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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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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위치
종로구 신청사 조감도

종로구(鐘路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의 중앙부에 있는 자치구이다. 동쪽으로는 동대문구, 서쪽으로는 서대문구은평구, 남쪽으로는 중구, 북쪽으로는 성북구와 접한다. 종로구는 1394년 조선 왕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후 중구와 함께 서울특별시의 원도심을 이루었고, 현재도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의 중심지 구실을 하고 있다.[1]

개요

서울특별시의 중부, 경도상으로는 동경 126˚ 57´ 2˝~127˚ 4´ 30˝, 위도상으로는 북위 35˚ 33´ 48˝~37˚ 37´ 46˝에 위치한다. 동서 간 거리는 6.07㎞, 남북 간 거리는 7.3㎞이며, 면적은 23.91㎢로 서울시 전체 면적의 약 4%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11번째로 크다. 행정구역은 17개 행정동(87개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평창동이 전체 면적의 약 37%를 차지한다. 인구는 2020년을 기준하여 15만 8996명으로 서울시 전체 인구의 1.6%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중구 다음으로 적다.

구를 상징하는 꽃은 철쭉,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까치이다. 구를 대표하는 캐릭터는 종로의 상징인 보신각종을 친근한 모습으로 의인화한 '종돌이'이다. 구청 소재지는 수송동이다.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을 일컫는 내 사산을 연결한 한양도성은 남산을 제외하고는 모두 종로구 지역이다. 조선 시대의 수도인 한양은 도성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이로 인해 자연히 성 안과 성 밖을 잇는 문들도 생겼다. 한양도성은 전체 둘레 약 18.7 km 구간 요소마다 네 개의 대문을 만들었는데 유교의 5상(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에 따라 동쪽에 흥인지문, 서쪽에 돈의문, 남쪽에 숭례문, 북쪽에 숙정문을 두었다. 그 가운데에는 보신각을 두어 도읍지의 이상과 정치 이념을 나타냈다. 대문과 대문 사이 요충지에 소문을 두어 관문으로 쓰게 했는데 바로 혜화문, 광희문, 소의문, 창의문이다. 1975년에 333,970명을 기록한 뒤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종로'라는 이름은 조선 시대 한양의 도성 문의 개폐 시각을 알려주는 큰 종을 매달았던 종루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종이 있는 거리라는 뜻에서 '종로'가 되었다. 전통적으로 한반도의 최중심이었지만 중구가 아닌데, 종로구가 탄생한 일제강점기에 경성의 중심은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번화가였던 명동 일대였고, 그래서 조선인들이 많이 살던 종로구는 중구라는 이름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2][3]

자연환경

북쪽 경계에 광주산맥의 한 줄기인 북한산(837m)이 이어져 보현봉·비봉·향로 봉·형제봉 등의 봉우리가 종로구에 속하며, 북한산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 북악산(342m)으로 이어진다. 북악산에서 다시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낙산(125m)으로 이어지고, 서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인왕산(338m)으로 이어져 구의 경계를 이룬다. 남쪽에는 중구와의 경계를 흐르는 청계천 양안으로 저지대가 형성되어 북쪽이 높고 남쪽으로 갈수록 낮아지는 북고남저(北高南低)의 지형을 이룬다. 조선시대에 낙산·인왕산·북악산과 지금의 중구·용산구에 걸쳐 있는 남산 등 내 사산(內四山)의 능선을 따라 한양도성이 축조되었으며, 도성 안을 양분하는 청계천을 경계로 북쪽이 종로구의 일부이고 남쪽은 지금의 중구에 해당한다. 지질은 중생대 쥐라기에 생성된 화강암 지대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기후는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바탕으로 한강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도시기후를 나타내고 있으며, 연평균 기온은 13.0℃, 1월 평균기온은 0.4℃, 8월 평균기온은 26.5℃, 연 강수량은 1,212.3㎜이다.

