이 서대문구의 충정로역을 경유하고, 대화역~오금역을 운행하는 수도권 전철 3호선이 서대문구의 홍제역~무악재역~독립문역을 거쳐 간다. 이 밖에 강서구 방화역을 기점으로 하는 수도권 전철 5호선이 서대문구의 충정로역을 거쳐 하남 검단산 역·마천역까지 두 갈래로 운행하며, 충정로역에서 2호선과 접속한다.
관광
현저동에 구한말 독립협회가 자주독립을 주창하여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국민 모금으로 건립한 서울 독립문(사적)과 서울 영은문 주초(사적), 중국 사신이 머물던 모화관을 개축하여 독립협회의 집무실로 사용하였던 독립관, 일제강점기에 유관순 열사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수감되어 고초를 겪고 목숨을 잃었던 서울 구 서대문형무소(사적)의 원형을 보존한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탑골공원에서 옮겨 세운 3·1 독립운동 기념탑과 순국선열 추념탑, 체육시설과 쉼터 등으로 구성되는 서대문 독립공원이 조성되어 역사 교육장이자 시민 휴식처로 개방되어 있다.
독립공원에 인접한 나지막한 안산 일대에는 약 7㎞에 걸쳐 안산 자락길이 조성되어 계절마다 왕벚나무숲·자작나무 숲·메타세콰이아 숲·가문비나무숲 등이 아름다운 풍광을 빚어내며, 순환형 산책로를 따라 북한산·인왕산·청와대·한강 등의 수려한 조망이 펼쳐진다. 안산 자락길과 연계되는 연희 숲속 쉼터에는 허브정원과 벚꽃 마당, 쉼터 등이 조성되어 벚꽃 명소로 유명하고, 홍제천을 따라 인공폭포와 음악 분수, 산책로 등이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처로 인기가 높다. 안산 자락의 봉원사(奉元寺)는 통일신라 진성여왕 때 창건된 고찰(古刹)이자 태고종의 총본산으로서 다수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정문에서 2호선 신촌역에 이르는 연세로 일대와 이화여자대학교 정문에서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구 신촌역사에 이르는 이화여대 길을 중심으로 하는 신촌 대학가 일대는 먹거리·볼거리·즐길 거리가 풍성한 젊음의 거리로 손꼽힌다. 이밖에 영천동에 꽈배기·떡볶이 등의 먹거리로 유명한 영천시장, 창천동에 2층 버스를 개조하여 추억 속 신촌의 옛 모습과 음악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한 신촌 플레이 버스, 북아현동의 웨딩 거리와 가구거리 등의 명소가 있다. 걷기 명소로는 홍은동 일대에 실락어린이공원을 기점으로 홍록 배드민턴장을 거쳐 옥천암(玉泉庵)에 이르는 4.5㎞의 북한 산자락 길이 무장애 길로 조성되어 있다.
교육
전통 교육기관은 조선 시대에 한성부에 속하여 성균관과 4부 학당이 공공 교육기관 역할을 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은 1886년 지금의 중구 정동에 설립된 이화학당(梨花學堂)을 모태로 하는 이화 여자 전문학교가 1935년 대현동의 현 위치로 이전하여 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로 이어진다. 1915년에는 경신학교에 대학부가 설치되어 연희전문학교의 효시가 되었으며, 1957년 연희전문학교의 후 신인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이 통합하여 지금의 연세대학교가 출범하였다.
초등 교육기관은 1896년 한성 공립 소학교가 개교한 뒤 공립 한성 보통학교·공립 미동 보통학교·한성 미동 공립 보통학교 등의 변천을 거쳐 지금의 서울 미동 초등학교로 이어지고, 1924년에 개교한 죽첨 공립 보통학교가 경성 죽첨 공립 심상소학교·경성 죽첨 공립 학교 등의 변천을 거쳐 지금의 서울 금화 초등학교로 이어진다. 이 밖에 1937년 홍제 공립 보통학교(지금의 서울 안산 초등학교)와 대곡 보통학교(지금의 서울 홍제 초등학교), 1941년 경성 북아현 국민학교(지금의 서울 북성 초등학교) 등이 개교하였다.
중등 교육기관은 1921년 향상 여자 기예 학교가 개교한 뒤 향상 여자 실업 학교를 거쳐 1946년 지금의 동명여자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고, 1928년 독립관에서 개교한 경성 실업 전수학교가 한성상업학교·한성중학교(6년제)를 거쳐 1951년 지금의 한성중학교·한성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이밖에 1940년에 설립된 경성가정여숙이 중앙 여자 상과 학교·중앙 고등 여학교 등의 변천을 거쳐 지금의 중앙여자중학교·중앙여자고등학교로 이어지고, 1945년 인창중학교(지금의 인창중학교·인창고등학교), 1948년 단국 중학교(지금의 명지중학교·명지고등학교) 등이 개교하였다.
2019년을 기준 하여 교육기관은 대학교 6개교(감리교신학대학교·경기대학교 서울캠퍼스·명지대학교 인문캠퍼스·연세대학교·이화여자대학교·추계예술대학교)와 전문대학 2개교(명지전문대학·서울여자간호대학교)를 비롯하여 고등학교 7개교, 중학교 14개교, 초등학교 19개교 등이 있다. 학생 수는 12만 8710명으로 서울시 전체 학생의 약 7%를 차지하여 종로구·성북구·동대문구 다음으로 많다.
문화재
국가 지정 문화재로는 백자 철화 포도문 항아리·삼국유사 권 1~2를 비롯한 국보 6점, 전 양평 보리 사지 대경 대사 탑·주역 천견록·고구려 평양성 석편·불설대보 부모 은중경·서울 옥천암 마애보살 좌상을 비롯한 보물 51점, 서울 독립문·서울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관·서울 구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한 사적 6개소, 국가무형문화재 1점(영산재), 청초 중단·적초의를 비롯한 국가 민속문화재 4점 등이 있다. 이밖에 1920년대에 건립된 서울 구 신촌역사와 백범 김구 혈의 일괄·이화여자대학교 토마스 홀·윤동주 친필 원고를 비롯한 36점이 국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시 지정 문화재로는 홍지문 및 탕춘대성·상설 고문진보 대전·수선전도·봉원사 범종·김홍도 필 매해파행도를 비롯한 서울유형문화재 39점, 서울무형문화재 1점(입사장), 서울기념물 1점(무악산 동봉수대 터), 용암사 감로왕도·봉원사 칠성각을 비롯한 서울 문화재자료 6점 등이 있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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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각주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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