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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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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구(鄭夢九, Chung Mong-koo)
현대자동차그룹 초대회장
현대자동차그룹(Hyundai Motor Group)
현대자동차㈜(Hyundai Motor Company)
기아자동차㈜(KIA Motors)

정몽구(鄭夢九, Chung Mong-koo)는 현대자동차그룹의 초대 회장이다. 현대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둘째 아들이다. 정몽구는 삼성그룹이건희 회장과 함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재벌 총수 2세로 꼽히는 인물이다. 정몽구 회장의 뚝심경영과 현장경영, 품질경영으로 현대기아차를 글로벌 5위 완성차 회사로 키운 실적으로 그의 경영철학은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MBA 필수 강의 주제로 택할 만큼 경영학의 교범으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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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정몽구는 정주영 회장의 2남으로 1938년 3월 19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쾌활하고 도전적인 성격으로 머리보단 행동이 먼저 앞선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럭비에 관심을 자지면서 건장한 체구와 또래 중에 가장 힘이 좋아서 주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여담으로 고등학교 때 알고 지내던 손병두 서강대 총장은 약한 친구를 보호하는 데 주먹을 쓸 줄 아는 의리파라고 하며 정몽구의 동생인 정몽준 의원은 집 근처 동네가 소란스러워 나가 보면 항상 정몽구가 있었다고 술회하였다.[1] 1959년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공업경영학과를 1967년 졸업한 뒤 1970년 현대자동차㈜ 서울 사업소 부품과 과장으로 시작하여 현장에서 AS 업무를 도맡아 하였다. 1977년 컨테이너H 빔을 제조하는 현대정공의 초대 사장을 맡았고, 불과 10여 년 만에 현대정공이 세계 컨테이너 시장의 40%를 점유하는 등의 성과를 보이며 정주영에게 지프차 사업 제안을 받게 되었다. 그로 인해 현대정공의 컨테이너 사업은 접어두고 SUV의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1991년 현대정공은 갤로퍼를 출시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갤로퍼의 성공으로 인하여 당시 정주영의 동생인 정세영 회장이 32년 동안 이끌던 현대자동차㈜를 차지하여 정몽구는 1996년 현대자동차㈜의 회장이 된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기아자동차㈜는 부도를 맞이하는데, 정몽구 회장은 기아차의 부채 7억 1700억 원을 탕감시켜 주고 기아차 주식을 51%를 인수하면서 당시 글로벌 경영에 주로 힘을 쓰고 있었기에 기아를 인수하면서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한다. 더하여 정몽구 회장 취임 이전에 해외에서 혹평 받던 자동차 품질을 적극적으로 개선하여 현대기아차는 '글로벌 톱 10'에 처음 진입하게 되었다.[2] 2000년 당시 현대그룹은 5남인 정몽헌과 정몽구가 공동회장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나 경영권 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하자 2000년 3월 14일 왕자의 난을 일으켰지만 정몽헌과 측근들이 정몽구를 공동 회장직에서 박탈시키고 2000년 3월 27일 정몽헌이 현대그룹 단독 회장 자리를 독차지하고, 2000년 9월 정몽구는 현대자동차㈜와 기타 자동차 계열사들을 현대그룹으로부터 계열분리를 하여 별도로 현대자동차그룹을 만들었다. 계열 분리 이후 2002년 중국, 2004년 미국, 2010년 러시아, 2012년 브라질 등에 공장을 세워 해외 생산 물자를 늘려 글로벌 생산 판매를 전례 없는 속도로 성장시켰으며 2004년 한보철강 공장 인수, 2011년 현대건설 인수, 한국전력공사로부터 삼성동 부지 인수 등 다소 무모하게 보일 수 있는 인수가 성공하였고, 부품, 철강, 건설, 물류, 금융 서비스 쪽으로 자동차 산업과 함께 모빌리티 발전에 중대한 역할과 기여를 하였다. 2020년 2월 한국인 최초로 자동차 역사에 뛰어난 성적을 가진 인물이 모인 자동차 명예의 전당(Automotive Hall of Fame)에 헌액되었으며 2020년 10월로 현대자동차그룹의 회장직을 아들인 정의선에게 물려주고 명예회장이 되었다.