역사

종로 지역의 선사 문화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삼각산·백악산으로 이어지는 산세와 청계천·한강으로 둘러진 배산임수의 지리적 조건을 바탕으로 선사시대의 인류들이 살았을 개연성은 높다. 종로 지역은 서울의 중심 지역으로 이곳을 무대로 최초의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은 진국(辰國)과 삼한 사회의 마한(馬韓) 그리고 초기 백제였다. 서기전 1세기 말 백제국이 마한을 정복하고 초기 고대국가인 백제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이들은 한강 유역의 경제성을 이용 하여 보다 많은 생산 활동과 인구 증가를 이루었고 보다 큰 정치집단을 형성하여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 전성기를 이루었다. 신문로 경희 궁지 일대의 지하철 공사장에서 백제 시대 토기 편이 무수히 발견되어 당시에도 많은 주민들의 생활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4세기 후반 고구려 광개토왕의 침공과 5세기 들어 장수왕의 남하 정책으로 서울 지역은 양국의 각축장이 되었다. 급기야 475년 장수왕이 한성을 공략하여 백제의 개로왕을 살해하였고, 이후 77년간 한강 유역은 고구려의 통치하에 들어갔으며, 남평 양이 설치되었다. 한편 신라는 553년 고구려로부터 수복한 백제의 한강 유역을 기습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독점함으로써 삼국통일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신라의 한강 유역 진출은 삼각산 비봉에 세워졌던 진흥왕순수비를 통해서 알 수 있으며, 진흥왕은 한강 유역에 군사체제의 행정구획인 신주를 설치하였다. 이어 신라는 전국에 9주를 설치했고 서울 지방은 한산 주(漢山州)에 편입되었다. 한산주는 757년(경덕왕 16) 서울 지방에 한양군(漢陽郡)을 설치하면서 한주(漢州)로 개칭되었다. 후 삼국시대에는 왕건의 활동으로 태봉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918년 왕건이 국왕에 추대되어 고려왕조를 개창함에 따라 한양군(漢陽郡)은 고려에 편입되었으며, 940년(태조 23) 전국의 행정구역을 재편성하고 주·군·현를 개칭함에 따라 한양군은 양주(楊州)로 편제되었다. 성종 14년 도제(道制)가 실시되어 양주는 관내도(關內道)에 속하였고 절도사가 배치되어 좌신책군(左神策軍)이 되었다. 현종 9년에 양주는 양광도에 속하게 되었으며, 1067년(문종 21) 양주는 남경으로 승격되어 고려 삼경제의 하나로 운영되었고, 1069년에 신경기(新京畿)에 편입되었다. 그 후 다시 양주가 되었다가 1101년(숙종 6) 남경개창도감이 설치되면서 남경후보지를 물색하여 지금의 청와대 자리인 면악(面嶽) 남쪽으로 결정되어 연흥전·천수전 등의 궁궐 건물이 마련되었다. 이때 남경의 관할구역은 동서로는 대봉에서 안산에 이르고, 남북으로는 사리(한강)에서 백악산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1390년(공양왕 2) 경기좌도에 속하여 과전과 공신전의 반급지역이 되었다. 한편 종로구 지역에 남경궁궐을 중심으로 관아, 객사, 향교, 성황당, 사찰, 정자 등이 설치 운영되었다. 남경의 관아는 고려 후기 한양부의 관아로 이어지고, 다시 조선의 한성부 관아로 이어지고 있다.

