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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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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부

이사부(異斯夫)는 신라의 장군, 수군 제독, 진흥왕 재위기의 병부령(兵部令)이다.

개요

  • 이사부는 신라 진흥왕 때의 장군·정치가. 병부령(兵部令)으로 실권을 장악하였다. 국사 편찬을 제안하여 《국사》를 편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한강 상류지역까지 영토를 넓히는 등 신라의 국력 강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일명 태종(苔宗). 성은 김씨로서 내물왕의 4대손이다. 505년(지증왕 6) 변경이던 실직주(悉直州:삼척)의 군주(軍主)로 임명되었는데, 이것이 신라에서 처음 군현제(郡縣制)가 실시된 사례이다. 512년에 아슬라주(阿瑟羅州) 군주로 있으면서 지금의 울릉도인 우산국(于山國)을 신라에 귀속시켰는데, 나무로 만든 사자를 배에 싣고 가서 항복하지 않으면 맹수를 풀어 멸하겠다고 속여 협박하는 계교를 썼다. 541년(진흥왕 2) 병부(兵部)의 책임자이자 당시에는 상대등(上大等)·시중(侍中)을 겸할 수 있던 병부령(兵部令)이 되어 562년까지 실권을 장악하였다. 549년에 한강 상류지역까지 신라 영토를 넓혔고, 550년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도살성(道薩城)과 금현성(金峴城)을 두고 공방을 계속하다 지친 틈을 타서 두 성을 빼앗았다. 이러한 활약은 신라가 함경도 남부까지 진격하는 데 기여하였다. 562년에는 반란을 일으킨 가야(伽倻)에 출정하여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소백산맥 동쪽에 신라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1]
  • 이사부는 삼국시대 신라의 실직주군주, 병부령 등을 역임한 관리이며 장군, 정치가이다. 일명 태종(苔宗). 내물마립간의 4대손으로, 지증왕 이래 법흥왕 · 진흥왕대까지 활약한 대표적인 장군이며, 신라 왕실의 중신이다. 505년(지증왕 6) 신라에서는 군현제가 실시되어 최초로 실직주(悉直州)가 설치되었다. 이 때 이사부는 그 곳의 군주(軍主)가 되었다. 그리고 512년에는 우산국(于山國 : 지금의 울릉도)을 점령하였다. 원래 우산국은 지리적인 이유로 신라에 귀복하지 않고 있었으며, 주민들이 사나워서 힘으로는 정복할 수가 없었다. 이에 이사부는 계교로써 항복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나무로 사자(獅子)를 많이 만들어 전선에 가득 싣고 그 나라 해안을 내왕하면서 항복하지 않으면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겠다고 위협하니, 그들은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541년(진흥왕 2)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 당시 병부령은 단순한 병부의 책임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등 · 시중을 겸할 수 있는 최고 요직의 하나였다. 그 뒤, 562년(진흥왕 23)까지 정치 · 군사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545년 왕에게 국사편찬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왕은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 562년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왕명을 받고 출정하였다. 이때에 사다함(斯多含)이 5,000 기병을 이끌고 전단문(旃檀門)에 치달아 백기를 세우니 성중의 모든 사람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를 본 이사부가 돌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대가야를 멸망시켜 낙동강 하류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이들과 연결된 왜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제거할 수 있었다. [2]
  • 이사부는 태종(苔宗)이라고 한다. 신라 지증왕 ~ 진흥왕 시대의 장군 · 정치가로, 내물 마립간의 4세손이다. 《일본서기》에는 실제 이름 발음으로 이질부례지간기(伊叱夫禮智干岐) 또는 이질부례지나말(伊叱夫禮知奈末)로 소개되어 있다. 《삼국유사》이후에는 풍습에 따라 단성으로 박(朴)씨로 기록되었으며 이름은 이종(伊宗)이라 나타난다. 독도 인근의 해산인 이사부해산에 그의 이름이 붙었으며 강원도 삼척시의 '이사부길',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의 '독도이사부길'에도 그의 이름이 붙었다. 斯夫, 苔宗은 실제로 '잇부/잇보'라고 불렸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사(斯)는 사이시옷으로 흔히 사용되던 글자다. 태(苔)는 이끼이며 잇기로 발음되므로 우리말 '잇'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종(宗)은 사람을 뜻하는 우리말 접미사인 '보/부' (울보, 먹보 등)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던 글자다. 질(叱) 역시 거의 항상 사이시옷을 표시하고자 사용되었다. 이종(伊宗)은 '잇보'에서 사이시옷이 약해져서 탈락된 형태이다. 지증왕 6년(505년)에 실직주(悉直州)의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512년에는 이찬의 관등과 함께 하슬라주(何瑟羅州)의 군주가 되어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해 신라 영토로 복속시켰다. 진흥왕 23년(562) 9월 반란을 일으킨 가야에 사다함(斯多含)의 활약으로 가야가 멸망하였다.[3]
  • 이사부는 512년 우산국을 점령한 신라의 장군이다. 내물마립간의 4대손으로 지증왕 이래 법흥왕, 진흥왕 대까지 활약한 장군이자 정치가이다. 505년(지증왕 6) 신라에서는 군현제가 실시되어 최초로 실직주(悉直州)가 설치되었다. 이때 이사부는 실직주의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512년에는 우산국(于山國)을 점령하였다. 당시 우산국은 지리적인 이유로 신라에 항복하지 않고 있었으며, 주민들이 사나워서 힘으로는 정복할 수가 없었다. 이에 이사부는 계교로써 항복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나무로 사자(獅子)를 많이 만들어 전선에 가득 싣고 우산국 해안을 내왕하면서 항복하지 않으면 맹수를 풀어 밟아 죽이겠다고 위협하니, 그들이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541년(진흥왕 2)에 이사부는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 당시 병부령은 단순한 병부의 책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등·시중을 겸할 수 있는 최고 요직의 하나였다. 그 뒤 562년(진흥왕 23)까지 정치·군사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545년 왕에게 국사 편찬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왕은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 550년 1월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함락하고, 3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금현성(金峴城)을 점령하는 등 양국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이 틈을 타 이사부는 이 두 곳을 공략하여 점령한 뒤, 성을 증축하고 1,000명의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어 금현성 탈환을 위해 재차 침입한 고구려의 군대를 다시 격파하였다. 근래에 발견된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에 의하면, 549년 전후에 이찬 이사부는 파진찬 두미(豆彌)와 아찬 비차부(比次夫)·무력(武力) 등을 이끌고 한강 상류지방을 경략하여 신라 영토를 크게 넓혔다고 한다. 562년 9월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사부는 왕명을 받고 출정하였다. 이사부가 돌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대가야를 멸망시켜 낙동강 하류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이들과 연결된 왜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제거할 수 있었다.[4]