약력

  • 1938년: 3월 19일 대한민국 강원도에서 출생
  • 1959년: 경복 고등학교 졸업
  • 1967년: 한양대학교 공업경영학 학사
  • 1970년: 현대자동차㈜ 서울 사업소 부품과 과장
  • 1987년: 현대자동차 서비스, 현대정공 대표이사 역임
  • 1996년~2000년 3월: 현대그룹 회장 역임
  • 1997년: 한국, 러시아 경제협회 회장
  • 1999년: 현대자동차㈜, 기아자동차㈜ 회장 역임
  • 2000년 9월: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역임
  • 2004년: 한보철강 인수, 미국 비즈니스워크에서 자동차부문 최고의 CEO 선정
  • 2005년 11월: 영국 파이낸셜 타임즈 세계에서 존경받는 기업인 42위
  • 2010년~ 2011년: 미국 오토모티브뉴스 자동차산업 부분 아시아 최고 CEO
  • 2011년 4월: 현대건설 인수
  • 2011년 12월: 미국 모터트렌드 세계 자동차 업계 파워리스트 2위
  • 2020년: 미국 하버드 비즈니 리뷰 세계 100대 CEO 6위
  • 2020년 2월: 한국인 최초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 헌액
  • 2020년 10월: 현대자동차그룹 명예회장

왕자의 난

차남 정몽구는 불의의 사고로 떠난 장남 정몽필을 대신하여 장자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정주영 회장은 정몽구보다 5남 정몽헌을 아꼈다고 한다. 정몽헌은 정주영이 중요시했던 영어를 잘하였고 기업인의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굉장히 부합되어 있었다. 반면 정몽구는 차분하지 않고, 다른 형제들보다 학업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아 경영인으로서 해낼 수 있는지 걱정이 앞서 있었다. 이전에도 가족회의에서 후계자 문제가 거론이 될 때마다 분위기상 정몽헌이 우세하였다고 한다.[1] 이전부터 정몽구 회장은 현대그룹의 자동차 부문, 정몽헌 회장은 건설, 전자, 증권 부문을 가져갈 예정으로 되어 있었지만 당시 현대자동차㈜보단 현대건설㈜과 현대전자㈜가 위상이 높아 장남 역할을 하고 있던 정몽구 회장의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였고 2000년 3월 14일, 정몽헌 회장이 해외 출장을 간 사이에 기습적으로 이익치 현대증권 장장을 고려산업개발로 전속 보직시켰다. 이익치 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의 가신그룹 일원이자 정몽헌 회장의 최측근으로써 정몽헌에게 떨어트리고자 보복성 인사를 강행하였던 것이다. 2000년 3월 24일 정몽헌 회장은 국내에 귀국하자마자 사실을 접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모아 이익치 회장의 인사 발령을 무효화하고 동시에 정몽구 회장의 그룹 공동회장직을 박탈하였다. 정몽구 회장은 2000년 3월 26일 정주영 명예회장을 만나 다시 복귀 명령을 받았지만, 몇 시간 후 정몽헌 회장이 정주영 명예회장을 만나 복귀 명령을 취소하였다. 결국 2000년 3월 27일 정몽구는 현대그룹에 단독으로 회장 자리를 차지하였고, 정몽구 회장은 2000년 9월 현대자동차㈜와 기타 자동차 계열사를 현대그룹으로부터 계열 분리하여 현대자동차그룹을 만들었다.[3]