1394년 태조 이성계는 한양 천도를 단행하고, 좌묘 우사(左廟右社) 전조 후시(前朝後市)의 도시계획 원칙에 따라 궁궐과 종묘·사직, 성곽과 관아, 시전과 도로 등을 설치하여 왕도의 면모를 갖추었으니, 그 자리가 바로 종로구이다. 한양 천도에 따라 도성 내의 중심가인 종로와 남대문~종로를 연결하는 남대문로가 구획되었으며, 이들이 교차하는 지점(종로네 거리)에 형성된 시전이 육의전으로 발전해 도심의 핵을 형성하였다. 이때 형성된 관청가와 주요 간선 도로망의 상가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따라서 종로구 지역은 한성부의 중심으로 한성부 중부의 서린방(瑞麟坊)·견평방(堅平坊)·경행방(慶幸坊)·징청방(澄淸坊)·수진방(壽進坊)·관인방(寬仁坊)·장통방(長通坊)·정선방(貞善坊), 동부의 연화방(蓮花坊)·창선방(昌善坊)·건덕방(建德坊)·숭신방(崇信坊)·숭교방(崇敎坊), 서부의 인달방(仁達坊)·여경방(餘慶坊)·적선방(積善坊), 북부의 순화방(順化坊)·준수방(俊秀坊)·의통방(義通坊)·관광방(觀光坊)·안국방(安國坊)·진장방(鎭長坊)·가회방(嘉會坊)·양덕방(陽德坊) 등의 지역이 청계천 북쪽지역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이후 영조∼고종 연간과 갑오개혁을 통하여 계와 동이 설치되는 등 행정구역의 개편이 있었다.

종로 지역에는 1394년 한양 천도로부터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의 궁궐과 각종 이궁이 건립되었고, 종묘와 사직 및 도성 문묘와 성균관 등이 축조되었다. 지금의 세종로, 종로, 남대문로에 해당하는 육조거리와 운종가에 국가 상징 도로가 개설되었으며, 생활하수의 통로 격인 개천이 청계천이라는 이름으로 경영되어 준천 공사가 이루어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궁궐 등 도시 시설이 불에 탔고 초근목피로 생명을 연장하면서 겨우 수천 명이 머무는 폐허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국운을 다시 일으키고자 했던 실학의 대두와 북학파의 활동 무대가 종로 일대였으며, 조선 후기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와 추사 김정희의 활동, 김홍도 등 풍속 화가의 등장으로 인한 문예 부흥의 터전도 종로구 일대였다.

1860년대에는 경복궁이 복원되었다. 조선 후기 장동(안동)김씨의 외척정치 60년의 본거지도 오늘날 종로구 청운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흥선대원군의 정치권력도 운니동 운현궁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그리고 고종 연간의 민씨 척족정치의 중심 무대도 경운동 일대를 비롯한 종로구 지역이었다. 임오군란·갑신정변의 현장이 종로구이며, 갑오개혁으로 홍범 14조가 발표되고,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경복궁 건청궁에서 시해되었으며,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가 운종가에서 개최되는 등 조선 왕조 500년 역사의 흔적이 모두 종로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은 경복궁·창덕궁·경희궁·종묘·문묘 등에서 이루어졌으며, 오늘날 광화문거리, 세종로·종로 그리고 북촌과 동촌 등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종로네 거리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연화방(종로 4가 일대), 서쪽으로 혜정교(종로 1가 교보빌딩 뒤), 남쪽으로는 훈도방(을지로 2가), 북쪽으로는 안국방(견지동 일대)에 이르기까지 긴 행랑이 설치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비단·면포·모시·종이·청포·어물 등 육의전을 중심으로 각종 물화가 매매되고 궁중과 관아에 물품을 납품하는 어용상인 조직으로서 시전이 자리 잡았고, 이를 관리하는 평시서(경시서)가 위치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도고 사상(都賈私商)이 상세를 확장하며 이현시장을 형성하면서 많은 사람이 구름같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운종가를 이루었다.

1910년 한성부를 경성부로 개칭하고, 1911년 경성부의 행정조직을 도성을 기준으로 성 안은 5부 36방, 성 밖은 8면으로 하는 5부 8 면제를 실시하면서, 종로구 지역은 중부 8방과 동부 2방 지역에 해당되었다. 1914년에 5부의 행정구역을 확장하여 8면 가운데 도성 근처의 지역을 5부에 편입하였고, 이와 동시에 경성부의 186개 동·정의 명칭과 구역을 공포함에 따라 조선시대 이래 계속 사용되어왔던 고유의 방명을 이어받고 동시에 일제식 동명이 새로 생겨났다. 1943년 6월 10일 구제(區制)가 실시됨에 따라 경성부에는 7개 구가 설치되었는데, 종로구를 비롯하여 중구, 동대문구, 성동구, 서대문구, 용산구, 영등포구가 출발하였다. 이때 운종가 가운데에 종루(鐘樓)가 있어 종로구라 하였다.