이사부의 가계

  • 이사부의 가계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사서간의 기록이 달라서 정확하지 않다. 《삼국사기》 이사부 열전에는 그가 내물왕의 4세손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그의 성을 박(朴)씨로 기록하고 있다. 사서마다 성씨가 다르게 기록된 또 다른 인물로는 신라의 충신 제상(堤上)이 있는데 삼국사기는 박씨, 삼국유사는 김씨로 기록한다. 이것은 신라 말기와 고려시대 이후 한국 성씨를 중국식 단성으로 표기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에 실제 성명은 한반도식으로 이질부례지간기이며 박씨가 아니었지만 단성 기록에 의해 박씨와 김씨같은 단성으로 바꾸어 기록되었다. 실제로 중국 사서에 신라왕의 성이 단성으로 기록된 것은 진평왕이 최초다.
  • 화랑세기에는 아버지가 아진종, 어머니가 보옥공주로 나와 있다. 보옥공주는 백제 개로왕의 딸이다. 지소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숙명공주는 진흥왕과 후비가 되었으나 풍월주 이화랑과 사통하여 궁을 떠났다. 아들로는 원광법사와 보리를 낳았고 딸로는 화명과 옥명을 낳았다. 궁에 있을 때 진흥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정숙은 태자로 봉해졌다가 폐해졌다. 경주김씨 세보에 따르면 이사부는 자비 마립간의 아들이자 소지 마립간의 동생이라 하여 열전의 기록과 다르다.[2] 이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쓰는 시대에는 중국식 단성을 써서 기록하였기 때문에 이질부례지간기를 김씨로 후세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밀양이씨 족보는 이사부를 고시조로 삼고 있다. 통일신라 말기에 최치원과 교류한 수창장군 이재도 성을 異로 쓰고 있다.