경영

철학

품질경영

정몽구는 현대자동차㈜의 회장으로 역임되었을 당시에 바로 실천하였던 경영철학이 품질경영이다. 정몽구 회장 전에 현대자동차㈜는 해외에서 품질로 인해 평이 좋지 않았다. 미국의 신차 품질 조사에서 당연 꼴등을 차지하고 인기 토크쇼에서도 현대차를 조롱하는 분위기였다. 정몽구 회장은 그런 현대차 입지에 충격을 받았고, 국내에 도착하여 신차 출시를 미루더라도 부실한 생산라인을 중단하라고 하였으며, 동시에 경기 화성시에 당시 세계 최대의 규모 연구개발센터를 설립하여 한 달에 두 번씩 품질회의를 열어 전 차종의 품질을 점검하고 관리하였다.[4] 더하여 차량의 무상 보증 기간을 3년, 5마일에서 10년, 10마일로 파격적으로 바꾸면서 품질보증을 꾀하였다. 2001년 현대자동차㈜가 양재옥 사옥으로 본사를 이전하면서 1층 로비에 품질상황실, 품질회의실, 품질확보실 등 품질총괄본부를 설치하고 품질을 경영철학의 최고로 삼겠다는 의지를 표현하였다. 현대차 품질 경영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품질 상활실은 24시간 실시간으로 전 세계 5천여 딜러 및 애프터서비스 네트워크로부터 품질과 관련된 불만 사항을 접수하고 품질 회의실과 품질 확보실에서 선진 자동차 업체들의 차종과 비교 전시를 통하여 품질 관련 회의를 한다. 또한 품질이 확보되지 않을 경우에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없는 품질패스제와 협력업체들이 품질에 각별히 신경을 쓰게 하고자 5-스타제를 실행하기도 하였다.[5]

현장경영

정몽구 회장 좌우명은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로 부지런하면 세상에 어려울 것이 없다는 뜻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 회장에게 써주었던 휘호이기도 하다. 과거 정몽구는 아버지인 정주영 회장에게 신임을 얻고자 더 많은 곳을 다니고 더 깊은 생각을 하고자 하였고, 그의 첫 직장인 현대자동차㈜ 서울 사업소에서 A/S 업무를 도맡아 하였는데 그곳의 있던 한 일화를 바탕으로 지금의 현장경영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때 당시 포드(Ford)로부터 자재가 적기에 조달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6] 그는 이를 타개하고자 임직원들과 함께 자동차 부품을 직접 싣고 전국 순회 서비스를 다녔고, 끊임없이 현장을 누비며 고객의 불만을 직접 접했던 경험으로 직접 소통하는 것에 장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일화를 마찬가지로 정주영 회장 또한 현장경영 습관이 있어서 이른 아침 현장으로 출근하던 정주영 회장의 뒤를 밟아 같이 출근하던 것이 몸에 익어 줄곧 현장을 누비고 다녔으며 매일 오전 6시 30분에 칼같이 출근하여 현장에서 같이 문제를 확인하고 해결하는 등 부지런한 모습을 주로 보인다.

뚝심경영

정몽구 회장은 뚝심경영으로 유명하다. 실패를 절대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목표를 위해 자신의 생각대로 밀고 나간다. 그것을 증명하는 여러 사례들이 있다. 1990년 중반까지만 해도 기아차는 재계 8위에 달하는 대기업으로 무리한 시세 확장과 과잉투자,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자금이 경색되고 차임금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부도 위기에 몰려 1997년 기아차는 부도를 맞이하며 국내 재벌들의 인수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기아차 입찰에는 대우자동차㈜, 삼성그룹, 포드 등이 참여하여 경쟁이 치열하였고, 더군다나 기아차가 부채 탕감까지 요구하면서 기아차 인수는 더욱 경제적으로 큰 위험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몽구 회장은 기아차의 성장 가능성을 믿고 1998년 현대차가 채권단으로부터 기아차와 아시아차 부채 7조 1,700억원을 탕감받는 조건으로 기아차 주식 51%를 인수함으로 기아차가 인수되었다. 다른 기업들은 이를 보며 기아차 정상화에는 상당한 기간이 걸릴 것이라 분석하고 양사의 동반 부실을 우려하였지만 22개월만에 기아는 법정 관리에서 벗어나고 이후 엄청난 성장으로 현대차그룹의 최고 전성기를 이루는 토석이 되었다.[2] 기아차 인수뿐만 아니라 2000년 11억 원을 투자하여 미국 앨리배마 공장을 세우고, 2004년 8771억 원을 들여 한보철강이 부도 이후 멈춰있던 공장을 인수, 2011년 4조 9,601억 원을 들어 현대건설 인수 등의 뚝심 결단력을 보여 주었다. 2014년은 무려 10조 5,500억 원을 들여 한국전력으로부터 삼성동 부지 7만 9342㎡를 인수했는데 공시지가 1조 4837억 원의 7배, 감정가 3조 3천억 원의 3배의 거액을 들여 무리한 배팅이라며 비난하는 여론도 있었다. 하지만 보란 듯이 현대차가 계속 성장세를 유지하자 과도한 판단이라 생각한 것이 이제는 오히려 계산된 모험이라며 신뢰를 얻기 시작했다.