1907년 순종이 황제에 올라 창덕궁에 유폐되어 동물원·식물원·박물관 등이 꾸며지고, 일제의 강점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이 경복궁의 외조 공간에 위협적으로 건립되었다. 시정 5주년 기념 물 산공 진회라는 이름으로 경복궁의 주요 건물이 철거되고, 경희궁과 사직단 등 많은 국가 상징의 건축물들이 훼손되었다. 이에 우리 민족은 3·1운동과 6·10 만세운동 등으로 민족의 자존을 꾀하였으니, 그 운동의 중심이 탑골공원을 비롯한 종로 지역이었다. 『동아일보』 등의 민족지가 발간된 곳도 종로구이다. 일제의 식민통치행위에 의한 가혹한 민족 시련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광복 후 1945년 10월 16일 경성부를 서울시로 개칭하고, 1946년 종로구의 지위를 서울시 8개 구 가운데 1위로 규정하였다. 이어 1970년 5월 18일에 명칭이 일치하지 않는 법정동과 동사무소의 이름을 일치시켰는데, 당시 행정동을 36개 동에서 25개 동으로 통합 조정하였다. 1975년 10월 1일 종로구의 관할구역이 크게 확장되었다. 서대문구 평창·부암동 등 창의문(彰義門) 밖의 12개 동을 편입했으며, 동대문 밖의 창신·숭인동 및 신설동 일부를 종로구로 편입하여 종래 관할구역이 10.68㎢에서 24.10㎢로 2.25배 늘어났다. 종로구는 87개 법정동을 17개 행정동에서 관할하고 있다. 그러나 종로구는 상당한 면적을 삼각산·백악산·인왕산·낙산 등의 산지가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 등의 궁궐과 종묘·사직·청와대·탑골공원·사직공원·삼청공원 및 성균관 대학교·상명대학교들이 자리하고 있어 도심의 활동면적은 6㎢에 못 미치는 좁은 지역이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서울시민은 종로 네거리와 세종로, 덕수궁 앞과 서울역 앞에 모여들어 광복과 독립 만세를 부르짖으면서 새 역사를 맞이하였다. 종로구는 구역소를 구청으로, 구장을 구청장으로 바꾸고, 최탁을 초대 구청장으로 삼았으나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미군정이 실시되고 신탁통치를 결의하자 동대문~종로~중앙청 건물에 이르는 거리는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의 집결지가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이 중앙청 광장에서 열렸으니 종로구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심이라는 역사성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한편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종로구 관내에서는 660명이 납치되고 주택 2,410동이 전파되거나 소실되는 등 피해가 대단히 컸다.

1960년 제4대 정부 통령의 선거의 부정부패로 야기된 4·19 의거의 주 무대로 세종로·대학로에서 경무대에 이르는 길과 이승만 대통령의 사저 이화장이나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의 사저 또한 종로구에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5·16군사정변이나 한일협정 반대 데모 이후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의 요람으로 종로구의 대한민국 정치 중심지 지위는 확고부동한 것이었다.

종로구는 조선 시대 한양 천도 후 형성된 육백 년 역사의 구시가지와 서울의 주요 지정 문화유산의 약 절반이 분포되어 있는 전통문화의 전승지이다. 청와대·감사원·헌법재판소·국무총리공관 등 국가 주요 공공기관이 집결되어 있고, 문화시설·고궁·녹지 등 우수한 문화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아울러 지하철과 노선버스가 집중되는 교통의 연결점으로 방사형 도로의 중심지이고, 백악산·인왕산·낙산·삼각산·고궁 등 풍부한 녹지공간과 수려한 자연경관을 보유한 서울의 심장부이자, 대한민국 정치·경제·문화·예술의 중심지이다.