이사부의 업적

  • 우산국을 정벌하였다. 신라는 505년(지증왕 6) 주군현제(州郡縣制)를 시행하였다. 이때 지금의 강원도 삼척시 지역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면서 이사부를 군주(軍主)로 임명하였다. 이 시기 군주의 성격에 대해서는 군대와 민정을 아우르는 지방관으로 보는 견해와 해당 방면에 설치된 정(停)이라는 군사 단위의 지휘관으로 보는 견해로 나뉜다. 어느 쪽이든 이사부는 신라의 동북부 해안에 위치한 주요 거점에서 강력한 군사권을 지닌 책임자가 되었다. 이사부의 활동 시기를 감안했을 때 그는 대략 5세기 후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므로, 군주로 임명되었을 당시에는 매우 젊은 나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책임 있는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왕실과 혈연적으로 이어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512년(지증왕 13)에는 지금의 강원도 강릉시 지역에 하슬라주(何瑟羅州)가 설치되면서 이사부가 군주로 임명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울릉도는 동쪽 바다 가운데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먼 곳에 있으며, 우산국 사람들은 바닷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여 신하 되기를 거부하였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산국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했던 것은 나무로 만든 사자라기보다 이사부가 거느린 대규모 선단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싶다. 울릉도 앞바다에 나타난 신라 수군(水軍)의 규모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 믿었던 넓은 바다가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항복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사부가 우산국 정벌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그가 실직 군주로서 동해안 지역의 군사권을 관할하게 된 후 수년에 걸쳐 수군을 양성한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금관가야를 정벌하고 병권을 잡았다. 532년(법흥왕 19) 신라는 금관가야(金官伽耶)를 복속시켰다. 이사부는 이때도 활약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사부는 '거도(居道)의 계략'을 써서 가야를 속여 취하였다고 한다. 거도는 신라의 탈해이사금(脫解尼師今) 때 인물이다. 그는 신라와 인접한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을 병탄하고자 마음을 먹고, 해마다 한 번씩 들판에 말을 모아 놓고 병사들이 말을 타며 놀게 하였다. 이것이 반복되다 보니 두 나라 사람들은 신라에서 항시 있는 일이라 생각하여 경계하지 않게 되었는데, 그 틈을 타 불의에 습격하여 두 나라를 병탄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사부의 금관가야 정벌 내용은 『일본서기』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사부는 529년(법흥왕 17) 3,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다라원(多多羅原)이라는 곳에서 세 달이나 머물며 시간을 끌다가 금관을 비롯한 4개 촌을 노략질해 빼앗았다고 한다.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거도의 계략’을 사용했다는 것은 바로 이때의 일로 짐작된다. 신라는 이사부의 활약에 힘입어 532년 최종적으로 금관가야를 복속시킬 수 있었다.
  •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대가야를 복속시켰다. 551년(진흥왕 12) 백제와 연합한 신라군은 거칠부의 지휘 하에 고구려의 남변을 공격하여 한강 상류에 해당하는 죽령 이북의 10개 군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또한 553년에는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되찾았던 한강 하류 지역마저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김무력(金武力)을 군주로 임명하였다. 한강 유역 전체를 무력으로 장악하며 신라가 한반도 내의 실력자로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562년(진흥왕 23) 신라는 대가야(大加耶)에 대한 정벌을 단행하였다. 총지휘관은 백전노장 이사부였고, 이사부를 보좌할 부장(副將)은 사다함(斯多含)이 맡았다. 사다함은 나물왕의 7세손으로 이때 나이 15~16세에 불과하였고, 이사부에게는 증손자뻘이었다. 이사부에 대한 기록은 대가야 정벌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사부가 활동한 시기는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후진(後進) 국가였던 신라가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영토 확장을 본격적으로 펼쳤던 때였다. 신라는 가야 제국(諸國)과 우산국 등 주변의 소국들을 제압하는 한편 전통적인 강자인 고구려와 백제를 상대로 화려한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처럼 신라가 욱일승천의 기세로 한반도의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하는 중심에 상승(常勝) 장군 이사부가 있었다.