공과

지배구조 개편

현대자동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은 기존의 순환출자 체제를 지주사 체제로의 전환 필요에 따라 시작되었다. 지배구조 개편은 2018년에 출범한 새 정부의 국정 과제 중의 하나이며 청와대 정책실장인 김상조가 공정거래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추진했다. 대기업의 지배구조를 지주사체재로 전환하라는 정책 기조는 신규로 추진하는 것이 아니고 1998년 금융위기 극복 과정에서 지주사 체재가 바람직한 지배구조의 표본으로 제시되면서 2000년대 초부터 정권하고 무관하게 계속 이어져 왔다. 현재 상황으로는 국내 5대 대기업 집단 중에 현대자동차그룹이 유일하게 순환출자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사례로 현대모비스가 현대자동차의 21.4% 지분을 보유하고 현대자동차가 기아자동차의 33.8%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기아자동차가 역으로 현대모비스의 17.2% 지분을 보유하는 출자구조를 들 수 있다.

2018년 3월에 현대자동차그룹은 현대모비스를 인적분할해 모듈 및 애프터서비스 사업부를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고 현대모비스 존속법인을 그룹 지배회사로 두는 방안을 제시하였으며 2018년 5월에 임시 주주총회를 개최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자세한 계획이 공개되면서 시장에서 부정적인 반응이 일어났으며 현대모비스의 여러 소액주주로부터 현대자동차그룹 여러 계열사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Elliott Management Corporation), 국민연금을 비롯한 한국 기관투자자까지 반대 의견을 제출하고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잇달아 주주총회에서 안건에 반대투표를 하라는 추천안들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자 현대자동차그룹은 예정된 주주총회가 열리기 직전인 2018년 5월 1일에 안건철회 결정을 내리고 지배구조 개편안을 보완한 뒤 시장과의 긴밀한 소통을 통해 지배구조 개편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7]

책임경영과 연구개발

2018년 1월 2일 신년사에서 "세계 경제의 저성장 기조가 장기화되고 있는 가운데 각국의 보호무역주의가 지속적으로 확산되고 미래기술 혁신 가속화와 경쟁 심화로 자동차산업도 급변하고 있다"며 "책임경영으로 외부 환경 변화에 더욱 신속하게 대응하고 미래 자동차산업을 선도해야 한다"고 하고 "현대차는 연구개발 분야에서 자율주행을 비롯해 미래 핵심기술에 투자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자동차산업의 혁신을 주도할 것"이라며 "회사에 자부심과 책임감을 지니고 2018년이 새로운 도약의 원년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글로벌 권역별 자율경영 시스템 도입

현대기아차는 기존에 본사에서 주요 전략을 제시하고 생산과 판매를 총괄했던 업무방식을 변경하여 글로벌조직 운영체계를 개편하고 각 권역에서 현지 전략과 생산, 판매 등을 통합 운영하고 신속하게 의사결정을 내리게 하였다. 정몽구는 "임직원 모두가 책임감 있게 각 부문이 자율적으로 업무를 추진하는 조직문화를 구축하라"고 독려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현대자동차의 글로벌 홍보업무를 담당했던 프랭크 에어런스는 2017년 11월에 미국 경제매체 포브스에 칼럼을 기고해 현대차그룹의 권역별 자율경영 시스템 도입을 놓고 “현대차 역사상 기념비적 일”이라고 평가했다.