2008년에는 청운동과 효자동이 청운효자동으로 통합되었고, 2012년 명륜 3가동이 혜화동에 편입되어 17개 행정동으로 정비되었다. 2020년을 기준하여 행정구역은 17개 행정동(가회동, 교남동, 무악동, 부암동, 사직동, 삼청동, 숭인 1~2동, 이화동, 종로 1·2·3·4가동, 종로 5·6가동, 창신 1~3동, 청운효자동, 평창동·혜화동)과 견지동·계동·공평동·관수동·관철동·관훈동·낙원동·동숭동·명륜 1~4가·서린동·세종로·소격동·안국동·연지동·연건동·예지동·옥인동·원남동·원서동·익선동·인사동·적선동·종로 1~6가·창신동·청진동·청운동·통인동·필동·화동·효자동을 비롯한 87개 법정동으로 이루어져 있다.[4]

산업

주요 공공기관과 금융·언론사 등이 소재하여 금융·보험업과 공공행정을 비롯한 서비스업의 비중이 크다. 2018년을 기준하여 지역 내 총생산(GRDP)은 31조 8687억 원으로 서울시 전체 GRDP의 7.5%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5번째로 비중이 크다. 경제 활동별 부가가치의 비중은 금융·보험업(6조 9843억 원)이 24.2%로 가장 크고, 이 밖에 공공행정·국방 및 사회보장 행정(16.9%), 정보통신업(12.3%), 사업서비스업(12.2%), 도소매업(11.2%), 부동산업(6.4%) 등의 순이다. 금융·보험업의 부가가치는 서울시 금융·보험업 총부가가치의 14.5%를 차지하여 중구·영등포구 다음으로 비중이 크고, 공공행정·국방 및 사회보장 행정의 부가가치(4조 8796억 원)는 서울시 전체의 약 30%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비중이 가장 크다. 또한 정보통신업(3조 5578억 원)과 사업서비스업(3조 5102억 원)의 부가가치는 서울시에서 6번째로 비중이 크다. 주요 기업으로는 SK·SKC·SK 이노베이션·GS 건설·현대건설·HMM·LG 생활 건강·한국 조선해양·팬오션 등의 본사가 종로구에 있다.

2018년을 기준하여 사업체 수는 3만 9952개로 서울시 전체 사업체의 4.9%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6번째로 많다. 사업체 별로는 도소매 업체(1만 6587개)가 42.2%로 가장 많고, 이 밖에 숙박·음식점 업체(16.6%), 제조업체(11.1%), 협회·단체 수리 및 기타 개인 서비스 업체(6.1%), 전문·과학 및 기술 서비스 업체(3.9%) 등의 순이다. 전체 사업체의 약 58%가 종로 1·2·3·4가동과 종로 5·6가동에 분포하고, 개인 사업체가 약 79%, 종사자 5인 미만의 소규모 업체가 약 82%를 차지한다. 사업체 종사자는 26만 5017명으로 서울시 전체 종사자의 5.1%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6번째로 많다. 제조업은 의류봉제업체와 귀금속·장신 용품을 비롯한 기타 제품 제조업체의 비중이 크며, 제조업의 부가가치(5768억 원)는 서울시 제조업 총 부가가치의 3.5%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9번째로 비중이 크다.