이사부에 대한 평가

  • 신라 전반기 최고의 명장으로, 신라 지증왕에서 진흥왕 시기인 6세기 초중반 시기에 활동하였으며 신라군을 지휘하여 전성기에 영토 확장을 이룩한 공신이다. 상대등 거칠부(居柒夫), 대각간 구진(仇珍) 등과 함께 백제, 고구려를 공략함으로써 경상도 지역에 국한되어 있던 신라의 영토를 한강 유역까지 확장하고 한반도 중심을 차지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동해로 진출하여 우산국을 합병함에 따라 신라는 당시 삼국 가운데 가장 넓은 해양 주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왜국 및 가야와의 전투에서도 승리하였다. 특히 가야인들에게는 저승사자와 같았던 인물로, 이사부의 손에 가야군이 여러 번 격파당했고 결국에는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끈 대가야를 함락시키면서 가야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성은 김(金)씨이며 이름은 이사부(異斯夫)이다. "혹운(或云) 태종(苔宗)"이라고 하여 '이사부'를 '태종'이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고대 한국어인 신라어는 오늘날의 일본어처럼 음(소리)과 훈(뜻)으로 쓰고 읽는 두 가지의 방법이 존재했으므로 같은 고유어 이름을 하나는 음차, 하나는 훈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苔)'는 이끼를 뜻하므로 고대에 이것을 훈으로 읽었을 때는 대략 '잇' 또는 '이시'로 발음한 것으로 추정되며, 종(宗)은 '부(夫)'에 대응하는 말이다. 고로 널리 알려진 이사부는 신라어의 음을 따서 쓴 이름이고 태종은 신라어의 뜻을 따서 쓴 이름이 된다.
  • 삼국사기 이사부 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이사부는 왕족의 피를 타고난 인물로서 내물 마립간의 4세손이라고 한다. 그 외에 이사부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등 가계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지증왕 역시 내물 마립간의 증손이므로 상당히 가까운 혈연관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는 박씨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 혹자는 경주 김씨인 김부식이 삼국사기 편찬을 주도했기 때문에 이사부를 박씨가 아닌 김씨라고 썼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한때 김부식 개인의 행보를 기반으로 삼국사기를 과도하게 불신하는 주장이 있었지만, 현재는 중국과 일본 사서들과의 교차 검증 결과 삼국사기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신뢰성이 높은 사서로 인정받고 있다. 지증왕 때에 가야가 멸망했다면 흔히 가야라 부르는 금관국이 신라에 합병된 532년까지 존속했다는 것도 모순이다. 또한 이사부가 562년에 정벌한 가야는 532년 신라에 합병된 금관국이 아니라 대가야이다. 지증왕 당시 가야 연맹 가운데 일부만을 점령한 것이라 추정하는 의견도 있으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이사부가 가야를 정벌한 562년을 《일본서기》는 신라가 임나관가(任那官家) 10국을 공격해서 멸망시킨 시기로 기록한다.
  • 이사부는 신라 역사상 최고의 명장 가운데 한 명으로, 가야와 우산국을 신라의 강역에 복속시킨 정복영웅이다. 파사 이사금이 서라벌 외부로 영토를 넒혀 도시국가에 머물렀던 신라를 하나의 고대국가로 성장시킨 왕이라면, 이사부는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앞장선 장군으로 신라의 전성기를 개막한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다. 백제와 고구려의 양면 공격에 시달리는 신라를 지켜내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김유신을 제외하면 그 어떤 장군도 이사부와 비교할 수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서기 500년 초부터 560년대까지, 일생의 대부분이라 할 수 있는 50~60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전장을 누볐다. 620년대에서 660년대 후반까지 40여 년 간 활약했던 김유신보다도 더 긴 활동 기간을 자랑한다. 신라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서 보더라도 이사부만큼 긴 시간을 전장에서 보냈고, 그때마다 전공을 올린 사람은 드물다.

동영상

각주

  1. 이사부(異斯夫)〉, 《두산백과》
  2. 이사부(異斯夫)〉,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이사부〉, 《위키백과》
  4. 이사부〉, 《향토문화전자대전》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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