제네시스 브랜드 런칭

정몽구는 10년의 시간을 투자해 2015년 11월에 독립 브랜드인 제네시스를 선보여 세계 고급차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현대기아차 글로벌 판매 800만 시대 열어

2014년에 현대기아차는 전 세계에서 800만 5천 대 자동차 판매 실적을 달성하였으며 토요타(toyota)와 제너럴모터스(General motors), 폭스바겐, 르노-닛산에 이어 글로벌 완성차회사중의 5 번째로 연간 판매량 800만 대 돌파하는 기록을 세웠다. 2008년에 현대기아차의 판매 실적은 400만 대였고, 2012년에 700만 대를 초과하였다. 2016년에 788만 대를 판매하여 18년 만에 판매량이 줄었고 2017년에는 미국과 중국 시장의 판매 부진으로 725만 대를 판매하였다. 2018년에는 755만 대 목표를 세웠지만 실제 731만 5천 대를 판매하였고 2019년에는 719만 3천 대 판매하였다.

중국에서 '현대 속도' 과시

현대기아차는 2014년 중국에서 176만 6,084대를 판매하여 폭스바겐제너럴모터스의 뒤를 이어 판매 순위 3위에 올랐다. 현대기아차는 2010년 중국에서 100만 대 이상을 판 뒤 해마다 연간 판매 신기록을 만들었으며 2014년 중국 진출 13년 만에 누적 판매 대수 1천만 대를 돌파하기도 했다. 현대기아차의 빠른 성장을 두고 업계에서 '현대 속도' 혹은 '현대 기적'이라는 말도 나왔다. 2016년 이후 중국 정부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보복을 본격화하면서 중국에서 현대기아차 판매량이 급감하였으며 지배력을 크게 상실했다. 2018년 사드 보복이 끝난 뒤에 판매량을 회복하고 있지만 여전히 과거 수준의 시장 점유율을 회복하는 데는 고전 중이다.

현대기아차 품질경영

현대자동차는 2014년에 미국 시장조사기관 제이디파워의 신차품질조사에서 일반 브랜드 부문 1위에 올랐으며 5년 만에 1위를 찾아왔다. 정몽구는 1999년에 미국 출장을 다녀온 뒤 제이디파워의 품질관련 컨설팅을 받기로 지시하였으며 현대기아차 품질개선에 총력을 기울였다. 2013년부터 '품질고급화'로 한층 강화하였으며 본인의 서울 양재동 사옥 품질상황실에 '제이디파워의 충고'를 액자로 걸어두고 품질경영의 고삐를 놓지 않았다. 2013년 초 현대자동차 시무식에서 "그동안 품질은 고객 최우선의 중심에 자리해왔다"며 "앞으로도 최고 품질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모든 접점에서 고객에게 만족과 감동을 제공함으로써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현대자동차그룹 사업구축

2000년 3월에 경영권승계를 두고 타툼을 벌린 뒤 2000년 9월에 공정거래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10개사를 이끌고 현대그룹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 뒤 철강 당진공장 인수, 현대제철 출범, 일관제철소 준공, 현대건설 인수 등을 통해 자동차, 철강, 건설이라는 세 축을 뚜렷이 만들어 현대자동차그룹의 틀을 구축했다.

현대모비스 모듈화사업 추진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을 경영하면서 모듈사업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사업을 모듈 중심 구조로 바꿨으며 기본이 충실해야 결과도 좋은 만큼 부품에서 성공해야 자동차시장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현대정공을 경영하면서 정주영 명예회장에게 경영능력을 인정받았다.