상업은 조선시대에 종로를 중심으로 시전(市廛)을 설치하여 도성 주민들에게 생활용품을 판매하고 조정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공급하게 하였다. 또한 육의전(六矣廛)을 두어 비단·면포·명주·종이·모시·어물 등 6가지 품목의 독점 상업권을 부여하였는데, 종로 2가에 그 터가 남아 있다. 18세기 후반 동대문 근처의 이현(梨峴, 배오개) 등지에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었고, 1905년 동대문 이현시장 자리에 조성된 시장이 광장시장과 동대문시장으로 혼용되다가 1970년 동대문 맞은편에 동대문종합 시장이 개설된 뒤로 광장시장과 동대문시장으로 구분되었다. 동대문시장은 동대문종합 시장과 인접한 중구의 평화시장·신평화시장 등을 통칭하기도 하며, 중구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두타몰 등과도 인접하여 서울의 대표적 쇼핑 명소의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이 밖에 전통시장으로는 통인동의 통인시장, 낙원동의 낙원 시장, 숭인동의 신설 종합시장, 창신동의 동문시장·창신골목시장, 충신동의 충신시장 등이 상설시장으로 운영되고, 세운상가를 비롯한 상점가 7개소, 기타 대규모 점포 10여 개소 등이 있다. 2018년 도소매업의 부가가치(3조 2180억 원)는 서울시 도소매업 총 부가가치의 5.2%를 차지하여 25개 구 가운데 6번째로 비중이 크다.

교통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교통망이 발달하였다. 도로 교통은 도시고속화 도로인 내부 순환로가 마포구를 기점으로 종로구를 거쳐 성동구까지 이어지고, 국내에서 폭이 가장 넓은 도로인 세종대로가 중구 남대문로 5가를 기점으로 종로구 세종로의 광화문까지 이어진다. 이밖에 용산구 한남동을 기점으로 종로구 재동까지 이어지는 삼일대로를 비롯하여 통일로(중구~종로구~경기도 파주시)·북악산로(부암동~성북구 종암동)·청계천로(세종로~동대문구 답십리동)·동호로(성동구 옥수동~종로 5가)·난계로(성동구 금호동 1가~숭인동)·세검 정로(서대문구 홍은동~신영동)·창경궁로(중구~종로구~성북구)·대학로(종로 5가~혜화동)와 사직로·삼청로·율곡로·자하문로·김상옥로·돈화문로·무교로·북촌로·새문안로·성균관로·수표로·우정국로·청와대로·혜화로·효자로 등이 종로구의 내·외곽을 연결한다.

철도 교통수도권 전철 1호선과 3~6호선이 종로구를 운행한다. 1974년에 개통한 1호선은 소요산역을 기점으로 종로구의 동묘앞역~동대문역~종로 5가역~종로 3가역~종각역을 거쳐 인천시(인천역)·충남 아산시(신창역)·경기도 오산시(서 동탄역)·광명시(광명역)까지 운행하고, 경기도 고양시 대화역을 기점으로 하는 3호선이 종로구의 경복궁역~안국역~종로3가역을 거쳐 송파구 오금역까지 운행한다. 4호선이 노원구 당고개역을 기점으로 종로구의 혜화역~동대문역을 거쳐 경기도 시흥시 오이도역까지 운행하고, 5호선이 강서구 방화역을 기점으로 종로구의 서대문역~광화문역~종로3가역을 거쳐 경기도 하남시의 하남 검단 산역과 송파구의 마천역까지 두 갈래로 운행하며, 응암역~신내역을 운행하는 6호선이 종로구의 동묘앞역~창신역을 거쳐 간다. 동묘앞역에서 1호선과 6호선이, 동대문역에서 1호선과 4호선이, 종로3가역에서 1호선·3호선·5호선이 각각 접속한다.

관광

한국의 100대 명산으로 꼽히는 북한산북악산·인왕산·낙산 등 도심의 수려한 산악 경관, 조선 왕조의 역사를 함께한 고궁들을 비롯하여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관광자원이 풍부하다. 북한산 국립 공원의 일부가 종로구에 속하여 구기동의 비봉 탐방지원센터를 기점으로 하여 금선사를 거쳐 비봉에 이르는 비봉 코스와 구기 탐방지원센터를 기점으로 하여 대남문~청수동 암문을 거쳐 사모바위에 이르는 사모바위 코스 등의 탐방 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북한산 주변에 조성된 북한산 둘레길 21개 코스 가운데 형제봉 입구에서 탕춘대 성암문 입구에 이르는 5㎞ 구간의 평창 마을길이 종로구에 속한다.

역사 명소로는 조선 왕조의 정궁(正宮)으로서 연못과 어우러진 야경이 일품인 경회루와 건춘문·근정전·자경전·사정전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재를 보유한 경복궁, 현존하는 조선의 궁궐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 창덕궁과 붙어 있어 함께 둘러보기 좋은 창경궁, 창덕궁의 후원으로서 풍경이 빼어나 국내외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비원(금원),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 등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으로서 유교의 검소함이 깃든 건축물의 원형과 주변 환경이 잘 보존되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종묘, 흥선대원군이 거처하던 운현궁,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서 3·1독립만세운동의 출발지였던 서울 탑골공원이 있다. 조선 초기에 내 사산의 능선을 따라 약 18㎞에 걸쳐 축조된 한양도성 성곽이 복원되어 종로구와 성북구의 경계를 이루며, 도성의 정동(正東) 쪽에 사대문의 하나로 세워진 서울 흥인지문(동대문)이 있다.

종로 1~6가와 서린동·관철동·관수동·예지동 일원은 2006년 관광진흥법에 따라 종로·청계 관광특구로 지정되었다. 관광특구는 청계천과 종로 사이의 서린동부터 창신동까지 길게 뻗은 청계천변에 관철동 젊음의 거리와 세운 상가·광장시장·조명 상가·인장 거리·수족관 거리 등 1만 4000여 개의 상점이 늘어서 있고, 인근에 고궁·종묘·인사동 등의 명소와 연계된다. 인사동 거리는 화랑과 고미술점을 비롯하여 전통 공예점·찻집·음식점과 카페 등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인접한 계동의 북촌 한옥마을, 익선동 한옥거리와 더불어 도심 속에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명소로 인기가 높다. 동숭동의 대학로는 마로니에공원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시설이 밀집하여 예술과 문화의 거리로 유명하고, 드라이브 코스로 잘 알려진 북악스카이웨이의 팔각정과 낙산공원은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을 조망하는 명소로 손꼽힌다.

교육

전통 교육기관은 조선 초기에 한성부 동부 숭교방(지금의 명륜동)에 성균관이 설치되어 지금의 국립대학 역할을 하였으며, 4부 학당 가운데 동학(東學)과 중학(中學)이 각각 지금의 종로 6가와 중학동에 설치되어 중등교육기관 역할을 하였다. 이 밖에 역관(譯官)을 양성하는 사역원, 의원(醫員)을 양성하는 전의감, 화원(畵員)을 양성하는 도화서 등이 지금의 종로구에 설치되었다.

근대 교육기관은 1883년(고종 20) 지금의 재동에 관립 외국어 교육기관인 동문학(同文學)이 설립되었고, 1885년 재동에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자 의학 교육 병원인 제중원이 설립되었다. 1886년에는 최초의 관립 근대학교인 육영공원이 지금의 중구 서소문동에 설립 되었다가 1891년 종로구 수송동으로 이전되었다. 1895년(고종 32)에는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관립 교사양성기관인 한성사범학교가 지금의 교동에 설립되고 성균관에 3년제 경학과(經學科)가 설치되어 근대 교과목을 함께 교육하였다. 1898년에 설립된 캐롤라이나학당이 배화학당을 거쳐 지금의 배화여자대학교와 배화여자중·고등학교로 이어지고, 1924년에는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어 8·15광복 후 서울대학교로 전환되었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은 1975년까지 동숭동에 있다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하고 의과대학은 연건동에 남아 있으며, 1946년 명륜전문학교가 조선시대 성균관의 전통을 계승한 성균관대학으로 출범하여 지금의 성균관대학교로 이어진다.