평가

  • 정주영 명예회장이 강조했던 '하면 된다'와 '뚝심경영'을 가장 잘 실천하고 있다.
  • 특유의 묵직한 리더십으로 투박하더라도 말 한마디로 조직을 이끌어 통솔력이 우수하다.
  • 과감하고 통 큰 경영 스타일을 보여줘 정주영 명예회장의 경영 DNA가 고스란히 이어졌다.
  • 현장경영을 중요시하며 직접 업무를 챙기고 부서장의 면면을 알고 있어 현안과 관련한 이슈가 있으면 수시로 인사를 단행한다.
  • 주요 현안을 보고 받으면 반드시 확인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보고한 사람은 후속 처리를 꼼꼼히 해야 한다.
  • 사회공헌과 스포츠 후원에 힘을 썼다. 2007년 11월 600억 원의 기금을 출원해 해비치사회공헌문화재단을 설립하였으며 2011년 12월 재단 이름을 현대차정몽구재단으로 바꿨다. 2016년 10월 국내 양궁대회 중 최대 규모인 4억 4천만 원의 '현대자동차 정몽구배 한국양궁대회 2016'을 열었다. 정몽구는 1985년부터 1997년까지 4번의 대한양궁협회장을 역임하고 1997년부터 지금까지 대한양궁협회 명예회장을 맡으며 32년 동안 양궁 인구의 저변 확대와 우수인재 발굴, 첨단 장비의 개발에 이르기까지 약 450억 원 이상을 투자했다.

사건 사고

세타2 엔진결함 은폐 의혹으로 검찰 고발

2017년 4월에 YMCA 자동차안전센터는 정몽구 등 현대차와 기아차 대표이사 등 관계자들을 자동차관리법 위반 및 특별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의 사기 혐의로 검찰에 고발한다고 밝히면서 "현대기아차 2013년 8월까지 생산한 세타2엔진을 장착한 차량이 소음, 진동, 시동꺼짐, 화재 등은 국토교통부가 밝힌 바에 따르면 제작 결함 때문"이라며 "이는 안전운행에 지장을 주는 중대한 결함"이라고 주장했다. 자동차안전센터는 "현대기아차가 2010년부터 고객민원, 언론보도로 해당 차량의 안전운행에 지장을 주는 구조적 결함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했다고 봐야 한다"며 "그러나 결함 여부에 대한 조사와 조치가 충분히 가능한 8년 동안에 아무런 대책없이 사실을 적극적으로 부인했고 최근 국토교통부의 조사결과 발표가 임박해서야 갑자기 리콜 계획서를 제출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국토교통부는 세타2엔진 결함과 관련한 조사는 중단했지만 현대기아차가 세타2엔진 결함을 포함해 다른 결함을 은폐하거나 축소한 혐의가 있는지를 조사하였다.

박근혜 게이트에 연루

2016년 11월에 박근혜 게이트에 연루되어 2006년 비자금 사건 이후 10년만에 검찰 소환조사를 받았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케이스포츠미르에 128억 원을 냈으며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부탁을 받고 최순실이 사실상 소유한 ㈜플레이그라운드에 62억 원의 광고업무를 내주고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동창생 부모가 운영하는 부품회사 ㈜케이디코퍼레이션에서 11억 원 상당의 부품을 구입하였다.

한국전력공사 부지 매입

2014년 9월에 감정가의 3~4배 수준으로 삼성동에 위치한 한전 부지를 10조 5,500억 원에 구입하여 고가매입 논란이 불거졌다. 애초 수익성만을 따져서 입찰에 참여한 게 아니고 현대차그룹의 주요 계열사들을 한 데 모아 시너지를 내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변명하였지만 한전 부지를 사는 데 썼던 돈이면 재규어 랜드로버(2조 3천억 원), 볼보(2조 1천억 원), 크라이슬러(4조 4600억 원) 등을 모두 사고도 남는 돈이라는 분석이 나오면서 현대차그룹이 회사 성장보다는 부동산 매입에만 관심을 두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일각에서 제기됐다.