중등 교육기관은 1885년에 설립된 언더우드 학당이 경신학교를 거쳐 1951년 경신중·고등학교로 분리되어 지금에 이르고, 1907년에 설립된 소의학교가 소의 상업학교·동성 상업학교·동성중학교 등의 변천을 거쳐 1950년 동성중·고등학교로 분리되어 지금에 이른다. 1908년에는 기호학교가 설립된 뒤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중학교를 거쳐 지금의 중앙중·고등학교로 이어지고, 1920년 조선 여자교육회 산하의 부인 야학강습소가 개설된 뒤 근화 여학교·덕성 고등여학교 등의 변천을 거쳐 1951년 지금의 덕성여자중·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이밖에 1921년 경성 제2고등 보통학교(지금의 경복고등학교), 1923년 경기도 립갑종상업학교(지금의 경기상업고등학교), 1925년 대동학원(지금의 대동세무고등학교), 1938년 대신 상업전수학교(지금의 대신중·고등학교) 등이 개교하였다.

초등 교육기관으로는 1894년 지금의 종로구 경운동에서 관립 교동소학교가 처음으로 개교한 뒤 교동 공립보통학교·교동 국민학교 등의 변천을 거쳐 지금의 서울 교동초등학교로 이어지고, 1895년 한성 사범학교부속소학교(지금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와 매동소학교(지금의 서울 매동초등학교)·재동소학교(지금의 서울 재동초등학교)·양사 동소학교(지금의 서울 효제초등학교) 등이 관립으로 설립되었다. 이 밖에 1910년 사립 숭정 의숙(지금의 서울 혜화초등학교), 1912년 사립 능인학교(지금의 서울 창신초등학교), 1923년 청운 공립보통학교(지금의 서울 청운초등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2019년을 기준 하여 교육기관은 성균관대학교·상명대학교 서울캠퍼스·서울대학교의과대학(연건캠퍼스) 등의 대학교와 전문대학 1개교(배화여자대학교), 고등학교 14개교, 중학교 9개교, 초등학교 13개교 등이 있다. 학생 수는 24만 6368명으로 25개 구 가운데 가장 많다.

문화재

국가 지정 문화재로는 서울 원각사지 십층 석탑·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경복궁 근정전·창덕궁 인정전·종묘 정전을 비롯한 국보 17점, 서울 흥인지문·창덕궁 돈화문·창경궁 홍화문·안중근 의사 유묵 – 국가 안위 노심초사·앙부일구·비격진천뢰를 비롯한 보물 147점, 서울 문묘와 성균관·서울 육상궁·서울 우정총국·구 서울대학교 본관·탑골공원·안국동 윤보선가·서울 경교장을 비롯한 사적 26개소, 명승 2개소(서울 부암동 백석동천·백악산 일원), 서울 재동 백송·문묘 은행나무를 비롯한 천연기념물 9점, 종묘제례·석전대제를 비롯한 국가무형문화재 5점, 경산 정원용 의대·인왕산 국사당을 비롯한 국가 민속문화재 11점 등이 있다. 이 밖에 1938년 화동에 건립된 구 경기고등학교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거주하던 원서동 고희동 가옥을 비롯한 66점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시 지정 문화재로는 정업원 터·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안평대군 이용 집터·황학정·천도교 중앙대교당·조계사 대웅전을 비롯한 서울유형문화재 136점, 서울무형문화재 5점(매듭장·남이장군 사당제·궁중다례의식·단청장·송서), 세검정 터·보신각 터·해공 신익희 가옥을 비롯한 서울기념물 6점, 평창동 보현산신각·선바위·반계 윤웅렬 별장을 비롯한 서울민속문화재 15점, 옥인동 박노수 가옥·백사 이항복 집터(필운대)·안양암 대웅전 신중도를 비롯한 서울문화재자료 26점 등이 있다.

지도

동영상

각주

  1. 종로구〉, 《위키백과》
  2. 종로구〉, 《네이버 지식백과》
  3. 종로구〉, 《나무위키》
  4. 종로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자료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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