현대자동차그룹 비자금 사건

검찰이 현대차 비자금 수사를 시작된 뒤 2006년 4월 28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가 2006년 6월 28일에 보증금 10억 원을 내고 보석으로 풀려났다. 2007년 2월에 개최 된 1심에서 900억여 원을 횡령하고 회사에 2,100억 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로 기소돼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으며 2007년 9월 항소심에서 "1조 원 사회공헌기금 출연 약속의 이행, 준법 경영을 주제로 2시간 이상 강연, 국내 일간지와 경제전문잡지에 준법 경영을 주제로 각 1회 이상 기고를 실행하라"는 내용의 사회봉사명령을 전제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2008년 4월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기고와 강연, 사재출연 등을 내용으로 하는 사회봉사명령은 위법이다"며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2008년 6월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자연 및 환경보호 활동, 복지시설에서의 활동, 봉사활동 등을 위주로 300시간의 사회봉사 명령을 받았으며 2008년 8월 15일 광복절 특별사면을 받아 사회봉사활동의 의무는 없어졌다.

가족관계

현대그룹 창업주이자 명예회장인 정주영을 아버지로 두었다. 형으로는 정몽필 전 인천제철 사장이 있다. 아래로 정몽일 전 현대기업금융 회장, 정몽근 현대백화점 명예회장,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정몽우 전 현대알루미늄 회장이 있다. 정몽필 정몽헌 정몽우 전 회장은 사망했다. 부인 이정화와 1962년 결혼하였으며 자녀로 1남3녀를 두고 있다. 장남 정의선 현대차부회장은 정도원 삼표그룹의 회장 장녀 정지선과 결혼했으며 사돈인 정도원 회장은 정몽구와 경복고 선후배 사이로 관계가 돈독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녀 정성이 이노션 고문은 선두훈 대전 선병원 이사장과 결혼했다. 차녀 정명이 현대커머셜 고문은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과 결혼했다. 삼녀 정윤이 해비치호텔리조트 전무는 신성재 삼우 부회장과 결혼했다가 2014년 이혼했다.

기타

2018년 2분기 말 기준으로 현대차 5.17%, 현대모비스 6.96%, 현대글로비스 6.71%, 현대제철 11.81% 의 지분을 보유하였으며 2018년 9월 10일 기준으로 4조 2천억 원 정도 된다. 2017년 4월 미국 경제매체 포브스가 선정한 대한민국의 50대 부호 순위에서 권혁빈 스마일게이트그룹 회장보다 한 단계 낮은 5위를 차지했다. 포브스에 따르면 권혁빈과 정몽구의 재산은 각각 61억 달러, 45억 달러였다. 2016년도 대기업 오너 가운데 가장 많은 연봉을 받았으며 현대차에서 53억 원, 현대모비스에서 40억 원 등 모두 93억 원을 받았다. 2017년에는 12억 원 가량 줄어진 80억 900만 원을 받았으며 2018년 상반기에 현대차에서 28억 3600만 원, 현대모비스에서 21억 2700만 원 등 모두 49억 6300만 원을 받았다.

각주

  1. 1.0 1.1 이임광, 〈구속된 정몽구 회장 인간탐구〉, 《JTBC GOLF》, 2006-05-03
  2. 2.0 2.1 권오용, 〈(권오용의 재계춘추(財界春秋)) (18) 정몽구 회장의 승부수, 기아차 인수와 품질경영〉, 《인사이드비나》, 2020-10-10
  3. 왕자의 난〉, 《나무위키》
  4. 박세준 기자,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 자동차의 전설 되다〉, 《동아닷컴》, 2021-09-02
  5. 이철영 기자, 〈현대자동차그룹 정몽구 회장, 현대차 신화를 이루다!〉, 《시사뉴스》, 2016-10-11
  6.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 《시너지컨설팅》
  7. 최종학, 〈현대차 지배구조 개편 계획을 둘러싼 논란〉, 《DBR》, 2020-11-01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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